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인화면으로
'인권 외교' 성과, 물거품 만들지 않으려면…
  • 페이스북 공유하기
  • 트위터 공유하기
  • 밴드 공유하기
  • 인쇄하기
  • 본문 글씨 크게
  • 본문 글씨 작게
정기후원
'인권 외교' 성과, 물거품 만들지 않으려면… [곽노현 칼럼] 안경환 국가인권위원장 사퇴의 의미
안경환 국가인권위원장이 갑작스레 사퇴했다. 임기를 4개월 남겨놓고서다. 이로써 국가인권위원회는 초대위원장만 빼고 3인의 후속 인권위원장이 모두 중도 사퇴한 진기록 보유 기관이 됐다.

그런데 안경환 위원장의 경우 사퇴의 변이 좀 특이하다. 오는 8월 초 요르단에서 개최 예정인 아시아태평양국가인권기구포럼(APF) 연차총회에 새 인권위원장이 참석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판단 때문에 그만둔다는 것이다. 이게 무슨 뜻인지 설명이 필요하다.

"ICC 의장 후보기구 때문에…" 사퇴 이유의 의미

오는 APF 연차총회에서 17개 정회원 국가인권기구는 국가인권기구들의 세계 조직인 국제조정위원회(ICC) 의장 후보기구를 선출할 예정이다. 대륙별로 돌아가며 의장국을 맡도록 한 ICC 규약에 따라서 내년부터는 아태 지역이 의장국을 맡을 차례다. 따라서 APF 총회에서 의장 후보로 선출되는 것은 내년 3월부터 개시될 3년 임기의 ICC 의장으로 사실상 확정되는 것을 의미한다.

한국인권위는 2007년부터 ICC의 아태 지역 대표 부의장국으로 활동해왔다. 그때부터 한국인권위는 APF 내에서는 차기 ICC 의장기구 후보로 가장 유력한 고지를 선점해왔다. 사실상 APF 내부에는 아무런 이견이 없었다. 그 결과 지난 3월 필레이 유엔 인권 최고대표가 한국 정부에 보낸 인권위 축소 반대 서한에서도 한국인권위의 ICC 차기 의장직이 기정사실로 언급되었을 정도다.

그런데 지난 3월 말의 정부의 일방적인 인권위 축소 이후 APF 내부 기류에 심상치 않은 변화가 감지된다. 적어도 한국인권위의 ICC 의장 후보 선임을 당연시하던 종래 분위기와는 현저하게 다르다. 후임 인권위원장 자리에 엉뚱한 인물이 임명될 가능성이 큰 한국의 현 상황에서 한국인권위를 무턱대고 의장 후보로 지지할 수 없다는 신중론이 이심전심으로 퍼지고 있는 것이다.

"국제사회의 이상기류, 100% 현 정권 탓"

▲ "지난 3월 말의 정부의 일방적인 인권위 축소 이후 APF 내부기류에 심상치 않은 변화가 감지된다. 적어도 한국인권위의 ICC 의장 후보 선임을 당연시하던 종래 분위기와는 현저하게 다르다." 회의를 주재하는 안경환 국가인권위원회 위원장. ⓒ뉴시스
말할 것도 없이 한국인권위의 ICC 의장국 수임을 위협하는 APF 내부의 이상기류는 100% 현 정권 탓에 생겨났다. 국내외 인권 공동체의 한결같은 반대 의견에도 인권위의 대규모 축소를 일방적으로 밀어붙인 한국 정부를 뭘 보고 믿느냐는 것. 인권위 고사 작전에 나선 것으로 판단되는 현 정권이 어떤 인물을 후임 인권위원장에 앉힐지 모르는 현재 상황에서 종전처럼 한국인권위를 무조건 밀어줄 수는 없다는 것이다.

일부 아태지역 국가인권기구들은 만약 수준 미달의 엉뚱한 인물이 전 세계 국가인권기구들의 대표 자리를 차지하게 되면 아태지역 국가인권기구는 물론 전 세계 국가인권기구들이 얼굴을 들 수 없는 것 아니냐고 여기저기 속삭이며 지지 철회를 부추긴다. 이와 같은 APF 내부의 기류 변화는 한 마디로 현 정권에 대한 국제인권공동체의 '비토' 기류를 반영하는 것이다.

안경환 위원장은 이런 상황 전개를 매우 안타까워한 것으로 보인다. 그가 숙고 끝에 선택한 충정어린 타개책은 위원장직의 조기 사퇴. 국가인권위의 ICC 의장국 수임을 위해 기꺼이 본인의 임기를 양보하고 희생한 셈이다. 안 위원장의 자기 희생적 고육지책이 성과를 내려면 무엇보다도 현 정권이 후임 위원장으로 임명할 분이 국내외 인권공동체가 환영할 수 있는 훌륭한 유자격자라야 한다.

특히 후임 인권위원장은 ICC 의장으로 연간 4회 이상의 국제회의를 직접 주재해야 하므로 국제적 식견과 소통 역량을 갖추는 것도 중요하다. 후임 인권위원장은 국내적으로는 약자와 소수자의 호민관으로 부족함이 없고 국제사회에서는 전 세계 국가인권기구의 대표자로 부족함이 없어야 한다. 이래야만 국내 인권단체들과 아태지역 국가인권기구들이 한국인권위의 ICC 의장국 진출을 지지하게 될 것이다.

"전 세계 인권기구의 독립성 가장 높이 외쳐야 할 텐데…"

정권인수위 시절부터 인권위의 약체화를 도모해온 현 정권의 속성상 후임 인권위원장이 누가 되건 인권위가 현재의 독립성과 활력을 유지하지 못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 주변의 우려 섞인 예측이다. 더욱이 후임 인권위원장은 국가인권위에 대한 인식과 견해가 현 정권의 그것과 동일하기 쉽다. 그렇다면 축소지향적 인권위 관점을 가진 후임 인권위원장이 과연 자나깨나 국가인권기구 강화를 부르짖어야 하는 ICC 의장 자리에 적합한지 의문이 들 수 있다.

