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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에서 트위터리안, 그가 혼탁한 늪에서 뒹구는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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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작가에서 트위터리안, 그가 혼탁한 늪에서 뒹구는 이유 [노정태의 논객시대 최종회] 기자-소설가-언어학자 고종석
☞바로가기 : 노정태의 '논객 시대' 모아보기

1.

영업 비밀을 공개하도록 하겠다. 내가 '논객시대'의 연재 원고를 쓰는 방식은 다음과 같다. 일단 원고에 어떤 분을 모실지 결정한다. 타겟을 잡고 나면 해당 논객이 쓴 책의 목록을 작성한다. 그가 쓴 모든 책을 빠짐없이 다 적어두는 것이다. 그리고 내 서재를 먼저 훑는다. 적어도 한 권, 많으면 몇 권 정도를 나는 이미 가지고 있다. 그것들을 뽑아서, 먼지를 털고, 책상 위에 얹어놓는다.

일단 그 책들의 이름부터 확인해 목록에서 체크한다. 나머지 책들은 도서관에서 대출하거나 친구에게 빌리기도 하고, 그때는 못 샀지만 지금 보니 가지고 있었어야 했을 것들을 구입하기도 한다. 그렇게 전체 목록에 상응하는 도서들을 실물로 확보하고 난 다음, 삶은 콩깍지에서 풋콩을 발라내듯 죽죽 읽어나가는 것이다.

'논객시대'는 기본적으로 '프레시안 books'에 실리기 위해 작성되는 것이니만큼, 나는 어디까지나 단행본으로 묶여 나온 원고만을 바로 그 형태로 다루기 위해 노력해왔다. '프레시안 books'가 책을 다루는 매체이기도 하고, 신문이나 잡지 등 이제는 널리 팔리지도 잘 보관되지도 않는 정기간행물을 인용하기 시작하면 독자들의 접근성이 떨어질 것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논객시대'는 지난 시대의 이야기이지만 동시에 우리가 살고 있는 현재를 다루고 있으므로, 내가 해당 도서를 올바로 읽고 이해하였는지의 여부를 독자가 최종적으로 판단할 수 있는 여지를 남겨야 한다는 원칙을 지키기 위해 노력했다.

물론 그 원칙의 선을 철두철미하게 지킬 수는 없었다. 이번에도 또 그래야만 한다. 왜냐하면 이번 글은 고종석에 대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의 마지막 단행본은 소설 <해피 패밀리>(문학동네 펴냄)이다. 그 책의 발행을 얼마 앞둔 2012년 9월 24일, 그는 <한겨레신문>에 '절필'이라는 제목의 칼럼을 내놓았다. 직업으로서의 글쓰기를 그만두겠다는 선언이었다.

오늘로, 직업적 글쓰기를 접는다. 언젠가 되돌아올 수도 있겠지만, 일단 접는다. 생계무책이기는 하다. 그러나 내게 생이 막막하지 않은 적은 없었다. 지난 30년간 내 글을 읽어주신 이름 모를 독자들에게 깊은 감사를 드린다.(☞바로가기 : )

▲ 기자이자 작가, 언어학자 고종석. ⓒ프레시안(김하영)
고종석이 절필을 선언했다는 사실 자체는 정직하게 말하자면 그렇게까지 놀랍지 않았다. 현실에 대해 말하면서도 그 현실로부터 늘 한 걸음쯤 비켜 서있던 사람이었으니까. 고종석의 절필은, 그가 절필을 선언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 이유 때문에 나를 놀라게 했다. 그 놀라움은 이내 풀리지 않는 궁금증으로 이어졌다.

그의 글을 사랑했던 모든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나는 고종석을, 트위터를 시작하고 스스로를 3인칭의 JS로 부르기 시작한 그를 이해해야 했다. 대체 왜 문필가 고종석은 직업으로서의 글쓰기를 그만두고, 트위터리언 JS가 되었을까. 직업적 글쓰기를 그만두고도 왜 그렇게 많은 이야기들을,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너무도 어색하다며 손사래를 치던 인터넷에 쏟아놓게 되었을까. 그가 우리에게 남긴 것들은 과연 무엇일까.

2.

기왕 펼쳐든 김에 그의 마지막 칼럼 '절필'을 좀 더 꼼꼼히 읽어보자. 첫 번째부터 네 번째 문단까지 그는 자신의, 본의 아니게 시작했지만 의외로 잘 풀려나갔던 글쓰기 인생을 반추한다. 고종석은 어린 시절 "글쓰기가 생업이 될 줄은 몰랐다." 학생 대표로 글짓기 대회에 나가본 적도 없고, 상을 타본 경험도 없다. "그런데 첫 직장이 신문사였"고, "끝 직장도 신문사였"으며, "신문기자 말고 다른 직업을 가져본 적이 없다."

그는 첫 직장에서 영어로 기사를 썼다. 국내 영자 신문에 취직했기 때문이었다. 고종석의 글을 읽어온 사람이라면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을 그 이야기이다. 고종석은 "괜한 겸손을 떨고 싶지는 않다"고 말한다. "1985년엔가, 일본 외신기자 클럽이 아시아 지역 기자들을 대상으로 영문 에세이 콘테스트를 연 적이 있는데", 거기서 "'한국 학생운동과 언론'이라는 제목의 글로 그랑프리를 받"고, "상금으로 받은 50만 엔의 일부로 편집국 동료들과 푸지게 회식"까지 했으니, 그 자부심은 수긍할만한 것일 터이다.

▲ <말들의 풍경>(고종석 지음, 개마고원 펴냄). ⓒ개마고원
이후 창간된 <한겨레신문>으로 자리를 옮기고, 한국어로 기사를 쓰기 시작하면서 "그 스타일만이 아니라 전문성으로 일부 독자들에게 좋은 반응을 얻기도" 하고, 그래서 글쓰기 콤플렉스에서 벗어나기 시작한 그는, "1992년 가을부터 1993년 봄까지 아홉 달간 나는 파리에서 '유럽의 기자들'이라는 저널리즘 프로그램에 참가했는데, 거기서는 불어로 기사를 써야 했다."

