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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석, 진중권, 유시민…'그들'의 시대는 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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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고종석, 진중권, 유시민…'그들'의 시대는 왜?

[노정태의 논객시대] 프롤로그

1.

'나무만 보고 숲을 못 보는' 사람은 숲 속에 있을까, 아니면 숲 밖에 있을까? 우리에게 너무도 익숙해진 관습적 사고의 틀에 따르면, 당연히 그 사람은 숲 속에 있고, 그래서 개별적인 나무만 바라볼 뿐 전체적인 숲을 조망할 수는 없다. 하지만 과연 그 은유를 그렇게 해석하는 것이 올바른 일일까? 내가 혹은 당신이, 나무들로 빽빽하게 뒤덮인 숲 속에 있다면, 오히려 숲을 못 보는 것이 불가능하지 않을까?

눈을 어디로 돌려도 나무들이 무성하게 자라있고, 잎사귀들이 서로 부대끼는 소리가 들려오며, 온갖 짐승들의 발자국과 날갯짓으로 당신의 오감은 꽉 차오른다. 아무리 걷고 또 걸어도 탁 트인 하늘은 나타나지 않고, 이 계속되는 짙푸른 장막이 서서히 눈에 익을 무렵이 되어, 드디어 작은 오솔길을 발견할 수 있게 될 때, 그때 비로소 우리는 '나무가 아니라 숲'을 보게 되는 것은 아닐까. 다시 말하자면, 나무가 아니라 숲을 보는 것은 숲 속에 뛰어들어야만 가능한 일일 수도 있다.

2.

국민국가를 건설하고 자본제 생산양식을 도입하려는 찰나 외세의 침략에 시달리며 식민지로 전락하고 만 조선이라는 나라. 그 나라의 지식인들은 그리하여 국민국가도 자본주의도 완성하지 못한 상태에서 그것을 '극복'하기 위한 투쟁에 나서야 했다. 국민국가와 자본주의가 결국 근대라는 하나의 본질이 표현되는 두 개의 양태라고 해본다면, 제대로 도래하지도 않은 근대와 맞서 싸우면서 동시에 그것을 다시 추구해야 하는 이중적인 모순을 이해하는 것. 그러한 근대를 "학문적으로 필사적으로 밝혀 보라는 것이 남북이 인문·사회학도에게 국가적 요청사항으로 강제했던 것"(693쪽, <내가 읽고 만난 일본>(그린비 펴냄))이라고, 김윤식은 회상했다.

▲ <내가 읽고 만난 일본>(김윤식 지음, 그린비 펴냄). ⓒ그린비
그가 그러한 시대적 요청을 감지하고 모종의 행동에 착수한 것은 1970년의 일이었다. 현해탄을 건너 일본으로 향한 것이다. '우리'에게는 없는 근대의 숲, '우리'에게 근대를 이식하면서 동시에 '자발적'으로 성장하고 있던 맹아를 짓밟은 일본에 가서, 해방 이후까지도 결국은 '우리'에게 지대한 영향을 준 그들의 근대를 보고 배우는 것. <내가 읽고 만난 일본>은 바로 그러한 문제의식을 품고, 근대라는 숲을 보기 위해 일본이라는 숲으로 뛰어들어갔던 한 젊은 연구자의 심정을, 수십 년이 지난 후 스스로 곱씹어보는 그런 책이다.

김윤식은 1970년과 1980년 두 차례에 걸쳐 일본을 향했다. 첫 번째 일본에 갔을 때 그는 도서관에서 하염없이 읽고 또 읽으며 일본에 '근대'를 형성해나간 고바야시 히데오와 에토 준 등을 탐독한다. 하지만 고국이 근대 앞에서 처하게 된 모순적 상황을 돌파해나갈 힘을 확보하지는 못한 채 그는 귀국했다. 스스로의 표현에 따르자면, "<한국근대문예비평사연구>를 간행했고, 그 연장선상에서 동화와 같은 루카치 흉내를 낸 문예비평의 현장에서 동분서주해 마지않았다."(559쪽, 같은 책)

하여 "5월의 광주까지 보아"버린 후, "군화로 무장된 현실체제는 미동도 하지 않"(같은 곳)는 상황 속에서, 김윤식은 두 번째 일본행을 단행한다. 요컨대 그에게 일본에 가는 것, 가서 '우리'가 직접 만들지도 경험하지도 못한 근대의 흔적을 주워오는 것, 그리하여 역시 일본에 세 차례나 건너갔지만 본인의 '고아의식'에 함몰되어버린 채 역사의 급류에 속절없이 휩쓸려버린 천재인 춘원 이광수를 이해하는 것은 젊은 김윤식에게 필생의 과업이 된 것이다.

