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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의 냄새', 영원히 지워지지 않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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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의 냄새', 영원히 지워지지 않아! [親Book] 조은의 <사당동 더하기 25>
솔직하지 못했다. 가난이 두렵지 않다고 함부로 지껄여대곤 했다. 나 자신도 속았다. 그러니, "자발적 가난"이라든가, "결핍이 추진력"이라는 말도, 아무 때고 쉬이 내뱉을 수 있었던 거다. 깊이 생각하지 않았다. 그저 겪어 봤으니 안다고 믿었다. 결핍이 삶의 곳곳에 침투해 있을 때조차, "가난이 두렵지 않아"라고 했다. 물론 거짓말이었다. 속마음과 달랐지만, 그렇게 말해두는 편이 자존심을 유지하기에 나았다.

내가 겪은 가난이란, 하나를 얻기 위해 다른 하나 혹은 그 이상을 반드시 포기해야 하는 거였다. '더 나은 미래를 위해 오늘의 수고쯤은 견딜 수 있어야 한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매일 가계부를 썼다. 석 달 후에 있을 일도 미리 대비해야 했다. 분에 넘치는 건 욕심 내지 않고 일찌감치 포기하는 일, 검소함과 사치의 의미를 정확히 가르면서 군더더기 없는 삶을 칭송하는 일에 익숙해야 했다. 근 10여 년간 시간 강사로, 비정규직 노동자로 위태로운 밥벌이를 하면서도 '가난한 사람'에서 서둘러 나를 제외했다. '그들'을 타자화함으로써 불안을 감추는 일 외에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하여, 조은의 <사당동 더하기 25>(또하나의문화 펴냄)는 버겁다. 불편하다. 기왕이면 밝고 유쾌한 이야기를 듣고 싶은데, 책에서까지 가난을 들여다봐야 하나 싶었다. 건방지게 입으로만 빈곤을 논했던 한계다. 당신의 가난은 게으름과 무능함의 결과물이라 몰아세우는 편이 차라리 나았다. 그래야 막연한 희망이라도 품어 볼 수 있지 싶었다. 가끔 가난의 반대편 목소리에 힘을 실어주기도 했다. 그들과 함께 가난을 개인 탓으로 돌리며, '빈곤 문화의 속성'을 말하는 편이 훨씬 편했다. 그리해야, 아득한 희망 뒤에 불안을 숨기고, 자신을 속일 수 있을 거라 믿었다.

▲ <사당동 더하기 25>(조은 지음, 또하나의문화 펴냄). ⓒ또하나의문화
내가 생각할 수 있는 가난이란, 하루 벌어 이삼일을 견디고 끼니를 염려해야 하는 정도이다. 서럽고 비참함에도 일자리가 있음을 다행으로 여기는 일도 포함된다. 독촉 전화를 익숙하게 처리할 수 있는 '뻔뻔함'과, '아, 돈만 있었으면' 하는 탄식의 일상화, 죽을 만큼 아프지 않고서는 병원을 찾지 않는 '대범함'과도 맞닿아 있다. 평생 고생만 시킨 가족에게 가장 노릇 한 게 없다던 A는, 없는 돈에 생명 보험부터 들었다고 했다. '300만 원 빚만 해결되면, 낯선 남자와 몸 섞는 일은 다시 하지 않을 거'라고 B는 말했다. 이들을 통해서 빈곤을 짐작했을 뿐이다. 이해한다고 착각했다. 어찌, 가난이 이해의 문제이던가.

사회학자 조은은 <사당동 더하기 25>를 통해 '빈곤의 세대 재생산'에 관한 화두를 던진다. 도시 빈민 운동이 활발했던 사당동에 거주한 금선 할머니 가족의 삶을 25년간 추적 연구하였다. 서두에서 "결과적으로 계급이나 계층의 이동이 거의 일어나지 않는 셈이다"라고 못 박았듯이, 주거 문제가 해결되어도 빈곤의 문제는 해결되지 않음을 밝히고 있다. 하나, <사당동 더하기 25>는 "어떤 사람에게는 너무나 낯익은 가난을 낯설게 읽고, 어떤 사람들에게는 너무나 낯선 가난을 낯익게 읽어 보려고 했다"(315쪽)라는 저자의 의도만으로도 결론을 넘어선 충분한 가치가 있지 않을까 싶다.