그의 문체 때문에 독자들은 고종석을 수줍어하는 문인이라고 생각하기 일쑤지만, 실상은 반드시 그렇다고 말하기 곤란하다. "내 더듬거리는 불어와 깔밋한 기사 문장 사이의 괴리를 동료들은 신기해했다"고, 그는 능숙하게 뽐낸다. "2005년 <한국일보> 논설위원직을 끝으로 출근 생활을 접었을 때, 나는 한 움큼의 이름을 얻은 글쟁이가 돼 있었다"고 그는 회상한다. 그 한 움큼의 이름을 얻기까지의 과정에 대해서는 좀 더 뒤에 살펴보기로 하고, 일단은 '절필'을 계속 읽어나가 보자. 네 문단에 걸쳐 자신의 인생을 곱씹어본 후, 고종석은 이와 같은 이유로 붓을 꺾는다.

그러나 내가 글쟁이로서, 다시 말해 얼치기 기자이자 얼치기 소설가이자 얼치기 언어학자로서 독자들에게 끼친 영향은 매우 제한적이었다. 소수의 독자들이 내 글에 호의적이긴 했지만, 내 책이 독자들에게 큰 메아리를 불러일으켜 많이 팔려나간 적은 없다. 설령 내 책이 꽤 팔려나가고 운 좋게 거기 권위가 곁들여졌다 해서, 그것이 세상을 바꿀 수 있을 것 같지는 않다. 분단체제 극복을 위해 그리도 많은 글을 쓴 백낙청이 통일부 중하급 관료나 외교통상통일위원회 소속 국회의원의 보좌관만큼이라도 대한민국의 통일정책에 영향을 끼칠 수 있을까? 미심쩍었다. 글은, 예외적 경우가 있긴 하겠으나, 세상을 바꾸는 데 무력해 보였다. 달포 전쯤, 술자리에서 친구 차병직이 자조적으로 "책은 안철수 같은 사람이나 쓰는 거야! 우린 아니지!"라고 말했을 때, 나는 진지하게 절필을 생각했다.

고종석은 기자, 소설가, 언어학자로서의 정체성을 가지고 글을 써왔다. 하지만 그가 보기에 자신의 영향력은 매우 제한적이었다. 왜냐하면 일차적으로는 그의 책이, 비록 소수의 충성스러운 독자층을 가지고 있었다고는 하나, 큰 반향을 불러일으키며 팔려나가지 못했기 때문이다. 신문 지면에 쓰기에는 다소 겸연쩍은 내용이긴 하나, 베스트셀러를 쓰지 못한 거의 모든 저자들이 한 번쯤은 스스로에게 던져볼만한 질문이다.

▲ <해피 패밀리>(고종석 지음, 문학동네 펴냄). ⓒ문학동네
문제는 그 다음이다. 그는 설령 자신의 책이 많이 팔려나가고 그로 인해 권위를 얻게 되었다 한들, 자신의 글쓰기로 세상을 바꿀 수는 없었을 것이라고 말한다. 여기서 그 문제적인 비유가 등장한다. "분단체제 극복을 위해 그리도 많은 글을 쓴 백낙청"과 "통일부 중하급 관료나 외교통상통일위원회 소속 국회의원의 보좌관"과 비교되고 있는 것이다. 대한민국의 통일정책 수립에 있어, 전자가 후자만큼의 영향력을 가지고 있는지 의문을 던진다.

이어지는 내용은 더욱 난해하다. "글은, 예외적 경우가 있긴 하겠으나, 세상을 바꾸는 데 무력해 보였다"면서, 예시로 등장하는 사람이 다름 아닌 안철수이기 때문이다. 당시 안철수는 문재인과 야권의 대선후보 자리를 놓고 경쟁하던 사람이다. 게다가 그는 자신의 출마 선언문과도 같은 <안철수의 생각>(김영사 펴냄)을 내기 전부터, 어마어마한 수준까지는 아니어도 꾸준히 잘 팔리는 책을 써온 저자이기도 하다. 안철수는 정치에 입문하기 전부터 환영받는 저자였다. 그처럼 '원래 성공한 사람'이 책을 써서 잘 팔리는 현상 자체만을 놓고 보자면, 그것은 결코 새로운 일이 아니기도 하다.

그러니 백낙청과 통일부 관료를 비교하는 것이건, 안철수와 고종석 자신을 견주어보는 경우건, 둘 다 번지수를 심하게 잘못 찾은 것 같다는 인상을 지우기 어렵다. 가장 단정하고 아름다운 한국어를 구사하는 불세출의 에세이스트가 쓴 문단이라고 보기에는, 내용이 너무 난삽할 뿐더러 그 속에서의 논리 전개도 이상하다. 글쓰기가 무력한 것이라는 그의 새삼스러운 깨달음에 전적으로 동의하더라도 그렇다. 고종석이 절필을 선언할 수는 있다. 하지만 고종석이 이런 절필 선언문을 남길 수는 없다. 이 불가해한 상황을 어떻게든 이해하기 위해, 우리는 그의 책들을 다시 읽어나갈 것이다.

3.

차라리 고종석이 자신의 글쓰기가 매너리즘에 빠졌다는 이유로 절필을 선언했다면, 적어도 나는 지금보다 쉽게 수긍할 수 있었을 터이다. 2000년대 중반을 넘어서 쓴 책에서 그는 이미 그러한 심경을 고백하고 있기 때문이다. 비슷한 시기에 나온 두 권의 책의 서문을 쓰면서, 고종석은 거의 흡사한 자기 성찰을 늘어놓는다.

