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이켜 보면 뜨거운 3개월이었다. 올해 초 프레시안은 주주, 임원, 직원 심지어 몇몇 필자도 함께 뜨거운 토론을 벌였다. 연말에 한 대기업이 거액의 투자 제안을 했고, 그것을 수용할지 말지를 놓고서 갑론을박을 벌인 것이다. "'좋은 언론을 키우겠다'는 의도 외에 다른 목적은 없으며 편집권 독립도 보장하겠다"는 제안이 솔깃했다.
하지만 프레시안 구성원은 결국 이 제안을 거절했다. 토론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프레시안의 진로를 놓고서 토론이 벌어졌다. 지난 12년간 이미 "공공재"가 된 프레시안을 말 그대로 "사회에 돌리는" 방안으로 협동조합으로의 전환이 조심스럽게 제기되었다. 아무도 가지 않은 길, 한편으로는 설렜지만 또 한편으로는 두려웠다.
바로 그 때 김종철 <녹색평론> 발행인(프레시안 고문)이 협동조합 전환을 강력하게 권유했다. 김종철 발행인은 "기존 정치 경제 사회 문화의 질서로는 더 이상 활로가 없다는 걸 깨달은 많은 사람이 새로운 길을 모색하고 있다"며 "언론이 이런 변화를 지켜보고 전달하는 것을 넘어서 자신이 직접 '변화의 주체'가 되는 것은 그 자체로 의미가 있다"고 격려했다.
어려운 한걸음을 내디딘 지금, 다시 김종철 발행인을 만났다. 지난 17일 서울 종로구 사직동 녹색평론사에서 진행된 인터뷰를 2회에 걸쳐 나눠서 싣는다. <편집자>
● 김종철 <녹색평론> 발행인을 만나다 ① : "이명박 때 남대문이 불타더니, 이번에는 윤창중이…" |
작은 언론 네트워크가 대안이다
프레시안 : 협동조합의 길을 가는 프레시안을 놓고서 소수파 비주류의 길로 노선을 확실히 정한 것이냐, 이런 시각도 있습니다.
김종철 : 언제는 프레시안이 다수파 주류였습니까? (웃음) 하지만 프레시안이 소수파 비주류로서의 역할에 충실하되, 거대한 전쟁의 한복판에서 싸운다는 긴장된 자각은 놓쳐서는 안 되겠죠. 섬처럼 작은 고립된 공간을 만들어놓고 자족해서는 언론이라고 할 수도 없을 테니까요.
그렇다면, 협동조합 프레시안이 어떻게 거대한 주류 언론과 대적할 수 있을까요? '작은 언론(small media)'끼리의 연대가 답이라고 생각합니다. 프레시안 자체는 작은 독립 언론으로서 자립적인 힘을 기르면서, 동시에 비슷한 성향의 작은 언론들과 함께 네트워크를 구축하는 거죠.
<녹색평론>과 같은 잡지도 그런 작은 언론일 테고, 앞으로 프레시안처럼 전국 곳곳에서 나타날 다양한 협동조합 언론들도 그런 작은 언론일 거예요. 기왕에 주식회사 형태이지만, 공공성을 표방하고 있는 매체들도 있고요. 주식회사라 해도 소규모라면 별로 나쁠 게 없어요. 또 특정 분야에서 뛰어난 실력을 갖춘 1인 미디어들도 있습니다. 이런 작은 언론들이 모여서 협동조합의 협동조합, 즉 협동조합 연합체를 만들 수도 있겠죠.
이렇게 전국 곳곳에 뿌리를 내린 작은 언론들의 연합체라면, 개별적으로는 미약하지만 결집했을 때의 힘은 엄청날 것입니다. 안타깝지만, 지금까지는 어느 진보 언론도 그런 연합체의 형성에 관심을 갖지 않았던 것 같아요. 앞으로 프레시안이 그 일에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다면, 우리나라 진보 언론의 비중이 크게 강화될 것입니다.
▲ 김종철 <녹색평론> 발행인. ⓒ프레시안(최형락) |
저출산은 '문제'가 아니라 '현실'이다
프레시안 : 그런 말씀을 들으니 힘이 납니다. 하지만 프레시안이 협동조합 언론으로 전환하고 나서 다른 모습을 보이지 못하면 이 모든 게 말짱 헛일이라고 생각합니다. 특히 프레시안도 시대의 변화를 예민하게 포착하는 모습을 보이지 못한 것 같아서 부끄럽습니다. 쓴 소리도 부탁드립니다.
김종철 : 솔직히 말하면, 요즘 프레시안에는 읽을 만한 글이 예전보다 줄었어요. 물론 남재희, 정세현 선생 같은 분들의 인터뷰는 늘 흥미롭습니다. 하지만 젊은 기자들의 기사를 읽고 감탄한 게 언제인지 기억이 가물가물합니다. 분발해야 합니다. 당대의 고통과 번민이 응축된 발로 뛴 젊은 기자의 글이 드문 건 큰 문제죠.
