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 드릴로(Don Delillo)의 소설 <코스모폴리스>(조형준 옮김, 새물결 펴냄)의 서평을 쓰기 위해 책을 먼저 읽었고, 뒤늦게 영화를 찾아보았다. 그리고 데이빗 크로넨버그의 영화에 관한 심도 있는 비평들이 이미 많이 나온걸 알게 됐다). 찬찬히 읽어보고 내린 결론은, 내가 보탤 말이 그리 많지 않다는 것. 어쩔 것인가?
▲ <코스모폴리스>(돈 드릴로 지음, 조형준 옮김, 새물결 펴냄). ⓒ새물결 |
책 표지 이야기다. 영화 포스터를 그대로 가져온 이 책의 표지 디자인을 보고 잠시나마 아연실색했던 게 나 혼자만은 아니리라 생각한다. 한 가운데 박아 넣은 분홍색 제목과, 그와 '깔맞춤'이라도 하려는 듯 발랄하게 나부끼는 노랑, 분홍색 내지들. 아! 작가 돈 드릴로는 이 사실을 알고 있을까? 허나 한국의 독자들이여, 너무 실망할 필요는 없다. 찾아본 결과 러시아어 번역본도 완전히 똑같은 표지를 사용하고 있다는 걸 알게 됐다(물론 "21세기 새로운 개츠비" 따위의 오글대는 문구는 없다). 그러니까 내 말은 우리만 이런 세계에 살고 있는 건 아니라는 얘기다. 어쩐지 조금은 위안이 되지 않는가.
▲ <코스모폴리스> 러시아판 소설 표지. |
2.
사실 내가 소설을 따로 읽어봐야 한다고 생각하는 큰 이유 중 하나는 바로 저 친구, 책 표지를 장식하고 있는 주인공 에릭 패커의 캐릭터 때문이다. 에릭 역으로 우리 시대의 '뱀파이어' 로버트 패틴슨을 선택한 크로넨버그의 탁월한 안목과, 그에 부응한 패틴슨의 나른하고 건조한 무표정 연기에 대해선 이미 많은 얘기가 있었다. 나 역시 어느 정도 동의한다. 하지만 여전히 영화는 그의 캐릭터를 채 절반도 담아내지 못했다는 생각이다. 이 인물에게는 대사와 표정, 동작만으로 온전히 담아낼 수 없는 어떤 특별한 아우라가 있는데, 아마도 그건 소설의 상당 분량을 차지하고 있는 그의 '내적 독백'에서 나온다.
말하자면 그는 '무엇을 하느냐'가 아니라 '무슨 생각을 하느냐'로 차별화되는, 그런 인물 유형에 속하는 캐릭터인 것이다. 주로 3인칭 전지적 작가 시점으로 제시되는 그의 '생각들'과 더불어 그가 여러 주변 인물들과 나누는 '대화' 역시 그가 누구인지를 보여준다. 하지만 영화에선 전자를 거의 전적으로 삭제할 수밖에 없었고, 유감스럽게도 내가 보기엔 바로 그것이 에릭이라는 특별한 인물 뿐 아니라 그가 속한 세계를 이해하는 데 있어서도 결정적인 부분이다. 가령, 대표적으로 이런 구절.
"숫자와 차트라고 하는 것을 그저 제멋대로인 인간의 에너지를 차갑게 응축해 놓은 것에 불과하다고 주장하는 것은 피상적인 생각이다. (…) 사실 데이터 자체에는 혼이 담겨 있으며, 빛나고 있다. 생명 과정이 가진 역동적 측면, (…) 지구 상에 사는 몇 십억 명이라는 생물의 날숨 하나하나를 규정하고 있는 디지털의 정언 명령. 여기 살아있는 세계의 들썩거림이 있다."(43쪽)
이런 구절들은 물론 일차적으로 에릭이 어떤 사람인지를 말해주는 것이다. 그는 자본의 흐름을 도표화함으로써 그것을 예측할 수 있는 모델을 개발하여 억만장자가 된 사람이다. 차트, 패턴, 그리고 예측 가능성, 이 세 가지가 그의 삶을 떠받치는 기본 모티프이다. 그런데 알다시피 소설의 줄거리는 거꾸로 움직인다. 숫자와 차트의 세계로부터 나와 육체와 물질과 역사의 영역으로 나아가는 이야기. 물론 그 길의 끝에는 '죽음'이 기다린다. 그는 대체 어쩌다가 리무진에서 내려 제 발로 암살자의 집으로 걸어 들어가게 된 걸까? 이를테면 이 질문에 이야기의 요체가 담겨있다.
