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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스트 87년 체제'에 대한 고민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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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포스트 87년 체제'에 대한 고민이 필요하다 [13년 묵은 노조법, 어디로 가나? ①] 명품 노사관계 위한 서울컨센서스도 가능하다
복수노조와 전임자 문제가 지난 4일 '3자 합의' 이후 국회에서 마지막 줄다리기 중이다. 13년 동안 묶여 있던 두 제도를 떨어트린 합의안은 그대로 국회를 통과할 수 있을까? 민주노총 및 야당은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아니, 어떤 선택을 해야 할까?

국회 논의가 진행 중인 가운데 프레시안은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들과 현장 노동자의 목소리를 통해 그 방향을 찾아보려고 한다. 6편의 글들은 3자의 합의안에 대한 평가를 중심으로 노동조합관계법의 올바른 개정 방안에 대한 고민을 담고 있다. <편집자>


민주노총과 같이 한나라당안에 반발하는 재계의 진짜 목적은?

좀처럼 변할 것 같지 않았던 복수노조·전임자 조항의 13년 냉동상태가 마침내 해동 단계에 들어섰다. 5년-5년-3년으로 이어지던 유예가 풀리고 현실이 되어 가고 있다. 물론 지금 진행되고 있는 국회 환경노동위원회 차원의 공방을 보건대 매끄러운 법안처리가 예상되는 것도 아니어서 속단하기는 이르다. 다만 이 문제를 또 다시 창고에 넣어둘 수는 없고 뭔가 결론을 낼 수밖에 없는 것은 확실하다.

환노위에서 벌어지는 논란의 핵심은 지난 12월 4일 정부와 한국노총·경총이 마련한 합의안을 어떻게 할 것인가이다. 물론 한나라당이 전임자관련 합의사항을 약간 손질한 건 사실이지만 한나라당 안의 골격은 노사정 합의안 그대로다. 합의안의 정당성을 부정하고 전면 수정을 요구하는 민주노총과 야당의 요구가 한 편에 있다면 합의안 원안을 지켜내려는 경제 5단체의 목소리가 다른 한편에 있다.

재계 요구의 핵심은 한나라당이 수정한 타임오프의 범위를 확대한 '노조 관리업무'를 철회하라는 것이다. 그러나 재계 입장에서 한나라당 안이 합의안보다 꼭 못한 것도 아니다. 한나라당이 타임오프의 대상 직무를 확대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 대신 합의안에 없던 처벌조항이 추가됐기 때문이다. 한나라당 안은 전임자를 법에서 정한 기준 이상으로 요구하는 노조를 처벌할 수 있게 했다. 이 조항은 법의 집행력을 제고하는 강력한 수단이다.

▲ 좀처럼 변할 것 같지 않았던 복수노조⋅전임자 조항의 13년 냉동상태가 마침내 해동 단계에 들어섰다. 5년-5년-3년으로 이어지던 유예가 풀리고 현실이 되어 가고 있다. ⓒ연합뉴스

당초 합의안이나 현행법에서는 사용자만 부당노동행위로 처벌할 수 있도록 되어 있는데 이 경우 사용자는 자기 의사에 반하여 전임자를 줬지만 처벌은 자기가 받아야하는 불합리함이 있었다. 이 때문에 실제 사용자 처벌을 요구하는 주체가 모호하여 법의 실제 규율효과가 크지 않을 것이라는 예측도 많았다. 일부 전문가는 이렇게 될 경우 관련 조항이 사문화될 것이라고 전망하기도 했었다. 반면 기준 이상의 전임자를 요구하는 노조를 직접 처벌한다는 것은 법 집행의 실효성을 크게 높이는 효과가 있을 것이다.