3.

<내가 읽고 만난 일본>은 그런 의미에서 <이광수와 그의 시대>(솔출판사 펴냄)의 저자 본인이 직접 쓴 기나긴 프리퀄이라고 할 수 있다. 굳이 요즘 표현을 빌려오자면 '김윤식 비긴스'라고 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물론 그 이전에도 학계에서의 입지가 굳건하였지만, 우리가 아는 김윤식을 '그' 김윤식으로 만들어준 저작을 단 하나만 꼽자면 역시 <이광수와 그의 시대>일 것이기 때문이다. 요컨대 <내가 읽고 만난 일본>은 근대의 이중모순에 사로잡힌 채 군사독재에 신음하는 조국을 바라보며 괴로워하던 젊은 학자가, 두 차례의 일본 방문을 거쳐 획기적인 작업물을 완성해냄으로써 스스로 왕좌에 오르는 장면에서 마무리되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1981년 12월 29일 귀국한 김윤식은 이듬해 정초부터 원고를 쓰기 시작했다. 아침 8시부터 12시까지 매일 원고지 20매씩. 그가 일본에서 찾아내고 복사하고 번역한 수많은 자료들도 국내에 최초로 소개되었다. 가령 '조선의 천재'인 이광수가 최초로 쓴 소설은 일본어로 된 '사랑인가'였다는 것, 그것이 김윤식이 말하는바 이광수의 '고아의식'을 드러내어 보여주는 또 하나의 증거가 된다는 것 등, 철저하고 집요하게 수집된 자료와 증거 앞에서 감히 반론을 제기하는 일은 매우 어려웠을 것이다.

애초에 이광수의 시대는 '자료'라고 할만한 것이 많이 남아있기도 어려운 시절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윤식은 최선을 다해 최대한의 자료를 독자들에게 제공했다. "어떤 점에서는 독자에게 판단을 맡길 수 있는 이점이 있었고, 또한 다음 연구자를 위한 조금의 배려를 겸한 것이기는 했지만, 그 때문에 글의 전체적인 균형이 흔들리고 논리전개의 일관성이 빈약해진 것도 사실로 인정된다"(757쪽)고 말하면서도, 김윤식은 다음과 같은 결론에 도달한다.

그것은 불가피한 일이 아니었겠는가. 이광수라는 인물과 그가 살았던 시대 자체가 매우 허술하고, 수미일관하지 못하며, 군데군데 금이 갔고, 한마디로 비합리적인 것 또는 '착란의 논리', '밤의 논리'에 속했던 것이 아니었던가. 그러기에 나의 이 글의 문체라든가 글 전체의 모양이 허술한 것은 이광수와 그가 살았던 시대에 오히려 상응하는 정직성일지도 모른다. 다시 말해 춘원이 살았던 시대는 망국에서 해방까지 이르는 기구한 역사의 '괄호 속'이 아니었던가. (같은 곳)

4.

'이광수의 시대'를 '나의 시대'와 구분하고, 그 시대의 허술함 등을 지적하는 태도는 결과적으로 양자를 확연하게 구분 짓고, 비가역적인 것으로 만들고자 하는 의지의 소산이다. 이광수의 시대에는 '밤의 논리'가 지배했다고, 이광수의 시대에는 역사와 그것을 바라보는 지식인들의 시선이 수미일관하지 못했다고, 이광수는 그의 시대 속에서 고아의식을 극복하기 위해 아버지를 찾아 헤매다가 결국 가짜 아버지인 대일본제국 앞에 무릎을 꿇었지만, 저 멀리서 해방의 동녘이 밝아오는 것을 전혀 알지 못했다고, 김윤식은 수많은 자료를 통해 강조하고 반복하고 또 곱씹었다.