그런데 무릇 모든 이야기에는 변화를 낳는 서사의 동인이 존재해야한다. 이야기를 앞으로 끌고 가는 힘, 즉 욕망의 주체가 존재해야한다는 뜻이다. 영화를 본 사람은 잘 알겠지만,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점점 더 분명해지는 것은 주인공 에릭의 '자기 파괴적' 의지다. 명민하고 꼼꼼한 관람자라면 그가 파산에 이르는 과정, 결국은 죽음에 직면하게 되는 과정에서 그의 자발적 의지가 개입하고 있음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영화에는 생략되어 있지만 그는 심지어 '더 잘 실패하기 위해' 금전적 도움을 약속한 아내의 계좌 잔고를 바닥내기까지 한다).
"21세기의 오디세이"라 불리는 이 작품을, 결코 완벽하게 예측할 수 없는 시스템 자체의 (비)논리(가령, '자기 운동하는 자율체'인 자본의 변덕 혹은 '비대칭' 전립선의 논리)에 의해 결국 파멸하고 마는 실패담이 아니라, 한 자본가가 연출하는 또 한편의 "미학적 승리담"(허문영)으로 읽게 되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그는 예정된 추락을 위한 모든 세팅을 스스로 준비하며, 그 파국의 문 안으로 자기 발로 들어선다. 말하자면 시스템의 승리자였던 그가 이제는 스스로의 삶을 질료로 한 "미학적 승리"를 구가하는 것이다. 범박하게 말해, 이 세계의 주인이었던 그는 마지막 순간까지 자기 삶의 주인이다. 그러다보니 "형편없는 가난뱅이인 필자도 괜히 그의 운명에 감정이입해버리는"() 어이없는 일이 생기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물론 이런 그의 행보를 마르크스 역사관의 핵심에 놓여 있는 '아이러니'를 드러내는 교묘한 알레고리로 읽고 싶은 유혹이 안 생기는 건 아니다. 자본주의의 질서가 스스로의 무덤을 파는 광경, 시스템의 발전이 자기 자신의 목을 죄는 그 아이러니 말이다. 과연, 시스템 전체를 장악했던 시장의 큰 손의 실패는 결국 시스템 전체를 위기에 빠뜨린다. 그는 엔화를 과도하게 차입했고 이는 시장 전체를 패닉으로 몰고 가게 된다. 하지만 이 이야기를 두고 "역시 그렇지. 자본주의는 그렇게 파멸하게 돼있는 법이지"라고 결론짓는 사람이 있다면, 아마 그는 소설 <안나 카레니나>를 '불륜하면 죽는다'로 요약할 수 있다고 믿는 사람일 게다.
문제의 핵심은 도무지 납득할 수 없는 에릭의 '자기 파괴적' 의지의 반대편에 숫자와 차트의 세계를 향한 강박적 확신이 자리 잡고 있다는 사실이다(이 확신을 느끼게 하기 위해 앞서 말한 그의 독백들이 필요하다). 그러니까 우리는 '이발소에 가야한다'는 어이없는 맥거핀으로 표현된 에릭의 파멸적 의지를 그의 세계를 지탱하던 강력한 확신의 정확한 반작용으로 이해해야만 한다. 작용이 강한만큼 반작용도 강해진다. 그리고 그 반작용의 기미는 이미 소설의 서두부에서 주어졌다. 에릭의 주변 인물 중 그의 내면과 가장 가깝게 밀착해 있는 디디 판처(에릭과 불륜 관계에 있는 그녀는 사실상 아내의 역할을 대신한다)는 이렇게 말했다.
"당신은 행동하는 것보다 의심하는 쪽이 더 재미있다고 생각하기 시작했어. 의심하는 데 더 많은 용기가 필요하지."(53쪽)
물론 영화에는 이 대사가 생략돼 있다. 소설의 마지막 부분에서 죽어가는(혹은 그렇다고 느끼는) 에릭의 다음과 같은 독백 역시 마찬가지다.
"그는 항상 초미립자가 되고 싶었다. 육체라는 덩어리를, 뼈 위의 부드러운 조직, 근육과 지방을 초월한, 주어진 한계 바깥에서 사는 것이 기본적인 생각이었다. 칩 속에서, 디스크 위에서, 빛을 발하면서 빙빙 돌고 회전하는 데이터로, 무에서 구해낸 의식으로. 그러나 그의 고통이 불멸에의 꿈을 방해하고 있었다. 그것이 그의 특이성에 핵심적인 것이다. (…) 그라는 인간을 만들어내고 있는 것들은 이름 붙일 수도 또 하물며 데이터로 변환시킬 수도 없다. 그것은 그의 몸속에서 살고 사방을 돌아다니고 있다. 모든 것에서, 닥치는 대로 미쳐 날뛰고 있다."(275쪽)
3.
