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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란음모'는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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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내란음모'는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장시기의 '영화로 읽는 세상'] 국정원의 <이석기 내란음모 사건>과 봉준호의 <설국열차>
(*이 칼럼에는 분석 과정에서 다수의 스포일러가 포함돼 있습니다.<편집자>)

1. 국정원의 영화 만들기, 가칭 <이석기 내란음모 사건>

국정원이 전액 국가지원의 예산으로 <이석기 내란음모 사건>이라는 영화를 만들고 있다. 국정원의 불법선거개입 사건이 불거지고 국정원의 (탈근대적) 개혁에 대한 국민의 요구가 새로운 촛불문화제로 확산하자마자, 국정원은 통합진보당 이석기 의원을 중심으로 통합진보당의 일부 요인들을 내란음모죄로 고발하였다. 이처럼 내란음모죄라는 국가보안법을 중심으로 한 언어적 개념이 이석기 의원이라는 한 개인과 통합진보당의 이미지를 선과 악, 혹은 친북과 반북의 이분법으로 지배하는 것이 근대적인 영화들의 전형이다.

따라서 국정원은 가칭 <이석기 내란음모 사건>이라는, 시대에 뒤떨어져도 한참 뒤떨어진, 서구 유럽에서는 1930년대나 40년대에 유행하였던, 그리고 근대 식민지 대한민국에서는 1970년대나 80년대에 유행하였던 지배 이데올로기 선전영화를 만들고 있다. 이것은 봉준호 감독이나 박찬욱 감독과 같은 대한민국의 새로운 감독들이 '한류문화'라는 새로운 이미지의 영화들로 오늘날의 지구촌 세계를 감동시키는 것과 전혀 다른 역사적 방향이다.

오늘날의 한국 영화들이 새로운 대한민국의 미래 이미지를 만들고 있다면, 국정원이 만드는 가칭, <이석기 내란음모 사건>은 21세기의 대한민국을 다시 지난 20세기의 독재국가나 파쇼국가의 이미지로 재구성하고자 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근대성과 탈근대성의 이중성은 국정원 요인들이나 북한 인물들이 등장하는 류승완 감독의 <베를린>이나 장철수 감독의 <은밀하게 위대하게>와 같은 영화들에서도 아주 잘 드러난다.

그러나 문제는 국정원의 가칭, <이석기 내란음모 사건>이 영화관에서 상영되는 영화가 아니라 대한민국의 모든 국민이 강제로 관객이 되어야만 하는 현실이라는 것이다. 그것은 영화 같은 현실이다. 마치 공포영화를 보는 영화 관객들처럼 국정원의 <이석기 내란음모 사건>은 대한민국 모든 국민들의 몸을 오싹하게 하고, 아직도 더위가 완전히 가시지 않은 요즈음 등줄기에 얼음 조각이 박힌 것처럼 국민들을 떨게 한다.

빨갱이니 간첩이니 하는 국가보안법의 올가미가 나나 주위의 삶에도 미치지 않을까 걱정하면서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가에 대한 모든 사유를 차단한다. 이와 더불어 국정원은 일제식민지 시대나 미 군정, 혹은 박정희나 전두환 정권의 지배 도구였던 국가보안법이 아직도 살아있다는 폭력적 지배 이데올로기를 21세기의 대한민국 국민들에게 강제로 주입하고 있다. 이러한 국정원의 망상은 자연과 마찬가지로 시간의 흐름에 따라 개인과 국가도 변화한다는 역사적 사실을 망각하고 있기 때문에다. 그 시간적 변화가 근대적인 영화들을 탈근대적인 영화들로 변화시킨 것이다. 과거의 근대적인 영화들과 오늘날의 탈근대적 영화들의 차이는 교육의 분야에서 논의되고 있는 근대적인 주입식 교육과 탈근대적인 창의적 교육의 차이와 같다.

과거의 근대적인 영화들은 각각의 영화 장르들에 따라서 이야기, 즉 영화의 내러티브가 스크린의 이미지들을 지배한다. 그러나 오늘날의 탈근대적 영화들은 관객들로 하여금 스크린의 이미지들을 통하여 삶과 생명의 세계를 스스로 사유하도록 만든다. <이석기 내란음모 사건>과 <설국열차>가 그 차이를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다.

▲ 내란음모 혐의 등으로 사전구속영장이 청구된 통합진보당 이석기 의원이 정기국회 첫 날인 2일 오후 국회 본회의장에 출석, 자신의 의석에서 생각에 잠겨 있다. ⓒ연합뉴스

2. 우리는 '설국열차'의 안에 있는가, 바깥에 있는가?