프레시안 : 시대 변화의 흐름 속에서 중요한 '사실'이 무엇인지를 파악할 능력이 모자라니 자꾸 기존 언론이 짜 놓은 프레임을 기웃거리게 됩니다.
김종철 : 우선 자신의 두뇌로 생각하는 습관을 기르면서 현실을 냉정히 파악해야죠. 예를 들어, 인구 문제만 해도 그렇습니다. 지금 출산율 저하 현상에 대해서 다들 걱정을 하고 있지만, 산업 국가에서 인구가 줄어드는 건 필연적입니다. 또 지구 생태계를 고려하면 인구 감소는 바람직한 현상이기도 해요. 그 사실을 인정하지 않고 자꾸 출산 장려 정책을 강구해봤자 쓸데없는 비용과 에너지 낭비예요.
물론 인구가 이대로 계속 감소하면, 인구 증가나 적어도 현재 수준의 인구가 지속될 것을 전제로 하여 설계해 놓은 연금 제도라든지 각종 사회 보장 제도를 위시해서 정치, 경제, 금융, 사회 구조 전체가 큰 타격을 받겠죠. 그렇다면, 지금 시급한 것은 어차피 줄어들 인구를 무리하여 늘리려고 애쓸 것이 아니라 인구 감소 상황에 대하여 지속 가능한 방식으로 대응할 수 있도록 정치, 경제, 금융, 사회 구조를 근본적으로 재편하는 일이죠. 더 이상 성장에 매달리지 않으면서 사회 구성원이 골고루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새로운 사회를 상상할 수 있어야 합니다.
저는 바로 이것이 지금 세계의 진보적 정치 세력에게 주어진 핵심 과제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한국에서는 여전히 '보편적 복지 국가' 타령만 하고 있어요. 갈수록 성장률은 떨어지고, 세금을 부담할 수 있는 인구가 줄어드는데 어떻게 그 복지 재원을 마련하지요?
저성장, 저출산 시대에 대응하여 시민들 자신의 자주적 역량으로 어떻게 복지 사회-복지 국가가 아니라-를 만들지 근본부터 다시 고민해야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지금 협동조합 운동이 활발해지고 있는 것은 매우 바람직한 현상입니다. 협동조합과 같은 자치, 자립을 모토로 하는 사회 운동이 왕성하게 전개되면, 굳이 국가적 차원의 복지 제도가 아니더라도 더불어 인간답게 살 수 있는 길이 열릴 테니까요. 복지 국가보다 복지 사회가 중요하다는 것은 그런 뜻입니다.
<프레시안>과 같은 매체가 이런 토론이 활발해지도록 공론의 장을 마련해야 합니다. 아직 우리나라에서는 이런 거스를 수 없는 시대의 흐름에 대해서 얘기하는 목소리는 크지 않습니다. 언론이 그런 목소리를 잘 포착하고 전달해줘야죠. 소수의 목소리인 만큼 그것을 전달하는 데는 상당한 용기가 필요할지도 몰라요. 성장의 도그마에 갇혀서 시대의 흐름을 제대로 읽지 못하는 전문가, 학자들의 논리가 아직도 대세를 이루고 있는 현실이니까요.
프레시안 : 그런 목소리에 독자들이 귀를 기울일 준비가 되어 있는지도 의문입니다.
김종철 : 한국의 대다수 보통 사람들, 특히 도시 중산층은 현재와 같은 정치, 경제, 사회 구조가 그대로 지속되길 원합니다. 그래서 아무리 거품 경제라 할지라도 거품이 터지면 망할 것이라고 굉장히 두려워하죠. 별거 아니지만 이 정도나마 안락한 생활을 누리게 된 게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이런 생활의 중단이나 변경은 상상도 하기 싫은 거죠. 그러나 다들 이 상황이 장기적으로 지속될 리 없는 사상누각이라는 것을 모르지는 않죠. 그렇지만 가는 데까지는 가보자 하는 게 보통 사람의 심리입니다. 그러니까 아무리 터무니없는 거품이 낀 아파트 가격일지언정 당장 가격이 내려간다든지 하는 사태는 참을 수 없는 일이죠.
지난 대선 때 새누리당이 승리한 것도 결국은 대중의 그런 심리 때문이죠. 그동안의 경험으로 보면, 아무래도 민주당보다는 새누리당 쪽이 이 방면에서는 더 유능한 것으로 대중이 인식하고 있으니까요. 박근혜 정부가 들어선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선거 때 공약했던 '경제 민주화'는 어느 새 공염불이 되고, 부동산을 포함해서 다시 거품 경제를 일으켜보려고 규제 완화, 철도 민영화 따위를 정책이라고 구상하는 것을 보세요.
