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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아버지는 친모를 죽인 사이코패스! 나도 혹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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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할아버지는 친모를 죽인 사이코패스! 나도 혹시?" [절망의 인문학] 심리학은 뇌 과학에 자리를 내어 주나?
인문학의 시대입니다. 스티브 잡스와 같은 자본가부터 거리의 노숙인까지 '인문학'을 말합니다. 유명 대학에서는 대기업 임원 등을 타깃으로 한 '인문학 코스'가 문전성시를 이룬다고 합니다. 예전에 테일러를 추종하며 드러커를 읽던 재벌 회장은 이제는 공자, 노자를 읽고 헤겔, 마르크스를 인용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희망의 인문학'이 아닌 '절망의 인문학'을 외치는 인문학자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이런 고통스러운 질문을 던집니다. "우리는 이 절망의 시대에 인문학을 말할 수 있는가?" 이들은 섣부르게 '희망'을 말하기 전에, 지금 여기 절망의 세상에 시선을 돌리고자 합니다. 이런 절망을 제대로 직시할 때 비로소 거짓이 아닌 진짜 희망의 몸짓이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프레시안>은 지금 여기에서 인문학의 존재 조건을 묻는 이들과 '절망의 인문학' 연재를 시작합니다. 계속되는 불온한 질문에 인문학자의 치열한 답변이 이어집니다. 아홉 번째 질문은 이렇습니다. "심리학은 뇌 과학에 자리를 내어 줄까요?" 심리학자 이남석 씨가 답합니다. "뇌 과학으로 마음의 비밀을 모두 알 수 있다는 발상은 또 다른 광신입니다!" <편집자>

① 첫 번째 질문 :
미스터 잡스, 이제 그만하면 됐거든요!
② 두 번째 질문 : 안철수는 과연 인문학적 정치인인가?
③ 세 번째 질문 : 대하소설은 여전히 가능한가?
④ 네 번째 질문 : 현대 동양 철학은 가능한가?
⑤ 다섯 번째 질문 : 문학 비평은 지금 무엇을 할 것인가?
⑥ 여섯 번째 질문 : 인문학 스타 사도 바울의 정체는?
⑦ 일곱 번째 질문 : 인문학을 파는 사기꾼을 고발한다!
⑧ 여덟 번째 질문 : 사회과학의 역할은 무엇인가?

심리학보다는 뇌 과학이라는 외계인

나는 꿈에서 외계인 파티에 참석한 적이 있다. 그날 화제 거리는 '인간의 마음은 어디에 있는가'에 대한 것이었다. 빨간색 외계인은 마음의 위치가 '배'라고 주장했다.

"아니 왜요?"

놀란 나는 신분도 망각한 채 다른 외계인보다도 먼저 물었다. 빨간색 외계인은 짐짓 여유를 부리며 대답했다.

"인간들은 공복일 때는 만사에 예민해지고 포만감을 느낄 때는 만사태평입니다. 그리고 배에 청진기를 대고 들어보면 일정한 패턴이 없이 계속 이상한 소리가 나지요. 그런 것으로 봐서 복잡한 인간의 마음은 배에 있습니다."

주변의 외계인들이 의심스러운 눈짓을 보내자 빨간색 외계인은 1970년대 심리학 책을 꺼내어 보여주었다. 그 책에는 윌리엄 셸던과 에른스트 크레치머 등의 체형과 심리의 관계에 대한 연구가 소개되어 있었다. 비만한 사람은 온화하고 사교적인 반면에, 마른 사람은 예민하고 내성적이며, 근육질의 사람은 강인하고 외향적인 성격이라는 내용이었다.

다른 외계인들은 즉각적으로 반론을 제기했다. 자신들이 잡아서 관찰한 지구인들을 보면 체형 심리학 이론과 맞아떨어지지 않는 경우가 너무 많다는 것이었다. 어느 외계인은 마른 체형으로 외향적이고 재기발랄한 코미디언이 많아서 아예 자신은 마른 지구인을 먼저 잡는다고 말하기도 했다. 혹시 나까지 잡아갈까 싶어 몸을 사리는 사이에 파란 외계인이 입을 열었다.