봉준호 감독의 <설국열차>는 근대적인 인류의 문제를 모두 담고 있는 '설국열차'의 안과 그 열차에서 벗어난 탈근대적인 바깥을 동시에 사유하도록 만든다. 그러나 우리는 영화의 초반부에 결코 설국열차의 바깥으로 나갈 수가 없다. 설국열차의 바깥으로 나갈 수가 없다는 것은 '설국열차'라는 근대의 국가보안법이나 국정원, 혹은 근대의 대한민국 바깥으로 나갈 수가 없기 때문에 국가보안법이나 국정원, 혹은 근대의 대한민국 바깥을 사유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1990년대 이전까지 우리는 <설국열차>의 초반부에 등장하는 것처럼 열차의 꼬리 칸에서 막연하게 제1세계와 제2세계, 혹은 제1세계와 제3세계를 구성하는 미국이나 구소련, 혹은 중국이나 북한 등등의 이름을 들을 수는 있었다. 그러나 그 구체적인 이미지를 사유할 수 없었다. 더더욱 1990년대 이전의 한반도는 그 꼬리 칸마저도 두 개의 코리아로 칸막이가 처져 있었다. 그 두 개의 코리아를 유지하는 방법은 실제로 적대적 공존을 하면서도 마치 서로 대립하고 있는 듯한 길리엄(존 하트 분)과 윌포드(에드 해리슨 분)이다. 그러한 근대의 적대적 공존이 크게는 미국과 구소련일 수도 있고, 미국과 중국의 제1세계와 제3세계일 수도 있고, 박정희와 김일성일 수도 있으며, 마지막 꼬리 칸 내부에서 커티스(크리스 에반스 분)가 혁명가로 등장하기 이전의 아수라장이었던 세계의 길리엄과 커티스의 대립과 갈등, 즉 좌파와 우파, 혹은 진보와 보수일 수도 있다.

그러나 구소련이 스스로 멸망하고 동독과 서독이 통일하고 남아공의 흑인과 백인의 대립과 갈등이 화해와 평화로 해결된 1990년대 이후의 세계, 혹은 1990년대 이후의 세계에서 우리들은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 마치 봉준호의 <설국열차>가 제1세계와 제2세계 혹은 제3세계 등의 수많은 서로 차단된 열차 칸으로 나눈 것처럼, 대한민국과 한반도 내부의 대립과 갈등이, 근대라는 서구 유럽과 미국 중심의 '설국열차'를 지속적이고 안정적으로 달리게 하기 위한 수단이라는 것.

그리고 대한민국과 한반도 내부에서 여당과 야당, 박정희 체제와 김일성 체제가 대립과 갈등이라는 적대적 공존의 세계에 있는 길리엄과 커티스의 서로 다른 이미지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이러한 근대를 구성하는 적대적 공존의 세게는 <설국열차>에서 열차를 지속적으로 유지하기 위한 '인구의 조절'이라는 방식으로 정기적인 "내란음모 사건"을 만드는 것이다.

국정원의 <이석기 내란음모 사건>은 식민지 대한민국을 지속시키기 위한 국정원이 만드는 정기적인 영화이다. 마치 제1세계를 지배하고 있는 윌포드와 제3세계를 지배하고 있는 길리엄이 '인구의 조절'이라는 '내란음모 사건'을 만들기 위하여 서로서로 쪽지를 주고받듯이 과거의 미국과 구소련, 혹은 과거의 김일성 정권과 박정희 정권은 근대적인 자본주의와 사회주의, 한반도의 남과 북이라는 적대적 공존을 지속적으로 유지하기 위해 서로 밀사를 파견해 의견을 교환했다. 또는 서로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하여 대립하거나 갈등을 만들었다. 그것이 오늘날 청와대와 국정원의 합작으로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다.

근대적인 구조 안에서, 혹은 근대적인 '설국열차' 안에서 과거의 수많은 '내란음모 사건'에 연루되었던 안중근 의사나 류관순 열사, 혹은 조봉암 선생이나 장준하 선생, 혹은 김대중 전 대통령이나 백기완 선생 등을 <설국열차>에 등장하는 길리엄이나 커티스로 사유할 수도 있다. 근대적인 구조나 근대적인 한반도, 혹은 근대적인 대한민국 안에서 우리는 그 수많은 "내란음모 사건"의 배후자들을 배척하기도 하고 흠모하기도 하고 또한 존경하기도 하고 미워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근대적인 대한민국을 탈근대적인 대한민국으로 변형시키고 있는 문화한류의 다양한 이미지들처럼 근대적 국정원을 탈근대적 국정원으로 개혁하기 위하여 촛불문화제를 열고 국회에서 국정감사를 실시하고 있는 2013년의 오늘, 설국열차의 꼬리 칸을 지배하고 있는 대한민국 국정원은 스스로 <설국열차>에 등장하는 길리엄처럼 지배자와 내통하고 있음을 자백하면서 통합진보당의 이석기 의원을 새로운 커티스로 만들고 있다.

