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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량·소신·배짱 없다면 지금이라도 '결단'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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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역량·소신·배짱 없다면 지금이라도 '결단'하라" [곽노현 칼럼] ICC 의장 불출마 ·국제회의 불참하는 인권위원장
7월 30일 국가인권위원회가 ICC 의장직 출마 포기를 선언했다. 공식적으로 내건 이유는 지난 3월말 인력 감축으로 지원 인력도 마땅치 않고 국내 인권 문제가 산적해 국외 활동 여력이 없다는 것. 하지만 이건 순전히 대외용 발표일 가능성이 높다. ICC 의장국 진출을 현재의 인력과 역량 결핍 상황을 돌파할 유력한 수단과 계기로 삼자는 데 내부의 의견이 모아졌었기 때문이다. 의장 후보로 제3자를 내세우는 한이 있더라도 ICC 의장직을 포기할 수 없다는 막판 몸부림수도 그 연장선상에 있다.

속사정을 추측하건대, 현병철 위원장은 직접 본인이 출마할 때 떨어져서 비웃음거리가 될 가능성을 몹시 우려한 것 같다. 실제로 직접 출마했다면 낙마 확률이 높고 이 경우 국내 상황이 험난할 것이었다. 그렇다고 제3자를 대타로 내세우는 방안은 결국 현 위원장의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을 것 같다. 물론 대외대표권 위임에 따르는 복잡한 법적 문제와 전례 없는 시도가 실패로 끝날 가능성도 계산에 넣었을 것이다. 정확한 이유가 무엇이건 간에 서너 달 만에 100% 추대 후보 지위에서 후보 지위 자진 반납으로 급전 직하한 한국인권위에 국제사회는 안타깝다는 표정을 짓는다.

ⓒ프레시안

보수단체, '딴청 인사'한 청와대의 애국심 결핍을 비난하라

인권위 입장에서는 출범 이래 틈만 나면 재를 뿌려댄 심술궂은 정권 탓에 다 된 밥상을 뒤엎은 격이라 아쉽기 짝이 없을 것이다. 이 시점에서 분명한 것은 청와대가 현 위원장 대신 국내외에서 누구나 인정할 만한 인물을 인권위원장에 기용했다면 국가인권위가 망설이지 않고 의장 출마를 했을 것이고 이 경우 100% 의장으로 선출될 것이라는 점이다. 물론 인권위는 이것을 그토록 원하던 국제 역량 및 국제 기여 강화의 일대 계기로 삼을 것이었다.

내정 사실을 통보받을 당시의 현병철 교수는 안경환 전 위원장이 중도 사퇴를 결행한 이유가 ICC 의장자격을 갖춘 후임위원장의 임명을 앞당겨서 ICC 의장자리를 굳히기 위한 자기희생적 포석이라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을 것이다. 안 위원장은 자신이 조기 사퇴를 단행할 경우 청와대도 당연히 ICC 의장직을 염두에 두고 후임위원장을 선임할 것으로 기대했다. 인권위에 대한 청와대의 호불호를 떠나 이렇게 하는 것이 최소한의 상식과 '애국심'에 부합한다고 판단했을 것이다. 하지만 청와대는 이런 상식과 선의를 철저히 외면했다. ICC에 대해선 들어본 적도 없고 인권위에 대해서도 눈길 한번 주지 않은 민법 교수를 개인 연고권 안에서 찾아내 덜컥 임명한 것이다. ICC 의장직은 이때 물 건너간 것으로 보면 된다.

현병철 위원장은 이명박 정권의 노골적인 인권위 무력화 정책에 의해 선택된 최약체 인권위원장으로서 향후 행동으로 그렇지 않다는 점을 입증하지 않는 이상 정권의 하수인이라는 혐의에서 벗어나기 어렵다. 인선의 정치적 맥락과 배경을 감안할 때 청와대가 현병철 인권위원장에게 바라는 것이 "균형 감각과 조직 관리 능력"으로 인권위의 독립성을 누그러뜨리는 데 있는 건 분명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정권이 부여한 현 위원장의 사명은 인권의 이름으로 정권의 발목을 잡는 불상사가 일어나지 않도록 인권위를 덜 시끄럽고 덜 껄끄러운 존재로 탈바꿈하라는 것이다. 한마디로 인권을 정권에 복속시키라는 것.

현병철 위원장은 청와대의 이런 인선 의도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사실 청와대와 현 위원장은 인권위원장 자리를 단순한 정권의 전리품으로 여기고 별 생각 없이 주거니 받거니 거래한 끈끈한 사이다. 향후 청와대는 필요할 때마다 현 위원장에게 '자리 값'을 요구할 것이고 현 위원장은 안팎으로 힘들어질수록 믿을 건 청와대밖에 없다고 생각하게 될 것이다. 사람의 일이라 속단은 금물이고 이렇게 되지 않기를 고대하지만 경험칙으로 볼 때 이런 예측이 90% 이상의 확률로 맞더라는 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이렇게 볼 때 임명권자로부터 독립성 약화의 기대를 한 몸에 받는 현 위원장을 수장으로 둔 한국인권위가 독립성이 생명인 전 세계 국가인권기구의 수장이 되겠다고 나서는 것은 객관적으로도 염치없는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부 보수언론과 단체들은 현 위원장의 ICC 의장 출마를 반대하는 공개서한을 ICC와 APF에 보냈다는 이유로 국내 인권단체들에게 원색적 비판을 쏟아낸다. 적반하장 격이다. 이들은 먼저 ICC 의장직 선거를 앞둔 상황에서 현 위원장을 '딴청인사'한 청와대의 애국심 결핍을 비난해야 옳다.