한나라당 개정안으로 또 하나 분명해진 것은 '전임자규제'가 형식은 직무별 타임오프제를 취하고 있지만 실제 내용면에서는 전임자 수를 규모별로 제한하는 방식에 가깝다는 점이다. 이는 현장에서의 제도 운영에서 큰 차이를 보이게 될 변경이다. 객관적으로 전임자 실태의 입증이 가능한 방식은 직무별 타임오프가 아니라 규모별 상한제이다. 노사 합의에 따라 전임자의 직무별로 타임오프를 정해야 한다면 이는 개별 사업장 차원의 노사갈등을 자초하는 일이 될 것이다. 또한 각 사업장마다 노사의 교섭력에 따라 전임자제도의 운영이 천차만별이게 된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한나라당의 전임자 제도 손질은 대체로 새 제도의 현실적합성과 실효성을 크게 높이는 것으로 재계 입장에서 크게 불리할 것이 없다. 따라서 재계의 합의안 고수 요구가 겨냥하는 바는 오히려 환노위 차원의 손질을 최소화하기 위한 예방적 로비가 아닐까? 예컨대 처벌조항 삭제라든가 상급단체 파견 전임자의 인정을 위한 노동계 로비에 대한 맞불이라고 하겠다. 그런데 재계의 입장에서 더 중요한 포인트는 복수노조 2년 6개월 유예와 창구단일화 합의를 지키는 일일 것이다. 이는 재계가 결코 놓칠 수 없는 합의 성과이다. 한국노총도 같은 입장이다.

논의가 정말 필요한 것은 복수노조 유예…기본권을 이해당사자가 합의로 결정?

따라서 환노위 차원의 마지막 공방에서 좀 더 심도 있는 논의가 필요한 사항은 복수노조 문제다. 원칙을 말한다면 전임자 제도개선은 법이 나설 문제가 아니라 그야말로 노사합의에 맡겨둘 사항이다. 노동계가 스스로 전임자제도의 남용을 개선하겠다는 확고한 의지만 있다면 노·경총이 일정한 가이드라인에 합의하고 각 사업장에서 그것을 지키도록 유도해 가는 것이 훨씬 진보적이고 세련된 방법이다. 노동계가 주장하듯이 그것이 글로벌 스탠다드고 선진화다. 그러나 법의 강제가 아니고는 전임자 중독을 단절하기가 어렵기 때문에 약간의 우격다짐이 불가피해진 것이다.

반면 복수노조의 허용 여부를 노사 합의에 따라야 한다는 것은 상식에 어긋난다. 근로자의 기본권을 지켜줘야 하는 정부가 기본권 보장여부를 이해당사자인 노사 합의로 판단한다는 것은 정부가 그 의무를 다하지 못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여건이 마련되지 않았다면 노사의 의견을 들어 정부가 스스로 유예시키면 그만이다. 그런데도 정부가 지난 15년간 세 번 네 번 반복하여 이런 합의의 당사자가 된 것은 좀 우스운 일이다.

이런 사정을 감안할 때 환노위 차원에서 좀 더 따져봐야 할 것은 복수노조 유예의 정당성과 그 기간의 적절성 그리고 창구단일화의 방법과 입법형식 문제 등이다. 막상 기업단위 복수노조 금지로 권리를 침해받고 있는 당사자는 3자의 합의에 참여할 수 없었다. 노사가 모두 반대하는 상태에서 협상테이블에 참여하지 못한 목소리(unheard voices)를 대변해야 하는 당사자는 정부와 국회다. 무엇보다도 2년 6개월은 좀 길어 보인다.

추미애 위원장의 환노위가 새 합의 도출할 수 있을까? '글쎄…'

그렇다면 환노위는 12.4 노사정 합의안의 한계를 보완하여 민주노총과 야당을 아우르는 새 합의를 도출해 낼 수 있을까?

전망은 비관적이다.

민주노총이 집회와 총파업을 불사하겠다고 하지만 한국노총 중심의 합의를 뒤엎을 만큼의 분노가 쌓여 있는 것 같지는 않다. 더구나 지난 10여년의 사회적 대화에서 확인되었듯이 민주노총의 타협능력은 믿을 것이 못된다. 환노위 차원에서 노동계에 좀 더 유리한 수정안이 제시된다 하더라도 민주노총의 관성으로 보아 선뜻 합의에 나서지 못 할 것이다. 한편 노동부와 노·경총은 합의 당사자로서 환노위 주도의 합의안 수정에 매우 소극적일 것이다. 한나라당 역시 당론으로 법안을 추인한데다 추미애 위원장 주도의 수정을 탐탁지 않게 여길 것이다.

합의안 수정이 여의치 않겠지만 그래도 노동법 개정에서 야당의 동의 절차를 생략할 수는 없을 것이다. 따라서 한나라당도 야당 의견을 일부 받아들일 가능성이 높다. 이 때 여야가 무엇을 어떻게 수정할 것인가 하는 점도 흥미로운 관전 포인트다. 노사는 지금 주로 전임자 조항을 둘러싸고 치열한 공방을 벌이고 있다. 복수노조 유예에 대해서는 이해가 일치하기 때문이다.