문제는 국정원이 만들고 있는 <이석기 내란음모 사건>은 봉준호의 <설국열차>와는 달리 열차의 바깥을 사유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것은 <설국열차>에서 마침내 길리엄이 윌포드에게 살해되는 것처럼, 혹은 <설국열차>의 커티스가 윌포드를 만나서 망연자실하는 것처럼, 국정원의 길리엄을 자칭하고 있는 과거의 국정원장이나 현재의 국정원장, 그리고 국정원이 커티스라고 지목하고 있는 통합진보당의 이석기 의원이 모두 탈근대의 대한민국 역사에서 영원히 사라질 것을 의미할 뿐이다.

문제는 이미 만들어진 이야기의 개념들이 영화의 이미지들을 지배하는 근대적 영화들을 사라지게 만들고 탈근대적 영화들이 등장한 것처럼, 혹은 봉준호의 <설국열차>에서 근대적 세계구조를 고스란히 담고 있는 "설국열차"를 수많은 삶의 희생에도 불구하고 지속적으로 달리게 만드는 엔진을 멈추게 하는 것처럼, 오늘날의 근대적 세계와 근대적 대한민국을 지속적으로 달리게 만들고 있는 개념과 담론들을 버리고 탈근대적 세계와 대한민국을 만들 수 있는 새로운 생명의 이미지들이 지니고 있는 삶의 관계들을 사유하는 것이다.

그러한 근대의 식민지적 개념과 담론들이 바로 16세기 이래로 서구유럽의 세계관에 의해서 만들어지고, 우리는 일제 식민지 과정을 통하여 받아들이고 있는 국가, 민족, 조국, 발전, 진보 등등으로 이루어진 근대의 해석학적 개념들과 담론들이라는 것이다. 오늘날의 국가나 민족이나 조국은 내가 살고 있고 삶의 문화를 형성하고 계급적이거나 지역적이거나 성적인 차이에도 불구하고 서로서로의 관계를 생성시키는 문화적인 개념들이지 결코 나와 우리를 지배하고 존속시키는 절대적 개념들이 아니다. 또한 오늘날의 발전이나 진보는 끊임없는 인간이익의 추구나 권력의 쟁취를 의미하는 개념들이 아니라 봄, 여름, 가을 그리고 겨울의 변화처럼 지속적인 인간과 자연의 상호생성적인 변화와 생성의 이미지들이다.

봉준호의 <설국열차>는 두 가지 방식으로 근대적인 개념과 담론들이 지배하는 '설국열차'가 아닌 생명과 상생, 문화와 삶의 관계 등등이 살아있는 그 바깥, 즉 탈근대의 세계에 대하여 사유하도록 만든다.

하나는 영화가 시작하면서 등장하는 1914년 7월 1일로 설정된 빙하기의 지구가 등장하는 사건이다. 그것은 근대적 국가구조로 만들어진 국가 원수들의 합의에 따라 만들어진 것이다. 현실적으로 그러한 근대적 국가구조들의 연합, 즉 국제연합(UN)은 미국과 서구 유럽 중심으로 만들어진 구조이다. 그러나 오늘날 유행하고 있는 지구촌 세계에서 미국과 서구 유럽은 결코 지구촌 세계의 중심이 아니다. 식민지 지역과 식민지 종주국 사이의 지배와 피지배 관계라는 과거의 세계처럼 오늘날의 세계는 결코 각각의 국가나 지역이 설국열차의 열차 칸들처럼 서로 차단되어 있지 않다.

오늘날의 동아시아 지역처럼 과거 근대적 지배와 피지배의 문제를 해결하고 새로운 탈근대의 동아시아 지역을 만들기 위하여 대한민국과 중국과 일본과 대만 등등의 국가들은 아직 완전히 개방되지는 않았지만 서로서로의 국가적 문을 열고 있다. 또한 미국과 서구 유럽 중심의 국제연합을 극복하기 위하여 아메리카의 브라질, 서구 유럽 변방의 러시아, 서남아시아의 인도, 동아시아의 중국, 아프리카의 남아프리카공화국이 지구촌 세계의 지역과 국가를 대변하는 브릭스(BRICS)를 만들어 미국과 서구 유럽 중심의 근대를 넘어서고자 하고 있다. 각각의 지역들이 서로서로 지역들의 문제를 해결하면서 지구촌 세계 전체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또 다른 하나는 영화의 끝에서 마침내 설국열차가 산산조각이 나고 열차에서 살아남은 아시아인 소녀 요나와 아프리카인이거나 아메리카인인 소년이 설국열차 바깥으로 나가서 멀리 지나가는 북극곰과 마주하는 사건이다. 두 소년과 소녀, 그리고 북극곰이 어떻게 근대가 만든 빙하기가 서서히 물러가는 새로운 지구촌 세계에서 살아갈 것인가에 대한 사유는 전적으로 연화의 관람객들 각자에게 달려 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들이 인간과 동물이라는 이분법으로, 혹은 남성과 여성이거나 아시아인과 아프리카인이라는 이분법적 개념으로 서로 대립하거나 갈등하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이다.