책의 전반에 걸쳐 저자가 금선 할머니 가족과 적정한 거리 조절을 두고 고민하는 모습이 나온다. "연구자에게 연구자가 속한 일상과 다른 일상을 경험하고 연구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지 수시로 자문해야 했다"는 말에서도 성찰과 반성을 엿볼 수 있다. 특히 '가난 두껍게 읽기'에서는 개입과 관찰의 경계를 조절하기 위한 연구자의 노력에 숙연해진다. 사당동은 그저 '동정적인 빈곤 폭로용'이 아니다. 연구 당시에는 "한국 사회의 치부를 드러내려는 악의적 행위로 의심받았다"(53쪽) 했으나, 더는 이를 문제 삼을 이 없을 거라 믿는다.

다만, 책을 읽고 나면 "예기치 않은 순간, 서로 다른 언어를 쓰고 있고, 속한 세계가 다르다는 것을 깨우치고" 생각지 못한 "언어의 계급성"(87쪽)에 대해 고민하게 될 터이다. "가난한 아이들은 먹고 싶은 것일수록 오히려 먹고 싶지 않은 척 받아먹지 않는다"는 은주 씨의 말을 통해 "빈곤 재생산의 삶과 과정은 좀 더 복잡다단하다"는 저자의 말을 다시 곱씹게 될지도 모르겠다. "가난이 두렵지 않다"던 나에게, "가난을 잘 몰라요"라고 한 어떤 이에게, 빈곤을 개인의 문제로 이해하고 함부로 단정 지어버린 누군가에게는 영 불편한 책이 아닐 수 없다.

이성보다 감성이 발달한 나는 '복지 병'이라거나, '과잉 복지'라고 문제 삼는 상황을 보면 발끈한다. 흥분의 근원이 설움의 투사인지, 인권에 대한 감수성인지 구분할 수 없으나, 저자의 말을 빌려 정리해 두고 싶다. "가난함의 경험은 그 가난을 실제로 경험한 사람들에게는 생존의 문제이지만, 경험하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생활양식인 것이다."(310쪽) 그러니, "가난한 사람들의 염치없음을 말할 때마다 조금 더 지켜보아야 하며"(215쪽), 신중해야 할 일이다. 보고 싶지 않고 불편하지만, 알고 있지 않은가. 여전히 밥 굶는 아이가 있고, 하루 살아남기도 빠듯한 삶이 있음을 말이다. '가난의 냄새', '빈곤의 냄새'는 아무리 깨끗하게 세탁하고, 털어내도 지울 수 없더라고 했다. "내가 못 살게 되면 내 아이도…돌고돌고 그렇게 되는 거죠"라고 금선할머니 막내 손자 덕주 씨가 말했다. 가난의 대물림에 대한 염려는 이들만의 몫인 걸까.

개인 사업 하셨던 아버지께서는 쉰 넷에 당신 의지와 달리 일을 접으셨다. 교육 공무원이셨던 어머니께서는 정년퇴임하시는 순간까지도 아버지 빚을 고스란히 떠안으셨다. 당연한 일이겠지만, 노후를 위한 대비는 엄두도 내지 못하셨다. 지금도 변함없이 우리 집 가훈은 '정직, 근면, 성실'이다. 기억으로는 부모님도 그리 살아오셨다. '국민의 의무'를 당연하다 여기며, '나라가 하라 하면 하셨고, 하지 말라는 건 하지 않으셨다.' 그럼에도 부모님의 노후는 개인이 감당해야 하는 문제라고 하신다.

영화배우 장국영의 유언처럼 부모님은 '착하게 사셨다.' 그 피를 받는 나는, 착하다 할 순 없지만, 요행을 바라지 않고 성실하고 근면함을 교훈으로 산다. 운 좋게 '돈 잡아먹는 큰 병'에 걸리지 않고, 일자리를 뺏어가지만 않는다면 20년, 30년은 족히 일해야 한다. 환갑 넘어 일해야, '대한민국 국민의 의무'는 다했으나, '나라님도 구제해 주지 않은' 부모님을 부양하고, 노년의 삶을 죄책감 없이 살 수 있을 듯하다.

가난이 두렵다. 선택할 수 있는 건 점점 줄어든다. 그럼에도 징그럽도록 아름다운 세상에 오래 머물고 싶다. 다만, 노년의 삶이 사회 문제가 되지 않기를, 국가 생산력에 도움 되지 않더라도 퇴치해야 하는 혐오의 대상이 되지 않기만을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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