"그런 낡은 심리학은 이제 버려야 해요. 요즘은 뇌 과학의 시대입니다. 인간의 마음은 뇌에서 나옵니다. 그러니 뇌를 연구하면 곧 마음을 알 수 있어요. 거추장스럽게 심리학 연구 방법이나 이론을 끼워서 설명할 필요가 없어요."

파란 외계인은 DNA 이중나선 구조를 발견한 공로로 노벨상을 수상한 프랜시스 크릭이 1994년에 내놓은 저서 <놀라운 가설(The Astonishing Hypothesis)>에서 한 말을 인용했다.

"인간의 주체성과 자유 의지는 사실 신경 세포와 그 관련 분자들의 거대한 집합체의 행태에 지나지 않습니다."

파란 외계인은 기원전 4세기 히포크라테스도 이미 뇌가 인간의 정신 기능을 담당한다고 알고 있었으며, 고대 철학자 플라톤도 최고의 덕목인 지혜의 위치를 머리(뇌)로 비유할 만큼 역사적으로 오래되었으니 새삼스럽게 요란을 떨 것 없는 당연한 결론이라는 식으로 말했다.

1848년 미국 버몬트 철도 공사의 현장 감독으로 일하다 사고로 쇠막대기가 뇌의 전두엽 부분을 관통해서 성격도 변한 피니스 게이지와 같은 사람들의 사례도 줄줄 읊었다. 평생 "Tan"이라는 말만 했던 실어증 환자의 뇌를 부검해서 왼쪽 뇌 전두엽 부분이 언어능력과 관련 있음을 밝혀낸 폴 브로카의 연구를 시작으로 뇌의 각 부위가 각각 어떤 역할을 담당하고 있는지 체계적으로 설명해 주었다.

그리고 인간의 뇌에는 최소 1000억 개에서 1조 개의 뉴런이 있으며, 1초당 뇌에서 만들어지는 신호는 1년간 전 세계 국제 통화의 단어 수보다 1000배 더 많다는 등의 이야기를 하며 인간의 복잡한 마음은 곧 뇌의 활동으로 환원시켜 설명하기에 충분하다고 주장했다. 파란 외계인이 줄기차게 쏟아내는 숫자와 예시에 입이 쩍 벌어졌다.

그러나 나를 더 놀라게 하는 것은 따로 있었다. 파란 외계인은 '심부 자극술'과 관련된 영상을 보여주었다. 뇌에 심어 놓은 신경 조정 장치로 전기 자극을 줘서 도파민을 활성화시켜 파킨스 병에 걸린 환자의 떨림을 억제하는 장면이 나왔다. 그 다음에는 심각한 우울증에 걸린 여성은 전두엽에 심부 자극 시술을 받아서 우울한 마음이 들 때마다 자신의 손으로 버튼을 눌러 전두엽을 자극하는 장면이 나왔다. 파란 외계인은 자신감 넘치는 어조로 말했다.

"프로이트가 무의식을 연구한 이후 우울증 치료에 기나긴 정신 분석 상담이 필요함을 주장했었지요. 하지만 이제는 시대가 달라졌습니다. 뇌에서 우울증과 관련된 패턴이 보이면 곧 우울증으로 진단할 수 있어요. 가설적인 개념인 내면 아이(inner child)를 발견해서 상처를 치유하느라 시간을 들일 필요나 인지 행동 수정 등 다양한 상담 훈련을 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저 지금 보신 장면처럼 뇌를 직접 진단 및 제어하면 됩니다."

여태까지 파란 외계인의 말에 수긍하며 신기해했지만, 우울증 사례에 대한 설명을 듣고 나서 나도 모르게 발끈하며 몸을 드러냈다.

"그게 말이 되나요?"

