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데 지금 한국에서 민주주의가 급격하게 흔들리고 있다. 언론이 특정집단의 사유물로 전락하고 있으며, 집회 및 표현의 자유가 공권력의 자의적 판단에 의해 봉쇄되고 있다. 심지어는 국가권력이 시민들의 이메일을 마구잡이로 열어보고 사생활을 공적 범죄의 일부분으로 구성해서 공표하는 황당한 사건이 벌어지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에 맞서 위기를 타개해 나가는 시민들의 민주역량은 기대만큼 분출되어 나오고 있지 못하다. 현재 진행되고 있는 민주주의의 위기 상황을 87년 체제의 투쟁방식으로 극복할 수 있어 보이지는 않는다.
왜 그러할까? 과거 민주주의에 대한 공격은 국가권력이 거의 일체의 폭력수단을 독점한 상태에서 전일적으로 행사되었다. 지배세력의 이익은 국가에 의해 수동적으로 대표되었다. 그래서 역으로는 독재에 대한 분노와 투쟁을 조직하는 것 또한 단순하고 명료했다. 그레고리 핸더슨이 한국의 정치현상을 일컬어 '소용돌이의 정치'라고 묘사한 것처럼 중앙집권적 국가권력과 시민사회 사이에는 마치 거대한 소용돌이가 전후로 움직여 가듯이 짧고, 단순하고, 역동적으로 정치변동이 일어나곤 했다. 1987년 민주화도 그런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그런데 지금은 그동안 민주화와 세계화의 시간대를 경과하면서 국가와 사회의 관계 양식이 현격하게 바뀌었다. 자본과 언론과 보수적 시민사회의 힘은 어느 정도의 자생력을 갖추었으며, 자주 국가권력의 힘을 능가한다. 바로 이들의 계급적 결속과 지원에 바탕을 둔 새로운 유형의 권력자원의 동원은 국가권력에 대한 투쟁으로 민주주의를 쟁취했던 과거와는 양상을 판이하게 달리하도록 만들었다. 보수적 국가권력이 궁지에 몰리면 보수적 시민사회가 전위대로 나서서 반대세력을 공격하고, 보수적 언론은 이를 확산시키며, 대자본은 광고와 같은 물질적 자원을 동원하여 측면에서 지원하는 보수적 협치의 모습은 적어도 87년 이전에는 거의 찾아볼 수 없는 현상이었다.
여기에 덧붙여 외환위기 이후 급격한 사회 공간 구조의 변화가 민주주의를 위한 사회집단들 간의 결속을 더욱 힘들게 만들었다. 즉 외환위기 이후 한국 사회는 계급과 계층에 따라 문화적 공간분리 현상이 급격히 심화되어왔다. 이를테면 강남 대 비강남, 수도권 대 비수도권 등과 같이 거주생활공간에 따라 소득·자산 격차가 심화되어 갈 뿐만 아니라, 직업, 학력, 주거환경, 소비수준 등 생활유형의 다양한 분화를 통해 사고, 가치, 행위, 의식세계를 통괄하는 문화격차를 야기함으로써 사회집단 간 공간분리 현상이 빠르게 진행되어왔다.
바로 이 같은 공간분리 현상은 사회집단들 간의 거리감, 다시 말해서 정치학의 용어를 빌면 사회균열 구조를 훨씬 더 복잡하게 만들어 왔다. 이를테면 중앙일보와 동아시아연구원이 2005년 8~9월에 실시한 조사에서도 나타나듯이, '잘사는 사람과 못사는 사람' 간의 거리감이나 기업가와 노동자의 거리감이나 정규직과 비정규직, 대기업과 중소기업 간의 거리감은 어느 것이 뚜렷이 우위라고 할 수 없을 정도로 다층적으로 형성되어 나타난다.
진보진영, 운동의 전략을 바꾸라
바로 이와 같은 사회 변동의 조건들이 민주주의 후퇴를 막기 위한 투쟁을 어렵게 만든다. 전략적인 용어로 표현하면 전선(front) 혹은 구도 형성을 곤란하게 만드는 것이다. 그렇다면 민주주의의 위기를 타개할 방법은 없는 것인가? 답은 운동의 전략을 바꾸는 데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관념 속에 존재하는 현실을 소거하고, 현실 속에 존재하는 현실에서부터 출발해야 한다.
먼저 나는 진보개혁세력이 자주 범하는 신화적 인식의 오류 한 가지를 정정하는 것으로부터 그에 관한 얘기를 시작하고자 한다. 이명박 정부는 '신보수 정권'인가? '신자유주의 정권'인가? 2008년 초 이명박 정부가 출범했을 당시 진보적 지식인들이 한겨레신문과 경향신문 등 여러 지면을 통해 이명박 정부의 성격을 놓고 논전을 벌인 적이 있었다. 당시 진보적 지식인들이 내린 일반적 결론은 이명박 정부가 '신보수 정권', '시장형 보수', '전면적 신자유주의 정권'이라는 것이었다. 심지어는 자본주의적 정상국가로 가는 보수의 진화현상으로 이명박 정부의 등장이 해석되기도 했다.