그런데 이런 식으로 거품에 의지하는 엉터리 경제가 얼마나 더 갈까요? 조만간 곪아 터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때 우왕좌왕하다 완전히 파멸하지 않으려면 누군가는 준비를 하고 있어야 하지 않겠어요? <프레시안>을 비롯해서 책임 있는 언론이 제 역할을 다하고, 그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수천 명, 수만 명 더 나아가 수십만 명의 정신적 공동체가 바로 그런 역할을 해야죠.
변화의 장애물, 재벌 기업
프레시안 : 아까 대안적인 정치, 경제, 사회 구조 얘기가 잠깐 나왔습니다. 어떤 방향으로 가야 할까요?
김종철 : 처음부터 완벽한 대안을 내놓기는 무리죠. 하지만 그렇다고 완벽한 대안이 나올 때까지 손 놓고 있어서는 곤란합니다. 이미 부작용이 드러날 대로 드러난 문제를 짚고 그 처방을 마련하는 것부터 시작해야죠. 우선 지금처럼 수출에 의존하는 재벌 기업 중심의 산업 구조가 과연 지속 가능한지 물어야 합니다.
당장 한국의 수출 산업이 언제까지 경쟁력을 유지할 수 있을지도 의문입니다. 지금은 생산 과잉의 시대입니다. 수출 시장은 갈수록 포화 상태죠. 거기다 금융 위기, 기후 변화, 자원 고갈 같은 문제까지 고려하면 지금과 같은 글로벌 무역 시스템은 머지않아 종말을 맞을지도 모릅니다. 재벌 기업의 수출 실적만 바라보고 있다가는 비참한 결말에 봉착할 가능성이 매우 높습니다.
장기적인 전망을 떠나서도, 그동안 실제로 재벌 기업이 국민 경제에 어떤 기여를 해왔는지도 잘 따져볼 필요가 있어요. 재벌 기업이 하청 중소기업을 가혹하게 착취하는 구조를 오랫동안 유지하면서 국민 경제의 균형 발전을 가로막아왔다는 것은 그동안 많이 지적돼 왔죠. 그리고 지금 대기업의 소유 구조를 보면, 대부분 외국인 주주들이 절반 이상입니다. 그러니까 엄밀히 말하면, '우리 기업'이라고 말할 수도 없죠. 이익의 절반이 외국의 투기꾼들에게 흘러가도록 되어 있으니까요. 하기는 내국인 주주들이 다수를 점한다 할지라도, 경영 방식이 별로 달라질 가능성은 없습니다. 주주들의 이익을 최우선적으로 고려하는 게 기업 경영의 제일 원칙인 이상, 사회적으로 책임 있는 윤리적 경영이라는 말은 헛소리에 불과한 것이죠.
그런데 한 걸음 더 나아가 생각하면, 재벌 기업은 경제적 측면뿐만 아니라 우리 사회 자체가 보다 건전하고 좋은 사회를 향해 가는 길을 원천적으로 차단하는 최대의 장애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핵 발전 문제를 생각해 봅시다.
2011년 3월에 후쿠시마 사고라는 엄청난 재해가 발생했고, 그 사고는 지금도 수습이 되지 않은 상태에서 진행 중입니다. 방사능 피해는 앞으로 우리나라에서도 계속 나타날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일본이나 우리나라에서는 불과 2년 전의 일인데도 거의 완전히 망각하고, 마치 그런 사고가 없었다는 분위기예요.
왜 그럴까요? 결론부터 말하면, 핵 산업과 연계돼 있는 대기업의 이해관계 때문입니다. 흔히 '핵 마피아'라고 하지만, 그 중심에 있는 것은 물론 대기업이죠. 대기업의 이익이 걸려 있기 때문에 정부도, 언론도, 대학도 모두 침묵하고 있거나, 혹은 이 와중에도 '원자력 강국'이 돼야 한다는 둥, 엉뚱한 소리를 하는 거죠.
핵 산업과 대기업의 관계를 분명하게 이해하기 위해서 덴마크의 경우를 한 번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덴마크에도 1980년대 초에 핵 발전 도입 여부를 놓고 큰 논쟁이 있었습니다. 덴마크 역시 석유가 생산되지 않는 나라이기 때문에 어떤 점에서 당연한 논쟁이죠. 찬반 의견이 나누어져서 논쟁이 치열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특기할 것은 이 국민적 논쟁 중에서 "에너지를 풍부하게 사용하는 것과 인간다운 삶의 풍요로움이 과연 관계가 있는가?"라는 다분히 철학적인 주제까지 등장했다는 점입니다. 그런 것을 보면, 덴마크 시민들의 수준이 느껴져요. 아무튼 치열한 논쟁 끝에 마침내 덴마크는 핵 발전 도입 불가라는 결정을 내렸습니다. 그 대신에 에너지 자립을 위해서 자연 에너지 개발에 집중한다는 원칙에 합의했습니다.
