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멘토=사탕? 백날 빨아 봤자 이빨만 썩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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멘토=사탕? 백날 빨아 봤자 이빨만 썩는다! [親Book]루쉰의 <루쉰 소설 전집>
얼마 전 화제가 되었던 변영주 감독의 인터뷰 기사(☞관련 기사 : 김진숙과 통화하던 그날, "이런, 젠장 할…")를 읽으며 나는 문득 루쉰을 떠올렸다. 정확히 말하면 루쉰의 어떤 문장을. 그건 이런 문장이었다.

요즘 들어 청년이란 말이 유행이다. 입만 열면 청년이요, 입을 닫아도 청년이다. 그러나 청년이라 하여 어찌 일률적으로 얘기할 수 있을까? 그중에는 깨어 있는 자도 있고, 잠자고 있는 자도 있으며, 혼미한 자도 있고, 누워 있는 자, 놀고 있는 자도 있고, 그 밖에도 여러 가지가 있다. 물론 전진하려는 자도 있다. (<아침 꽃을 저녁에 줍다>(이욱연 엮고 옮김, 예문 펴냄), 89쪽)

사실 조금 시대착오적인 문장이긴 하다. 다섯 번이나 등장하는 '청년'이라는 단어가 특히 그렇다. 루쉰이 이 글을 쓴 게 1926년이니 벌써 한 세기 전의 일이다. 21세기 한국에서는 더 이상 그런 말을 쓰지 않는다. 대신 우리에게는 '청춘'이라는 단어가 있다. 그러니 우리는 이렇게 말해야겠다.

"요즘 들어 청춘이란 말이 유행이다. 입만 열면 청춘이요, 입을 닫아도 청춘이다. 그러나 청춘이라 하여 어찌 일률적으로 얘기할 수 있을까? 그중에는 깨어 있는 자도 있고, 잠자고 있는 자도 있으며, 혼미한 자도 있고, 누워 있는 자, 놀고 있는 자도 있고, 그 밖에도 여러 가지가 있다."

그리고 그것은 바로 나다. 자고 있고, 혼미하며, 누워 있다. 물론 어느새 서른 살을 훌쩍 넘긴 인간을 청춘이라는 쨍한 단어로 호명할 수 있는 것인지에 대해서는 이견이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유행하는 셈법에 따르면 나는 아직 청춘이라고 한다. 자주 아프고 천 번을 흔들리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삼단논법이고, 유행과는 상관없다.

루쉰은 여러 청년들 중에서도 전진하려는 청년들에 대해 이야기한다. 전진하려는 청년들에게는 길이 필요하고, 그 길을 안내해줄 지도자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지도자를 찾을 수 없다. 찾지 못하는 게 도리어 행운이다. 이유는? 루쉰은 이렇게 말한다.

자기 스스로를 아는 자라면 지도자의 자리를 사양할 것이다. 지도자이길 자임하고 나서는 자가 과연 나아갈 길을 진정으로 알고 있을까? 길을 안다고 나서는 자들은 대개 30세가 넘고, 빛이 바래고 노티가 흐르는 자들로, 그저 원만하다는 것뿐인데 자신이 길을 알고 있다고 착각하고 있다. 정말 길을 알고 있다면, 자신이 벌써 자기의 목표를 향해 전진하였을 것이고, 지금껏 지도자 노릇을 하고 있을 리 없다. 불법을 설교하는 스님이든 신선의 약을 파는 도사이든, 언젠가는 우리와 똑같이 백골(白骨)로 된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에게 극락으로 가는 이치를 묻고, 하늘나라에 갈 비결을 구하려 하니, 실로 가소로운 일 아닌가! (90쪽)

▲ <루쉰 소설 전집>(루쉰 지음, 김시준 옮김, 을유문화사 펴냄). ⓒ을유문화사

하지만 이 또한 지난 이야기다. 21세기 한국에서는 누구도 지도자를 원하지 않는다. 우리가 구하는 것은 극락으로 가는 이치도, 하늘나라에 갈 비결도 아니다. 우리는 우리의 일상을 구원할 최신형 스마트폰과 그것을 구입할 수 있는 약간의 여유를 바랄 뿐이다. 물론 얼마간의 위로와 치유를 구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건 지도자의 일이 아니다. '파도가 바다의 일'이고 '너를 기다리는 것이 나의 일'이듯, 고도로 분업화된 현대 사회에서 위로와 치유는 '멘토'의 일이다. 그래서 우리는 투표를 하는 대신 멘토의 책을 읽는다. 윌리엄 깁슨의 <뉴로맨서>(김창규 옮김, 황금가지 펴냄) 속 인물들이 더러운 바에서 한 잔의 술과 마약을 찾는 것처럼. 책이 마약보다 훌륭하다는 사실을 부정할 사람은 없다. 그러니 우리 모두는 잘하고 있는 셈이다. 끊임없이 새로운 멘토들을 찾아내는 일에 성공하고 있긴 하지만, 그저 조금 운이 없을 뿐이다.