소설과 영화의 이런 미묘한 뉘앙스 차이는 보기보다 큰 낙차를 만든다. 가령 그것은 이 소설을 '뒤늦게' 유명하게 만든 '반자본주의 시위대' 장면에서도 마찬가지로 드러난다. 이론담당 주임 바자 킨스키와 대화를 나누는 에릭의 리무진이 무정부주의자들의 반지구화 시위 현장을 통과하는 드라마틱한 장면은 영화에서도 눈에 띄게 강조되어 있다. 방탄 처리된 리무진 <안>에서 보드카 술잔을 기울이며 '속도'에 관한 명상을 나누는 두 인물과, 차창 <밖>으로 스쳐 지나가는 혼돈스런 시위대의 우스꽝스러운 풍경 사이의 극명한 대조! 안과 밖의 인상적인 대조로 제시된 이 우아한 쇼트를 두고, 한 평자는 "트래블링(고속촬영)은 도덕의 문제다"라는 고다르의 말을 비틀어 "트래블링은 자본의 문제다"라고 논평한 바 있다(남다은, <씨네21>).
설명을 생략할 수 있게 하는 '압축적 시각화'의 강점은 물론 인정할 만하지만, 아무래도 소설에 비해 논지가 불분명해지는 건 어쩔 수 없다. 왜냐하면 이 대목의 진짜 핵심은 안과 밖의 대립, 예컨대 '1퍼센트와 99퍼센트의 대립' 따위가 아니라, 그들 간의 드러나지 않는 '결속'과 '연루'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사는 이 세계에 대한 일종의 '메타-주석가'로 등장하는(하지만 그녀는 스스로가 말하듯 단지 '이론가'일 뿐이다!) 바자 킨스키는 이렇게 말한다.
"하지만 이들은 무덤을 파는 자들이 아냐. 이것은 자유 시장 자체지. 이런 사람들은 시장이 만들어낸 환상이야. 그들은 시장 밖에서는 존재하지 않지. 외부 따윈 없는 거야. (…) 그들은 시스템에 필요한 거야. 그들이 경멸하는 시스템에. 그들은 시스템에 에너지와 규정을 주지. 그러니까 그들이 존재하는 거지. 시스템에 활기를 불어넣고 영속시키기 위해."(128쪽)
그녀에 따르면, 무정부주의자들의 슬로건인 "파괴하려는 창조적 충동"은 과거를 파괴하고 미래를 창조하는 "자본주의 사상의 특질"(131쪽) 자체이기도 하다. 요컨대 그들의 시위란 "시스템의 위생을 지키기 위한" 것, 체제가 원활하게 돌아가도록 기름을 치는 일에 불과하다. 그리고 이는 다시 "시장 문화의 혁신적인 탁월함, (…) 유연한 목적에 부응해 자기를 변화시키고 주위의 모든 것을 흡수할 수 있는"(140쪽) 능력을 입증하고 있을 뿐이다. 그녀가 보기엔 스스로를 태워 무언가를 말하는 분신의 현장마저도 그다지 "독창적일 게 없는" 가련한 "도용"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니까 작가 돈 드릴로의 소설적 '예언'이 주는 오싹함은 그가 2008년에 벌어질 사태(월 가의 금융위기와 그 뒤를 이은 오큐파이 운동)를 5년 전에 이미 예견했다는 데 있는 게 아니다. 오히려 그건 위기와 운동의 '성격'에 대한 그의 냉소적 진단 자체에 있다. 아닌 게 아니라 오큐파이 운동과 티파티 운동을 반대편 "쌍둥이"로 진단하는 최근의 논평()을 읽으며 이런 딜레마에 빠져들지 않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 <봉기>(프랑코 베라르디 지음, 유충현 옮김, 갈무리 펴냄). ⓒ갈무리 |
"바로 무슨 말인지 이해가 되었다. 그리고 그것이 뭔지 알았다. 물론 그는 이 문장을 알고 있었다. 그것은 최근에 읽고 있는 시의 한 구절이었다. (…) 그들이 자신이 읽고 있던 것과 같은 시를 읽고 있다니, 그것도 유쾌하다."(137쪽)
파괴하려는 창조적 충동은 자본주의 정신 그 자체이고, 금융 자본에 대항하는 시적 슬로건은 자본가의 감각을 자극하는 유희의 대상일 뿐이다. 유쾌하게도(!), 그들과 우리는 "같은 시를 읽고 있다." 대안적 상상력마저 이중으로 봉쇄되어 버린 우리 시대의 무기력을 향한 냉소적 전망은 크로넨버그의 영화에서보다 돈 드릴로의 소설에서 더욱 깊고 예리하게 다가온다.