그 결과 덴마크는 20여 년 사이에 세계적인 풍력 발전 국가로 발전하고, 지금 전 세계로 풍력 발전 기술을 수출하는 나라가 되었죠. 그런데 덴마크가 핵발전소 건설을 단념하고 자연 에너지 쪽으로 방향을 잡는 과정에서 중요한 정책이 있었어요. 그것은 전기 요금의 대폭적인 인상이었습니다. 사실 아무리 자연 에너지 중심이 된다 하더라도 거기에는 명확한 한계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우선 전기를 절약하는 게 제일 중요하죠. 전기 절약을 위한 가장 확실한 방법은 당연히 전기 요금 인상입니다.
전력 소비가 절약되면, 대형 화력 발전소에서의 화석 연료 사용이 현격히 감소합니다. 그뿐만 아니죠. 원래 풍력 발전과 같은 자연 에너지 생산 비용은 아무래도 초기 단계에서는 단가가 높을 수밖에 없는데, 화력 발전 에너지 가격이 올라가면 충분한 가격 경쟁력이 확보되어 자연 에너지 기술 개발이 순조롭게 될 수 있는 경제적 조건이 만들어지는 거죠.
그러니까 덴마크가 오늘날 세계적으로 가장 건전한 에너지 국가가 되는 과정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이 전기 요금 인상 정책이었다는 거죠. 그런데 이 정책이 덴마크에서 실제로 시행될 수 있었던 것은 시민들의 의식 수준도 수준이지만, 그보다 중요한 것은 재벌 기업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만약 국가 정책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재벌 기업이 버티고 있었다면 '산업 경쟁력'이니 '국가 경쟁력' 운운하며 전기 요금 인상을 결사 반대했을 것이고, 그 결과 아마 오늘과 같은 모범적인 에너지 국가 덴마크는 출현하지 못했을 게 확실합니다.
대기업 중심으로 생각하면, 풍력이나 태양광 같은 자연 에너지 시스템에 대한 구상도 엉뚱한 방향으로 전개되기 쉽습니다. 일본의 손정의 소프트뱅크 회장이 고비 사막에 거대한 태양광 발전 단지를 설치하여 거기서 생산한 전기를 일본으로 송전하는 아이디어를 내놓았잖아요? 그런 식으로는 종래의 화석 연료나 핵 발전 시스템과 구조적으로 조금도 다르지 않은 중앙 집중적, 위계적 시스템이 확대될 뿐입니다. 원래 자연 에너지로의 전환이라는 프로젝트는 단지 전력 생산 방식의 전환만이 아니라, 인간 차별·지역 차별 등 불평등한 구조를 불가피하게 수반하는 중앙 집중적, 위계적 권력 질서에서 지역 중심의 분권적 질서로의 전환이라는 새로운 시대정신에 따른 기획입니다. 손정의 식의 발상은 이런 시대정신을 외면하는 발상이죠.
우리나라에서도 대기업이 자연 에너지 산업에 투자를 하면, 대규모 풍력 발전 단지나 태양광 발전 단지를 짓는 식으로 진행할 게 분명합니다. 사실 그런 상황이 벌어지면 재앙입니다. 자연 에너지 시스템은 모처럼 민주주의가 착실한 뿌리를 내릴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는 것인데, 그 기회를 대기업이 박탈할 가능성이 큽니다. 풍력, 태양광, 바이오매스 같은 재생 가능한 에너지를 활용하면 마을마다 집집마다 소규모 발전 시설이 들어설 수 있고, 그런 식으로 에너지 자립 사회가 되면 명실상부한 분권적인 자립 사회가 성립할 수 있습니다. 대기업이 상업주의 논리로 이 영역으로 침범해 들어오면 이런 민주적 가능성이 원천 봉쇄당할 것입니다.
이것 말고도, 재벌 기업의 폐해는 한두 가지가 아니죠. 그러니 당장 재벌 기업 중심의 경제, 사회 구조를 바꾸는 데서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우리가 한 번도 가지 않았던 길이지만, 지역에 기반을 둔 자립 경제는 당면한 사회적, 경제적, 생태적 위기를 벗어나기 위해서도 반드시 지향해야 할 목표입니다.
차베스의 꿈, 대한민국의 꿈
ⓒ프레시안(최형락) |
김종철 : 그와 관련해서 저는 요즘 베네수엘라의 전 대통령 우고 차베스의 행적을 다시 살펴보고 있습니다. 차베스가 죽고 나서 구미 대다수 언론은 그의 업적을 깎아내리기 바빴습니다. 제가 평소에 신뢰하는 영국의 <가디언>도 차베스에 대한 평가에서는 이중적인 자세를 드러냈어요. 빈민들을 구제하는 획기적인 업적이 있지만 독재자였다는 거죠.
한국에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일부 극소수 예외가 있었지만, 심지어 <경향신문>, <한겨레> 같은 진보 언론도 '차베스는 독재자'라는 구미 부르주아 언론들의 입장을 비판적 검토 없이 수용했더군요. 그런데 과연 그런가요? (☞관련 기사 : 차베스, 남미의 '김일성' 아닌 '전태일'!)