21세기 멘토들의 모습도 루쉰이 설명하는 지도자의 모습과는 거리가 멀다. 오늘날 멘토를 자처하고 나서는 자들은 대개 빛나는 성공이 새겨진 명함과 그에 걸맞은 외모를 갖추고 있다. 30세가 훌쩍 넘었음은 물론이다. 도무지 신뢰를 보내지 않을 수 없는 모습인 것이다. 하지만 의문은 남는다. 루쉰의 말마따나 "청년들이 금 간판이나 내걸고 있는 지도자를 찾아야 할 이유가 어디 있는가?" 다시 말해, 청춘들이 금색 띠지나 두르고 있는 멘토의 책을 찾아야 할 이유가 어디 있는가?

여기 한 가지 이유가 있다. 그들은 성공했고 그렇기에 인생을 안다. 그들은 인생을 알고 그렇기에 성공했다. 우리의 멘토 문화 이면에는 개인의 성공과 인생에 대한 통찰은 비례한다는 믿음이 전제되어있다. 그러니 우리는 성공한 멘토들의 말씀을 경청해야 한다. 그렇다고 우리가 단지 수동적인 '멘티'에 머무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그들의 책을 구입함으로써 그들의 성공에 기여할 수 있다. 단순히 10억 원만큼의 성공을 한 멘토의 말과 100만 부를 파는, (그래서) 20억 원만큼의 성공을 한 멘토의 말씀이 같을 리 없다. 많은 사람들이 구입할수록 가격이 낮아지는 '소셜커머스'를 생각해 보라. 많은 사람들이 멘토들의 책을 사면 살수록 그들의 성공은 더욱 커지고, 인생에 대한 그들의 통찰 역시 깊어지는 것이다. 그렇게 얻어진 통찰은 이내 위로와 치유의 말씀으로 우리에게 돌아온다. 일종의 낙수 효과. 우리는 우리에게 필요한 멘토를 만들고, 공인된 위로를 얻는다. 이것이야말로 SNS 시대에 걸맞은 '소셜 멘토링'이 아닐 수 없다.

물론 멘토들이 거둬들이는 성공의 양과 우리가 얻는 위로의 크기 사이에는 커다란 간극이 있게 마련이다. 조금 불공평하다고 느낄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것을 따지고 드는 것은 점잖지 못한 일이 될 것이다. 그것은 낙수 효과의 본질이고, 우리의 항의 바깥의 문제다. 그러니 우리는 그들을 흔들어서는 안 된다. 아프게 해서도 안 된다. 그 자신 아프고 흔들리는 사람의 말은 우리에게 필요하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들이 '멘토링'에 집중할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 목을 죄어 오는 이자와 월세와 각종 공과금 같은 산수로 좌절하게 만들어서는 안 된다. 다름 아닌 우리 자신의 위로와 치유를 위해서라도.

당신은 이렇게 물을지도 모른다. 아무리 밑줄을 그어가며 그들의 책을 읽는다고 해도 잠시 뿐, 우리는 여전히 아프고 흔들리지 않느냐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 뻔하지 않느냐고. 아마 그럴 것이다. 하지만 그건 단지 우리가 덜 큰 탓이다. 어른이 못 된 탓이다(어쩌면 그들의 책이 아직 덜 팔렸고, 그만큼 약효가 덜하기 때문일 수도 있다). 그렇다고 걱정할 필요는 없다. 24시간 편의점 계산대 앞에 놓인 색색의 사탕들처럼, 언제고 당신이 흔들릴 때를 위한 멘토들의 신작은 늘 거기에 있다. 설령 죽는 날까지 아프고 흔들린다 해도 그건 우리가 여전히 청춘이라는 뜻이니 어디 가서 불평할 일이 못 된다. 맨 몸으로 태어나서 책 몇 권은 읽었으니 좋은 일이고, 누군가의 성공을 도왔으니 훌륭한 일이며, 변함없는 청춘으로 생을 마감할 수 있으니 그 또한 기쁜 일이 아니겠는가?