그러한 규정을 내린 이면에는 한국사회가 '민주 대 반민주', '개혁 대 수구'의 구도로부터 '국가관여 대 시장자유' 혹은 '신자유주의 대 반신자유주의'의 구도로 이행해 왔다는 가정이 깔려있다. 시장주의 혹은 신자유주의야말로 한국사회가 극복해야 할 대상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적어도 '정치적' 수준에서 한국에 시장주의는 거의 존재하지 않거나 미미하게만 존재한다. 무슨 콩 까먹는 소리냐고 반문하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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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적' 수준에서 시장주의 혹은 신자유주의는 세계화의 물결을 타고 한국에 외부로부터 이식되어 들어왔다. 그러나 한국에 수용된 시장주의는 원판이 심하게 변질된 '시장 없는 시장주의'의 모습에 다름 아니었다. 시장주의는 여전히 크고 권위적인 정부와 결합되었고, 재벌체제라는 개발경제의 적자와 결탁되었을 뿐만 아니라, 법치를 초월하는 자의적 재량주의로 발현되었다.
그런 경향은 특히 김영삼 정부나 이명박 정부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이명박 정부가 추진하는 신자유주의 정책이란 실질적으로는 국가권력의 힘을 통해 시장의 규칙을 마음대로 바꾸는 국가주의의 변종에 지나지 않는다. '줄푸세'(세금 줄이고, 규제 풀고, 법원칙 세우고)를 대선의 핵심 정책공약으로 내걸었던 정부가 정작에는 KDI가 만성적·구조적 재정적자의 늪을 우려할 만큼 대규모 재정을 남발하면서 재벌과 부자지원에 혈안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과거에 '반공'을 '자유민주주의'라고 불렀던 것처럼 '국가의 무차별 개입'을 '시장'이라고 부른다.
그렇다면 왜 이런 현상이 발생할까? 그 같은 불일치와 모순은 자유주의를 체득하지 못한 채 권위주의에 익숙해져 온 한국적 보수의 '불행한 의식'과도 같은 것에서 기인한다. 강정인 교수가 '동시성의 비동시성'이라는 개념을 통해 설명하고 있는 것처럼, 한국의 보수는 세계사적 시간대에 따라 자유민주주의를 표방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실상은 지배역량의 내적 한계로 인하여 한국의 주류사회에서 자유주의는 제도와 현실이 표리부동한 이중성을 띌 수밖에 없었다. 이명박 정부 역시 '신보수'나 '신자유주의'라기보다는 민주주의를 후퇴시키는 권위주의에 오히려 더 가깝다. 한국의 보수주의는 여전히 권위주의로부터 크게 탈피하지 못하고 있다.
바로 이런 구조적 한계로 인해 경제적 제도로서 도입된 신자유주의가 '시장 없는 시장주의'로 전락하고, 정치적 수준에서는 권위주의의 도구로 변질되고 마는 것이다. 그 때문에 김대중 정부와 노무현 정부 내내 보수 우익들은 '작은 정부', '큰 시장', '법치주의', '삼권분립'을 내세우면서 개혁적 민주정부를 '포퓰리즘' 또는 '친북좌파정권'이라고 공격해대었지만, 그들이야말로 왜 이명박 정부의 자의적 재량주의에 의한 법치의 파괴, 시장에 대한 무분별한 개입, 권위주의의 부활과 같은 모습에 철저히 침묵으로 일관하는가 묻지 않을 수 없는 대상인 것이다.
과거 자신이 활동하던 단체 이름에 '자유주의'라는 글자를 새겨 넣었던 어느 인사는 지금 현역 국회의원이 되어 집단적 표현의 자유를 제한하는 법을 만들기 위해 전력을 투구하고 있다.(일본에서 역사교과서 왜곡을 주도하고 있는 우익단체의 이름도 '자유주의사관연구회'라고 부른다)
주지하다시피 우리나라는 자유민주주의적 헌법정신을 채택하고 있다. 자유민주주의적 헌법은 표현의 자유를 제한하는 입법을 할 때 해악 발생의 확실성과 제한의 절대적 필요성이 인정될 경우에 한하여 정당화될 수 있다는 '명백·현존위험의 원칙'을 따른다. 그런데 집회에서 마스크를 착용하면 처벌한다는 논리는 경찰이 얼굴을 식별하도록 하고 집회에 참석하라는 이야기다. 도대체 왜 집회에 참석하는데 경찰이 얼굴을 식별하도록 해야 하는가? 그런 논리는 결국 집회에서 얼굴 식별을 힘들게 하는 선캡을 써도 안 되고 선글라스를 껴도 안 되며, 외국의 집회현장에서 종종 보는 가면 퍼포먼스를 해도 안 된다는 논리로 발전할 수밖에 없다. 한 마디로 집회에서는 아무런 사생활의 자유도, 창작의 자유도 누리지 말라는 것이다.
