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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난에서 진정한 '유토피아'를 이끌어 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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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난에서 진정한 '유토피아'를 이끌어 내자! [프레시안 books] 레베카 솔닛의 <이 폐허를 응시하라>
성공 속에서 희망을 보는 것이나 재난 속에서 절망을 보는 것은 누구나 하는 일이다. 반대로 빛나는 성공 속에서 어두운 미래를 보는 이에겐 사소한 것에서 어떤 징후를 읽어내는 선지자의 날카로운 육감(肉感)이 필요하고, 암담한 사태 속에서 '구원'의 빛을 보는 이에겐 아뜩한 섬광 속에서도 미광에 눈을 돌릴 줄 아는 여유 있는 시선이 필요하다. 이런 육감이나 시선이란 얼마나 희소한 것인지! 그렇기에 지옥 같은 재난 속에서 출현하는 낙원을 보는 레베카 솔닛의 눈은 희소하고 아름답다.

"지옥 속에 출현하는 낙원(A Paradise Built in Hell)." 그것은 사실 누구의 눈앞에나 그대로 보이는 것이었을 테지만, 솔닛의 지적에 눈이 번쩍 뜨이는 것을 보면, 이제까지 그것을 보거나 지적한 사람이 별로 없었던 것일 게다. 보르헤스라면 그 낙원을 일러 "눈앞에 다 까놓아도 알 수 없는 것"이란 의미에서 '최고의 비밀'이었다고 했을 것이다. 하이데거라면 항상 바로 옆에 있지만 망각되었기에 있는 줄 모르는 '존재'라고 말할지도 모른다. 국역본의 제목을 <이 폐허를 응시하라>(정해영 옮김, 펜타그램 펴냄)라는 강한 어조의 명령문으로 바꾼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이었을까?

올해 2월 '수유너머 n'에서 개최한 국제 워크숍에 참가했던 한 일본 친구는, 레베카 솔닛의 이 책을 언급하면서 작년 3월 11일 강력한 지진과 쓰나미로 도시 기능이 마비된 메트로폴리스 도쿄에서 '지옥 속의 낙원'을 체험했음을 증언해 주었다. 핵발전소 사고로 정전이 돼 지하철이나 전철이 올스톱되었다는 소식이 알려지자마자 페이스북이나 트위터 등에 '집에 못 가신 분들, 잘 곳 없는 분들, 우리 집으로 오세요'라는 내용의 메시지들이 대대적으로 올라오기 시작했다고 한다.

도쿄 시내에서부터 택시를 타고 집에 가려면 10만 원으로도 모자란다는 걸 아는 사람이라면, 사람들이 왜 이런 메시지들을 대대적으로 올렸는지 좀 더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또 도쿄에 사는 사람들의 주거 공간이 서울보다도 훨씬 비좁다는 것을 안다면, 그리고 평소, 도쿄에 사는 이들이 사적 공간에 대한 태도가 우리보다 훨씬 폐쇄적임을 안다면, 이런 메시지를 발신하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이었을지도 충분히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만은 아니었다. 지진과 정전으로 놀란 사람들은, 밖에 있는 이들이 궁금하여 대거 거리로 몰려나왔고, 어차피 전철이 멈추어 집에 돌아갈 수 없게 되자 편의점에서 맥주를 사들고 거리에 모여앉아 있던 이들과 합류했고, 그 결과 정전으로 어두워진 도쿄는 갑자기 즐겁게 떠들며 밤새워 노는 거대한 축제의 공간으로 바뀌었다는 것이다.

아직은 핵발전소의 심각한 사고가 알려지지 않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래도 지진과 쓰나미에 죽어간 사람들을 두고서 어떻게 그렇게 즐겁게 떠들며 놀 수 있느냐고 반문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은 이 책에서 솔닛 또한 적절하게 지적하듯이, 멀리서 전해지는 소식을 들으면서 사태를 '숙고'하는 이들의 감정이다.

