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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대는 무조건 '야권' 찍는다? 확실히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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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대는 무조건 '야권' 찍는다? 확실히 아니다! [프레시안 books] 카를 만하임의 <세대 문제>
어떤 책은 다른 책보다 너무 늦게 도착한다. 독일의 사회학자 카를 만하임이 쓴 <세대 문제>(이남석 옮기고 해제 씀, 책세상 펴냄)가 바로 그런 경우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88만원 세대>(우석훈·박권일 지음, 레디앙 펴냄)가 출간된 2007년 이후 이른바 '세대론'을 둘러싸고 수많은 논의가 있었지만, 제목 그대로 '세대 문제'를 사회학적인 문제로 정식화하고 분석한 이 고전적 논의가 우리에게 도달한 것은 2013년의 일이기 때문이다.

비극적이게도 나는 이 책의 내용을 이미 '알고' 있었다. 또한, 내가 2007~2008년 이후 이른바 '20대 논객'으로 호명되기 시작하면서부터 알게 된 내용들이 이 책에 이렇게 저렇게 포개져 있는 것을 확인할 수도 있었다. 일단 <세대 문제>의 가장 핵심적인 문단을 인용해보자.

동시대의 낭만적-보수적인 청년과 자유주의적-합리주의적인 청년은 동일한 실제 세대에 속하지만 두 가지 다른 세대단위들Generationseinheiten에 의해 결합되어 있다. 세대단위들은 단순한 실제 세대가 구성했던 유대보다 훨씬 더 구체적인 유대다. 동일한 역사적-실제적 문제에 정향하고 있는 이와 같은 청년은 동일한 '실제 세대' 속에서 살고 있다. 동일한 실제 세대 내에서 이러한 경험을 각각의 서로 다른 방법으로 소화하는 이러한 집단들은 동일한 실제 세대의 범주 내에서 각각의 다양한 '세대단위'들을 구성한다. (67쪽, 강조는 원문)

▲ <세대 문제>(카를 만하임 지음, 이남석 옮기고 해제 씀, 책세상 펴냄). ⓒ책세상
시간에 따라, 혹은 생물학적 시대에 따라 나누어지는 세대들, 가령 막연한 '1980년대 생' 같은 것이 단순한 '세대위치'가 된다면, 그 속에서 구성원들이 구체적인 사건이나 기타 다양한 변수로 인해 자신들이 어떤 세대임을 자각할 때 그들은 실제 세대를 구성한다고 할 수 있다. 예컨대 1980년대 초반 생들이 20대 초반에 2002년 월드컵을 겪었던 것을 떠올려보면 그렇다. 그런데 그 실제 세대 속에서 지역, 소득, 교육, 기타 여러 가지 변수가 종합되어, 같은 체험을 공유한 비슷한 연령대의 사람들은 각기 다른 몇 개의 집단을 구성하는 경우가 생기는데, 그것을 '세대단위'라고 만하임은 명명하고 있다.

세대위치 - 실제 세대 - 세대단위라는 이 세 가지의 개념적 틀을 정확히 파악하면, '왜 어떤 세대는 세대화가 되지 않는가'라던가, '과연 88만원 세대라는 말로 중산층의 자녀로 태어나 어학연수를 가는 청년과 그 청년의 부모가 가진 건물의 편의점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는 사람을 같이 지칭할 수 있는가'와 같은 문제에 대한 대답을 어렵지 않게 구할 수 있다. 2013년 7월 12일이라는 '오늘'을 같이 살아가는 동년배들과 필자는 같은 세대위치에 놓여있지만, 그들 전부와 동일한 실제 세대를 이루는 것은 아니며, 같은 세대단위에 속한다고는 더더욱 말할 수 없는 것이다.

만하임의 말을 직접 인용해보자. "우리는 먼 지역에 떨어져 있어서 엄청난 격변을 조금도, 아니, 전혀 접촉하지 못하는 농민들을 동시대의 도시 청년과 함께 공동의 실제 세대 집단에 집어넣는가? 확실히 아니다!"(65쪽) 왜냐하면 그들은 그 자체만으로도 서로 다른 세대단위를 구성하며, 도시의 청년들은 그 중에서도 '낭만적-보수적 청년'이 되거나 '자유주의적-합리적 청년'이 되는 식으로, 다시 별개의 세대단위를 형성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마치 20대라면 모두 민주당, 열린우리당, 기타 등등 '야권'을 찍을 것처럼 간주하는 시각에 대해 일찍이 만하임은 의문을 표하고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동일한 실제 세대라는 범주 안의 양극에서 적대적으로 다투고 있는 다수의 세대단위들이 형성될 수 있"으며, "다수의 세대단위들이 서로 다투면서도 서로 조화를 이루기 때문에, 여러 세대단위들은 하나의 '실제 세대'를 구성"(71쪽)한다. 즉 단지 나이대가 비슷하다는 이유만으로 '젊은이들'을 호출하여 '우리 편'으로 삼는 것은 불가능하다. "세대단위라는 세대현상은 동일 연령 집단의 구성원들 사이의 생물학적인 단순한 끌림의 현상에서는 결코 발생하지 않"(76쪽)기 때문이다.