차베스에 대한 국내 언론의 평가는 우리가 여전히 구미의 정신적 식민지라는 걸 보여줍니다. 감히 말하건대, 지금 전 세계에서 가장 새롭고 창조적인 대안을 보여주는 곳은 바로 라틴 아메리카입니다. 지금 세계 전체가 헤어나기 어려운 도탄에 빠진 근본 원인은 지난 수십 년간 계속된 이른바 신자유주의 혹은 '워싱턴 컨센서스'라는 이름으로 자행된 약탈적 세계 지배 시스템에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이름만 바뀌었을 뿐이지 근본적으로는 과거 500년 동안 계속된 제국주의 혹은 식민주의의 연장이자 확대판입니다. 그러니까 인류 사회가 인간다운 사회로 소생하자면, 우선 이 틀을 깨는 것이 무엇보다 필요합니다. 요컨대 '탈식민화'가 가장 중요하다는 얘기죠.
그런데 차베스의 베네수엘라를 중심으로 그동안 볼리비아, 에콰도르, 쿠바와 같은 라틴 아메리카 국가들이 활발히 추구해온 사회 개혁의 내용을 잘 들여다보면 바로 이 탈식민화를 위한 역사적 운동이자 실험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저는 이것은 프랑스 혁명, 러시아 혁명에 못지않은 세계사적 의의를 지닌 엄청난 운동이라고 봅니다. 아니, 피를 흘리지 않고 어디까지나 헌법 절차에 따라 평화적인 방식으로 진행해왔다는 점에서 종래의 어떤 혁명보다 더 뜻 깊은 개혁 운동이라고도 할 수 있죠. 미국을 비롯한 서구 국가들과 자본으로서는 라틴 아메리카의 이 새로운 움직임이 달가울 리 없죠. 그래서 이 움직임의 중심에 있는 차베스를 그렇게 미워했던 거죠. 2002년에 쿠데타를 통해서 차베스 정부를 붕괴시키려고 했던 것은 우리가 다 아는 사실이죠.
프레시안 : 얼마 전 <경향신문> 칼럼에서도 차베스의 '새 정치'의 내용을 소개하셨죠? (☞관련 기사 : )
김종철 : 그 칼럼에서도 언급했지만, 차베스 집권 이전에 베네수엘라의 수도 카라카스의 주변 언덕배기를 꽉 채운 수많은 바리오(빈민촌)는 지도상에서 그냥 '녹지대'로 표시되어 있었어요. 베네수엘라 시내에 살고 있는 중산층들에 고용되어 청소부, 식모, 하인, 기사 노릇을 하면서 연명하는 수백만 명의 풀뿌리 민중의 존재는 지배층, 중산층의 안중에는 전혀 보이지 않는 불가시적 존재였던 거죠. 그처럼 오랫동안 모욕을 받고, 인간 이하의 취급을 당하며 살아온 이들은 국민 중 대다수를 점하는 원주민, 혼혈민, 빈민들이었습니다. 이들의 운명이 차베스 집권 14년 동안 완전히 달라진 것입니다.
차베스가 들어서기 전에 베네수엘라의 협동조합은 700개였습니다. 그런데 지금 베네수엘라의 협동조합은 무려 20만 개나 됩니다. 전에 청소부, 식모, 하인, 기사, 실업자였던 사람들이 지금은 빵가게, 의류 공장의 '경영자-종업원'이 된 거예요. 수백 년 동안 자신의 목소리를 낼 수 없었던 사람들이 자기 인생의 주인으로 다시 태어난 겁니다. 차베스가 바로 그걸 해낸 거예요. 차베스는 국가 권력이 아니라 민중 권력을 강화하는 데 자신의 권력을 사용했습니다. 그는 궁극적으로 권력 엘리트들이 대신해주는 정치가 아니라 풀뿌리 민중의 자기 통치가 가능한 진짜 민주주의 세상을 만들고 싶었던 거죠. 우리가 상식적으로 아는 국가, 정치, 권력 개념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급진적인 정치철학, 정치 형태라고 할 수 있죠.
프레시안 : 이런 얘기에 '석유' 타령을 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석유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라는 거죠.
김종철 : 틀린 말은 아니죠. 석유 수출로 벌어들인 돈이 없었다면 많은 사회 개혁 프로그램의 실행도 어려웠고, 외국 자본에 대한 저항도 어려웠을 겁니다. 그러나 차베스의 성향으로 보건대, 석유가 없었더라도 형태를 달리한 여러 급진적인 개혁을 실천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석유가 있다고 해서 차베스처럼 정치를 하는 권력자가 있나요? 사우디아라비아를 보세요. 베네수엘라에서도 차베스 집권 이전에는 석유로 인한 이익은 오로지 기득권층들과 외국 자본이 독점하는 구조로 되어 있었어요. 그러니까 차베스의 업적이 모두 석유 덕분이었다고 하는 것은 초점이 빗나간 해석입니다.