1906년 대지진이 일어났을 때 샌프란시스코에 있던 철학자 윌리엄 제임스는 "큰 재앙을 비참하게 느끼는 사람은 직접적인 희생자들보다는 멀리 떨어져 있는 사람들이라는 것"을 확실하게 알게 되었다고 쓰고 있다. 반면 그는 당시 "캘리포니아에서 그 누구도 비참한 말이나 감상적인 말을 하는 것을 들은 적이 없다"고 한다(90쪽). 반대로 "캠퍼스에서는 모두들 흥분에 들떠 있었다. 그 흥분은 처음에는 거의 즐거움에 가까워 보였다. (…) 과거와 미래가 무시무시하게 단절되고 물질적인 것들과의 익숙한 관계가 끊어졌는데도 모두들 쾌활해 보였고, 기강과 질서가 완벽했다."(88~89쪽) 덧붙여 그는 "혼란 속에서 즉석으로 질서를 만들어내는 신속함"과 "보편적인 침착함"이 인상적이었다고 쓰고 있다(89~90쪽).

이는 테러로 거대한 건물이 무너진 9·11의 뉴욕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거리에서는 전반적으로 공동체 의식과 차분함이 느껴졌어요. 사람들이 함께 한다는 어떤 동지애가 있었고, 공황이나 병적 흥분 상태는 찾아볼 수 없었어요." 반면 먼 곳에서 보고 그에 대한 감정과 상상을 더해 보도하는 매스미디어는 달랐다. "뉴스는 지나치게 흥분하여 비행기가 건물과 충돌하고 건물이 무너지는 장면만 반복해서 보여주었죠. 텔레비전에서 보여주는 것은 거리에서의 경험과 사뭇 달랐어요."(293~294쪽)

▲ <이 폐허를 응시하라>(레베카 솔닛 지음, 정해영 옮김, 펜타그램 펴냄). ⓒ펜타그램

이렇듯 솔닛은 샌프란시스코의 지진과 대화재에서부터 9·11로 부수어진 뉴욕, 심지어 허리케인으로 박살난 뉴올리언스에 이르기까지, 재난 속에 있던 사람들은 우리의 상상과 반대로 쾌활함과 즐거움을 느끼며 사태에 대처하면서도 대단히 침착하게 행동한다는 뜻밖의 사실을 반복하여 전해준다.

여기에 더해 재난은 이웃이나 전혀 알지 못하는 타자들을 향한 이타적인 마음을 촉발한다. "묻지도 따지지도 않았다. 그들이 무엇을 원하건, 내가 가지고 있으면 그들에게 주었다."(48쪽) '타인들을 돕고자 하는 열망'(293쪽), 그것은 사실 재난이 발생한 곳이면 어디서나 대대적으로 발견되는 사실 아닌가! 휴직을 하거나 직업을 포기하면서까지 사고가 발생한 곳으로 달려가는 자원 활동가와 대대적인 물자와 돈의 지원은 아프리카나 인도네시아에서 일본이나 미국에 이르기까지 모든 재난에 함께 하는 전형적이고 일반적인 현상이다.

오히려 문제는 이 자원자들을 받아들이거나 감당하지 못하는 '재난 관리 기구'들이다. 자원자들의 관리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고베 대지진 때 일본이 그랬고, 그래서 후쿠시마의 지진 때도 초기엔 자원자들의 자제를 요구했다고 한다. <3·11 물이 마을이 사라진 날>(나카하라 잇포 지음, 이희라 옮김, 에이지21 펴냄), 55~72쪽). 심지어 카트리나로 박살난 뉴올리언스에서 미국의 연방재난관리청(FEMA)은 자원자나 물자, 선상 병원, 교통수단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기관이나 단체, 사람들이 제공하겠다는 도움을, 뉴올리언스로 들어가는 길이 안전하지 않다는 어이없는 이유로 모두 거절했다(359쪽).

