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낭떠러지로 폭주하는 대한민국, 침묵하는 언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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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낭떠러지로 폭주하는 대한민국, 침묵하는 언론 [협동조합 프레시안] 이런 언론 하나쯤 있었으면
어느 곳이나 절박한 곳에 가면 '정치'와 '언론' 두 가지가 빠지지 않는다. 그리고 언론이라고 하면 '독립'이라는 단어를 빼 놓을 수 없다.

2004년 1월 전라북도 부안 얘기부터 풀어 보겠다. 당시에 부안에서는 핵폐기물 처리장 유치 문제로 심각한 충돌과 갈등이 벌어지고 있었다. 인구 7만 명도 안 되는 지역에서 구속자, 부상자가 속출하고 수천 명의 경찰이 상주를 하던 상황이었다. 이 당시에 부안 주민들을 만나면 모두들 '우리 얘기를 제대로 들어주는 언론이 없다'라는 얘기를 했다. 소수의 언론을 제외하면, 지역 주민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언론이 없다는 것이었다.

오히려 왜곡 보도로 주민들을 '지역 이기주의'로 몰아붙이는 언론도 있었다. 그런 언론 보도를 본 주민들은 '그렇게 핵폐기물 처리장이 좋으면 서울에다 지을 것이지, 왜 부안에다 짓느냐'고 흥분하며 말을 잇지 못했다. 지역 언론들의 문제도 심각했다. 광고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전북 지역 언론들은 정부와 전라북도, 한국수력원자력의 입노릇을 했다. 그래서 부안 주민들은 자신들의 목소리를 담아낼 수 있는 지역 언론을 직접 만들었다. 십시일반으로 돈을 모아 <부안 독립 신문>이라는 지역 신문을 창간한 것이다.

이처럼 우리 사회에서는 독립된 언론에 대한 요구가 끊임없이 있었다. 민주화 이후에 <한겨레>가 창간하고, <경향신문>이 독립 언론으로 자리매김했으며, <오마이뉴스>, <프레시안>같은 인터넷 언론이 만들어진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일 것이다. 지역에서도 <옥천신문>, <부안 독립 신문>과 같은 독립 언론들이 여럿 만들어지기도 했다.

그러나 언론이 '독립'된다는 것이 '중립'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사회가 중요한 변화를 맞아야 하는 시기에는 사회 변화의 방향을 적극적으로 고민하고 뚜렷한 자기 목소리를 내는 언론이 필요하다. '독립'은 자본과 권력으로부터 독립하자는 것이지, 색깔 없는 무색무취한 언론이 되자는 건 아닐 것이다.

언론이 독립적이되, 중립적일 필요는 없다는 것은 마하트마 간디도 잘 보여준다. 간디는 언론의 중요성을 잘 알고 있었고, 스스로 언론을 만들기도 했다. 1904년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인도인에 대한 차별을 없애기 위해 노력하고 있던 간디는 <인디언 오피니언>이라는 신문을 내기 시작한다. 그는 감옥에 있을 때를 제외하고는 10년 동안 매호에 직접 논설을 실었다. <인디언 오피니언>은 간디가 이끌고 있던 사티아그라하(Satyagraha, 진리를 지킨다, 비폭력 저항) 운동을 알리는 중요한 매체였다.

간디가 자서전에서 "사티아그라하 운동은 <인디언 오피니언>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라고 회고했을 정도로 이 신문의 역할은 컸다. 사람들은 이 신문을 통해 남아프리카의 인도인들에게 행해지던 차별의 실태를 알 수 있었고, 사티아그라하 운동에 대해 믿을 만한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그래서 재정적인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간디는 <인디언 오피니언>을 계속 발행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그렇다면, 2013년 한국의 상황에서는 어떤 언론이 필요할까?

지금 우리 사회를 보면, '나쁜 언론'이나 '별로 안 좋은 언론'들이 더 많긴 하지만, 좋은 언론도 있다. '좋다'는 기준은 사람마다 다를 수 있겠지만, 진실을 추구하고 자본과 권력으로부터의 독립을 지향하는 언론을 '좋은 언론'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개개인으로 보더라도, 좋은 언론인들이 있다.

그렇지만 뭔가 아쉽다. 매일 매일 기사를 읽다보면 뭔가 허전한 대목이 있다. 왜 그럴까?

아마 '좋은 언론'을 넘어서서, '절박함을 가지고 지금의 시대적 문제에 대한 대안을 찾으려는 언론'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있어서 그런 것 같다.

부안 주민들이 자신들의 목소리를 절박하게 알리고 싶었던 것처럼, 마하트마 간디가 인도인에 대한 차별의 실태와 비폭력 저항 운동의 필요성을 절박하게 알리고 싶었던 것처럼, 지금의 시대에도 절박한 얘기들이 있다. 이것은 '이런 입장도 있고, 저런 입장도 있고'의 문제가 아니다.

당장 10년, 20년 후의 세상이 어떨지 앞이 안 보인다. 생태적 측면에서 심각한 위기가 다가오고 있다. 최근 측정 결과에 따르면, 지구의 이산화탄소 농도는 400피피엠(ppm)을 넘어섰다. 많은 과학자들이 마지노선이라고 하는 450피피엠까지 얼마 안 남았다. 대재앙이 멀지 않은 것이다.