추미애는 '6월 비정규법의 전략'을 재현할까?

마지막 하나의 변수는 여당이 일체의 수정을 거부할 경우에 야당의 선택이다. 야당은 현행법 시행을 불사하고 법개정을 반대할 수 있을까? 지난 6월 비정규법 개정을 시도하던 한나라당은 추미애 위원장의 버티기로 큰 낭패를 본바 있다. 야당은 이번에도 비슷한 교섭력을 발휘할 수 있을 것인가? 이는 현행법을 그대로 시행한다는 것이 제도개선의 차원에서 무슨 의미가 있는지에 대한 판단에 따라 입장이 달라진다.

▲지난 6월 비정규법 개정을 시도하던 한나라당은 추미애 위원장의 버티기로 큰 낭패를 본바 있다. 야당은 이번에도 비슷한 교섭력을 발휘할 수 있을 것인가? ⓒ연합뉴스

우선 복수노조는 즉시 허용되고 창구단일화의 법적 의무가 없는 상태가 되어 자율교섭이 가능하게 된다. 전임자의 경우에는 전면 금지되고 어기면 부당노동행위로 처벌할 수 있다. 이는 개혁원칙을 지지하는 쪽이 바라는 바다. 일부 전문가와 경제부처, 일부 노동운동세력과 현대기아차그룹 등이 이 입장에 가깝다.

이런 선택의 가장 큰 난점은 시행초기 겪게 될 사업장의 혼란이다. 복수노조의 양태가 어떻게 전개될 것인지 그리고 전임자 전면 금지가 실제 가능할 것인지에 대하여 누구도 분명한 답을 갖고 있지 않다. 다만 노동부가 한 때 주장했던 대로 '선시행·후보완'을 대안으로 생각할 수는 있다. 그러나 이러한 길을 선택하기엔 정부여당과 노·경총이 너무 많이 와버렸기 때문에 추 위원장과 야당으로서도 선뜻 선택하기 어려울 것이다. 합리적인 기대는 여야가 합의 불참자를 배려하는 수정안에 타협하여 연내에 처리하는 것이다.

타협 선택한 장석춘, '일부 업종 노조'를 위해 대의 버렸다

복수노조·전임자 제도개선을 현실의 문제로 만들고 제도 변경의 골격을 주도적으로 정해간 것은 한국노총이다. 장석춘 위원장의 막판 전략적 선택은 투쟁이 아니라 타협이었다. 11월 30일 장 위원장의 전격적인 전략수정은 조직 안팎의 많은 논란을 불러 일으켰지만 노사정 간의 팽팽한 대치를 협상과 타협으로 돌려놓는 계기가 됐다. 그리고 전임자축소 수용과 복수노조 반대라는 그의 입장은 합의안의 골격이 되었다. 전임자에서 양보하고 투쟁을 접은 것은 정부 특히 경제부처의 강경 입장을 누그러트리는 계기가 됐다. 여기에는 한나라당의 정무적 판단도 중요한 역할을 했을 것이다. 한국노총은 그러한 정당성으로 정부를 협상테이블로 불러 낼 수 있었고 타협안을 자신들에게 유리하게 끌고 갈 수 있었을 것이다. 2010년 상반기 타임오프 총량산정에 있어서도 한국노총은 상당한 발언권을 행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장 위원장의 결단은 "전체 노동자들의 대변자"라는 노동운동의 명분과 대의는 저버리는 선택이었다. 철저하게 한국노총만의 이해관계에 충실한 선택을 한 것으로 평가된다. 복수노조와 전임자제도 모두 한국노총에 위협이 된다고 생각한다면 복수노조를 반대하고 그 대신 전임자제도에서 양보를 얻어내는 것이 현실적이기 때문이다.