동일 연령 집단의 구성원들은 특정한 계기나 집단 구성 등을 통해 하나의 세대단위를 형성한다. 그들이 다른 세대단위와 갈등하면서도 결과적으로는 주도적인 위치를 차지할 때 그 세대를 대표하게 되며, 한 걸음 나아가 다른 세대와의 상호작용과 갈등을 통해 시대정신을 종합적으로 구현해내게 된다.

그런데 이 경우, 모든 세대위치에서 실제 세대가 도출된다고 보장할 수는 없다. 30년 주기별로, 15년마다, 아무튼 특정한 시간대를 먼저 제시한 후 거기에 맞춰서 세대를 호출하는 것은 마케팅적으로 어떤 의미를 지닐 수 있겠지만, 그렇게 불러 세워진 세대가 실제 세대로서 다른 실제 세대와 길항하며 시대정신의 구성 요소가 된다고 장담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옮긴이가 해제에서 제대로 짚고 있다시피, 이것은 이른바 '88만원 세대'가 상대적으로 볼 때 결코 적은 숫자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의 정치적 대표를 갖지 못한 채 부유하고 있는 현상을 잘 설명해준다. 세대위치도 있고, 그 위치에 빼곡하게 차있는 머릿수들도 있지만, 그들 중 어떤 세대단위가 다른 세대단위와 충돌하며 실제 세대를 구성하는 일만큼은 지금껏 온전히 가시화된 형태로 이루어지고 있지 않다는 뜻이다.

카를 만하임의 <세대 문제>는 사회학적 연구를 담은 책이다. 어떤 운동의 실천을 위해 만들어진 팸플릿이 아니다. 그러므로 이 책에서 어떤 해답을, 혹은 '통찰'을 찾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그것은 어떤 의미에서, 특히 원고를 써서 생활을 하는 사람의 입에서 나온다면, 몰염치한 발언이기도 하다. 사회학 쪽의 연구자라면 독자에게 이 작은 책자의 후속 논의들이 무엇이 있는지 소개하고, 읽는 이들의 정신적 지평을 넓혀야 할 의무가 있을 것이다. 반대로 해당 분야의 연구자가 아니라 사회적 논의를 불러일으키고 새로운 관점으로 세상을 바라볼 수 있게 해주는 것을 작업의 본령으로 삼는 자, 즉 '논객'이라면, 이 책이 제시하는 이론적 틀을 통해 한국 사회를 다시 한 번 읽어낸 후 그 논의를 재활성화하기 위한 시도를 할 필요가 있다.

다시 책으로 돌아가 보자. 만하임은 세대들의 연속성, 즉 한 세대가 다른 세대에 의해 대체되는 과정에서, 가장 나이 많은 세대와 젊은 세대가 직접적으로 대립하는 일은 그리 자주 발생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대신 "이러한 반작용적 화해 과정에서 가장 나이 많은 세대와 가장 어린 세대가 아니라, 서로 가장 인접한 '중간 세대Zwischengeneration'가 서로 대치한다."(62쪽) 우리의 맥락에서 말하자면, 88만원 세대는 '세대'의 일원으로 등장하여 연속성을 띄는 과정에서, 이른바 386세대와 서로 대치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 반대로 말해볼 수도 있다. 386세대의 문제의식 및 그들의 세계관과 맞서지 않는 한, 88만원 세대가 스스로에게 적합한 이름을 찾고 그 속의 여러 세대단위를 구성하여 실제 세대로 자리매김하는 일은 상상하기 어렵다. '나꼼수'의 김용민이 '너희들은 희망이 없다'고 촛불시위 잘만 나오고 있던 대학생들을 향해 일갈했을 때, '우리도 열심히 하고 있어요'라는 식으로 대답하는 것이 과연 올바른 대응이었을까? 그렇게 질문을 던지는 김용민 스스로가, 바로 그런 행동을 통해, 약 10여년의 세대위치를 뛰어넘어 '민주화 세력'이라는 실제 세대의 일원으로 편입하고 있었다는 점을 생각해보자. 그 대답은 더욱 회의적일 수밖에 없다.

1983년에 태어나 2001년에 대학에 들어간 나는, 이 글을 쓰면서 계속 나 스스로가 어떤 세대에 속하는지, 혹은 내가 속한 세대단위를 어떻게 호칭해야 하는지에 대해 고민했다. 나의 세대를 외부에서 부르는 이름들은 매우 분열적이고 또 일회적이다. 중요한 것은 그러한 외부로부터의 호명을 받아내는 수많은 세대단위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혹은 우리는, 비록 '수꼴'이나 '보수화된 청년층'으로 매도되는 한이 있더라도, 일단 스스로를 드러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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