ICC 의장은 손보기 차원의 인권위 축소 기타 독립성과 실효성 침해 행위가 세상 어느 구석에서 시도될 때마다 신속하고 단호하게 반대 입장을 공개적으로 밝히고 그를 좌절시키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경주해야 한다. ICC 의장은 심지어 탱크 소리 요란한 군부 쿠데타의 공포 상황에서도 국가인권기구가 독립적으로 진실을 외치도록 독려해야 한다. 한마디로 ICC 의장은 전 세계 국가인권기구의 독립성과 실효성에 대한 지칠 줄 모르는 대변자 겸 보호자 노릇을 해야 한다.

후임 인권위원장이 누가 되건 그는 국가인권위의 손발을 과감하게 잘라낸 현 정권의 비이성적 행위를 묵인했거나 유엔 인권 최고대표와 ICC 의장의 강력한 항의 서한을 외면했던 사람이기 쉽다. 이런 신임 인권위원장이 과연 ICC 의장의 임무를 모순없이 또한 진지하게 수행하는 것이 가능할 것인가? 다시 말해서 한국인권위가 ICC 의장이 되는 것이 과연 전세계 인권기구를 위해 바람직한 것인가?

놓치기 힘든 ICC 의장기구로서의 영예

안 위원장이 이 질문에 대해서도 바람직하다는 즉답을 내놓을지는 잘 모르겠다. 그러나 그가 ICC의장직 피선이 국가인권위의 발전과 대한민국의 명예를 위해 바람직하다고 판단한 건 틀림없는 것 같다. 또한 그 실현을 위해 본인의 조기 사퇴마저 감수할 정도로 강한 진정성을 가진 것도 분명하다. 안 위원장이 왜 그렇게 판단하는지 이해하기 위해서는 약간의 설명이 필요하다.

ICC에는 현재 120개가 넘는 국가인권기구가 회원으로 가입해 있다. 유엔 인권 최고대표실의 국가인권기구팀이 ICC 사무국 역할을 공식적으로 수행하는 데서 알 수 있듯이 ICC는 실질적 의미에서 유엔인권기구의 일부다. 총회는 2년마다 대륙을 돌아가며 개최한다. 이사회는 총 16개국의 국가인권기구로 구성되는데 대륙별로 4개씩을 선출한다. 회의는 유엔 인권이사회 개최시점에 맞춰 매년 2회 이상 제네바에서 개최된다. 그 사이에도 매년 1~2회 의장단 회의가 개최된다.

ICC 의장이 되면 국가인권위의 국제적 위상이 높아진다. 후임 인권위원장은 ICC 의장으로 모든 회의를 주재할 뿐 아니라 유엔인권이사회에서 발언 특권을 갖는다. 그뿐만 아니라 대륙별 인권기구 간 대화와 교류를 촉진하고 독립성과 실효성의 모범 사례를 발굴, 확산하며 국제 인권공동체의 진로 설정에서 일정한 영향을 주게 된다. 이러한 국제적 역할을 3년간 지속적으로 수행하게 되므로 국가인권위의 국제적 역량과 국제적 위상이 크게 제고될 것이다.

ICC의장 피선 물거품 되도록 할 것인가

ICC 의장직은 국가인권위의 국제역량과 국제기여를 대폭 강화하는 계기가 될 것으로 기대된다. 다른 나라들과 비교할 때 상대적으로 좋은 환경에서 뒤늦게 태어나서 모범적으로 성장한 국가인권위는 국제적으로 높은 신망과 기대를 받은 게 사실이다. 반면 그에 걸맞은 국제 역량과 경험을 갖추지 못해서 국제적 리더십과는 거리가 멀었던 것도 사실이다. ICC 의장직이 인권위에 바람직한 일차적 이유는 국제 역량의 강화에 필요한 인력과 예산지원을 받는 결정적 계기가 될 것이라는 데 있다.

그러나 안 위원장이 내심 기대한 것은 일단 내년부터 3년간 ICC 의장직을 맡게 되면 현 정권이 남은 임기동안 국가인권위를 더 이상 무리하게 취급하지 못할 것이라는 점이 아닐까 싶다. ICC 의장직이 현 정권에 대한 인권위의 독립성 보장책인 셈이다. 국가인권위의 ICC의장국 피선은 국가인권위의 독립성 보존 및 국제역량 강화에 기여할 뿐 아니라 한국의 국제적 위상을 높이는 국제 인권 외교의 작은 성과라고 할 수 있다.

분명한 것은 안경환 위원장의 충정에 힘입어 ICC 의장후보로 선출되기 위해서는 8월 APF 총회에서 첫 선을 보일 후임 인권위원장이 국내 인권단체들과 역내 인권기구들이 고개를 끄덕일 수 있는 인물이 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현 정권이 어떤 이유에서든지 이런 인선 기준을 충족하지 못할 경우 한국인권위의 ICC의장 피선은 물거품이 될 것이고 그에 대해 현 정권은 전적으로 책임져야 할 것이다.
이 기사의 구독료를 내고 싶습니다.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매번 결제가 번거롭다면 CMS 정기후원하기
10,000 원
결제하기
일부 인터넷 환경에서는 결제가 원활히 진행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kb국민은행343602-04-082252 [예금주 프레시안협동조합(후원금)]으로 계좌이체도 가능합니다.
프레시안에 제보하기제보하기
프레시안에 CMS 정기후원하기정기후원하기

전체댓글 0

등록
  • 최신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