예술에서든 저널리즘에서든 아카데미즘에서든, 되풀이는 글쓰기의 커다란 악덕이다. 그걸 잘 알면서도, 이따금 그 악덕을 저질러온 것이 늘 계면쩍었다. 그래 이 책에서는 표제어를 고를 때나 감회를 펼칠 때나, 앞선 책과 겹치는 데가 없도록 내 깜냥을 다했다. 그러나 지금의 내가 열두어 해 전의 나와 정체성을 공유하고 있는 이상, 그 애씀이 완전히 성공적이었으리라고 자신할 수는 없다. (서문, <어루만지다>(마음산책 펴냄))

되풀이라는 것은 저널리즘에서만이 아니라 지적 담론이나 문학에서도 피해야 할 악덕이다. 하여 나는 '말들의 풍경'을 연재하며 앞선 책들에서 다룬 소재를 피하려 애썼으나, 그 일에 완전히 성공하진 못했다. 아무리 비체계적인 글쓰기라 할지라도 어떤 주제에 접근하면서 빠뜨려서는 안 될 고갱이가 있기 때문에 그리 됐다고 변명하고 싶지만, 그것은 나 자신도 설득하지 못할 구차한 변명이다. (중략) 내 글쓰기가 언제까지 계속될지는 모르겠으나, 지적 불성실의 가장 흉한 형태라 할 이런 되풀이와 자기표절을 늘 경계하겠다는 다짐으로 오랜 독자들에 대한 결례를 조금이나마 치유하고 싶다. (<말들의 풍경>(개마고원 펴냄), 9쪽)

▲ <어루만지다>(고종석 지음, 마음산책 펴냄). ⓒ마음산책
여기서 우리는 두 가지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첫째, 이미 2007~2008년 무렵부터 고종석은 자신이 이미 했던 말을 되풀이할 가능성을 경계하고 있었다. 둘째, 마찬가지로 이미 2007~2008년 무렵부터 고종석은 '예술-저널리즘-아카데미즘', 혹은 '저널리즘-지적 담론-문학'의 세 겹의 정체성을 인식하고 있었다. 이것은 2012년에 쓴 '절필'에 등장하는 '기자-소설가-언어학자'의 그것과 정확히 포개지는 것이다.

그가 되풀이라는 악덕을 경계하고 있었다는 것은, 심지어 그 경계의 내용마저도 되풀이되고 있으니만큼 굳이 더 강조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여기서 좀 더 흥미로운 것은 두 번째 것이다. 마치 기독교의 교리 속에서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 셋이면서 동시에 하나이듯이, 고종석의 자아상 속에서 기자, 소설가, 언어학자는 각자의 역할을 맡지만 동시에 통합된 스스로의 모습을 형성하고 있다.

4.

기자-소설가-언어학자의 세 가지 정체성은 서로가 서로를 지탱하는 기둥 노릇을 하며 고종석이라는 한 문장가를 형성하고 있었다. 기자인 고종석이 파리에서 경험한 내용을 소설가 고종석이 1993년 <기자들>(민음사 펴냄)이라는 소설로 써낸다. 언어학자인 고종석은 소설가 고종석이 읽은 글을 차분히 분석하고 독자들에게 제시한다. 언어학자인 고종석이 가진 지식을 동원해, 기자인 고종석은 <조선일보>가 '빨갱이'라는 단어를 으르렁말로 사용하고 있다며 목소리를 높인다.

실제로 고종석은 그 세 가지 역할을 동시에, 탁월하게 잘 수행해왔다. 그는 90년대 말부터 2000년대 초까지 한국 사회를, 비록 지식인 사회에 국한되었다고 비판할 수는 있겠으나, 아무튼 뜨겁게 달궈온 안티조선 운동의 중요 활동자였다. 그것은 기자, 즉 넓은 의미에서의 현실 참여형 지식인으로서의 역할을 다하는 것이었다고 볼 수 있다.

소설가로서의 고종석 역시 마찬가지다. 산문가로서의 고종석만을 겨우 아는 사람들은 그가 늘 똑같은 내용, 즉 지식인이 술에 취해 누이를 그리워하는 소설만 쓸 줄 안다고 비아냥거리곤 한다. 하지만 반대로 생각해보면, 바로 그 형식을 끝없이 변주한 덕분에 그는 한국 소설의 역사 속에서 그리 중점적으로 다루어지지 않은 분야에 자신의 작은 영토를 구축하는데 성공했다. 물론 그마저도 종국에 이르러 어떤 결말, 혹은 파국을 맞이하고 마는 듯한 인상을 남기는데, 그에 대해서는 잠시 후에 더 살펴보기로 하자.

게다가 고종석은 언어학으로 박사과정까지 밟은 사람이다. 이것은 매우 놀라운 일인데, 왜냐하면 정작 언어학을 자신의 지적 영역으로 삼은 사람 중 본인의 글쓰기에서 단정하고 정련된 문장을 선보일 수 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가 흔히 이론적 글쓰기라고 부르는 작업들이야말로, 그러니까 일정 정도 추상화된 사변의 공간 속에서 이뤄지는 개념과 논리의 연산작업이야말로, 그 논리연산 규칙의 최소형태라고 할 문법에 대한 신경증을 마땅히 전제해야 하는 것일 텐데도, 이론가라고 자처하는 사람들의 글에서 문법에 대한 무신경을 너무도 자주 발견하게 되는 것은 놀랍고 쓸쓸한 일"(<고종석의 유럽통신>(문학동네 펴냄), 65쪽)이라고 그는 지적한다.

▲ <기자들>(고종석 지음, 민음사 펴냄). ⓒ민음사
고종석은 그렇지 않다. 올바른 문장과 글쓰기에 대해 운운하는 책들 중 대부분이, 자신들이 말하는 그 기준을 지키지 못하면서 남에게 강요하는 목불인견의 행태를 보이는 것과 달리, 고종석은 언어에 대해 설명하면서도 한국어를 올바르게 사용할 줄 아는 탁월한 능력을 가지고 있다. 고종석은 자기 자신이 좋은 한국어 문장을 사용하면서 한국어에 대해 설명할 수 있는, 손에 꼽을만한 언어학자이기도 한 것이다.

물론 그는 독립적으로 사전 편찬 작업을 진행하는 박용수, 남영신이라는 언어학자들에게 존경과 동경의 눈빛을 보낸다. 하지만 그가 지금껏 누려왔고 앞으로도 어쩔 수 없이 향유하게 될 자유를 포기하고 학자로서의 삶을 택할 것이냐고 묻는다면 아마 고개를 저을 것이다. <엘리아의 제야>(문학과지성사 펴냄)에 등장하는 대화 한 대목을 옮겨보자. "대한민국에서 교수 하는 놈들은 거의 예외 없이 누군가의 가랑이 밑을 몇 번은 기어간 놈이라고 그랬지. 지도교수의 가랑이든, 대학 재단 사람의 가랑이든 말이야. 그걸 부끄러워할 줄 좀 알라구 그러더군."(30쪽)

한국어로 기사를 쓰기 시작한 이후 고종석은 늘 한겨레신문의 동료였던 조선희를 동경했다. 하지만 영어 뿐 아니라 불어로도 글을 써 본 경험이 있는 자신의 삶을 부정하면서까지 조선희가 되고 싶어 할 것 같지는 않다. <독고준>(새움 펴냄) 자체가 소설가 최인훈에게 헌정되었다는 점을 통해 쉽게 알 수 있다시피, 또한 그의 소설이 보여주는 성격상, 그는 지식인을 주인공으로 하여 지적인 주제를 탐구하는 그런 소설을 쓰고자 했다. 그러나 그의 소설들은 최인훈 같은 작가들에 대한 동경심을 보여줄 뿐, 그들을 능가하고자 하는 예술적 야심을 드러내지는 않는다.

