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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겔 '만가'가 아니라 '초혼가'가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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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겔 '만가'가 아니라 '초혼가'가 아닌가! [프레시안 books] 김상환의 <철학과 인문적 상상력>
<철학과 인문적 상상력>(문학과지성사 펴냄)에서 김상환은 영화 <매트릭스>가 흔히 말하는 것과 달리 보드리야르적이라기보다는 라캉적이라고 지적한다. 시뮬라크르와 시뮬라시옹이 지배하는 신세계에 대한 서술이라기보다는 매트릭스라고 불리는 시뮬라크르의 외부에 있는 '실재'에 대한 일관된 추구를 담고 있다는 점에서 이 말은 적절하고 타당하다.

물론 매트릭스 안에서 발생하여 그것마저 잠식하는 바이러스에 대처하기 위해 시뮬라크르의 세계와 레오로 대표되는 실재를 향한 운동이 손을 잡고 화해하는 3편의 마지막 종결이, 어떤 상징적 봉합에도 불구하고 그것과의 축소될 수 없는 거리를 남겨두는 라캉적 실재와 다르다고 지적할 수도 있겠지만, 시뮬라크르 저편의 실재에 대한 일관된 추구가 원본적 실재의 무력화로 귀착되는 보드리야르보다는 라캉에 가깝다는 것은 분명하다.

<매트릭스>에 대한 김상환의 지적을 빌려 말하면, 이 책에서 감상환은 흔히, 적어도 내가 예상했던 것과는 달리 들뢰즈적이거나 데리다적이라기보다는 지젝적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반헤겔적인 '시대정신' 속에서, 혹은 사위인 자크-알랭 밀레의 개입을 통해서 헤겔과의 거리를 의도적으로 취했던 라캉을 헤겔로 되돌아가게 했던 지젝과 유사하게, 김상환은 명시적으로 헤겔에 대해 비판하던 들뢰즈나 묵시적으로 헤겔과의 거리를 취해오던 데리다를 헤겔로 되돌아가게 하려 한다는 점에서 그렇다.

이는 <차이와 반복>의 역자의 책에게서 들뢰즈적 취향을 발견하거나 <해체론 시대의 철학>의 저자에게서 데리다적 입장을 확인하는 것에 비해 훨씬 흥미로운 것이다. 철학자들을 '계간(鷄姦)'해서 그가 보면 깜짝 놀랄 사생아를 만드는 방식으로 철학사를 연구한다던 들뢰즈를 역으로 깜짝 놀라게 할 뜻밖의 '계간'과 만나고, 철학자들의 텍스트를 '해체'하여 그 안에 존재하는 이율배반을 찾아내고 그것을 가동시켜 원래의 것과는 아주 다른 새로운 개념으로 변형시키던 데리다를 역으로 해체하는 놀라운 '해체'와 대면하는 것은, 성실하지만 평범한 주석에 비하면 훨씬 흥미롭고 촉발적인 것 틀림없다. 물론 혹자는 그 '계간'이나 '해체'의 속도가 설득력의 속도보다 지나치게 빠르다고 비판할 수도 있을 것이고, 그래서 들뢰즈나 데리다가 주던 종류의 놀라움과 다르다고 지적할 수도 있을 것이다. 허나 답답하도록 평범하고 속 터지게 느린 신중하고 충실한 문헌학적 주석에 지친 사람이라면, 오히려 이 속도에서 시원함을 느낄 수도 있을 것이다.