뇌와 마음의 관계

ⓒsiumed.edu
뇌 과학의 발전과 일반 대중의 관심 증가로 언론에서도 뇌 과학 연구 소식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는 세상이다. 덕분에 전두엽, 측두엽, 두정엽, 후두엽, 시상하부, 해마 등의 뇌 부위와 PET, fMRI, ERP, MEG, SPECT 등의 진단 도구와 같은 전문적인 용어를 아는 사람이 세상에 많아졌다. 그러나 뇌 과학 연구와 용어가 많이 퍼질수록 뇌와 마음의 관계에 대한 이해가 높아진다기보다는 더욱 더 혼란스러워지는 양상이다. 학계에서도 마찬가지이다.

학자 중에는 새로운 뇌 과학 연구 방법으로 심리학을 포함한 기존 학문의 이론을 검증해서 심리 현상을 곧 뇌의 활동으로 환원시켜 설명하려는 뇌 결정론자가 있다. 프랜시스 크릭, 라마찬드란, 패트리샤 처칠랜드 등 대중적으로 이름이 많이 알려진 신경 과학자들이 대부분 이에 속한다.

이들은 심리 과정이 곧 뇌 과정이며, 마음의 물리적 기반인 뇌와 신체 기관 신경계의 구조와 과정에 대한 상세한 이해 없이는 마음에 대한 올바른 이론을 만들 수 없음을 주장한다. 그래서 때로는 기존의 심리학은 틀린 이론이거나 적어도 더 이상 필요 없으며, 뇌 과학으로 모든 것이 수렴된다고 말하기도 한다.

뇌 결정론자들은 때로는 뇌의 특정 요소에 의해서 모든 것이 결정되었다는 주장을 과감하게 펼치기도 한다. 마르코 야코보니는 저서 <미러링 피플>에서 거울 뉴런(mirror neurons) 덕분에 인간이 사회적, 정치적, 경제적 동물로 진화할 수 있었다며 역사적 사례를 모두 거울 뉴런과 연결시켜 설명했다.

다양한 학문이 여러 변인이 작용하여 만들어낸 변화라고 역사적으로 이해하고 있던 것을 그는 뇌의 전두엽과 측두엽에 소량 존재하는 신경 세포의 작용으로 설명한 것이다. 다른 뇌 결정론자가 쓴 대중서나 연구에 대한 언론 보도도 신경 세포나 부위, 신경 전달 물질 등의 차이가 있을 뿐 이러한 과감한 주장의 태도는 동일하다.

한편, 뇌 과학이 심리학을 비롯한 다른 학문보다 우위를 점하기보다는 오히려 올바른 마음에 대한 이해를 위한 협력의 대상임을 강조하는 학자들도 있다. 대표적인 사람이 마이클 가자니가와 브루스 후드 등이다. 그런데 이들이 무조건 다른 분야에 대해서 수용적인 것은 아니다. 혈액형이나 체형과 심리의 관계를 논하는 심리학과 같이 일반적 직관에 의존한 통속 심리학(folk psychology)는 몰아내야 한다는 점에서는 강성의 뇌 결정론자의 주장과 동일하다.

그러나 모든 심적 활동이 뇌에 의해서 결정이 되고, 모든 것을 뇌의 작용으로 환원해서 설명할 수 있다는 것에 대해서는 회의적이라는 점에서 뇌 결정론자와는 큰 차이가 있다. 마이클 가자니가의 저서 <뇌로부터의 자유>(박인균 옮김, 추수밭 펴냄)에 나오는 "자유 의지와 책임은 개인의 뇌 자체가 아니라 둘 이상의 뇌가 상호 작용하는 사회적 관계에서 창발된다"는 주장은 이러한 학자들의 입장을 대변하고 있다.

미국의 신경 과학자 짐 팰런은 사이코패스 살인자들의 뇌를 연구하던 중 그들의 뇌에서 안와피질의 활동이 결여돼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안와피질과 극악한 범죄의 상관 관계에 대해서 결론을 내리기 전 팰런은 자신의 뇌와 살인자들의 뇌를 비교했다. 그런데 놀랍게도 자신의 뇌가 살인자의 뇌와 같은 패턴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뇌 결정론에 따르면 살인자가 되었어야 하는 운명의 소유자였던 것이다.