<이광수와 그의 시대>를 관통하는 주제의식 중 하나가 바로 이 '단절에의 의지'이다. 그것을 우리는 개정증보판에서 추가된 논문인 '탄생 1백주년 속의 이광수 문학'에서 아주 명시적인 형태로 확인할 수 있다. "나는 오 년에 걸쳐 이 연재를 마쳤는데, 이광수란 '나의 시대'와 무관하다는 시각이 이 제목 속에 함의되어 있었다"(470쪽, <이광수와 그의 시대 2>)고 김윤식은 말한다.

이광수가 '나의 시대'와는 무관하다는 생각을 내가 품게 된 것은, 한 문인이나 사상가란 자기 시대의 소명감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매우 소박한 이유에서이다. 그가 '그의 시대'를 살았다고 함으로써 그를 한정시킬 필요가 있었는데, 나와의 거리감 확보 없이는 그에 대한 객관화가 불가능하다고 판단한 까닭이다. (같은 곳)

여기서 우리는 한 가지 역설적인 상황을 목격하게 된다.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김윤식은 이광수가 경험한 '일본을 통한 근대'의 체험을 고스란히 반복하면서, 이광수의 시점에 직접 뛰어들어가서 일본을 바라보고 또 극복하고자 했다. 그러나 동시에 김윤식은 그러한 경험을 글로 풀어내는 과정에서, 구태여 힘주어가며 이광수와의 거리감을 확보함으로써 객관화하고자 애를 썼다.

그 이유를 이해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김윤식에게는 '식민지 근대화론'을 극복하고 '근대화 맹아론'을 주창해야 할 거대한 역사적 사명이 있었기 때문이다. 조선 민족을 '일본식'으로 개조해야 한다고 믿었던, 즉 조선 내부에는 '근대'라는 이상향이 없고 그것은 다만 일본을 통해 수입될 수 있을 뿐이라고 생각했던 이광수와 달리, 김윤식은 조선 내부에 근대성의 씨앗이 이미 잠재되어 있었지만 그것이 채 싹트기도 전에 외세에 의해 짓밟히고 말았다는 입장을 취했다.

그것은 자연인 김윤식이라는 한 개인의 학문적 주장이 아니었다. 일제의 식민통치를 스스로 이겨내지 못하고 미국에 의해 해방되었다는 자의식에 짓눌린 채, 군사독재를 거치며 군국주의적으로 재흡수되고 있는 일본 정신에 대응해야 한다는 시대적 소명에 더욱 가까운 것이었다.

5.

그러므로 김윤식에게, 이광수의 시대는 김윤식의 시대와 완전히 다른 것이어야만 했다. 김윤식은 이광수를 끝도 없이 몰아붙인다. 고아의식을 평생 극복하지 못한 사람. 자기중심적 사고에서 벗어날 수 없었고, 지적으로도 그리 괄목할만한 성취를 보이지 못한 일본 유학생. 일본인들이 서양의 것을 베껴놓은 도쿄를 보고 그것이 세상의 전부인 줄 알았던 우물 안 개구리. 그래놓고도 본인의 콤플렉스를 극복하지 못해 결국 완벽한 황국신민이 되는 것이 조선을 위하는 길이라고 주장하기까지 한 '조선의 3대 천재'.

▲ <이광수와 그의 시대>(김윤식 지음, 솔출판사 펴냄). ⓒ솔출판사
그러나 <이광수와 그의 시대>가 나온 지 20년도 더 지난 지금의 우리는, 이제 물어볼 수 있다. 과연 이광수의 시대와 김윤식의 시대는 그렇게 어마어마하고 본질적인 차이를 지니고 있는가? 일본에서 배워온 얄팍한 지식으로 이광수가 조선에서 선생 노릇을 하였던 것과,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국내 학술서의 대다수가 일본의 것을 거의 고스란히 베끼다시피 하던 그 지적 종속성에는 과연 얼마나 유의미한 차이가 존재하는가? 김수영은 자신의 시 '엔카운터 지(誌)'에서 영국의 잡지 를 "나의 모든 프라이드"이자 "재산"이며 "연장"이라고 서슴없이 말했다. 해방 이후 지금까지 달성하지 못한 근대적 주체의 문제를 오직 이광수에게만 덮어씌움으로써, 김윤식은 그를 (르네 지라르 식의) '희생양'으로 삼고 있는 것은 아닌가?