차베스의 업적 중 또 하나 중요한 것은 무역이라는 개념을 바꿔놓은 것입니다. 근대 이후 세계 무역의 본질은 기본적으로 '약탈 무역'으로 일관해 왔습니다.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을 보세요. 미국과 한국은 혈맹 운운하는 사이인데도, 무역 협상 과정은 총칼만 안 들었을 뿐이지 전쟁이나 다름없죠. 강자라고 해서 조금도 양보하는 게 없잖아요.
그런데 차베스는 현대 세계에서도 '호혜 무역'이 가능하다는 걸 입증했어요. 베네수엘라, 볼리비아, 에콰도르, 쿠바 사이에 지금 행해지고 있는 무역은 말 그대로 우호적인 관계를 증진하는 호혜 무역입니다. 예를 들어, 베네수엘라는 라틴 아메리카의 이웃 나라들을 위해서 기꺼이 석유를 값싸게 제공합니다. 여기에 호응하여 쿠바는 많은 의사와 교사를 베네수엘라에 파견하여 가난한 사람들에게 의료와 교육을 무상으로 제공하는 식이죠.
이런 식의 새로운 무역 형태는 살벌한 경쟁 논리가 압도하는 자본주의 무역 시스템에서는 상상하기도 어렵죠. 하지만 차베스는 바로 그런 연대와 협력의 호혜 무역이 단순한 이상이 아니라 현실 세계에서 실제로 가능하다는 걸 증명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인류 사회의 앞날을 위한 모범적인 모델을 보여준 거죠. 바로 미국의 코앞에서, 국내외 온갖 기득권 세력으로부터의 격렬한 저항과 방해 공작을 뚫고서요.
한국에 '안철수'는 있는데 '그릴로'는 없다
프레시안 : 차베스를 보면서 고민이 많이 깊어진 것 같군요.
김종철 : 예전에는 저 자신도 국가를 괄호 안에 집어넣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았죠. "국가란 도저히 어떻게 해볼 수 없는 야만적인 폭력 기구이니, 국가 밖에서 즉 지역에서 대안을 찾자" 이런 논리였죠. 특히 우리나라에서는 모든 문제 해결에 국가를 중심에 놓고 사고하는 습관이 뿌리 깊습니다. 그런 풍토에서 지역 중심의 자립적 삶에 대해서 생각하고 얘기하는 것이 굉장히 중요하기는 해요.
그러나 그런 논리에 명백한 한계가 있다는 것도 간과할 수 없어요. 강변 농토에서 수십 년간 온갖 고생을 무릅쓰고 유기 농업을 일구었지만, '4대강 사업'이라며 국가 권력이 강을 파헤치고 주변 농지를 파괴해 버리면 모든 게 허사예요. 후쿠시마 사고가 터지자 가장 먼저, 가장 큰 피해를 입은 것도 당연히 지역 농민들과 어민들이었습니다. 이런 것을 생각하면, 국가가 없는 것처럼 행동한다는 것은 말이 안 되죠. 적극적으로 국가에 개입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어요.
지금 안철수 씨가 '새 정치'를 얘기하고, 많은 이들이 기대를 품고 있죠. 하지만 저는 그의 새 정치가 무엇인지 조금도 모르겠어요. 그가 지금 누리고 있는 대중적 인기란 기성 정치권에 실망하고 좌절한 국민적 정서 때문인데도, 그는 자신의 구체적인 정치철학과 개혁 프로그램이 무엇인지 구체적인 설명을 안 하고 있잖아요. 설명을 안 하는 게 아니라 못하는 게 아닌가 싶어요. 깊이 있는 내용이 원래 없는 게 아닌가 싶어요. 특히 자꾸 호남 민심에 기대려고 하는 게 실망스러워요. 정말 '새 정치'를 구상한다면, 이 나라 정치를 이 지경으로 만든 원흉, 즉 보수 우익 세력의 본거지로 들어가서 거기서부터 새로운 기운을 일구려는 용기를 보여줘야 할 거 아닙니까? 벌써 틀렸다는 생각이 들어요.
제 생각에는 지금 필요한 것은 '새 정치' 정도가 아니라 '혁명적 정치'입니다. 그런 점에서 오늘의 라틴 아메리카의 정치 상황은 우리가 잘 살펴봐야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라틴 아메리카만이 아니라 둘러보면 혁신적 정치 운동은 다른 곳에서도 싹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혹시 이탈리아의 베페 그릴로나 '오성(五星)운동'에 관해서 들어보셨나요?
프레시안 : 신문에서 몇 차례 이름을 보긴 했습니다만, 눈여겨보지는 못했습니다.