ICC 의장은 국가인권기구의 독립성 수호와 실효성 증진의 상징적 존재가 되는 것이 순리다. 쿠데타가 발생하거나 정권 교체가 이뤄진 국가는 인권기구의 독립성을 침해하기 쉽다. 이런 현상에 대해 한국 인권위는 지금까지 구경꾼 노릇으로 그쳤지만 만약 의장국이 되면 신속하고 단호하게 적절한 옹호 조치를 취해줘야 한다. ICC 의장기구의 일차적 임무가 이와 같이 인권기구의 독립성 옹호라고 할 때 독립성 침해 이력을 가진 정권이 독립성 관리 차원에서 무리하게 선임한 현 위원장의 의장직 수임은 국제적 위선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합의제 인권위, 위원장 뜻대로 결정하기 힘들다

현병철 위원장은 인권위 업무에 워낙 백지 상태라 당분간 업무 장악과 조직 관리에서 적잖은 한계를 노출할 것으로 예상된다. 더욱이 인권위는 합의제 기관이라 위원장이 뜻대로 결정할 수 있는 영역이 좁다. 인권위처럼 위원들의 지명 기관과 출신 배경이 다양한 진성(眞性)합의제기관의 경우 돋보이는 식견과 경륜을 배경으로 탁월한 이견 조정 능력과 대안 제시 능력을 보여주지 못하는 위원장은 머지않아 권위를 인정받지 못하게 돼 있다. 이 경우 위원회 회의는 마냥 겉돌게 돼 있다.

특히 인권위는 합의제기구 중에서도 상임위원들의 높은 참여가 제도화된 민주적 의사결정구조를 갖고 있다. 국가인권위의 최고의사결정기구는 인권위원 11인으로 구성된 전원위원회로서 주로 대외 업무, 즉 진정 처리와 정책 권고 안건을 다룬다. 경륜과 권위가 떨어지는 위원장은 여기서 단순 1표에 지나지 않는다. 인권위원장은 내부 업무, 즉 조직 운영과 일반 업무에 대해서도 마음대로 할 수 없다. 상임위원들의 조언과 견제가 제도적으로 보장돼 있기 때문이다. 위원장과 상임위원(3인)으로 구성된 상임위원회는 매주 사무처의 주요 업무를 보고받고 조언한다. 상임위원회 회의를 주례화한 06년 초 이래 위원장의 월권과 전횡은 구조적으로 불가능하다고 할 수 있다.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상임위원 3인 중 2인의 동의를 구하지 못하는 위원장은 상임위원회에서 어떤 안건도 통과시킬 수 없다. 공식 의결이 필요 없는 보고 안건이나 논의 안건의 경우에도 상임위원들이 한 목소리로 다른 의견을 내면 사실상 그에 따르지 않을 수 없다. 상임위원의 마음과 표를 돌려세우는 것은 기본적으로 전문적 식견과 경륜으로 뒷받침된 위원장의 권위다. 이것이 결여된 위원장은 한 표만 달랑 가질 뿐이다. 다행히 전임위원장들은 상임위원 2인의 협력을 기대할 수 있었다. 자신을 임명한 동일정권의 정부여당이 선임한 상임위원이 늘 2인이었기 때문이다.

이례적으로 현 위원장은 이러한 정권 프리미엄의 혜택조차 받지 못한다. 오는 2010년 12월까지는 상임위원 세 자리 중 두 자리가 '지난 정권'의 정부여당이 임명했거나 임명할 상임위원들로 채워지기 때문이다. 위원장과 상임위원의 중도사퇴에 따라 위원장과 상임위원의 임기가 모두 엇갈리게 된 데다 야당 몫 상임위원이 먼저 교체되는 탓이다. 아무튼 현 위원장은 내년 말까지는 기본적으로 정치철학과 정서가 다른 상임위원 2인을 의식하며 힘겹게 조직을 운영해야 한다. 머지않아 사무총장이 새로 오면 상임위원들의 경계와 견제는 한층 강화되기 쉽다.

위원장이 마주칠 전원위원회의 사정도 좋지 않다. 주요 쟁점 사안에 대한 전원위원회의 표결구도는 현재 6대5, 한 표 차이로 진보적 색채가 다소 강하다는 것이 내외부의 일치된 분석이다. 이러한 표결 구도가 현 위원장의 지도력과 설득력에 따라 바뀌지 않을 경우 현 위원장은 내년 2월 대통령 몫 비상임위원이 교체될 때까지 중요사안에서 소수 보수파의 수장으로 전락할 가능성이 높다. 인권단체들도 단단히 벼르고 있다. 당장 인권위에 대한 감시 비판 활동을 강화할 태세다. 전원위원회와 상임위원회 모니터링 체계화와 전문위원회 활용 증대 방안 등이 논의된다.