일본이 직접 조선을 통치하던 시대와, 일본식 혹은 미국식 군사 교육을 통해 그나마 '근대적 계획'을 수립할 능력을 갖게 된 군인들에 의해 해방된 조국이 통치되던 시대는, 과연 어떻게 다른가? 그 두 시대가 같다고 말할 생각은 전혀 없지만, 이광수가 살았던 '그의 시대'와 김윤식이 살았던 '나의 시대'를 칼같이 나누는 일은, 젊은 김윤식의 호언장담과는 달리, 그 자체가 하나의 거대한 지적 과제인 것처럼 보인다. 적어도 내게는 그렇다.

아직까지도 김윤식이 자신의 최고 역작으로 꼽는 <이광수와 그의 시대>에서, 논리 전개가 무리하다고 느껴지거나 평전의 대상이 되는 인물에게 지나치게 가혹하다고 여겨질 수 있는 대목은, 거의 모두 바로 이런 '타자화'의 기제를 바탕에 깔고 있다. 일본어로 생각하고 글을 썼던 기성세대와 날카롭게 대립하는 4.19 세대의 존재 증명이 언뜻언뜻 엿보인다. 비록 나도 일본에서 근대의 신세계를 보았지만 이광수 당신과는 다르다는 자의식이, <이광수와 그의 시대>를 김윤식의 시대에 철저히 귀속되는 무언가로 만든다.

6.

격주로 연재될 이 칼럼의 제호는 '논객시대'이다. 논객들의 시대. 물론 논객이라는 단어는 오래 전부터 사용되었고 그때마다 미묘하게 다른 울림을 지녔지만, 여기서는 1990년대 말부터 2010년대 초인 현재에 이르기까지, 이른바 '사회과학'이 몰락하고 난 후 그 담론적 공백을 메꾸기 위해 주로 언론 매체의 지면을 이용해 자신들의 논지를 펼쳐온 사람들을 대상으로 삼는다. 진중권, 강준만, 유시민, 박노자, 고종석, 홍세화, 김규항, 김어준, 우석훈 등의 이름을 우리는 꼽아볼 수 있다. 즉 내가 '논객'이라는 단어를 꺼냈을 때 당신이 떠올릴법한 그런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를 하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김윤식과 달리 나는 '논객들의 시대'를 '나의 시대'와 날카롭게 대립시킬 생각이 없다. 현재를 살아가는 수많은 청년들처럼, 나 역시 그들의 글을 읽으며 머리가 굵어졌고, 아직도 그 논객들의 영향력은 죽지 않았다. 그들 중 일부는 나와 다른 독자들을 크게 실망시켰고, 다른 이들 또한 예전의 그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지는 못하다. 하지만 그들은 여전히 살아있을 뿐 아니라, 납북 후 생사가 확인되지 않아 김윤식의 세계에 더는 영향을 미칠 수 없었던 이광수와 달리,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계의 일원이다.

요컨대 이른바 '대 활약기'는 지났어도 그들은 여전히 현재의 인물들이다. 그러므로 '논객시대'는 곧 나의 시대이기도 할 것이며, 동시에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의 시대이기도 하다. 따라서 이런 종류의 작업을 진행한다는 것은, 즉각적인 비판과 항의 뿐 아니라, 이른바 '인간적' 차원에서 그리 긍정적이지 않은 결과를 초래할 위험을 끌어안는 것이기도 하다. 마치 <인물과 사상>을 시작할 때의 강준만이 그러하였듯이, 실명비판은 또 다른 실명비판을 불러오고, 큰 힘에는 큰 책임이 따르는 법이니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 연재의 기획을 내놓았고, 주변의 우려와 근심을 뒤로한 채 강행하기로 했다. 왜냐하면 누군가는 해야 할 일이기 때문이다. 어렸을 때부터 솔선수범하는 습관이 몸에 배어있는 터라, 누군가 해야 한다면 내가 하자, 기왕 할 거라면 더 잘 하자고 마음을 다잡고 있다. 하지만 제대로 된 설명이 있다 하더라도 오해를 불러올 여지가 큰 작업이니만큼, 최선을 다해 목적과 동기를 독자들에게 먼저 납득시킬 필요성은 충분하다고 하겠다.