4.
이런 해석은 결국 작품의 말미를 장식하고 있는 최후의 '대결 장면'으로 직결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자신을 지켜줄 마지막 보호막인 경호원 토발을 스스로 살해한 후 에릭은 이렇게 중얼거린다. "토발이 사라짐으로써 오늘 한층 더 의미심장한 대결을 향해 길이 열리게 되었을 뿐."(201쪽) 암살자 베노 레빈과의 이 마지막 대결 장면은 이제까지 등장했던 모든 '2인 무대'들의 결정판이라 할 만하다. 에릭은 소설 내내 다양한 사람들과 만나는데 이 만남은 전적으로 '일 대 일'의 형태를 취한다. 후반부에 딱 한번 세 사람이 함께 있는 장면이 나오지만, 그곳은 에릭의 어린 시절 추억이 남아있는 유일한 장소인 이발소다(사실 한 장면이 더 있긴 하다. 리무진 안에서 에릭과 회계 담당자가 성적 유희를 나눌 때 의사가 동석하는데, 에릭의 '뒤(!)'를 봐주고 있는 그는, 미안한 말이지만, 사실상 없다고 쳐도 무방한 형국이다).
▲ 데이빗 크로넨버그 감독의 영화 <코스모폴리스>. ⓒAlfama Films |
크로넨버그 감독은 이 대결 장면을 위해 영화의 후반부에 무려 20분가량을 할애했다. 하지만 고백컨대, 나는 이 장면을 보고 적잖이 실망했다. 이 가련한 암살자가 배불뚝이 대머리로 그려졌기 때문은 물론 아니다. "너는 전립선의 목소리를 들어야만 했어"(266쪽)라는 다소 진부한 상징을 제외하고는 나름 의미심장해 보이는 대사(가령, "폭력에는 대의(cause)가 필요해" 따위의)를 죄다 에릭에게만 할당했기 때문도 아니다(사실 이건 소설에서도 마찬가지지만, 영화는 프레임 분할을 통해 둘 간의 힘의 불균형을 한층 뚜렷하게 강조한다). 내가 불만스럽게 느낀 것은 영화가 이 캐릭터의 가장 중요한 모티프 하나를 말 그대로 통째로 삭제해버렸기 때문이다. 그건 그의 '글쓰기,' 즉 '쓰는 자'로서의 레빈의 정체성이다.
레빈은 어떤 인간인가? 과거 에릭의 회사에 근무했던 그는 사실 전직 대학교수다. 1인칭 서술 형태로 삽입되어 있는 두 개의 "베노 레빈의 고백" 챕터를 영상으로 옮기는 것은 물론 불가능에 가까운 일일 것이다. 이 챕터들에서 레빈은 자기가 어떤 인간인지를 설명하는데, 여기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커다란 "철제 책상"이라는 모티프다.
"나에게는 책상이 있다. 보도를 따라, 그런 다음 골목길을 통과해 계단 위로 질질 끌고 온 것이다. 며칠이나 걸린 일이었다. 쐐기와 밧줄을 사용한 체계적인 일. 끝마치기까지 이틀이 걸렸다."(88쪽)
이 커다란 철제 책상은 영화에도 잠깐 등장하기는 한다. 하지만 온갖 서류철과 고물 계산기가 어지러이 널부러져 있는 그 책상은 아무리 봐도 '글쓰기'를 위한 작업대처럼 보이진 않는다. 그런데 그는 '쓰는 인간'이다. 그것도 아주 강박적으로.