하지만 솔닛은 이런 이타적 행동들이 단지 '아무것도 없는 무력자'에게 물자를 일방적으로 주는 '자선'이 아니라 서로가 서로에게 눈을 돌리고 서로를 위해 손을 내미는 '상호' 부조고 '연대'임을 강조한다. 샌프란시스코에서도 뉴올리언스에서도, 위기에 빠진 이들에게 가장 먼저 손을 뻗었던 것은 외부에서 온 자원자나 정부의 구호가 아니라 그 재난 속에 있었던 사람들 자신이었다.

그들이 만든 공동체 급식소를 정부기관에서 운영하는 급식소로 대체하려는 것을 사람들이 거부했던 것은 그런 상호 부조가 정부의 일방적 '자선'으로 대체되는 것을 거부한 것이었다(135쪽). 자선 아닌 연대, 그런 연대와 상호 부조의 거대한 공동체, 바로 그것이 재난과 더불어 가장 먼저, 어디에서나 자연 발생적으로 출현하는 것이다. 나중에 '미스바 카페'라는 이름을 얻게 되는 이재민 홀스하우저의 급식소에 씌어 있던 "자연이 한번 손을 대면, 전 세계가 친구가 된다"는 문구는 '친구'라는 말은, '자선'과 다른 이런 연대와 상호성을 요약해주는 단어일 것이다.

솔닛이 재난 속에서 낙원을, 좀 더 강하게 말해서 '유토피아'를 발견하는 것은 바로 이 지점에서다. "전기 공급이 끊어지면 기계가 초기 설정으로 돌아가듯, 이 놀라운 사회에서는 사람들이 이타적이고 공동체적이고 융통성 있고 상상력이 풍부한 원래의 모습으로 되돌아간다. (…)천국의 모습은 이미 초기 설정 값으로 우리 안에 있다." 많은 이들이 현재하는 고통을 넘어서기 위해 꿈꾸고 실험하는 유토피아에는, 단지 합목적적이고 의도적인 기획뿐만 아니라, 이처럼 의도도 목적도 없이 그 자리에서 즉각적으로 만들어지는 자연 발생적인 재난 공동체도 포함되어야 한다(36쪽)고 하는 것은 이런 이유에서다.

아니, 오히려 이런 유토피아야말로 경직된 원리에 따라 배제의 원칙을 가동시키는 권위적인 종교적 유토피아나 꿈을 과학적 확실성으로 바꾸고자 했던 소련의 강압적 유토피아가 망쳐 놓은(36~37쪽) 유토피아의 가능성을 되살려낼 수 있으리라고 믿는다. 재난 속에서 발견되는 이 유토피아, 있어도 보이지 않고 찾으려 하는 것과는 다른 방향에서 출현하는 이런 유토피아에 '언더그라운드 유토피아'(39쪽)라는 말보다 더 좋은 표현을 찾기는 어려울 듯하다.

그러나 재난 속에서 유토피아적인 것의 출현만을 볼 만큼 솔닛이 순진하다고 생각하면 곤란하다. 샌프란시스코 대지진에서부터 멕시코 지진, 9·11의 뉴욕과 카트리나의 뉴올리언스에 이르기까지 단 한 번도 빠짐없이 들이닥치는 파괴자들이 있음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치솟는 불길로부터 시민이 아니라 '도시'를 구하고, 재난 속의 '약탈자'들로부터 '재산'을 지키는 것을 자신의 임무로 생각했던 펀스턴 준장은 단지 1906년 샌프란시스코에만 있었던 게 아니었다.