7.

대체 그 시절동안 우리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던 것일까? 어째서 강준만은 그의 전작들에 비해 현저히 힘이 빠진 상태로 <안철수의 힘>(인물과사상사 펴냄)을 쓰게 되었고, 진중권은 필리핀에 다녀오더니 변희재와 '사망유희' 토론을 했으며, 고종석은 붓을 꺾고 트위터에 매진하게 되었을까?

특정한 부류의 지식인들은 '잠수함의 토끼', 혹은 '탄광 속의 카나리아'로 비유되곤 한다. 잠수함의, 탄광의, 산소가 부족하면 토끼나 카나리아가 먼저 죽는다. 그 모습을 보면 광부들은 갱도에서 나가고, 잠수함의 함장은 신선한 공기를 얻기 위해 수면 가까운 곳으로 배를 옮길 것이다. 그것이 지식인의 사회적 기능이라고 우리는 배워왔다.

그리고 우리에게는 논객들이 있다. 내가 이 글에서 '우리'라고 호명하는 사람들이라면, 대체로 이름만 듣고도 그들이 어떤 사람들인지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각자의 머릿속에 나름의 방식으로 갈무리된 논객의 모습들이 있을 터이다. 하지만 우리는 그들을 얼마나 알고 있는가? 또 그들은 우리에 대해 얼마나 알고, 깨닫고, 그것을 우리에게 전해주고 있는가? 잠수함의 토끼는 아직도 살아있는가?

논객들의 현재에 대한, 그리고 우리들의 지금에 대한, 두 가지 질문은 하나의 방법으로 응답될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그들은 논객이고, 논객은 어떤 의미에서건 시대 및 대중의 흐름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진중권이 달라졌다면 진중권만 변한 게 아니다. 고종석이 절필을 선언했다면 그 사건을 전후로 더 많은 사람들이 입을 다물었을 것이다. 빠리의 택시운전사 홍세화의 짧은 정치인 생활과, 지식소매상 유시민의 10년은 여러모로 흥미로운 비교 대상이 될 수 있다.

그 논객들이 개별적인 상황 속에서 각자의 판단을 내린 것은 결코 개인적인 차원의 선택에서 머물지 않는다. 시대와 온몸으로 호흡하고 교감하는 사람들이 한 수 한 수 돌을 꽂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우리는 그들의 시대라는 큰 바둑판의 그림을 그려볼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천애고아였던 이광수의 입지전적인 출세를 통해 동학혁명 및 개화의 열풍이라는 그 시대의 단면을 살펴볼 수 있는 것과 같다. 자신이 어떤 면에서건 '고아'라는 인식에서 벗어나지 못해, 결국 누구보다 빠르고 확실하게 황국신민이 되고자 했던 이광수의 선택이 단지 개인적인 일탈과 방황에서 머물지 않는다면, 우리의 시대가 가진 논객들의 선택 또한 마찬가지일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시대를, 즉 우리 자신을 이해하기 위해, 그 논객들을 이해해야 한다.