"나는 몇 년이 걸리더라도 1만 페이지를 쓰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러면 당신에게 기록을 남기게 된다."(91쪽)
"그러나 나는 남은 인생을 이렇게 보내려고 생각한다. 지금 살고 있는 공간에서 이런 메모를, 일기를 계속 쓰면서. 자신의 행동과 사고를 기록하고, 무엇인가 명예를 찾아내고, 맨 밑바닥에 깔린 모든 것에서 가치를 찾아낸다. 나는 1만 페이지를 쓰고 싶다. 세계를 정지시켜 버릴 1만 페이지를."(206쪽)
이건 전적으로 나만의 추측이지만, 레빈의 캐릭터는 너무나도 유명한 문학적 선조의 정당한 후예다. 1세기 반전에 자신만의 '지하세계'에서 지상의 인간들을 향한 '강박적 말하기'를 멈추지 않았던 인물, 도스토예프스키의 "지하생활자"가 바로 그 선조다. "나는 나 자신에 대해 너무 많이 생각하는 것이다. 자신을 연구한다. 그리고 질려버린다. 그렇지만 나에게는 이것밖에 없다. 나는 그 외의 아무것도 아니다"(91쪽)라고 말하는 인물, 그가 우리 시대의 지하생활자가 아니라면 누구란 말인가. 보라, 그는 이렇게 말하고 있지 않은가.
"하지만 다른 사람의 생명을 뺏는 일은? 그것은 새로운 날에 대한 비전이다. 나는 마침내 결행하기로 결심한다. 그것은 역사를 만들고 이전의 모든 것을 바꾸는 폭력적인 행동이다. 그러나 그 순간을 어떻게 상상하면 좋을까?"(209쪽)
▲ <지하생활자의 수기>(표도르 도스토예프스키 지음, 이동현 옮김, 문예출판사 펴냄). ⓒ문예출판사 |
이런 표현이 어떨지 모르겠지만, 베노 레빈의 혁명은 두 가지 형식을 취한다. '살인'의 형식과 '쓰기(기록)'의 형식. 우리 시대의 가장 뛰어난 '스타일리스트' 중 하나인 크로넨버그 감독은 레빈의 발사를 유예시킴으로써(영화는 결국 방아쇠를 당기지 못한 채 끝난다) 전자를 무화시켰을 뿐 아니라, 후자의 형식을 아예 소거해버림으로써 그를 우스꽝스러운 패러디로 만들어버렸다.
이쯤에서 솔직히 말하겠다. 내가 정말로 보고 싶은 것은 천문학적인 돈을 주무르는 뉴욕의 최연소 거물 투자가, 우리 시대 "0.1%"의 리무진 '안' 풍경이 아니라 병든 실패자 레빈이 쓰게 될 '1만 페이지의 역사'다. 적어도 내게는, 이 기이하고 처절한 "정신적 자서전"(202쪽)을 읽는 일이 21세기 "새로운 개츠비"의 파란만장한 하루를 구경하는 것보다는 더 가치 있는 일로 느껴진다. 최소한 그건 "개츠비의 운명에 나도 모르게 감정이입해버리는" 어이없는 결과를 낳지는 않을 테니 말이다.
정리해보자. 돈 드릴로의 소설 <코스모폴리스>는 돈과 언어로 주조된 우리 시대에 관한 흥미로운 풍속화다. 물론 서민적 일상의 소소한 풍경이 아니라 이 세계를 주무르는 '0.1퍼센트의 살벌한 하루'를 그린다는 점에서, 그리고 그 살풍경이 잭슨 폴록이나 마크 로스코의 그림을 더 닮았다는 점에서, 아무래도 조금은 특별한 풍속화라 하겠다(두 화가의 그림은 영화의 오프닝과 엔딩에 각각 사용된다). 하지만 그 풍속화가 액션 페인팅처럼 제멋대로이고 추상표현주의처럼 난해하다고 해서, 작가를 탓할 수만은 없을지도 모른다. 만일 우리가 사는 이 세계 자체가 이미 그렇게 생겨먹은 거라면 말이다.
진짜 문제는 그 혼돈스런 세계의 진상을 왜 우리가 0.1퍼센트의 삶을 통해 확인해야 하느냐는 것이다. 과연 저 높은 세계의 인간들은 어떻게 살고 있을까, 우리와 '다른' 그들의 머릿속엔 대체 무엇이 들어있을까? 질투와 선망의 감정이 뒤섞인, 저 신기한 '인종'을 향한 값싼 호기심을 이젠 그만 집어 던져도 좋지 않을까? 그렇다고 '개츠비'를 집어 던지고, 그 대신 이 세계 어딘가에 살고 있을 '안티고네'와 '바틀비'를 찾아 나서자는 얘기가 아니다. 그건 또 그것대로 정반대의 '페티시즘'일는지도 모른다. 차라리 그것보단, 개츠비도 바틀비도 아닌 우리 자신의 삶을, 우리 자신의 내면을 더 찬찬히 들여다보는 게 좋지 않을까? 그걸 '1만 페이지의 기록'으로 남길 수 있다면 물론 더욱 좋을 것이다.
전체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