요컨대 한국 보수의 '불행한 의식'은 자유주의와 단절된 권위주의와의 격차를 넘지 못하는 데서 연원한다. 서구사회의 보수세력이 비록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개인의 자유권에 대한 보편적 인정 위에서 '국가 대 시장'의 구도를 축으로 자신의 위상을 정립하는 것과는 달리, 한국의 보수는 권위주의의 강력한 관성으로 인해 '국가 대 시장'의 구도로 자신을 확장시키는 진화의 경로를 밟지 못하고 있다. (필자가 보기에 한국에서 '시장적 보수주의자'에 가까운 사람은 한나라당 이한구의원 정도인 것 같다) 그래서 한국의 정치지형 속에서 보수에게는 자유주의도 없고, 시장주의도 없다고 하는 것이다.
얼마 전 이와 관련된 꽤 유의미한 실증적 조사 자료가 하나 나왔다. 'P&C정책개발원'이라는 곳에서 2009년 2월에 조사한 한국인의 정치성향 자료에 의하면, 한국인들은 한나라당 지지자이건, 민주당 지지자이건, 무당파이건 시장자유보다는 적절한 국가관여를 전반적으로 선호하는 가운데, '개인의 자유권'에 대한 가치지형에 따라 당파적·정치적 스펙트럼이 갈라지는 것으로 나타났다.
특히 여기서 가장 주목할 점은 개인의 자유권 문제에 대한 반응도가 무당파 층에서 민주당이나 민주노동당 지지자들보다 더 강한 것으로 나타난다는 점이다. 무당파 층은 정부가 하는 일에 가급적 믿고 따라줘야 하지만 정부가 개인의 표현의 자유를 침해한다든지, 언론통제 등의 수단을 갖는 것에 대해서는 강하게 반발하는 성향을 갖고 있다. 이들에게 개인의 자유권은 경제나 민생 문제보다 오히려 더 민감한 주제이다.
그런데 이명박 정부가 보수결집전략을 추구하면서 기득권층에게 경제적·사회적 이익과 특혜를 주는 것을 넘어서 개인의 자유권을 무차별적으로 짓밟고 뭉갰으니 무당파 층이나 중도적 유권자들이 대거 이탈할 수밖에 없다. 보수결집전략은 약발이 딱 6개월용이었다. 그 후부터는 무당파까지를 반대세력 쪽으로 밀어냄으로써 편익보다 손실이 더 커지게 되었다. 지난 4.29재보선의 참패는 이 같은 역학구조가 작용한 결과였다.
자유권을 매개로 한 다성악적 민주주의로
자, 이제 필자가 궁극적으로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 얘기하겠다. 우리는 여기서 진보개혁진영이 진화해 나가야 할 방향이 무엇인지 시사 받을 수 있다. 한국 진보개혁진영의 좌표는 '반신자유주의'가 아니라 바로 '민주주의'이다. 그러나 그것은 '87년 체제의 민주주의'가 아니라 '새로운 체제의 민주주의'이다.
87년 체제의 민주주의는 단성악적(單聲樂的) 동질성을 기초로 한 '소용돌이의 민주주의'에 가까웠다. 그에 반해 새로운 민주주의는 개인의 자유권을 매개로 하는 다성악적(多聲樂的) 민주주의여야 한다. 하지만 여기에도 양가성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개인의 자유권이 중요하다고 해서 자신의 이익에 매몰되고 타자로부터 고립을 지향하는 소극적 자유권을 옹호해서는 안 될 것이다. 평등한 권리주체들 간의 협력과 참여를 통해 사회적 공동선을 만들어 가는 집단적 정치경험이 수반되어야 한다.
한국에서 진보의 가장 중요한 정치적 주제는 '빵'이나 '계급'보다 '가치'(value)이다. 서울대 사회발전연구소가 2008년 조사한 자료에 의하면, 한국의 진보는 보수보다 공공재 창출에 더 적극 참여하고, 사회적 약자에 대해 더 관용적이며, 탈물질주의적 가치관을 더 많이 가지고 있다. 한국 사회의 대중은 '가치'가 출현할 때 진보에 열렬히 화답하였고, '가치'가 소멸할 때 침묵하였다.
개인의 자유권은 참여와 토론을 통해 형성되는 공론의 공간으로부터 창조된다. 그런 점에서 2007년 촛불집회는 다중의 자유롭고 평등한 참여와 토론을 통한 의사소통공동체 건설의 가능성을 단초적으로 보여준 사건이었다. 개인의 자유를 억압하는 비인간적 제도의 타파를 위해 싸우자! 민주적 법치주의를 수호하자! 차이에 관용과 다양성의 순기능을 옹호하자! 나아가서는 진보개혁진영 내부에 스며있는 권위주의 문화를 우리 스스로 씻어내자. 바로 여기에 진보가 보수로부터 자신을 날카롭게 차별화하고 최대다수의 연합을 형성할 수 있는 핵심 포인트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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