가계의 역사를 살펴보니 실제로 조상 중에는 자신의 어머니를 죽인 살인자도 있었다. 그는 바로 미국 역사에 기록된 최초의 모친 살해범이었으며, 다른 조상 중에서도 일곱 명의 살인자가 더 있었다. 그러나 그는 부모가 제공한 좋은 양육 환경과 자신의 노력으로 살인자가 되지 않고 명석한 신경 과학자가 되었다. 그는 자신의 사례를 통해 뇌의 역할보다 환경과의 상호 작용을 이후에 더 많이 보게 되었다.

뇌 결정론에 너무 빠져 있는 사람에게도 팰런이나 가자니가와 같은 두 번째 부류의 학자들처럼 뇌를 넘어선 변인을 보라고 조언하고 싶다. 그들은 실험실의 뇌가 아니라, 살아 움직이는 인간이 노출되어 있는 사회적 환경을 고려해야 하기 때문에 심리학을 중심으로 한 여러 인문학적 성찰을 무시하지 않는다. 오히려 배우자를 고르는 것처럼 세심하게 취사선택해서 껴안으려 한다.

이 밖에도 여러 부류의 학자들이 뇌 과학에 대해서 각기 다른 입장을 갖고 있다. 그러나 세상은 목소리를 높여 떠드는 사람이 가장 주목을 많이 받는다. 그리고 실제보다 더 많고 주도권을 가진 것으로 대중을 현혹시키는 데 문제가 있다. 본의 아니게 오도되지 않으려면 현재의 뇌 과학 연구가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 꼼꼼하게 살펴봐야 한다.

영국 워릭 대학교 지안펭 펭 팀의 2011년 연구의 경우 우울증 환자와 일반인의 뇌를 fMRI(기능성 자기 공명 장치)로 찍어 비교해서 우울증 환자가 분노 표출과 관련된 신경 회로가 제대로 활성화되지 않은 것을 밝혀냈다.

이와 다르게 국내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 이창준 팀은 2012년 9월 우울증에 대한 놀라운 연구를 발표했다. 그 동안 뇌 과학자가 집중적으로 연구해온 뇌 신경 세포가 아닌 비신경 세포를 연구한 결과, 비신경 세포가 직접 신경 전달 물질을 뿜어내 신호 전달을 활성화시킨다는 것을 밝혀낸 것이다.

즉, 신경 전달 물질인 글루타메이트가 TREK1(트렉1)이라는 통로를 빠르게 지나서 분비되면 우울증이 유발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이 연구 결과를 읽은 독자는 사람의 뇌를 머리에 그렸을 것이다. 그런데 이창준 팀은 쥐를 대상으로 실험을 했다. 쥐를 거꾸로 매달아 처음에는 벗어나려 아등바등 대다가 결국 포기할 때까지 우울증을 유발시킨 다음에 쥐의 뇌를 관찰했다.

기본적으로 인간의 뇌는 다른 생물과 동일하게 세포로 이뤄져 있고, 세포는 동일한 물리학 법칙의 지배를 받으니 인간 뇌의 비밀을 밝히기 위해 쥐의 뇌를 연구하는 것 자체가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연구자들이 조작한 것이 정말로 인간이 처한 사회적 환경 속의 우울증과 본질적으로 맞아떨어지는가와 신경 전달 물질의 분비 증가를 곧 우울증이라고 볼 수 있느냐는 것은 의문으로 남는다.

내 꿈에서 나온 파란 외계인이 '심부 자극술'을 설명하면서 보여준 동영상의 주인공의 예를 다시 생각해보자. 만약 그녀가 아버지의 폭력과 엄마의 히스테리에 지쳐 새로운 누군가를 만나도 자신의 상처를 치유해 줄 것이라는 믿음이나 기대가 없으며, 굳이 다양한 인간관계를 가지지 않고 혼자 있는 시간을 늘리다가 결국 만성적인 우울증에 빠져 들었다면 그녀의 우울증의 원인을 설명하는 적절한 변인이 어릴 적의 심리적 상처일까, 아니면 현재 그녀의 전두엽의 패턴일까? 우리는 간단하고 확실하게 관찰할 수 있는 뇌에 마음을 빼앗겨 정말 봐야 하는 것에는 점점 눈을 감게 되는 것은 아닐까?