8.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의문이 생긴다. 그렇다. 그 작업은 꼭 필요한 일이다. 하지만 그걸 꼭 지금 당장 해야 하는가? 이것은 마치 일본강점기가 끝나지도 않았는데 <이광수와 그의 시대>를 쓰는 것과 비슷한 행동이 아닌가? 우리는 우리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지, 그것을 회고적으로 성찰할 수 있고 해야 하는 입장에 처해있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물론 표면상으로 보면 그럴 것이다. 왜냐하면 김윤식은 이광수라는 인물을 통해 개항기부터 한국전쟁 직전까지의 상황을 다루었고, 그것은 그가 원고를 쓰던 당시에 분명히 과거에 속한 일이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이광수와 그의 시대>가 다루고 있는 문제의식, 즉 근대를 성취하면서 동시에 극복해야 하는 주체의 혼란과 갈등, 다시 말해 식민사관의 극복은, 사실상 김윤식이 원고를 쓰던 바로 그 시대의 당면 과제였다.

식민사관을 그렇다면 왜 극복해야 했을까? 지금 우리는 군사독재를 통해 '근대'가 강요되던 당시 지식인들의 복잡한 심경을 다시 한 번 상상해볼 필요가 있다. 4.19 혁명을 통해 이승만을 쫓아냈지만 조국의 지리멸렬한 상황은 결코 나아지지 않았다. 가시적인 변화가 생기고, 사회가 비로소 변화의 동력을 얻기 시작한 것은 쿠데타로 권력을 손에 쥔 박정희 소장이 대통령에 당선된 이후의 일이었다. 이른바 '조국근대화'의 시작이었다.

근대라는 거대한 역사의 목표를 향해 우리가 나아가야 한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었다. 문제는 그 동력이 과연 어디서 오느냐이다. 당시에는 군사정권에 의해, 아무리 싫다고 하더라도 근대화가 이루어지고 있던 상황이었으므로, 그것은 일본의 식민통치에 의해 조선이 근대화되던 풍경과 묘한 대구를 이루는 것이기도 했다. 요컨대 식민사관과 맹아론의 갈등은, '우리'가 제대로 시동이 걸리지 못했지만 아무튼 역사의 기관차 노릇을 할 수 있었느냐 아니면 단지 끌려다니는 객차에 지나지 않느냐의 문제인 것이다. 그것은 과거의 일이면서 동시에 매우 현재적인 갈등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어떠한가? 1997년의 정권교체 이후, 군사독재 타도와 대통령 직선제 쟁취로 이어지는 형식적 민주주의의 도입은 실질적으로도 완성되었다. 이제 한국은 정부가 바뀐다고 해서 국가가 바뀌지는 않는다. 국민적 합의가 모여 개헌론이 수면 위로 떠오르고, 그래서 제6공화국 체제가 흔들릴 가능성도 지금으로서는 그리 크지 않다.

군사독재에서 민주화로, 민주화에서 정권교체로 이어졌던 정치적 역동성은 그 결과 과열된 엔진처럼 공회전하고 있다. 동시에 찾아온 IMF 외환위기는 일본의 것을 모방하여 창조해낸 기존의 경제 구도를 허물어뜨렸고, 그리하여 우리는 청소원부터 사장까지 모두가 하나의 기업을 구성하는 일원으로 대우받던 시절의 이야기를 아득한 꿈처럼 받아들이게 되었다. 정돈된 유교 자본주의의 외피마저도 이제는 유지되기 힘든 것처럼 보인다.

이렇게 망가진 현실 속에서 극소수의 '위너'를 제외한 거의 모든 사람들은 그저 관성적으로 살아가고 관성적으로 생각하며 관성적으로 개탄할 뿐이다. 2012년 대선 과정과 결과가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다시피, 논객시대를 지배하던 논리는 더이상 통용되지 않지만, 그것을 대체할만한 새로운 무언가가 나타나지도 않았다. 가까운 과거와 먼 과거가 충돌해서 그 중 무언가가 어떤 식으로건 승리를 거두었을 뿐이다.

그러므로 우리에게는, 군사독재시절의 문제를 논하기 위해 일본강점기의 이광수를 이야기할 수 있었던 그만큼의 여유도 없다. 세상이 어떤 식으로건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면 그런 회고적인 고찰을 할 수도 있겠지만, 오직 SNS에서만 뜨거웠던, 지리멸렬하기 짝이 없었던 이번 대선 과정과 결과가 적나라하게 보여주듯이, 우리는 이미 죽어버렸고 서서히 식어가는 사회 속에서 간신히 숨만 쉬면서 살아가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과거에 빗대어 오늘의 문제를 말하겠다는 것은, 적어도 나로서는 상상할 수조차 없는 정신적 사치에 지나지 않는다.