요컨대 고종석은 세 가지 정체성을 모두 가지고 있었고 그것을 성공적으로 운영해왔지만, 셋 중 하나라도 잃어버리지 않기 위해 그만한 노력을 기울이고 있었던 것이다. 아름다운 글을 쓰지 않는, 비루하게 남의 가랑이 사이를 기어가는 언어학자가 되지 않았다. 정확한 지식에 기반한 기사를 쓰고자 했다. 그 자체가 문학작품으로서의 가치를 지니지 않는 글은 발표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기자-소설가-언어학자'일 수 있었으며, 그 고리를 깨뜨리면서까지 세속적인 성공 따위를 거머쥘 수는 없었던 것이다.

5.

▲ <엘리아의 제야>(고종석 지음, 문학과지성사 펴냄). ⓒ문학과지성사
잠시 시간을 거슬러, 한국 사회가 대통령 직선제를 쟁취해냈던 1987년으로 돌아가 보자. 당시 고종석은 이미 신문 기자였고, 영어로 기사를 쓰고 있었다. <한겨레신문>이 창간된 것은 그 이듬해인 1988년 5월 15일의 일이다. 고종석이 한국어로 기사를 쓰기 시작한 것도, 마찬가지로 그 이후의 일일 수밖에 없다. 고종석은, 특히 김훈이 위악스럽게 포장하여 떠벌이곤 하는, 밥벌이를 위해 굴욕적인 글을 써야 하는 시대를, 적어도 한 사람의 월급쟁이 기자로서 겪지는 않았던 것이다.

그리고 세계의 문이 갑자기 열렸다. 대학생들은 삼삼오오, 혹은 혼자서 배낭여행을 떠나기 시작했다. 해외 연수 등을 통해, 군사독재의 무게를 느끼며 청춘을 삭혔던, 대학생이 아닌 이들조차 더 넓은 세상으로 발을 들여놓지 못해 안달인 시대가 열렸다. "유럽의 기자들은 기자 연수 프로그램 이름이기도 하고, 그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재단 이름이기도 하고, 그 프로그램에 참가하는 기자들을 가리키는 말이기도"(<도시의 기억>(개마고원 펴냄), 203쪽)한데, 고종석은 바로 그 '유럽의 기자들'에 참여하여, 혹은 '유럽의 기자들'이 되어, 1992년 가을부터 1993년 봄까지의 세 계절을 파리에서 보내게 되었다.

그의 말을 그대로 인용해보자. "'유럽의 기자들'은 일상의 권태에 절어 있던 30대 중반 사내에게 어느 가을날 소리 없이 찾아든 축복이었다. 시간의 미화작용에 기대어 뒷날 돌이켜보는 행복 말고 순간순간 겨워했던 행복이 내 삶에 있었다면, 그것은 파리에서의 그 세 계절이었다."(같은 책, 204쪽) 고종석의 청춘 시절은 파리에서 뒤늦게 찾아왔고, 금세 사라졌다. "며칠 뒤 서울행 비행기를 탔을 때, 나는 싱그러움이 내 몸뚱이에서 빠져나가고 있음을 깨달았다. 다시는 되돌아오지 않을 싱그러움이."(같은 책, 209쪽)

고작 1년 반 뒤 그는 다시 파리 행 비행기에 오른다. 별다른 대책도 없었다. 직장을 그만두었지만 그가 다니던 회사는 파리 주재기자라는 직함을 안겨주었다. 프레스 카드를 발급받아 체류증을 갱신해가며 고종석은 파리에서 "'커리어'와 무관한 빈둥거림"(같은 책, 211쪽)을 만끽했다. 당시의 기분을 그는 이렇게 회고한다.

확실히 그것은 빈둥거림이었고, 일종의 허송세월이었다. 그러나 그게 바로 내가 바라던 것이기도 했다. 나는 파리에서 세월을 허송하는 게 좋았다. 가능하기만 하다면 늙어죽을 때까지 그러고 싶었다. 파리가 그저 좋았기 때문이다. '유럽의 기자들' 시절만큼 자극적인 행복은 없었지만, 파리는 내게 꼭 맞는 옷 같았다. 그 전에 35년을 산 서울 기억이 가물가물할 지경이었다. 앞에서 얘기하지 않았는가, 파리는 내 마음을 식민지화했다고. (같은 곳)

이 시절의 소설가 고종석은 '유럽의 기자들'의 경험을 바탕으로 <기자들>을 썼다. 기자로 일하는 고종석은 <고종석의 유럽통신>이라는 지극히도 '90년대적'인 감수성이 넘치는 제목을 달고 있는 책을 펴낸다. 그 속에는 유럽의 다양한 시사적, 문화적 이슈 뿐 아니라 다양한 학문적 내용까지 빼곡히 담겨있다. 고종석처럼 훌쩍 떠나지 못한 사람들 모두가 바로 그런 세계의 경험과 교양을 그리워하고 있었던 시절이었다.

6.

<사랑의 말, 말들의 사랑>(문학과지성사 펴냄)은 바로 그 허송세월이 빚어낸 작품이다. "새 아파트의 집세는 예전 아파트의 집세에 견주어 거의 두 배 가까이"(<사랑의 말, 말들의 사랑>, 15쪽) 되었기에 그는 허송세월하는 와중에도 부지런히 일을 해야 했고, 그래서 자신의 둘째 아이에 대한 사랑을 조금이나마 회복하게 되었다고 말한 그 여드레, 즉 8일 동안, 그는 책 한 권을 써냈다.