다시 지젝과 비교하여 말하자면, 지젝이 상징 이전의 사물성이 강조된 사물(Ding)의 실재적 계기를 강조하면서 그것이 야기하는 분열과 간극을 통해 그것을 포착하려는 정신의 시도를 무한히 연기시키려 했다면, 김상환은 이와 달리 사물(Ding)과 구별되는 '사태 자체(Sache selbst)'를 주목하며(342, 360쪽) 그것을 통해 객체와 주체의 대립을 넘어서는 주체 상호 간의 운동의 '통일성' 내지 '동일성'을 강조한다. 사태 자체란 칸트가 말하는 사물처럼 단지 '자연적인 것'이 아니라 관념이나 이념의 촉수가 닿았다는 점에서 '이념적인 존재자'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지젝이 사물을 포착하려는 이념의 운동, 실재를 포섭하려는 상징계의 작동에서도 그것이 담을 수 없는 간극에 자리를 틀고 앉는다면, 김상환은 주객 대립의 상황을 넘어서 양자를 하나로 '묶어주는' 계기를, 그가 오래전부터 '계사(繫辭, 繫絲)'라는 말로 주목해왔던 운동 속에 자리를 틀고 앉는다. '계사의 존재론'이란 기획으로 주체와 객체를 묶는 것뿐만 아니라 "철학사 전체를 관통"하는 것, 동양과 서양의 모든 철학적 사유를 하나로 묶고, 근대와 탈근대를 비롯한 모든 역사적 전환의 배후에 있는" 논리적 사태를 파악하고자 했던 이전의 야심적 기획(<니체, 프로이트, 마르크스 이후>(창비 펴냄), 7~10쪽)을 안다면, 이는 어쩌면 자연스런 것일 지도 모른다. 주역을 통해 시대를 포착하고 "한번 음하고 한 번 양하는 것을 일컬어 도라 한다"는 주역의 계사를 풀어 "대립적인 두 항을 묶어 서로 보완하게 만드는 무한한 반복"을 조였다가 풀어주었다가 하는 '끈'이나 '계사'라는 말로 받아 동서양의 최고 범주들을 두루 묶고자 하는 것은 이런 맥락에 있는 것일 터이다.

그래서일 것이다. 김상환은 횔덜린을 통해 존재의 근원적 분할(Ur-teilen)을 가져오는 이성적 판단(Urteil)의 폭력과 그로 인해 야기된 주객 대립의 구도를 다시금 벼리어 내고, "어떻게 판단 이전의 존재론적 통일성, 주객 분리 이전의 단순함으로 돌아갈 것인가?"(466쪽)라는 물음을 다시 던진다. 그리고 이로써 근대 독일 철학사는 물론 현대 프랑스 철학사까지도 이해하려 한다. 셸링과 헤겔은 물론 니체와 하이데거, 나아가 데리다와 들뢰즈까지 이와 유사한 맥락 안에 있다고 본다(466쪽).

▲ <철학과 인문적 상상력>(김상환 지음, 문학과지성사 펴냄) ⓒ문학과지성사
이번 책에서 특히 주목하고 강조했던 것은 헤겔인 것 같다. 이는 단지 '헤겔 만가'라는 부제를 달았다는 것만으로 짐작한 것은 아니다. 루카치를 비롯해 이전의 많은 사람들이 헤겔에게서 주객 대립을 극복하는 변증법적 사유의 정점을 발견한 바 있다는 기억을 얼른 떠올려 추측한 것도 아니다. 이 책에서 저자는 동물적 왕국과 학자들의 성실한 의식에서 인문적 정신의 위상을 찾으려 하며, 이를 위해 스토아주의와 회의주의에서 기독교 성령 개념의 역사를 관통하는 불행한 의식의 운동 궤적, 그리고 '아름다운 영혼'의 모순적인 운동을 거쳐 완성되는 절대정신의 역사를 재탐사한다. 이럼으로써 포착되는 "인문적 사유는 어떤 치유된 증상, 정상화된 광기"가 된다(406쪽). 그것은 "철저히 자신의 힘으로 자신의 힘으로 자신의 지고한 주체성 안에서 자신의 능력을 초과하는 보편자를 직접 만나고자" 하고, "보통 사람은 생각하지 않는 것, 무한히 이성적인 것, 무제약적인 이념을 예감하고 표현하고 실현하고자 하는 것"으로 해석된다. 물론 이는 앞서 말한 여러 의식들처럼 주인과 노예의 대립과 반전, 주객의 대립과 불화를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이다(408~409쪽). 아마도 들뢰즈라면 '보편자를 만나려는' 인문적 사유에 화들짝 놀랄 것이고, 아마도 푸코라면 광기를 치유하여 정상화하려는 동일자의 폭력이라는 비판으로 응수했을 지도 모른다.