바로 이런 비관적 상황으로부터 어떻게든 탈출해야 한다. 그것이 내가 이런 무모한 기획을 하게 된 이유라고 말할 수 있다. 어떤 과거와 또 다른 과거가 얽히고설켜 있을 뿐인, 죽어버린 현재를 되살려내는 것. 현재사를 다시 현재화하는 것. 논객시대에 현재로서의 정당한 위상을 부여하고, 바로 그 시대의 산물이자 그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한 사람으로서 목소리를 냄으로써, 자신이 살아가는 시대에 개입하는 발언의 형식을 회복하는 것. 현재사를 재현재화하는 것.

오늘을 사는 사람으로서, 오늘의 역사를 말하면서 동시에 개입하고 참여하는 것, 그것이 이 연재의 목표다.

9.

이 시점에서 이 글을 시작하면서 던졌던 질문을 상기해보자. 나무가 아니라 숲을 보기 위해서 우리는 어디에 가 있어야 하는가? 김윤식은 이광수의 시대라는 숲을 보기 위해, 자신이 서 있는 그곳은 '이광수의 시대'가 아니라 '김윤식의 시대'임을 강조했다. 이광수의 시대의 바깥에 서면 그것을 전체적으로 조망할 수 있을 것이라고, 대신 자기 자신만은 이광수가 다녔던 학교를 방문하고 아직 국내에 소개되지 않았던 자료를 확보하고 제시하겠노라고, 그런 연구 방법론을 택했던 것이다.

그러나 논객시대의 바깥은 없다. 적어도 지금 이 시점에서 한국어를 사용하는 우리에게는 그렇다. 결국 이 숲을 어떤 총체성을 지닌 숲으로 인식하기 위해서는 바로 지금 여기에 극단적으로 충실해야 한다.

짐짓 자신만은 이 현실에서 벗어나 '객관적 제3자'가 될 수 있을 것이라고 가정한 후, 가장무도회를 열어 스스로를 그럴싸하게 보이게 만들기 위한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을 것이다. 어떤 '이론가'의 풍선에 매달려 허공에 붕 떠올라볼 수도 있고, 독자 대중이 쉽사리 접할 수 없는 '뒷이야기'들을 수집해서 일종의 '정보 스트립 쇼'를 벌여볼 수도 있다. 전자를 택하건 후자를 택하건 독자로서는 뭔가 모르던 이야기를 알게 되었으니 손해 보는 느낌은 없을 것이며, 저자의 입장에서는 최대한 검증하기 어려운 '소스'를 동원함으로써 단단한 울타리를 치게 된다.

나는 그 두 가지 길을 모두 피할 것이다. 앞으로 이어질 내용은, 지금까지 이 지면에 올라온 모든 글처럼, 결국 서평의 범주에 속한다. 비록 절판되었더라도 가까운 도서관에 가면 구할 수 있는 책들만을 소재로 삼는다. 설령 알고 있다고 하더라도 대상이 되는 논객에 대한 개인적인 정보나 출간되지 않은 텍스트 등은 모두 배제한 채, 독자들이 직접 읽고 확인할 수 있는 논의의 지평에서 개별적인 논객들의 생각을 검토한다. 동시대를 살아온 독자들이 스스로 확인 가능한 정보를 통해 지적 참여를 할 수 있게 하는 것이, 이 연재에서 택할 '현재사의 재현재화'의 방법론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유행이 지났고, '맛'이 갔고, 망가졌고, 예전의 총기를 잃었다고, 우리는 그들을 쉽게 비아냥거릴 수 있다. 어쩌면 사실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우리가 우리의 논객들을 다시 읽지 않는다면, 우리는 지금 우리가 얼마나 깊은 바다 속에 들어와 있는지, 우리에게 신선한 공기가 얼마나 절실한지 모른 채, 다 함께 질식해버릴 수도 있다. 예상되는 파국 앞에서, 나는 용기를 내어 이 연재를 시작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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