▲ 복수노조가 허용되면 사업장마다 노동조합이 난립하고 선명성 경쟁으로 산업현장이 큰 혼란에 빠질 것이라는 장 위원장의 경고도 과장돼 있다. 아직 노조 독점권을 누리고 있는 일부 업종의 반대가 이러한 판단에 영향을 준 것으로 해석된다.ⓒ프레시안
다만 의문인 것은 노동운동의 대의가 아니더라도 실리 면에서 복수노조 허용이 한국노총 전체에 불리할 것인가에 대한 판단은 분명치 않다. 최근 민주노총의 조직적 이완이 가속화되고 있는 점을 감안하면 더욱 그렇다. 또한 복수노조가 허용되면 사업장마다 노동조합이 난립하고 선명성 경쟁으로 산업현장이 큰 혼란에 빠질 것이라는 장 위원장의 경고도 과장돼 있다. 아직 노조 독점권을 누리고 있는 일부 업종의 반대가 이러한 판단에 영향을 준 것으로 해석된다.

사실 복수노조의 금지는 1963년 이래 한국노총의 독점을 지탱해 주는 버팀목이었다. 1987년 11월에 있었던 복수노조 금지조항의 강화도 이후 민주노조의 공격으로부터 조직을 보존하는 데에 크게 기여해왔던 것이 사실이다. 삼성을 비롯한 몇몇 무노조 기업들이 이 조항에 의지하여 노사관계를 관리할 수 있었던 것은 역사적인 맥락으로 보면 부수적인 효과에 불과하다.

쉽게 얻은 재계·정부…노조 생존 위협하는 제도가 지탱 가능할까?

한편 재계는 한국노총의 '이니셔티브'에 힘입어 복수노조 유예와 전임자 개선이라는 성과를 손쉽게 얻을 수 있었다. 사실 한국처럼 전임자의 임금을 전적으로 회사에 의존하고 있는 기형적인 관행은 반드시 타파되어야 하지만, 그 전부를 노조가 부담하고 이를 어기면 처벌하자는 현행법도 비현실적이고 지나치게 공격적이다.

합리적인 사용자라면 전임자의 과도한 남용을 막되 노동조합의 정상적인 운영을 위해서는 그 비용의 일부, 예컨대 50%라도 회사가 부담하겠다고 나서는 것이 정상일 것이다. 노조운영의 투명성 제고와 전임자 제도의 합리화를 목표로 하는 것은 맞지만 노조 생존 자체를 위협하는 제도는 노사관계 현실에서 지탱될 수 없기 때문이다.

정책연대 파기를 우려하던 한나라당과 정부는 한국노총과의 우호 협력관계를 유지하면서도 13년 묵은 숙제를 해냈다는 성과를 챙길 수 있게 됐다. 이 문제에 관하여 민주노총은 선택이 분명치 않았고 투쟁과 협상 모두에서 주도권을 발휘하지 못 했다. 무엇을 원하는지가 분명치 않았고 원하는 것을 효과적으로 관철하지도 못한 것으로 평가된다.

'포스트 87년 체제'를 위한 뉴딜의 공론화는 어느 정도 왔나?

노사관계 시스템의 변화를 설명하는 신제도주의 이론 중에 진화생물학의 단속균형(punctuated equilibrium)의 개념이 등장한다. 생물의 진화와 마찬가지로 제도의 진화도 눈에 보이지 않는 점진적인 변화보다는 단속적인 제도의 재정열(realignment)을 통해 다음의 진화단계로 나간다는 해석이다. 이는 노사관계의 '87년 체제' 형성 과정에 딱 맞는 얘기다.

▲지금 한국 노동운동이 겪고 있는 절체절명의 위기와 노동조합의 정치사회적 고립은 '87년 체제'가 이제 한계에 달했기 때문일 수 있다. ⓒ프레시안

그리고 지금 한국 노동운동이 겪고 있는 절체절명의 위기와 노동조합의 정치사회적 고립은 '87년 체제'가 이제 한계에 달했기 때문일 수 있다. 1997년 이후 노동시장은 급속하게 변했는데 노사관계는 아직 1987년 시기에 형성된 제도와 관행에 갇혀 있기 때문에 시장과 제도의 부조화가 심각한 수준에 이르렀고 그 부작용이 노동시장 양극화와 상시적인 고용위기 그리고 노동운동의 고립으로 표출되고 있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시장과 제도의 부정합을 바로 잡는 노사관계의 뉴딜이 필요한 시기일 수 있다. '87년 체제'를 넘어서는 새로운 균형으로 나아가는 새로운 질서와 이를 위한 새 계약(new deal)이 요구되는 것이다. 그러나 새로운 단속균형으로의 진전은 저절로 되는 것이 아니라 노사정의 전략적 선택으로 가능하다는 점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지금 전임자·복수노조 문제를 둘러싸고 노사정이 극단적으로 갈등하고 있는 이 시기가 '포스트 87년 체제'를 설계할 수 있는 적절한 시점일 수 있다. 따라서 노사정 모두가 이에 관한 법리적인 문제만이 아니라 이 제도의 변경으로 초래될 노사관계 구조의 변화를 함께 구상해야 한다.