이재민 전체를 잠재적 약탈자로 간주하고, 그들을 구조해야 할 대상이 아니라 경계하고 가두어야 할 적으로 취급하여 감옥 같은 폐쇄된 공간에 유폐하여 '관리'했던 정부 기관들, 그들을 막기 위해 출구를 막으며 '방어선'을 치곤 예상외의 움직임이 있으면 무턱대로 총질을 해대는 '자경단' 혹은 민병대나 경찰들 그리고 턱없는 소문을 아무런 확인도 하지 않고 사실인양 보도하여 이재민들을 폭도로 둔갑시켜 그런 공격적인 행동을 촉발하며 정당화하는 매스미디어가 어디에나 있기 때문이다.

솔닛은 이를 하나로 묶어 '엘리트 패닉'이라고 부르지만, 단지 엘리트들만의 것은 아니라고 할 것이다. 간토 대지진에서 조선인들을 대대적으로 학살하게 만들었던 것이 바로 이들이었음은 솔닛은 잘 알고 있다. 매스미디어가 더욱 강력해지고, 사적인 무장이 일반화된 미국 그리고 인종적이고 계급적인 이유에서 흑인이나 유색인, 빈민들에 대한 두려움과 적대감이 지배하는 미국에서는 이런 처참한 '전쟁'이 더욱더 증폭된 형태로 진행된다. 이는, 재난은 모두를 홉스적인 늑대 떼로 만들 거라는 믿음 속에서, 그리고 먼 곳에서 보며 재난 속의 공황 상태를 상상하는 불안과 두려움의 감정에 의해 이루어진다.

따라서 재난은 사람들을 친구로 만들지만 동시에 적으로도 만든다. 그렇기에 재난 속에서 유토피아를 발견하는 솔닛만큼이나 끔찍한 디스토피아를 발견하는 나오미 클라인 같은 이들의 얘기도 충분히 설득력을 갖는다. 솔닛의 이 책 또한 이를 잘 보여준다. 결국 재난 속에서 실제로 진행되는 사태는 즉각적으로 재난 공동체를 구성하는 민중들의 즉각적인 대응과 그들을 적으로 몰고 그런 공동체를 해체하여 재난이란 상황에 대한 통제권을 장악하려는 정부와 유산자들의 대응이 충돌하며 만들어지는 내전 같은 상황이다. 혹은 함께-생존하고자 하는 이들과 자신의 재산을 보호하려는 자들이 벌이는 '계급투쟁'이라고 해야 할까?

이를 잘 알면서도 솔닛이 재난 속의 전쟁이 아니라 재난 속의 낙원을 제목에 붙이면서까지 강조했던 것은, 양자 사이에 존재하는 근본적인 비대칭성 때문일 것이다. '재난 유토피아'가 재난에 대한 직접적이고 자연 발생적인 반응으로 즉각적으로 닥쳐오는 반면 '재난 디스토피아'는 재난 속에서 사람들은 모두 늑대가 되고 약탈자, 폭도가 되리라는 믿음을 매개해서만 닥쳐온다. 따라서 전자가 일차적이라면 후자는 이차적이며, 전자가 직접적이고 '자연 (발생)적'이라면 후자는 간접적이고 '인위적'이다.

따라서 후자 없는 전자는 가능하지만(사실 미국은 모르겠지만, 재난에 대한 대처가 항상 적대적 상황을 수반하지는 않는다), 전자 없는 후자, 즉 끔찍한 디스토피아만 출현하는 일은 없다. 카트리나의 뉴올리언스처럼 정부의 재난 구제는 최악이면서 이재민에 대한 극단적인 억압과 살해가 극에 달했던 경우에조차, 재난 공동체는 이미 거기 있었던 것이다.

더불어 이런 대비를 좀 더 밀고 나가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먼저 '재난 유토피아'는 그것의 존재에 대한 믿음이 재난 공동체의 직접적인 출현 이후에, 이 책이 우리 앞에 나타난 것만큼이나 뒤늦게 나타난다는 점에서 '유물론적'이라면, '재난 디스토피아'는 늑대처럼 싸우며 약탈하는 사태에 대한 믿음이 약탈이나 전쟁 이전에 먼저 형성되어 재난이 발생하는 곳이면 어디든 달려갈 준비를 하고 있으며, 끔찍한 사태는 이런 믿음을 매개해서만 이루어진다는 점에서 '관념론적'이다.