루쉰의 시대에는 이런 것들이 없었다. 루쉰은 연인 쉬광핑에게 보낸 어느 날의 편지를 이렇게 쓴다.

고통은 항시 인생과 관련되어 있다고 나는 생각합니다. 그러나 떠날 때도 있는데 그것은 곧 깊이 잠들었을 때입니다. 깨었을 때 고통을 좀 덜려면 재래로 중국에서 써온 방법은 '교만하게 구는 것'과 '되는대로 처신하는 것'인데, 바로 나 자신에게 이런 결함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그리 좋은 것이 못 됩니다. 쓰디쓴 차에다 사탕을 넣으면 그 쓴 수량은 여전하지만 그래도 사탕이 없는 것보다는 나은 것입니다. 그런데 그 사탕은 구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것이 어디 있는지 나는 모릅니다. 그러니 이 문제에 한해서는 백지를 내는 수밖에 없습니다. (<노신 전집 4 : 서간문·평론>(노신문학회 편역, 여강출판사 펴냄), 432쪽)

루쉰은 감히 사탕의 효용까지 부정하고 나서지는 않는다. 그러나 그는 사탕을 찾을 수 없었다. 그에게는 안 된 일이다. 그럼 그는 격동의 20세기를 어떻게 살아냈을까? 루쉰은 계속해서 쓴다.

1. '인생'이라는 먼 길을 걷는 과정에서 제일 봉착하기 쉬운 난관은 두 가지가 있습니다. 그 하나는 갈림길입니다. 이런 경우에 묵책 선생은 통곡하면서 되돌아왔다고 합니다. 그러나 나는 울지도 되돌아오지도 않고 먼저 갈림길 어구에 앉아서 좀 쉬거나 한잠 자고 나서 갈 만해 보이는 길을 선택하고 계속 걷습니다. 만약 성실한 사람을 만나면 먹을 것을 빼앗아서 요기를 하기도 하지만 길을 물어보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나는 그가 모르리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만일 범을 만나면 나는 나무 위에 급히 올라갔다가 범이 배가 고파서 가버린 뒤에 내려옵니다. 만일 범이 끝내 가지 않으면 나는 나무 위에서 굶어죽을 작정을 할 뿐만 아니라 죽은 다음에 범한테 시체마저 먹히지 않기 위해 우선 띠로 자기 몸을 나무에 붙들어 놓습니다. 그런데 만일 나무가 없으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그러면 별 수 없으니 잡아먹히는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그놈을 한 입 물어뜯는 것이 괜찮을 것입니다. 둘째는 '막다른 길'에 다다르는 것입니다. 이런 경우에는 원적 선생도 통곡하면서 되돌아섰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나는 역시 갈림길에서 취한 것과 같은 방법을 취해 계속 앞으로 나아가 가시덤불 속으로 헤치고 들어갑니다. 그러나 세상에는 본디 막다른 길이란 것이 없는 법인지 아니면 내가 다행히 막다른 길에 부닥치지 않은 것인지는 몰라도, 나는 죄다 가시덤불뿐이고 걸을 데라곤 전혀 없는 곳은 아직 봉착해 보지 못했습니다.

2. 사회적인 전투에 나는 대담하게 나서지 않습니다. 내가 다른 사람에게 희생이요 뭐요 하는 것을 권고하지 않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유럽 대전에서는 제일 치열하다는 것이 '참호전'인데, 참호 안에 엎드려 있는 전사들은 때로는 담배를 피우기도 하고 노래도 부르고 트럼프도 놀고 술도 마시며 참호 안에서 미술 전람회를 열기도 합니다. 그러면서도 가끔 적에게 총을 몇 방 쏘기도 합니다. 중국에서는 뒷전에서 수작을 부리는 경우가 많아서 대담하게 떨쳐나서는 용사는 목숨을 잃기 십상이므로 이러한 전법이 필요할 것입니다. 그렇지만 육박전을 하지 않으려야 않을 수 없는 경우도 아마 있을 것입니다. 이런 경우에는 하는 수 없이 육박전에 뛰어듭니다.