김종철 : <프레시안>은 물론이고 국내 언론은 거의 주목을 안 하더군요. (웃음) 베페 그릴로는 이탈리아의 정치 풍자 코미디언 출신의 새로운 정치가입니다. 이탈리아 정치도 한국 정치 못지않게 엉망이죠. 그 정치를 방송에서 코미디 형식으로 신랄하게 비판하다가 그릴로는 벌써 오래 전부터 방송 출연 금지를 당했다고 합니다. 그 뒤로 그는 자신의 블로그에 정치와 사회의 부조리를 날카롭게 비판하는 글을 쉴 새 없이 올렸고, 거기에 공감하는 시민들이 갈수록 늘어났습니다. 그리고 그는 방송 대신에 직접 거리로 나가서 코미디와 정치 풍자를 계속했는데, 어떤 때는 청중이 수십만 명이나 모여든다고 하죠.
찾아보니까 그릴로의 책이 몇 년 전에 우리말로 출판된 게 있더군요. <진실을 말하는 광대>(임지영 옮김, 호미하우스 펴냄)라는 책인데, 읽어보다가 놀란 것은 그대로 우리나라 얘기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비슷한 얘기가 너무 많아요. 반 농담이지만, 이탈리아와 우리나라는 원래 닮은 게 많아요. 첫째, 반도 국가죠. 둘째, 사람들이 대체로 영리하고 사기꾼이 많아요. 셋째, 노래를 좋아하는 공통점도 있어요. 그리고 이탈리아인이나 한국인 중에는 미국에 친척 한 두 사람 없는 사람이 드물죠. 그런 공통성도 있어요.
그런데 그릴로의 책을 읽어보니까 가장 중요한 공통성은 기성 정치에 희망이 없다는 점이에요. 실비오 베를루스코니라는 희대의 부도덕한 부자가 계속해서 권좌에 오르는 나라가 이탈리아인데, 국민들이 그런 인간의 정체를 모르는 것도 아닙니다. 알면서도 다른 대안이 없으니까 이탈리아의 언론과 재계를 장악한 베를루스코니가 자꾸 수상이 되는 구조가 되풀이되는 거죠. 그러다가 지금 유로 위기 상황에서 이탈리아는 그리스, 스페인과 더불어 국가의 전면적인 재정 파탄 위기에 빠져서 서민 경제는 완전히 붕괴되고 말았죠.
이런 상황에서 베페 그릴로가 새로운 정치를 표방하고 나섭니다. 2009년 10월에 그는 인터넷에 기반을 둔 정당, '오성운동'을 결성합니다. 그리고 맹렬히 자신의 정체성을 알리고, 이탈리아 정치의 개혁 방안을 알렸습니다. 그 결과 지난 2월 이탈리아 총선에서 제3당으로 떠올랐어요. 제3당이라고 하지만, 제1당, 제2당과 거의 차이가 없는 25퍼센트가 넘는 득표를 했습니다. 신생 정당이, 그것도 정치를 해본 경험이 없는 사람들이 모인 정당이 첫 선거에서 이렇게 대약진을 하자 이탈리아뿐만 아니라 유럽과 세계가 놀랐습니다.
이탈리아의 기존 정당들은 우파건 좌파건 그릴로를 '어릿광대'니 '파시스트'니 하고 조롱하고 폄훼해왔지만, 어엿한 제3당이 되자 지금 양쪽에서 연정을 제안하고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지금 그릴로는 연정을 거부하고 있는데, 앞으로 어떻게 될지 귀추가 주목됩니다. 어떻든 그릴로와 '오성운동'의 약진은 일시적인 돌출 현상이 아니라 향후 이탈리아뿐만 아니라 유럽 전체의 변화에 큰 영향을 미칠 가능성이 높다고 관측하는 사람들도 꽤 있습니다.
프레시안 : 그릴로의 부상 자체는 '안철수 현상'과 유사점이 있군요.
김종철 : 그런데 그 내용은 전혀 다릅니다. 이 그릴로의 '오성운동' 그룹이 내세운 공약 중에서 주목할 만한 게 세 가지가 있어요.
첫째는 유로 권으로부터의 이탈입니다. 지금 유로 위기 상황에서 유럽중앙은행과 금융 자본은 그리스나 이탈리아, 스페인, 포르투갈 등의 국가에 대해서 재정 긴축 정책을 시행할 것을 강요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국가의 공공 서비스는 무너지고, 가난한 서민들은 살 길이 없어집니다. 그릴로는 왜 부패한 권력 엘리트와 특권층이 만든 국가 부채 위기를 서민들이 뒷감당을 해야 하느냐는 근본적인 질문을 하면서, 만약 집권을 한다면 국가 채무 불이행(디폴트) 선언을 하고, 유로 권에서 탈퇴하여 이탈리아 독자의 통화 금융 정책을 시행하겠다고 말했습니다.
그릴로가 이런 엄청난 공약을 제시한 것은 이론적 근거가 있습니다. 그는 벌써 1990년대 말부터 대중 집회에서 근대적 통화 금융 제도의 모순과 병폐를 얘기해 왔다고 합니다. 자세한 내용은 지금 말할 여유가 없지만, 아무튼 그의 공약은 무식한 사람의 선동적인 발언이 아니라 매우 진지한 학습의 결과라는 점이 중요합니다.