이제 기후 변화는 더 이상 북극곰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의 문제로 되고 있다. 기후 변화로 인한 가뭄과 홍수, 사막화, 해수면 상승은 전 세계의 농업에 타격을 줄 것이고, 그것은 세계적인 식량 불안정으로 나타날 것이다. 식량 자급률이 22.6퍼센트에 불과한 대한민국은 일찍이 겪지 못한 식량 위기를 겪게 될 수도 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이를 자신의 일로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뭔가를 할 수 있는 시간'을 잃어가고 있다. 자금 자기 자식을 좋은 대학에 보내기 위해 노심초사하는 부모들에게 '앞으로 10년, 20년 후 당신 자식이 먹을 것을 걱정해야 할 수 있다'고 말하는 게 과장이기만 할까?

ⓒAP=뉴시스

핵발전소 문제도 마찬가지이다. 우리나라 언론들은 후쿠시마 사고 이후에 핵발전소에 대해 많이 보도를 한다. 그러나 '이런 사고가 났는데, 한쪽에서는 위험하다고 하고, 다른 쪽에서는 괜찮다고 한다'는 식의 기사가 많다. 그러나 사고가 나면 한 사회 공동체가 붕괴하게 되는 게 핵발전소다. 후쿠시마 사고로 인해 15만 명이 집을 잃고 떠돌고 있고, 121조 원을 투입해도 복구가 불가능한데, 이게 남의 일이기만 할까?

23개의 핵발전소가 가동 중에 있고 42개까지 더 짓겠다는 대한민국은 핵사고 위험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이런 상황에서 중립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핵발전소를 폐쇄시키겠다는 각오로 진실을 캐고 핵발전소 문제에 매달리는 그런 언론이 필요한 게 아닐까?

사회 불평등이나 행복과 관련된 우리 사회의 각종 지표도 경고음을 내고 있다. 지난 2월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이 발표한 자료를 보고 충격을 받은 적이 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 노인 자살률은 큰 변화가 없는데, 대한민국의 노인 자살률은 10년 동안 2.3배가 늘어났다는 통계를 보았기 때문이다. 청소년 자살률도 47퍼센트가 올랐다고 한다. 이런 사회가 정상이라고 할 수는 없다. 심각한 사회적 불평등, 과도한 경쟁이 많은 사람들을 불행으로 몰아넣고 있다.

언론은 때때로 이런 현상을 선정적으로 보도한다. 그러나 그런다고 해서 바뀌는 게 있는가? 언론에게는 기사거리일지 모르지만, 사람이 죽고 사는 문제이다. 이런 문제는 사회 시스템이 근본적으로 바뀌지 않으면 안 되는 문제이다. '경제 성장을 해야 하고, 그것을 위해 약자는 희생되어야 하고, 경쟁을 시켜야 한다'는 논리 구조에서 벗어나지 않는 이상 답이 없다.

수도권에 많은 인구가 몰려 있는 상태에서는 사람들이 행복하게 살 수도 없고, 이런 구조는 에너지, 환경 등의 측면을 고려할 때에 지속 가능하지도 않다. '경제 성장에 대한 집착을 버려야 한다', '서울 중심의 사회로는 희망이 없다'는 얘기를 과감하게 하는 언론은 불가능할까? 스스로 여기에서부터 벗어나려고 노력하는 언론은 불가능할까?

이런 생각을 하던 중에 <프레시안>이 협동조합 언론으로의 전환을 선언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전환을 통해 추구하려고 하는 가치가 '생명, 평화, 평등, 협동'이라고 한다. 단비처럼 반가운 소식이다.

물론 협동조합은 형식에 불과하다. 중요한 것은 간디의 사티아그라하 운동을 <인디언 오피니언>이 담아냈듯이, <프레시안>이 지금의 시대적 가치를 담아낼 수 있느냐일 것이다.

지금 필요한 언론은 중립적인 언론이 아니다. 뚜렷한 자기 관점을 가지고 우리 사회를 바라보고, 우리 사회가 그런 방향으로 변할 수 있도록 현실을 집요하게 파헤치며, 곳곳에서 만들어지고 있는 대안적인 사례들을 소개하고 공유하는 언론이 필요하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본과 권력으로부터의 독립이 필요하기에 '협동조합 프레시안'으로 전환하는 것은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이것이 내가 '협동조합 프레시안'에 대해 가지는 기대이다. 물론 세상 모든 일이 그렇듯이 이런 기대가 실현된다는 보장은 없다. 그렇지만, <프레시안>의 새로운 시도에 대해 방관하거나 비평하기보다는 참여하는 쪽을 택하려고 한다. 그래서 나는 '협동조합 프레시안'의 조합원이 되려고 한다.

물론 쉽지 않은 길일 것이다. 처음 시도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세상의 중요한 변화는 늘 새로운 시도를 하는 사람들에 의해 이루어져 왔다. 그리고 그런 시도에 힘을 보태는 게 같은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으로서 할 수 있는 작은 실천이라고 생각한다. 이것은 남들이 불가능할 것이라고 하던 녹색당 창당 과정에 참여하면서 나 스스로 절실하게 느낀 것이기도 하다.

'생명, 평화, 평등, 협동'의 가치를 추구하는 언론. 이것은 남을 위한 것이 아니라, 나와 내 가족, 내 이웃의 행복을 위해 그리고 우리 사회의 지속 가능성을 위해 필요한 것이다. 낭떠러지를 향해 달려가는 폭주 기관차를 타고 있으면서, 아무 일도 하지 않는다는 것은 너무나 어리석고 불행한 일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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