일찍이 100년 전 유럽 중심의 게슈탈트 심리학자들은 '전체는 부분의 합보다 크다'는 말로 마음과 환경의 본질을 명백히 말했지만, 최첨단의 기술로 무장한 일부 뇌 결정론자들은 일부 뇌의 요소의 합으로 전체 마음을 설명하려고 하고 있다. 뇌 결정론자의 주장은 사진기의 부품으로 사진의 예술적 가치 전체를 논하려는 잘못을 연상시킨다.

경박한 뇌 과학보다는 진중한 심리학을 선택하는 지구인

심리학이 뇌 과학에 자리를 내어주려면 우선 뇌 과학이 월등하게 과학적인 가치를 가져야 한다. 현재 뇌 과학은 비약적으로 발전을 하고 있지만 아직은 뇌의 신비를 정확히 추적하기에는 역부족인 것이 현실이다. 그리고 연구 간에 상충되는 결론이 혼재하는 등 안정화된 결론에 도달하는 데에도 앞으로 더 많은 시간이 걸릴 전망이다.

그렇다고 심리학이 온전히 자리를 지켜야 하는 것은 아니다. 심리학도 빨간 외계인이 빠진 것과 같은 통속 심리학에서 벗어나, 마음의 비밀을 찾을 수 있는 과학적 객관성과 엄밀함, 명확성을 꼭 갖춰야 한다. 그래야 심리학은 마음의 비밀을 밝히는 학문으로서의 자리를 지킬 수 있다. 사이비 과학으로 몰려서 내준 자리가 좌뇌 학습법, 우뇌 학습법, 전두엽 촉진법과 같은 단어를 쓰도록 놔두는 경박한 학문이라면 더 땅을 치고 후회해야 할 일이다.

학자는 과학적 태도를 가져야 하겠지만, 대중도 노력이 필요하다. 아주 구체적인 숫자와 데이터가 나오기는 하지만, 사실은 검증되지 않은 가설과 믿음을 전파하는 경우가 많은 뇌 과학 연구에 대한 기사는 더더욱 경계를 해야 한다. 현재 많은 사람들이 뇌 결정론자의 주장이 구체적이라는 이유로 철학자 알프레드 노스 화이트헤드가 지적한 '잘못 놓인 구체성의 오류(the fallacy of misplaced concreteness)'에 쉽게 빠지는 듯하다.

뇌의 각 부위가 담당하는 역할을 명확하게 구별할 수 있다거나 보편적인 뇌의 지도가 완벽하게 그려져는 것이 아닌 상황에서 특정 세포나 요소의 영향력을 이야기하는 것은 아무리 구체적으로 보여도 사실은 가설이나 의견을 밝히는 것에 지나지 않을 수 있음을 비판적으로 생각해야 한다.

그런데 심리학이 뇌 과학에 자리를 내어주기 힘든 이유는 과학적 가치가 아닌 마음의 본질에서 찾을 수 있다. 마음은 뇌라고 하는 물리적 근거를 갖고 있다. 이것은 뇌의 진단 도구가 나오기 전인 초기 심리학자인 윌리엄 제임스가 1892년 그의 저서 첫 번째 챕터의 첫 장에 쓴 말이기도 하다. 그런데 물리적(신체적) 기초를 갖고 있다고 해서 그것이 곧 마음이라는 뜻은 아니다. 컴퓨터가 하드웨어나 소프트웨어 어느 하나로 모두를 설명할 수 없듯이, 마음도 하드웨어로서만 설명할 수는 없다.