마찬가지로, 독일 근대 철학사는 모르겠지만, 니체, 데리다, 들뢰즈까지 이런 주객 대립과 극복의 끈 운동 속에서 파악하는 것에 대해선 적지 않는 이들이 이견을 제기할 것 같다. 가령, 객체보다는 '타자'라는 말을 썼겠지만, 레비나스가 서구 존재론의 역사가 이런 '주객 통일'의 과정을 통해 타자성을 부정하고 주체에 복속시켜온 역사라고 비판했던 것도, 그래서 주체로 환원될 수 없는 타자성을 '신'의 지위에까지 올려놓으며 존재론을 다시 쓰고자 했던 것을 떠올리게 된다. 그것은 '주객 대립과 그 극복의 역사'에 맞서서, 주체로선 포착할 수도 없고 극복할 수도 없는 타자성을 끝까지 견지하려 했던 시도였기 때문이다. 이성이 광기를 '동물성'이나 '정신병'이란 개념으로 타자화하면서 동시에 이성의 이름으로 정상화하려 했던 역사를 다루면서 푸코가 광기를 병으로 몰았던 이성에 대해 이제는 니체와 고흐 같은 광인들 앞에서 그런 자신의 행위를 정당화해야 한다고 일갈했던 것 또한 유사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을 게다. <문학의 공간>에서 블랑쇼가 '불가능한 것'이란 개념을 통해, 혹은 낮과 밤의 대립과 아예 다른 차원에 있는 '또 다른 밤'이란 개념을 통해 강조하려 했던 것도, <차이와 반복>에서 들뢰즈가 사유 불가능한 것, 지각 불가능한 것, 경험을 초월하는 것을 통해 말하고자 했던 것도 나는 이런 맥락에 있는 것으로 이해한다. 그리고 라캉이 현실과 구별되는 '실재'에 대해 말하면서 "실재는 불가능하다"라고 말했던 것도 이와 다르지 않을 것이다.

그렇지만 김상환은 이 모든 것을 이성이나 주체로부터 거리를 만들어내는 것으로 이해할 것이고, 그것이 결국은 자기-내-복귀를 통해 이성으로 되돌아가는 한 계기라고 답할 것 같다. 사유가 사유 불가능한 것을 통해 시작된다는 말은 결국 사유 불가능한 것이 사유 속으로 들어가기 시작했음을 뜻하는 게 아닌가 반문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식으로 사유나 정신은 그 불가능한 것들을 자기 주머니에 담는다. 그것이 헤겔이 절대정신을 향한 운동에서 말했던 것이기도 하다. 이성이나 주체로부터 등 돌리고 멀어져 가는 것, 나의 신체로부터 멀리 떨어진 타자의 삐딱한 시선, 이 모두는 그 거리를 싸안는 운동을 통해 이성이나 주체의 일부로 내부화된다. 이는 거의 모든 곳에서 반복되면서 결국 자기를 함양하고 자기능력을 고양시켜가는 '주체의 상승적인 자기 함량 운동'이 된다. 데카르트의 정념론에서 찾아낸 '내적 정서의 길'(65쪽)도, 자기 자신과 싸우는 한없는 반성 속에서 도덕화되는 칸트의 '아름다운 영혼'(96쪽)도, 나의 대타성 속에서 소격되었다가 다시 자기 자신으로 복귀하는 메를로-퐁티의 살(존재)(145쪽)도, 모두 이런 동일성 안에 있다.

노래 '곁에 서 있어요(stand by your man)'를 통해 인문학의 본성을 "옆에 서 있고 그 옆을 지키는 것"이라고 하면서(12쪽), 특히 가장 편안한 장소, 고향과도 같은 '엄마 옆'을 통해(16쪽) '원초적인 장소'(24쪽) 친밀하고 내밀한 장소에서 인문학적 사유의 장소를 발견하는 것이나, 거기에 어떤 사선적인 기울기를 담아내며 "모든 사물이 마주 보는" 사건을 기대하는 것을 보면, '고향 상실'과 그것의 극복이라는 하이데거의 문제의식도 이런 방식으로 해석될 것 같다. 이런 의미에서 이 책은 헤겔을 떠나보내는 '만가'가 아니라 죽은 헤겔을 다시 불러내는 '초혼가'처럼 보인다.

이 모두는 '계사의 존재론'이라는 문제 설정의 '크기'를 보여주는 것 같다. 모순과 지양의 변증법에 대한 근본적 거부조차, 거리를 만드는 또 하나의 소격 운동으로 치환시켜 새로운 지양과 통일의 운동 속으로 담아내는 정신의 운동의 거대함. 알다시피 베르그손은 헤겔의 변증법을 들어 이런 식의 거대함에 대해 '너무 커서 누구에게나 맞는 헐렁한 옷'이라고 비난한 바 있지만, 그 옷을 입고 추는, 반전을 거듭하는 현란한 춤사위는 앞으로도 필경 보는 이의 눈을 강한 힘으로 매혹할 것이다.