"나는 억지로 사랑에 대한 생각을 함으로써, 내 몸을 적시는 미움을 중화시키고 싶었다. 그 강요된 - 자발적 강요도 강요이므로 - 생각의 결과가 이 책이다."(같은 책, 20쪽)

▲ <사랑의 말, 말들의 사랑>(고종석 지음, 문학과지성사 펴냄). ⓒ문학과지성사
<사랑의 말, 말들의 사랑>은 훗날 고종석이 쓰게 될 수많은 책들의 한 기원을 형성한다. 앞서 인용한 <어루만지다>가 '사랑의 말, 말들의 사랑'이라는 부제를 달고 있음은 물론이거니와, 그렇게 직접적인 경우를 빼고 보더라도 그렇다. 언어의, 여성의 관능에 대한 애착을 보여준다. 한국어에 대한 사랑은 "결핍으로서의 사랑"인데, "그 사랑을 결핍으로서의 사랑으로 만드는 것은 내 언어에 아로새겨진 그 모국어의 무늬가 머지않아 맞게 될 磨耗[마모]의 운명, 말소의 운명"(같은 책, 21쪽)이라고 탄식한다. 이 모든 광경은 그의 독자들에게 너무도 익숙한 것이다. 바로 이 책에서부터 시작되었다.

고국에서 떨어져 한국어를 '그리워'하며 사랑할 수 있었기 때문에, 그는 '아내' 같은 글을 쓸 수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함부로 단언할 수는 없겠으나, <사랑의 말, 말들의 사랑>에 수록된 '아내'는, 그리 오랜 역사를 지니지 않았고 제대로 개척되지 않은 한국어 산문의 역사 속에 오래도록 기억될만한, 또 기억되어야 할 걸작이다.

서울에서 삼풍백화점이 무너져 아내의 이종 중 한 사람이 뜻밖에 유명을 달리하는 것에서 시작해, 죽음에 대해 성찰하고, "죽은 자들 사이에서 죽음에 대해 지겹도록 생각하면서, 그 지겨움을 통해 두려움을 분해해 버리"(같은 책, 143쪽)기 위해 페르-라셰즈 묘지를 아내와 함께 산책한다. 그 속에서 그는 새삼스레 아내와의 연애 감정을 되살리고, 만으로 스무 살도 되지 않은 나이에 시작한 결혼 생활을 반추하고, 아벨라르와 엘로이즈의 연애담을 곱씹는다. 아벨라르와 엘로이즈가 페르-라셰즈로 이장된 과정을 추적하면서 그 묘지 자체의 역사를 훑어보는 것으로 그 기나긴 산책은 마무리된다.

아내와 나는 엘로이즈와 아벨라르의 무덤 앞에서 30분쯤 머물렀다. 엘로이즈와 아벨라르와 마담 두드토와 루소에 대해 얘기하며, 사랑과 치정에 대해서 얘기하며, 가족과 일과 집과 돈에 대해 얘기하며. 우리는 죽음에 대해서는 얘기하지 않았다. 비가 흩뿌리기 시작했으므로, 우리는 카페를 찾아 페르-라셰즈를 나섰다. (같은 책, 168쪽)

이 소박한 걸작은 고종석이 즐기던 파리 시내의 산책만큼이나 체계적이지 않고 산만하며, 뚜렷한 목적의식을 가지고 있지도 않다. 자그마한 분량의 산문 속에 중세의 철학사와 그 철학사를 감싸고 있는 희대의 스캔들, 그리고 근대 이후 파리의 역사가 등장하는데, 그 짧은 산책이 끝나고 나면 결국 우리는 다시 고종석의 도시로 돌아오게 된다. 심지어 고종석 본인조차도 이와 같은 글을 다시는 쓰지 못할 것 같다는 생각마저 든다. 그는 한국어권이 가진, 유일하게 온전한, 본래의 의미를 간직한 '산책자'였던 것이다.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떠돌아다니며 기웃거리는 산책자가, 파리를 헤매며 한국어로 글을 썼다. 고종석 개인에게도 그렇지만, 한국어 전체를 놓고 보더라도, 아주 짧은 순간 누릴 수 있었던 찰나의 기적이었다.

7.

▲ <도시의 기억>(고종석 지음, 개마고원 펴냄). ⓒ개마고원
1997년에 외환위기가 터지지 않았다면, 나는 지금도 파리에 살고 있을지 모른다. 내가 그곳에 간 것은 그저 거기 살기 위해서였으니까. 파리에서 살고 싶다는 욕망은, 그것이 내 아이들에게 재앙이 될지도 모른다는 불안을 잠재울 만큼 이기적으로 강렬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 욕망도 경제현실을 이길 수는 없었다. 외환위기가 터져 원화의 값어치가 반으로 동강나면서, 집세를 포함한 내 가족의 생활비는 두 배로 뛰었다. 내 수입원의 대부분이 서울에서 오는 원고료였다.

나는 그제야 깨달았다. 겉멋에 들려 파리 사람인 양 살았지만, 내 알량한 허영심을 물질적으로 뒷받침해온 것은 서울이었음을. 나는 파리에 살면서도 뿌리를 서울에 박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파리에 떠 있는 서울 사람이었다. 서울에서 들려오는 비평은 곧 내가 지르는 비명이었다. 몇 달을 버텨내지 못하고 나는 가족과 함께 서울로 돌아왔다. 김대중 씨가 대한민국 15대 대통령으로 취임한 날이었다. (<도시의 기억>, 215쪽)


고종석은 더 이상 파리의 산책자일 수 없게 되었다. 87년 민주화 이후 10여 년간 지속되어온 도취의 시대가 끝났다. 고종석이 귀국한 날 대통령이 된 김대중은, 박정희의 측근이었던 김종필과 손을 잡고 이른바 'DJP 연합'이라는 것을 구축한 후에야, 이인제의 경선 불복 및 탈당으로 인한 이탈표의 외부효과를 등에 업고서 간신히 승리를 거머쥐었다. 군사독재는 끝났다고 다들 믿고 싶었지만, '그들'과 손을 잡지 않고서는 그 누구도 대한민국의 권력을 손에 쥘 수 없는 것 역시 명확해 보였다. 민주화는 아직 완성되지 않은 것이었다.