요컨대 내 자신이 고민을 대하는 방법은 전적으로 습격해 오는 고통에 대처하여 망나니 수단을 취하는 것을 승리로 삼고 억지로 개가를 불러대는 것을 낙으로 삼는 것인데, 이것이 곧 사탕일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결국 가서는 역시 '할 수 없다'는 데로 돌아오게 되니 실로 이것은 어찌하는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상으로 내 자신의 방법은 다 말했습니다. 그저 이럴 뿐이며 그것도 유희에 가깝습니다. 걸음마다 인생의 올바른 길을 걷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혹시 인생의 올바른 길이 있을지도 모르나 나는 모르고 있습니다). 이런 것을 써 보내도 당신에게 쓸모 있을 것 같지는 않으나 나는 이 정도밖에 쓸 수 없습니다. (434~435쪽)

그는 스스로 사탕을 만들어냈고, 그것의 한계 또한 알았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그의 시대의 일이다. 이런 것을 읽어봤자 우리에게 쓸모가 있을 리 없다. 오늘날 사탕은 어디에나 있다 -편의점에, 서점에, TV 속에, 스마트폰 위에, 그 밖의 모든 곳에. 스스로 사탕을 만드는 수고를 감수할 필요는, 하물며 망나니가 될 이유는 어디에도 없는 것이다. 청춘을 위한 사탕만 있는 것도 아니다. 어린이를 위한, 청소년을 위한, 중년을 위한, 장년을 위한 모든 종류의 사탕이 이미 구비되어 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어떤 사탕을 선택하느냐의 문제뿐. 우리는 소비자가 되어 행복한 왕의 고민(고객은 왕이다)을 하면 그만인 것이다. 루쉰이 보기에 우리는 운이 없을지 모르지만 적어도 우리는 왕이다. 싸구려 위로와 중국산 공산품으로 채워진 가난한 왕국의 왕일지라도, 어쨌거나 왕은 왕인 것이다.

물론 사탕을 구입하는 일에는 돈이 든다. 하지만 그건 또 다른 문제로, 이 자리에서 논할 일은 아니다.

어쩌면 당신에게도 끊임없이 사탕을 받아먹는 일에 싫증을 느끼게 되는 순간이 찾아올지 모른다. 몽땅 썩어버린 이빨 덕분에 밤잠을 설치는 날이 올 수도 있다. 나는 아직 아프고, 아프니까 청춘이고, 고로 나는 청춘이라는, 아프면 아플수록 더욱 열렬한 청춘이라는 마법의 삼단논법이 더 이상 통하지 않는 순간. 삼단논법은 물론이고 오빠가 좋다는 아이유의 삼단고음마저 통하지 않는, 도저히 참을 수 없는 고통에 차라리 삼단괴성을 내지르고 싶어지는 순간. 그런 순간은 온다. 반드시 온다.

그럴 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바로 루쉰이다.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개척하는 고독자의 자세를 다룬(혹은 온갖 구습에 젖은 인물들을 풍자하는) 구시대적 글들과는 달리, 너무나 현대적인 '멘탈'을 다룬 유일한 소설에서 루쉰은 등장인물의 입을 빌려 이렇게 말한다.

새하얗고 번쩍번쩍 빛나는 은화더미! 더구나 그의 것이었는데-지금은 없어진 것이다. 자식놈이 가져간 셈 친다고 말해 보았으나 역시 마음이 편치 않았다. 스스로가 벌레라고 말해 보아도 역시 편치 않았다. 그도 이번만은 실패의 고통을 약간 느꼈다.

그러나 그는 곧 패배를 승리로 전환시켰다. 그는 오른손을 들어 힘껏 자기 뺨을 두 차례 연거푸 때렸다. 얼얼하게 아팠다. 그제야 그는 마음이 평안해지기 시작했다. 마치 때린 것은 자신이고 얻어맞은 것은 또 다른 자신 같았기 때문이다. 잠시 후 그는 자기가 남을 때린 것같이-비록 아직도 얼얼하지만-몹시 만족하여 의기양양해 드러누웠다.

그는 푹 잠들었다. ('아큐정전', <루쉰 소설 전집>(김시준 옮김, 을유문화사 펴냄), 126쪽)


어떤 멘토의 속삼임에도 위로 받을 수 없는 순간을 위한 비상약. 루쉰의 시대에는 널리 인정받지 못한 이 마법의 기술을 오늘 우리는 '정신 승리'라고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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