시기적으로 보면 한국은 이미 노사관계 전환의 마지막 고비를 넘기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노사정은 전임자·복수노조 제도개선에 따른 세세한 이해득실에만 매달릴 것이 아니라 '포스트 87년 체제'를 위한 노사관계 뉴딜의 종합패키지를 구상하는 공론을 적극적으로 펼쳐나가야 한다. 노사정의 능동적 선택에 따라서는 기업의 울타리에 갇혀 조합원만의 권리증진과 임금극대화에 충실한 '87년 체제'를 버리고 보다 고용친화적이고 혁신지향적인 노사상생의 새 패러다임을 정립시킬 수도 있다. 민주화와 임금중심의 87년 노사관계 패러다임을 상생(파트너십, 연대)과 고용 중심의 포스트 87년 패러다임으로 전환해야 할 시기가 왔다.

'87년 체제' 버리고 '새 집 짓기' 손을 잡아야 한다

복수노조·전임자제도의 변경 그 자체가 '87년 체제'의 근간을 흔들 수 있다고 보지는 않는다. 하지만, 이미 노동시장의 변화가 '87년 체제'를 앙시앙레짐으로 만들어버렸기 때문에 복수노조·전임자제도의 변경은 전체 시스템의 전환을 촉발하는 계기가 될 수 있다. 지금은 분명 또 한 번의 단속균형으로 나아가는 지각변동의 시기다. 노사단체와 정부는 차라리 이미 그 시대적 효용가치를 다한 '87년 체제'라는 헌집을 버리고 새집을 짓겠다고 손을 잡는 것이 낫다. 대기업 정규직 중심의 닫힌 노사담합구조를 넘어 유연안전성에 기초한 상생타협체제를 구축하는 데에 한국 노사관계의 미래가 있고 한국경제의 성패가 달렸다.

어차피 국회 입법과정이 끝나더라도 시행령 공방은 계속될 것이다. 전임자 실태와 직무에 대한 노사정 공동조사가 예정돼 있고 이를 근거로 타임오프 총량의 기준이 마련될 것이다. 또한 정부는 복수노조 창구단일화의 구체적인 방안도 시행령으로 정해야 한다. 국회의 법개정 절차가 마무리되더라도 내년 상반기까지 정부와 노사 간의 공방은 더욱 치열해 질 것이다. 설사 제도 정비가 끝나더라도 현장이 변하는 데에는 훨씬 더 많은 시간이 걸릴 것이다.

짐작컨대 전임자제도만 하더라도 파업 기간 중의 무노동-무임금 관행의 정착 과정을 보건대 10여년에 걸쳐 서서히 변해 갈 것이다. 복수노조의 경우에도 새 질서 정착까지는 최소 5년 이상의 시행착오가 예상된다. 이러한 새로운 질서 형성기에 노사정이 어떤 비전과 목표, 어떤 전략적 선택에 나서느냐에 따라 '포스트 87년 체제'가 만들어질 것이다.

한국은 OECD 보편의 가치와 기준을 받아들여 그야말로 아시아 최고의 명품 노사관계를 만들어 낼 수 있는 좋은 조건을 갖추고 있다. 밑으로 부터의 민주화와 자주적인 노동운동의 전통을 갖고 있으면서도 경제적으로 성공한 유일한 아시아 국가라는 브랜드는 한국의 자랑이다. 지금의 노사불신과 사회갈등만 제도적으로 잘 수렴한다면 한국은 최소한 아시아스탠더드(Asian Standards)를 주장할 수 있고 더 나아가 워싱턴콘센서스와 베이징컨센서스를 넘어서는 서울컨센서스를 만들어 갈 수 있다.

노사정은 이런 비전을 갖고 앞으로 5년간, 어떤 노사관계를 만들기 위하여 제도개선에 나서게 되었고, 복수노조 전임자제도 변경에 따라 노사관계가 어떻게 변할 것인가에 대한 폭 넓은 공론화와 끊임없는 자문자답에 몰두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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