그 무렵을 살았던 다른 이들과 마찬가지로, 파리에서 서울로 강제 송환된 고종석에게 있어서 '선출되지 않은 권력'의 문제는 결코 사소한 게 아니었다. 김영삼에 이어 김대중도 결국 '그들'과 손을 잡아야만 한다면, 대통령을 직접 뽑건 말건 그게 그렇게 큰 차이가 있는 것인가? 그렇다면 '그들'은 누구이며, '그들'과 어떻게 싸워야 하는가? 사방팔방 적을 만들어가며 실명비판의 칼춤을 추던 강준만에게 <조선일보>의 이한우 기자가 명예훼손 소송을 걸면서 순식간에 전선이 그어졌다. '앙시앙 레짐'은 <조선일보>에 있었다. 그들과 싸우는 것, 싸우지 않더라도 적어도 비타협적인 태도를 취하는 것이야말로 시대정신이었다.

동시에 IMF 외환위기는 한국인들의 정신세계에 또 다른 외상을 안겨주었다. 경제적인 충격이야 말할 필요도 없는 것이고, 더 중요한 것은 한국인들에게 '세계'의 다른 얼굴을 보여주었다는 데 있다. 우리가 배낭을 메고 여행을 갈 때, 그들은 관광객을 받아주는 현지인이었다. 하지만 우리가 빚더미에 올라앉자 그들은 충격요법을 요구하고 뼈를 깎아서라도 빚을 갚으라고 요구하는 샤일록 같은 존재로 돌변했다. 관광객에서 채무자로 신분이 격하된 한국인들에게 '세계'는 사뭇 다른 곳이었다. 세계를 여행하고 즐기는 것은 옛날 일이고, 그 속에서 어떻게 살아남아야 할지 고민해야 할 시점이었다.

고종석이 '스승'으로 모시던 소설가 복거일이 난데없이 영어를 한국의 공용어로 사용해야 한다는 주장을 내놓은 것은 바로 그런 맥락을 전제하고 바라볼 필요가 있다. 서양인들을 불쾌하게 하지 않는 테이블 매너 따위가 문제가 아니게 된 것이다. 어차피 사실상 영어가 상류층의 언어로 자리매김하고 있는 지금 그 논쟁을 보면 무슨 말인가 싶지만, 당시에는 다들 절박했다. 세계 속에서 '무한경쟁' 해야 하고, 살아남아야 하는 것이다.

그 악명 높은 '영어공용화론'이 담긴 <국제어 시대의 민족어>(복거일 지음, 문학과지성사 펴냄)는 1998년 출간되었다. 그로부터 몇 달 뒤인 1998년 10월, 강준만이 펴내는 저널룩 <인물과 사상>의 지면에 고종석의 '우리는 모두 그리스인이다'가 게재되었다. 고종석의 이름이 책을 읽는 대중들의 머릿속에 깊이 박혀 들어가는 순간이었다.

그 여파가 얼마나 강했는지 알고 싶다면 1999년 출간된 <감염된 언어>의 구판을 잠시 접어두고, 2007년 출간된 개정판의 머리말을 펼쳐보자. 고종석은 그가 낸 수많은 책들을 개정하여 다시 출간했지만, 지난 글에 대해 이토록 길게 설명하고 있는 다른 경우를 찾아볼 수는 없다.

이 책에서 펼친 생각들은 지금도 거의 변함이 없다. 다소 논란을 불러일으켰던 '우리는 모두 그리스인이다'의 논지 역시 마찬가지다. 내가 그 주제를 지금 다룬다 해도 다른 결론에 다다를 것 같지는 않다. 적잖은 독자들이 그 글에서 '약육강식'의 세계관을 읽어낸 것이 매우 당혹스러웠다. 내 한국어가 넉넉히 익지 않아 그런 오해를 빚었는지는 모르겠으나, 내가 거기서 편든 것은 우리 사회의 가장 덜 혜택 받은 사람들이었다. 또 적잖은 독자들이 그 글에서 언어정책론의 옹호를 읽어낸 것도 당혹스러웠다. 한국어 순화가 됐든 영어 공용이 됐든, 나는 국가적 차원의 적극적 언어정책에 반대한다는 점을 그 글에서 분명히 했다. (개정판 <감염된 언어>(개마고원 펴냄), 7쪽)

▲ <감염된 언어>(고종석 지음, 개마고원 펴냄). ⓒ개마고원
복거일의 영어공용화론에 대해 핏대 세운 비판을 하는 대신, '우리는 모두 그리스인이다'라는 세계시민주의적 선언을 하는 고종석의 글에서 사람들이 '약육강식'의 세계관을 읽어낸 이유는, 그때가 그런 시절이었기 때문이다. 김대중과 함께라면 든든할 것 같아서 뽑았지만, 노동자들에게 돌아온 것은 전례 없는 노동 탄압과 노조 분쇄의 발자국뿐이었다. 대통령을 조롱할 자유는 어디에나 있었지만, 그 대통령이 '노동 유연화'를 꾀하고 '신경제'를 추구하는 것에 맞설 권리는 그 누구에게도 주어지지 않았다. 과거의 질서는 무너지고 새로운 질서는 도래하지 않았는데, 그때만 해도 바로 그 '질서 없음'의 상태가 새로운 시대의 규칙이라는 것을 아무도 깨닫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 혼란의 세월 속에서 고종석이 '스승'이라 부르고 있던, "반공과 자유와 개인을 이야기했는데, 놀랍게도 그는 내가 한국 사회에서 신물 나게 보아온 파시스트가 아니었"(<감염된 언어>(개마고원 펴냄, 1999년), 74쪽)던 복거일은 세계 속의 생존을 위해 민족주의적 감수성을 줄여야 하고, 세계인들과 두루 소통되는 언어를 사용해야 하며, 따라서 영어를 공용어로 사용해야 한다는 급진적인 주장을 내놓았다. 나라가 망할지 모른다는 불안감에, 순진한 한국인들이 벽장 속의 금붙이를 꺼내어 국가의 손에 위탁한 그 열기가 채 가라앉기도 전이었다. 복거일이 마녀사냥의 대상이 된 것은 당연한 일이었고, 고종석은 '스승'을 변호하기 위해 팔을 걷어붙이고 뛰어들었다.