어떤 사람이 친구의 전화번호를 기억하지 못하고 있다가, 스마트 폰을 켜서 친구의 아이콘을 보고 전화하는 세상에서는 특히 개인의 뇌에만 제한시켜서 마음의 범위를 생각하기 힘들다. 사람들은 사회 연결망 서비스(SNS)를 통해서 자신이 생각하지도 못한 것을 알게 되고 자극을 받아 자신의 의견을 표현하기도 하고, 메모지나 스마트 폰에 일정을 정리하는 대신 자신의 뇌는 구체적 사실을 기억하는 부담을 덜기도 한다.

즉 사람들은 마음이 작동하는 자리를 단지 자기의 뇌에 국한시키지 않고 자신이 상호 작용할 수 있는 인공물(artifacts)로 이미 분산, 확장시키고 있다. 어떤 사람은 메모지나 일반 컴퓨터가 아니라 태블릿PC나 스마트 폰으로 글을 써야 생각이 잘 난다고 하는데, 그렇다면 그의 생각을 만드는 것은 온전히 뇌로만 봐야 하는 것일까, 아니면 기기로 봐야 하는 것일까?

융합적으로 마음을 연구하는 인지 과학자들은 이미 '분산된 인지(distributed cognition)'이라는 개념으로 뇌의 범위를 넘어선 인간의 마음을 연구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뇌가 모든 것을 결정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참신한 시도가 아니라 무모한 시도로 머물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확실한 것은 진공 상태에서 자신의 뇌만을 의지해서 사는 이상화된 인간은 없다는 것이다. 실험실에서 연구자가 조작한 것대로 움직여야 하는 쥐처럼 사는 경우도 많지 않다. 걸출한 러시아 학자인 레프 비고츠키는 <사회 속의 마음(Mind in Society)>에서 사회적 관계 속에서 상호 작용하는 마음이 먼저 발휘가 된 다음에 개인의 인지 체계가 작동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뇌 결정론자들이 흔히 주장하는 것처럼 개인의 인지 체계가 투사되어 일방적으로 변화시키는 것과는 큰 차이가 있다.

우리는 모두 마음을 갖고 있는 지구인이다. 그러나 어떤 때보면 사람들은 마치 인간 사회 속에서 상호 작용하는 주체로서가 아니라, 외계인으로서 인간의 마음을 보려고 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지금 이 글을 읽으며 여러분의 경험하고 있는 것을 있는 그대로 생각해 보자. 여러분은 그냥 뇌에 저장된 것을 꺼내는 것이 아니다. 나를 포함한 세상 사람들과 공유하고 있는 상징으로 표현된 정보를 처리하고 있다.

그냥 수동적 입력이 아니다. 어떤 경우에는 내가 상큼하게 쓴 단어도 퍽퍽하게 읽을 정도로 능동적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각자의 지식수준에 따라 이해하는 바가 달라, 글에 나온 인명이나 개념어를 검색하며 글을 읽었을 수도 있다. 이것은 눈을 통해서 후두엽의 시각 피징에 들어온 정보를 해마에 저장된 정보와 비교해서 전두엽에 투사해서 종합적으로 판단을 내리는 것으로 설명하고 말기에는 아까울 정도로 다채로운 경험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는가. 여러분이 파란 외계인이 아니라면 말이다.

인문학은 '삶의 조건을 꼼꼼히 따지는 학문'이다. 삶의 조건은 다양하며, 조건들이 결합해서 낼 수 있는 조합의 수도 다양하다. 그런데 단순성과 구체성의 유혹에 빠져 특정 조건만을 따지는 것은 인문학을 풍요롭게 하기 보다는 오히려 빈곤하게 할 위험이 있다. 뇌는 인간이 마음을 작동시키기 위해서 필요한 조건 중의 하나이다. 다른 조건인 환경, 인공물, 사회적 자원을 보는 것도 게을리 하지 않아야 할 것이다.

뇌 과학자이든, 심리학자이든, 인문학자이든, 대중이든 말이다. 그래야 우리 스스로 자리를 내주고 외계인에게 마음의 위치를 묻는 상황에 빠지지 않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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