현 위원장이 위와 같은 의사 결정 구조를 미리 알았든가 ICC 의장출마구도를 미리 알았더라면 골치 아픈 인권위원장 자리를 덥석 받지는 않았을 것 같다. 개인과 가문의 영광이 되는 대신 연일 창피와 수모를 당하니 지금쯤 후회막급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 법학 교수로서 인권 현장만 모르지 '인권 이론'은 안다고 큰소리쳤는데 결재문서가 올라올 때마다 구체적으로 아는 것이 너무 없다는 사실을 실감하고 있을 것이다. 이미 ICC 의장후보로 제3의 인물을 내세우자는 이색 제안이 나와서 조직내외에서 체면과 위신을 형편없이 구겼다. 임명 첫날부터 수업료를 단단히 치렀지만 앞으로가 더 첩첩산중이다. 현재로서는 돌파전망이 시계 제로에 가깝다.

정말 인권위 위한 의지 있다면 APF 총회에 적극 참가해야

현 위원장은 배짱이 두둑하거나 얼굴이 두꺼운 분도 아닌 것 같다. 이것이 잘 드러난 것이 현 위원장의 이번 APF 연차총회 불참 방침이다. ICC 의장 후보 불출마 결정이 공식발표처럼 국내 문제 치중 방침에 의한 것이라면 가지 않을 이유가 없다. 지금까지 어느 국가든 인권기구의 신임수장이 APF 총회에 얼굴을 비치지 않은 적은 없다. 더욱이 APF 총회는 내용적으로도 짜임새가 있고 유익하다. 매년 방문 조사, 직권 조사 등 인권기구들의 공통 업무와 관심사에 대해 모범사례와 매뉴얼이 발표된다. 정신보건인권, 이주노동자인권, 기업인권 등 전문분야의 최신 동향과 전망이 공유된다. 한마디로 아주 좋은 학습 훈련의 장이다.

신임위원장으로서는 이런 국제회의에 참가해서 동료위원장들과 상견례를 갖고 회의분위기를 파악하며 지적이고 실천적인 자극을 받는 것이 필수적이다. 그야말로 '백문이 불여일견'이므로 직접 가봐야 한다. 조영황 전 위원장도 자서전에서 APF총회와 ICC총회에 가본 게 많은 공부가 됐노라고 밝히고 있을 정도다. 사실 APF 총회에는 출장 예산조차 변변치 못한 개도국 인권기구들도 위원장을 위시해서 상임위원과 사무총장 등 3~4인 참가가 기본이다. 현 위원장이 이런 좋은 기회를 취임 초에 바로 갖게 된 건 오히려 행운이다.

일부러라도 시간을 내서 가야할 좋은 국제모임에 현 위원장이 가지 않기로 결정한 이유는 왠지 자신이 없고 부담스럽기 때문일 것이다. 신임 인권위원장이 아태지역의 동료위원장들과 상견례도 못 나눌 정도로 내면 깊숙이 주눅이 들어있는 건 큰 문제다. 이건 현 위원장 개인이 아니라 한국 인권위의 위상과 체면이 걸린 중대한 문제다. 신임위원장이 들어서더니 ICC 의장출마 포기 선언에 이어 회의 자리에도 오지 않고 숨어버린다면 국제사회가 어떻게 보겠는가. 현 위원장 개인은 다소 어색하더라도 한국인권위의 존재감을 보여주고 국제사회의 의구심을 풀어주기 위해서라도 APF총회에 가야 한다.

APF 본회의장에 달려가서 '한국 인권위에 대해 걱정하는 것 잘 안다. 나도 인권위에 대한 일방적 조직 축소를 잘한 일로 보지 않으며 부족한 인권위 인력을 늘리기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 무소속 독립기관의 수장으로서 인권위의 대정부 독립성을 수호하는 데 앞장설 것이며 한국 인권위의 좋은 전통을 계승발전하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할 것'이라고 당당하고 떳떳하게 선언해야 한다. 이는 물론 현 위원장이 본인의 독립성 수호 의지에 대해 양심 성찰을 한 후 임명권자가 아니라 법에 충성하기로 다짐한 후에야만 가능하다.

만약 이런 인식과 의지가 진실로 있다면 APF 연차 총회만큼 이런 발언을 공개적으로 하기 좋은 데는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APF 총회에 불참하기로 결정한 것을 보면 현 위원장에게는 이런 인식과 신념, 자신과 배짱이 없는 것이 아닌가 걱정된다. 만약 그렇다면 현 위원장은 더 이상 지체 없이 인권위원장직을 내려놓아야 한다. 현 위원장은 이제 법의 명령과 국민의 기대에 부응하기로 결단하든가 곧바로 사퇴하기로 결단해야 한다. 어렵더라도 이 길만이 본인과 인권위의 위상과 명예를 그나마 지키는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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