'우리는 모두 그리스인이다'는 고종석의 세 가지 정체성이 모두 발휘된, 역시 그 무렵의 고종석이 아니면 그 누구도 쓸 수 없는 글이다. 안티조선 운동에 끼어든 언론인으로서 그는 다른 글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목청을 높여 <조선일보> 및 기타 민족주의적 감수성을 밀어붙이는 이들에게 항의한다. 한국어로 문예 활동을 하는 예술가의 감수성은 한국어의 미래에 대한 비관적인 예측마저 포용하게 한다. 그 모든 이야기들은 그가 훈련된 언어학자이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기자-소설가-언어학자로서, 고종석은 그 누구도 하지 못했거나, 당시로서는 감히 할 수 없었던 이야기를, 과감히 내질렀다. 이후 그가 써내려간 사회 참여형 글쓰기의 적지 않은 원동력이 바로 그 지점에서 시작되었다고 말해도 큰 무리가 없을 것이다.

8.

▲ <독고준>(고종석 지음, 새움 펴냄). ⓒ새움
고종석에 대한 여러 수식어에 대해 고개를 갸웃하게 되는 것은 바로 그런 이유들 때문이다. 자유주의자이면서 가장 왼쪽에 가깝다거나, 좌파를 부끄럽게 하는 우파라거나 하는 이야기들은, 모두 그가 2000년대 초 진보정당을 지지하지 않았기 때문에 달라붙었던 수식어들이다. 그런데 막상 2007년 대선이 되면, 그는 민주노동당의 권영길 후보를 향해 "미래를 위한 사표"(<경계긋기의 어려움>(개마고원 펴냄), 98쪽)를 던지자고 주장하며, 자유주의자에서 자유지상주의로 돌변한 '스승' 복거일에 대해, 대통령이 되자마자 강자의 편으로 돌변한 노무현에 대해서와 마찬가지로, 거침없는 비판의 말을 던졌다.

좌파답다-좌파답지 않다-우파답다-우파답지 않다는 식의 다양한 수사법이 덧없이 느껴지도록, 한국 사회와 정치가 뒤틀려버렸다. 2006년 무렵이 되자 벌써 '안티조선'은 '추억'이 되었다(<신성동맹과 함께 살기>(개마고원 펴냄, 2007년), 12쪽). 고종석은 자신과 막역한 사이인 강금실이 나온 서울시장 선거를 두고서도 "마땅히 민노당 김종철 후보에게 표를 던져야 했음에도 그러지 못한 나 자신을 책망"(같은 책, 26쪽)한다는 말까지 한다. 양심적 우파니 좌파를 부끄럽게 하는 자유주의자니 하는 소리들은 많았지만, 결국 그 무렵의 풍랑에 휩쓸려 들어가지 않았던 고종석은, 지고지순한 회의주의자 혹은 감상주의자였을 따름이다.

나는 하염없는 감상주의자(였)다. 이성과 합리성에 바탕을 둔 리얼리즘이 모자랐던 탓에, 나는 늘 주변인으로 살았다. 크고 작은 공동체의 변두리에, 안과 밖의 경계에 내 자리가 있었다. 그 가두리의 자리를 나는 자유의 자리로 여겼다. 그 자유는 패배의 대가로 얻은 자유였다. 그러니까 내가 일종의 낭만주의자라 하더라도, 그 낭만주의는 영웅적 낭만주의가 아니다. 그것은 삶의 패배를 예상하거나 예정한, 소극적·도피적 낭만주의다. (<도시의 기억>, 34쪽)

그가 말하는바 "소극적·도피적 낭만주의"는 그가 쓰는 소설의 주인공 및 주변인들을 특징짓는 중요한 정서적 지표이기도 하다. 영웅적 낭만주의자를 고종석은 그려낼 줄 모르거나, 알더라도 하지 않을 것이다. 다만 그는 기자-소설가-언어학자로서의 온전한 자신을 지키기 위해, 기꺼이 지는 편에 서는 것을 감수할 뿐이다. 하여 미래를 향해 사표를 던지자고, 진보정치가 몰락하면 앞으로는 더욱 힘들어질 것이라고, 자신이 동어반복을 하고 있다고 인정하기 시작한 2007~2008년 무렵이 되면 적극적으로 발언하기 시작한다. 하지만 이미 늦었다.

현실 정치에 대한 발언을 내놓던 '논객' 중 박근혜가 가지고 있던 고유한 에너지를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경고한 사람이 고종석이었던 것 역시, 그가 한 걸음 물러서서 응시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고려하면, 전혀 놀랍지 않은 일이다. 2008년 3월에 그가 쓴 글을 다시 읽어보자.

2004년 노무현 탄핵소추의 반작용으로 궤멸의 위기를 맞은 한나라당을 되살려냈을 때, 박근혜 씨가 아버지의 이름으로 그 어려운 일을 해내지는 않았다. 그는 상당 부분 자신의 지도력으로 한나라당을 이끌었고, 그의 품 안에서 체력을 키운 한나라당은 결국 정권교체에 성공했다. (<경계긋기의 어려움>, 76쪽)

그리고 그 박근혜는 현재, 김영삼이 감옥에 넣었지만 김대중이 대통령직을 얻자마자 풀어주었던 전두환의 남은 추징금을 환수하기 위해 칼을 빼들고 휘두르는 중이다. "1980년 이후 스물 세 번 째 5월을 보내며, 우리는 다시 한 번 되새겨야 한다. 전씨는 살인자라는 것을. 그의 손과 돈은 그 해 5월에 학살된 사람들의 피로 얼룩져 있다는 것을."(<신성동맹과 함께 살기>(개마고원 펴냄), 200쪽) 2003년 5월의 고종석이 쓴 이 내용은, 정권이 바뀌고 돌아오지 않은 채 세월만 10년이 흐른 지금에서야, 역사의 희비극으로 실현되고 있는 중이다.

9.