이를 잘 알면서도 아주 작고 세부적인 어떤 것을 통해 약간의 거리를 다시 만들어보려는 것은, 근본적인 대립과 거리를 통일하는 이 '승승(繩繩)의 매듭 운동'에 새로운 종합의 계기를 제공함으로써 긍정적인 기여를 할 수 있을 것이라는 막연한 바람 때문이다. 아니, 실은 그 이상으로 내가 어쩌면 이 책에서 가장 흥미롭게 끌려들어가며 읽었고, 그런 만큼 진지함을 유발하는 어떤 촉발 속에서 다시 소격되는 어떤 운동을 경험했기 때문이다. 그것은 무엇보다 세 편의 동요의 해석에 관한 것이다.

먼저, '나뭇잎 배'에서 김상환은 '엄마 곁'의 위상학적 근원성을 강조하며, 이 '엄마 곁'을 통해 상상의 구도가 바뀌는 전환점이라고 말한다. 낮에서 밤으로의 전환이 더해진다. 낯익은 동요를 낯설게 만드는 이 지적에 놀라면서 나는 시선을 동요의 가사로 다시 돌렸다. 그런데 거기서 어떤 해석적 거리를 발견한다. 왜냐하면 "낮에 놀다 두고 온 / 나뭇잎 배는" "엄마 곁에 누워도/ 생각이 난다"고 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경우 '누워도'는 낮에 놀던 것들을 잊게 만드는 어떤 전환이라기보다는(그러려면 '누우니', '누우면'이 되었어야 할 것이다) '누워도' 지속되는 어떤 연속성을 표현한다고 해야 하지 않을까? 그 뒤의 구절은 그 편안하고 친밀한 엄마 곁에 '누워도' 계속 떠오르는 상상된 장면이다. 달과 구름이 비친 밤의 연못, 거기를 떠다니는 나뭇잎 배. 이는 낮에 놀던 장면의 연장, 즉 낮의 연장으로서의 밤이다.

요컨대 '누워도'는 엄마 곁에 누워도 생각나는 그것, 그것은 그토록 편안하고 좋았던 엄마 곁을 어느새 떠나게 되었음을, 그 옆에 누워도 어느새 잊게 되는 어떤 떠남을 표시하는 건 아닐까? 엄마 곁을 떠나 자신의 장면을 갖게 된 아이, 우리는 편안하고 원초적인 장소를 떠나게 된 그 아이의 상실을 안타까워해야 할까, 아니면 이제 엄마 곁을 떠나 자기의 장면을, 자신의 길을 갖게 된 아이의 떠남을 축하해주어야 할까? 이는 동요만이 아니라 철학에 대한 해석에서도 반복해서 나타나는 질문인 것 같다.

'곁에 있음'의 이런 존재론적 위상을 강조하기 위해선 '나뭇잎 배'보다 오히려 나중에 언급하는 '부엉새가 우는 밤'이 더 적절했을 것 같다. 왜냐하면 이 노래에선 부엉새의 으스스한 노랫소리가 밤의 '추움'과 더불어, 집 밖의 세상을 감싸고 있는 어둠으로서 '할머니 곁'이라는 더없이 편안하고 다정한 세계와 대비되고 있기 때문이다. '옹기종기' 모여 앉아 있는 할머니 곁, 그렇게 듣는 옛날이야기, 정겹고 다정하며 그리움과 향수를 자극하는 장면이다. '할머니 곁에'가 갖는 편안함과 내밀함에 더해, 할머니에게 듣는 '옛날이야기'가 그 장소의 신화성을 명시한다. 이러한 표현들이 모여, 부엉새가 춥다고 우는 밤, 그 바깥의 세계로부터 느끼는 거리감과 대비되며 할머니 곁의 친밀성과 원초적 성격을 확연하게 표현한다. 이 노래에서 아이들은 아직 할머니 곁을 떠나지 못한 것이다. 이런 이유에서 아이들이 옹기종기 모여 앉아 듣는 할머니의 '옛날이야기'에서 "칠흑의 밤이 상징하는 무의식적인 것, 디오니소스적인 것", "말할 수 없는 것"을 뜻한다는 해석에 좀처럼 동의하기 어렵다.