또 재난 유토피아가 민중, 혹은 대중 자신에 의해 형성되는 반면, 재난 디스토피아는 국가 기구나 유산자들 혹은 '엘리트'들에 의해 만들어진다. 민중적 자율성과 국가적 타율성이 선명하게 대조적이다. 또 전자가 연대와 공동체를 형성하는 방식으로 가동된다는 점에서 코뮨주의적이라면, 후자는 개인 간의 적대와 재산의 보호를 목표로 한다는 점에서 개인주의적이고, 재난을 새로운 축재의 기회로 이용하려 한다는 점에서 자본주의적이다(이런 점에서 나오미 클라인은 재난의 충격을 이용해 민중을 제거해 축재하는 것을 '재난 자본주의'라고 명명한다(<쇼크 독트린>(김소희 옮김, 살림Biz 펴냄)).

그러나 이차적인 것이라고 해서 쉽게 제거될 수 있다거나 없어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정말 소박하고 순진한 몽상에 빠져버리게 될 것이다. 우리는 잘 알고 있다. 많은 경우 어이없는 믿음이 실제 사실보다 훨씬 강력한 힘을 발휘하며 결국은 사실들을 그 믿음에 따라 바꾸어버린다는 것을. 그렇기에 재난 유토피아와 재난 디스토피아의 대비 속에서 어느 하나를 취하고 어느 하나를 버리는 식으로 답을 구할 순 없을 것이다. 솔닛도 말하고 있듯이, 중요한 것은 재난의 시기에 항상 저 멀리서 몰려오는 잘못된 믿음(이는 단지 엘리트만의 것은 아니다)과 '엘리트 패닉', 그리고 사람보다는 재산을 구하려는 구호 전략이나 상황을 장악하고 통제하는 데 일차적 관심을 갖고 있는 국가 기관의 개입 등에 대항하고 대결하면서, 재난이 만들어준 공동체적 관계를 보호하고 확장하는 것일 게다. 어떤 유토피아도 그런 대결과 투쟁 없이는 존속할 수 없다는 사실에서 재난 유토피아 역시 예외가 아닌 것이다.

좀 더 나아가 말한다면, 중요한 것은 재난에서 벌어지는 이런 대결적인 상황을, 재난을 통해 드러나는 어떤 관계에 대한 물음으로, 사실은 재난의 발생에마저 깊이 관여되어 있는 지배적 관계에 대한 물음으로 바꾸는 것일 게다. 대개는 적대적 형태를 취하는 그런 관계에 대해 근본에서 다시 생각하고 대결해나갈 출발점으로 삼는 것일 게다.

텐트 연극으로 유명한 일본의 연극인 사쿠라이 다이조는, 지진과 쓰나미에 더해 핵발전소 사고로 폐허가 된 이시노마키에 가서, 대지와 공기에 스며든 방사능, 그로 인한 불안과 더불어 살게 된 그곳에 텐트를 치고 "오메데토오 고자이마쓰(축하합니다)"란 콘셉트로 연극을 했던 이유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재해지에서 우리는 인간의 생존과 근대 자본주의가 대결하는 원점으로 되돌아갈 수 있고, 싸울 대상을 만났고, 성장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기 때문이다(<후쿠시마에서 부는 바람>(조정환 엮음, 갈무리 펴냄), 36, 56쪽).

이럴 수 있다면 재난은 심지어 디스토피아에게 유토피아가 잡아먹히고 만 경우에조차 '축하할' 일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아니, 재난 속에서 출현하는 진정한 유토피아란 재난을 긍정의 계기로 만드는 바로 이런 축하 속에 숨어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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