▲ <경계긋기의 어려움>(고종석 지음, 개마고원 펴냄). ⓒ개마고원
최초의 질문으로 돌아가보자. 왜 고종석은 절필을 했을까? 왜 붓을 꺾으면서 백낙청과 통일부 관료를 비교하고, 자기 자신과 안철수를 견주었을까? 통일부 관료는, 설령 그가 작성하는 서류의 힘이 대단히 강하다 할지언정, 결국 한 사람이 아니라 조직의 부품으로서 그 힘을 발휘할 수 있을 뿐이다. 어쩌면 그 관료는 실제로 책임질 필요 없이 장쾌한 한반도 구상을 마구 떠들 수 있는 백낙청을 부러워할지도 모른다. 적어도 그 관료는, 관료로서의 자리를 유지하고 있는 한, 자신의 입장을 발표할 수도 바꿀 수도 없다. 그가 가진 것은 서류에 찍을 수 있는 도장일 뿐, 역사를 움직이는 힘 그 자체가 아닌 것이다.

안철수와 고종석을 비교하는 것은 더욱 납득하기 어렵다. 안철수는 결국 그렇게 잘 팔리는 책을 써놓고도 문재인에게 대통령 후보 자리를 양보했으며, 문재인은 대통령이 되지 못했다. 투표율만 높아지면 이긴다는 식의 분위기가 팽배했지만, 스마트폰과 인터넷은 영원히 '우리 편'일 줄 알았지만, 카카오톡으로 투표하자고 격려하는 50대 이상 유권자들의 파도를 넘을 수는 없었다. 당시의 '멘붕'을 떠올려보면, 드골의 말투를 흉내 내어 '그들도 코리아야'라고 비아냥거리고 싶은 심정마저 든다. 그렇게 박근혜는 압도적인 득표수를 기록하며 대통령이 되었다.

언어학자인 고종석이 매너리즘에 빠진 것은 당연한 일이다. 학계의 일원이 아닌 만큼 최신 연구 결과가 업데이트되지 않을 것은 물론이거니와, 설령 그렇다 하더라도 대중을 상대로 교양 강의를 할 수 있는 내용이 뻔하기 때문이다. 스티븐 제이 굴드 같은 일급 학자조차, 대중서 내용은 거기서 거기다. 고종석이 한국어에 대해 했던 이야기를 또 하는 것은 지적 나태의 증거라기보다는, 교사로서의 성실함의 증거일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나 기자로서, 혹은 한 사람의 지사로서 발언해야 할 고종석의 자리는 이제 없다. 노무현의 당선 이후 시작된 정치 실험과, 그 여파로 발생한 진보 정치의 몰락 때문이다. 이제 고종석은 좌파 정당을 보고 크메르 루주니 스탈린이니 하는 것들을 자동 연상하지 않는다. 그런 무지막지한 것들을 떠올리게 할 정도의 힘도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에게 주어지는 반대의 선택지는 그저 조악한 정치공학의 산물일 뿐이다. <조선일보>에 기고하지 않음으로써 양심을 지키는 그조차, 전두환의 아들인 전재국이 소유한 시공사 계열의 총판을 통해 자신의 책이 유통되는 것은 막을 수 없다. "경계긋기의 어려움"을 고종석은 고백했고, 다른 이들은 털어놓지 않았지만, 우리는 모두 그 앞에서 주춤거리고 있다.

소설가 고종석이 다다른 결론에 대해 이야기하면 그것은 <해피 패밀리>의 결말과 내용에 대한 언급이 될 수밖에 없을 터인데, 이 글을 읽는 사람이라면 이미 알고 있기도 할 것이므로, 그냥 말을 하자. 소설가 고종석의 주인공들은 누이를 향하지만 누이에게 도달하지 못함으로써 그의 윤리성을 획득하고 발화할 수 있었다. 그런데 그의 마지막 작품에 이르러, 그 사랑은 완성됨으로써 파국을 맞이한다. 최인훈 소설의 주인공인 독고준을 살려내어 자기 자신을 실컷 투영한 후 노무현의 자살과 함께 죽게 만든 다음의 일이다. 한 사람의 애독자로서, 소설가 고종석이 부활하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을 것임을 알기에, 두 손 모아 기원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10.

▲ <신성동맹과 함께 살기>(고종석 지음, 개마고원 펴냄). ⓒ개마고원
우리가 살아온 논객시대는 결국 이렇게 되었다. 우리는 여전히 '그들'로 이어진 "신성동맹"과 함께 살고 있다. 항의하는 자에게는 처벌이, 이탈하는 자에게는 핍박이 가해지는 세상이다. 반면 그 반대편에서 존재했던, 혹은 가능하리라고 믿었던, 말하자면 '민주동맹'은 산산이 깨어진지 오래다. 그 속에서 복수의 정체성을 엮어 하나의 자아를 형성했던 한 문인에게, 이 세상은 억지로 적응하기에는 너무도 비루한 곳일지도 모르겠다.

생계를 위해 고종석은 글쓰기 강좌를 시작할 예정이다. 직업으로서의 글쓰기를 그만두겠다고 했지, 아예 입도 벙긋하지 않고 살겠다고 한 것은 아니므로, 그는 트위터를 통해서건 다른 경로를 이용해서건 계속 무언가를 말할 것이고 우리는 그것을 듣게 될 것이다. 한 시대를 가장 치열하면서도 단정하게 돌파해온 어떤 문인이, 이전까지는 쳐다보지도 않았던 혼탁한 언어의 늪에서 스스로를 감염시키고 있다.

언뜻 생각하면 가슴이 아프다. 그러나 어차피 돌아가야 할 이상향 따위 본래 없었다는 점을 고려해보면 꼭 그렇지도 않다. 비비고 섞이고 흔들리고 뒤집히고 씹어 먹히고 내뱉어지는 그 모든 지저분한 삶과 언어의 현장 속에서만, 새로운 변종이 탄생할 수 있을 테니까. 우리에게 주어진 한 줌의 말들 속으로 뛰어드는 것 말고는 달리 할 수 있는 일도 사실 없다는 것을, 이제 우리는 알고 있으니까. 그러나 그 얕은 뻘에서 뒹굴다 지칠 때면 종종 '아내' 같은 글을 꺼내어 읽는 나와 여러분들처럼, 2013년의 고종석 또한 그 어느 시절의 고종석으로부터 작은 위로를 받을 수 있기를, 나는 진심으로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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