또한 이 사건은 영화의 시작부터 말미까지 피비린내 나는 대립과 갈등으로 인하여 마침내 모두가 멸종해버린 설국열차 안에 있었던 수많은 근대인에 대한 연민을 불어넣는다. 그것은 문명과 야만, 선진국과 후진국, 제1세계와 제2세계 그리고 제3세계. 혹은 부르주아와 프롤레타리아 등등의 수많은 근대적 개념들을 가지고 서로서로의 열차 칸들을 차단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서로의 문들을 열고 광장을 만들어 서로 넘나들었으면 하는 소망과 동시에 처음부터 커티스와 윌포드, 그리고 길리엄과 남궁민수가 만나서 근대적인 설국열차의 엔진을 멈추게 하는 방법을 논의했으면 하는 아쉬움이다.

3. 대한민국 국민이 만드는 <국정원의 탈근대적 개혁>이라는 또 다른 영화

1914년 7월 1일, 혹은 그 이후의 어느 날, 근대라는 이 세계의 종말이 빙하기나 핵전쟁 등등의 폭력적인 방식으로 오지 않게 하기 위해서는 앞으로도 수많은 노력과 과정이 필요하다. 그러나 2013년의 오늘날 대한민국에서 근대적 대한민국이나 근대적 한반도의 몰락이 폭력적인 방식으로 오지 않게 하기 위해서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아주 분명하다.

그것은 수많은 국민이 요구하는 것처럼 국정원과 박근혜 정부가 하루라도 빨리 국정원 불법선거개입을 인정하고 사과함과 동시에 국정원이 스스로 가칭 <이석기 내란음모 사건>이라는 너무나도 진부한 근대적 영화 만들기를 포기하고 대한민국 국민들과 함께 <국정원의 탈근대적 개혁>이라는 상호생성적이고 미래지향적인 탈근대적 영화 만들기에 동참하는 것이다.

그러한 탈근대적 대한민국 만들기에서는 수천 년 동안 한반도라는 동일한 역사와 문화를 공유했던 남과 북이 서로서로의 문을 여는 것이다. 그러한 남과 북의 상호개방 속에서 일본과 중국과 대만과 몽골 그리고 필리핀 등등의 동아시아 지역이 서로서로 넘나드는 탈근대적 지역 광장이 만들어질 것이다. 그러한 남과 북의 상호개방과 동아시아 지역의 탈근대적 광장의 연장 선상에서 미국과 서구 유럽을 중심으로 한 근대적 '설국열차'는 서서히 엔진 가동을 중단하고 평화롭게 서로의 열차 칸에서 내려 지구촌 세계의 다양한 아름다움을 음미할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러한 탈근대적 광장의 세계에는 진보도 없고 보수도 없다. 좌파도 없고 우파도 없다. 여당도 없고 야당도 없다. 그러한 탈근대의 대한민국을 만들기 위해서는 친북도 필요하고 반북도 필요하며, 친미도 필요하고 반미도 필요할 뿐만 아니라 친일도 필요하고 반일도 필요하다.

<설국열차>에 등장하는 2014년 7월 1일 근대의 인류가 완전히 사라지는 것처럼 대한민국과 한반도가 완전히 사라질 수도 있는 한반도의 전쟁을 다시 오지 않게 하기 위해서는 전쟁을 걱정하는 다양한 방식, 평화를 사랑하는 다양한 방식, 즉 이석기 의원과 통합진보당의 정치적 성향도 필요하고 국정원과 청와대의 정치적 성향도 필요하다. 진보와 보수, 좌파와 우파, 여당과 야당 등등의 이분법은 과거의 미국과 구소련, 혹은 과거의 박정희 체제와 김일성 체제처럼 개인이나 조직과 집단이 서로서로 적대적 공존을 하면서 서로서로를 죽이면서 각각의 지배권력을 유지하기 위한 수단일 뿐이다.

그러한 사실은 <설국열차>의 마지막 꼬리 칸에서 길리엄과 커티스가 화해하기 이전의 세계이다. 적대적 공존으로 서로서로 살아남기 위해서 서로서로 죽이는 아수라장에서 길리엄은 자신의 다리를 잘라서 커티스에게 주었다. 그러한 길리엄처럼 국정원의 불법 선거개입 사건으로 인하여 만들어진 오늘날의 아수라장을 해결하기 위하여 국정원은 스스로 자신의 다리를 잘라서 국민들에게 주어야만 한다. 그것이 바로 국민들이 요구하는 <국정원의 탈근대적 개혁>이라는 새로운 영화 만들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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