또 하나의 동요, "엄마 엄마 이리와/ 요것 보셔요.// 병아리 떼 뽕뿅뿅뿅/놀고 간 뒤에// 미나리 파란 싹이/ 돋아났어요"에서 정명환이 보았다는 구원의 욕망, 앎의 욕망, 유희의 욕망, 창작의 욕망을 발견할 수 없는 것은 나의 상상력이 무디기 때문일 것이다. 그 대신 이 노래에는 앞의 두 노래에, 비록 아주 다른 양상으로지만, 두 개의 대비되는 세계가 있던 것과 달리, 오직 하나의 세계만이 있는 것처럼 보인다. 상상의 세계. 거울에 비친 자신을 보고 놀라며 매혹되는 아기에 대한 라캉의 말처럼 신기함에 놀라 "요것 보셔요"라고 엄마를 부르는 거울단계의 아이. 그래서 그 눈에는 병아리 떼의 놀이에서 아이가 느끼는 경이만이 있다. 놀이 뒤에 돋아난 미나리 파란 싹은 상징계의 싹도 아니고 두렵게 하는 어떤 실재의 얼룩 같은 것도 아니다. 상상계 속의 아이를 기쁘게 하는 또 다른 상상적 대상일 것이다. 아이의 상상적 세계에서 내가 발견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유희의 욕망이다. 구원이나 앎, 창작의 욕망을 상상계를 벗어나지 못한 영혼에서 상상하긴 나로선 불가능해 보이기 때문이다.

인디밴드 '눈뜨고 코베인'이 이 노래를 패러디한 것은 아마도 이런 상상계적 순진성을 깨주고 싶었던 것일 게다.

"엄마 이리 와서 요것 보세요 / 병아리 떼 쫑쫑 소풍가는 길에 / 병아리 떼 다 죽었어요
병아리 떼들은 내가 죽인 게 아니에요 / 그 많은 병아리 떼들을 / 내가 어떻게 다 죽여요" (눈뜨고 코베인, '얄리는 내가 죽였다')


이 가사의 전반부는 병아리떼에 대한 상상계적 놀이가 '죽음'이라는 당혹스런 실재의 침입에 의해 깨지는 것을 극화(劇化)한다. 상상계적 천진성은 "다 죽었어요"라는 사건에 의해 깨지고, 이로써 엄마를 부르는 놀라움은 상상적인 것이 아니라 실재와의 만남에 기인하는 것으로 변환된다. 후반부에는 이러한 실재에 대해, '내가 죽인 게 아니에요"라고 하는, 결코 상상적 동일성으로 환원 불가능한 말이, 기표들이 등장한다. 실재와의 대면이 야기한 충격을 지우는 상징, 혹은 그것을 가리는 변명 같은 기표들. 실재의 침범에 의해 상상계가 깨지고, 그것을 가리는 기표들의 상징계가 출현하는 사건, 노래의 제목은 이 기표들이 변명임을 시사한다. 변명, 그것은 주객의 대립을 극복하려 하지만 결코 극복할 수 없는, 단지 극복하려는 안타까운 의지나 극복했다는 허구적 믿음의 언사다.

이런 식으로 '눈뜨고 코베인'은 당혹스런 패러디로 아이를 상상계로부터 떠나보내려 한다. 중요한 미덕은 거기에 익살스런 곡조와 리듬으로 웃음을 덧붙임으로써, 그 떠남을 두려운 것이 아니라 웃을 수 있는 것으로 만들어준다는 점이다. 쉽게 떠나게 하려 함일 게다. 멀리 갔다가 다시 돌아와야 할까? 나는 김상환이 지적하는 떠남과 되돌아옴의 반복을, 떠나곤 다시 자기에게 되돌아오는 무한한 과정보다는 아무리 떠나도 계속 되돌아오는 자기로부터 무한히 반복하여 떠나는 것으로 받아들이고 싶다. 어차피 비슷하다고 말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부엉새나 병아리 떼의 동요와 '눈뜨고 코베인'의 노래 사이에 존재하는 정서의 차이는 비슷해 보이는 그 과정이, 하이데거 풍으로 말하면, 아주 다른 '근본 감정(Grundgemut)'으로 채색되어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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