이와 관련해서 주목할 것이 그의 두 번째 주요 공약, 즉 은행의 공공화라는 아이디어입니다. 아시겠지만, 지금 미국에서도 시민들 사이에 공공은행 설립 운동이 활발히 전개되고 있어요. 은행은 돈이라는 공공재를 다루는 곳이지만, 오늘날 은행은 대개 사유화된 상업 은행들입니다. 그러니까 공익보다 주주들의 사적 이익을 추구하는 영리 기관이라는 거죠. 그런데 은행들이 사회의 공공재를 다룬 결과로 얻은 막대한 이익을 공익 사업이나 공공 복지를 위한 재원으로 사용해야 할 텐데, 왜 그렇게 못하는가? 은행이 사유화돼 있기 때문이죠. 실제로 우리나라에서도 박정희 시대나 군사 정권 시대에 국가 차원의 산업 정책을 통해서 고도 경제 성장이 가능했던 것은 기본적으로 은행들을 국가가 소유하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신문을 보면, 요즘 국내 상업 은행들의 분기별 수익이 각기 몇 천 억 원을 넘습니다. 그런데 이 엄청난 수익은 민간 주주들, 그것도 절반 이상은 외국인 주주들에게 넘어 가는 구조입니다. 보통 시민들은 이런 사실에 대해서 별로 인식이 없습니다. 경제학자들도 가르쳐 주지 않습니다. 국가 채무 위기라는 엄중한 상황에 처한 이탈리아에서 그릴로가 은행의 공공화라는 아이디어를 제창하는 것은 이런 이유 때문입니다. 이것을 당당하게 얘기하면서 공약으로 내세울 때는 진지한 학습도 학습이지만, 비상한 용기가 없이는 안 되는 일이죠.
그의 세 번째 주요 공약은 기본 소득입니다. 철학자 앙드레 고르도 얘기했듯이, 산업 국가의 고용 문제는 갈수록 심각해 질 것입니다. 그렇다면, 결국 대안은 노동 시간을 줄이고, 일자리를 공유하는 방향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기본 소득 제도를 도입해야 합니다.
기본 소득이란 고용 여부, 재산 여부를 묻지 않고, 국가나 공공 기관이 시민들에게 무조건 일률적으로 인간다운 생활에 필요한 최소한의 현금을 지급하는 제도입니다. 만날 정치가들은 고용 창출, 일자리 증가를 약속하지만, 그런 것은 경제 성장이 계속되는 상황에서나 가능한 일입니다. 성장 시대가 저물어 가는 상황에서는 인습적인 사고방식을 뛰어넘은 새로운 경제, 정치, 사회, 문화적 틀을 구상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기본 소득은 지금 그 구체적인 실현 가능성에 대해서 세계 여러 나라에서 활발하게 논의되고 있는데, 그것을 보면 역시 시대가 크게 변하고 있다는 것을 느낍니다. 전통적으로 우리는 소득은 노동의 대가로 주어진다는 사고에 익숙해 있었죠. 그런데 기본 소득의 근간에 있는 것은 고용과 소득이 반드시 일치할 필요는 없고, 사회 구성원이면 누구든 인간답게 살 권리가 있고, 그 방도를 공동체로부터 제공받을 자격이 있다는 새로운 철학과 사상입니다. 근대적 관습과 가치 체계를 넘은 탈근대적 사고방식이라 할 수 있죠.
그릴로가 BBC 기자와 인터뷰하고 있는 동영상을 보니 개인 서재가 큰 도서관 같아요. 책들이 엄청나게 쌓여 있어요. 대중이 듣기 좋아 하는 소리만 골라 얘기하는 딴따라 정치인이 아니라 대단한 공부꾼임이 분명합니다.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극작가 다리오 포도 그를 '중세의 음유 시인'에 비유하면서 높이 평가하고 있다고 하는데, 이상할 게 조금도 없죠.
앞으로 그릴로와 그의 '오성운동' 그룹이 어떻게 진화해 갈지 속단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무엇인가 근본적인 변혁의 바람을 몰고 올 예감이 듭니다. 새로운 정치라고 하면 이 정도는 돼야죠. 이런 변화를 좋은 방향으로 끌기 위해서는 역시 언론의 역할이 중요합니다.
프레시안 : 결국 다시 도돌이표처럼 언론의 역할로 돌아가는군요.
김종철 : 그래요. 언론은 동시대의 가장 첨예한 의식을 가진 집단 지성을 자극하여 변화의 촉매 역할을 해야 합니다. 앞으로 협동조합으로 거듭날 <프레시안>이 그런 역할을 선도해주길 기대합니다. 저도 미약한 힘이나마 보태겠습니다.
프레시안 : 오늘 좋은 말씀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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