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민의 의료 기본권
일주일 전 한중 자유무역협정(FTA)이 실질적으로 타결되었다고 한다. 숨 돌릴 여유도 없이 주말에는 뉴질랜드와도 협정 타결을 선언했다. 담당한 관료와 정부는 성과이자 치적이라 말하겠지만 과연 그럴까.
두 나라와 맺은 FTA라면 당장 농업과 축산 피해를 주목한다. 이 나라들과 맺은 협정의 위력을 다시 설명하는 것은 부질없다. 중국 농산물이야 진작 밥상을 장악하고 있던 참이고, 뉴질랜드 역시 농업과 축산의 대국이다. 이제 한국 농업과 농민의 운명은?
당사자들이 상세한 내용을 알 수 없다는 것이 의아하다. 더 이상한 것은 사회 전체가 침묵한다는 것이다. 당장 난리라도 난 것 같은 반응을 예상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걱정하는 목소리는 이상하게 작고, 여론의 관심도 놀랄 만큼 약하다. 거세게 반발하는 몇몇 농민 단체들의 처지가 외롭다.
짐작하는 이유 한 가지는 피로감. 거듭되는 FTA가 사람들을 무디게 만든 것은 아닐까? 그러나 그것만으로 턱없는 무관심을 설명하기는 어렵다. 그 유명한 또는 악명 높은 중국 농산물이 아닌가. 그런데도 일주일이 지나기까지 괴괴할 정도로 조용하다.
그렇다면 남은 이유는 이제 '국익'이 아니라는 것이 아닌가. 사실 경제, 정치, 사회, 어느 것 할 것 없이 농업과 농민의 비중은 크게 줄었다. 당장 미국과 FTA를 협상하던 때와 비교해보라. 농산물로만 보면 중국과의 협정이 미칠 영향은 비교가 불가능할 정도로 크다. 하지만 어느 하나 자기 이익의 목소리는 낮다.
근본적으로는 두 가지 태도 또는 이해 방식이 한국 농업을 압도한다. 하나는 대세론, 또 한 가지는 비교 우위론이다. 후자는 공리주의에 토대를 둔 '농업 희생론'이라고 해도 좋다. 이 둘은 당연히 서로 맞물려 있고 원인-결과를 가리기도 어렵다.
숫자로는 억지라고 하기만은 어렵다. 1970년 1400만 명 수준이던 농가 인구는 이제 약 280만 명 수준으로 줄었다. 전체 인구에서 농가 인구가 차지하는 비중은 5.7% 수준이라고 한다. 어느 쪽으로 보든 소수 집단이 되었다.
경제적 비중은 더 작다. 국내 총생산에서 농업이 차지하는 비중은 3%에도 미치지 못한다. 괜한 '감정'에 휘둘릴 일이 아닐지도 모른다. 그렇지 않아도 경제와 통상 정책은 이 논리에 충실하다.
대세든 비교 우위든 결과는 마찬가지다. 결국 농업과 농민은 고사를 강요당하던 참이다. 여기다 이번 FTA가 내리막길에 가속기를 밟는 모양새가 되었다. 대세론은 더욱 굳건해질 것이고, 더 이상 비교 우위와 희생을 말할 필요조차 없을지 모른다.
그리고 지금의 침묵. 이는 어떤 막다름에 이르렀음을 나타내는 것으로 읽힌다. 그리고 막다름은 또한 새로움과 바뀜의 징후이기도 하다. 농촌과 농민을 보는 시각을 경제에서 삶으로 이동해야 한다는 것.
비교 우위와 경쟁력을 말하는 사이 사람들의 삶은 고루 나빠졌다. 경제만이 아니라 삶이 쇠퇴했다는 것이 중요하다. 적나라한 잣대 한 가지가 '무의면'이 늘고 있다는 점이다. 무슨 1960년대 이야기를 하느냐고 할지 모르지만 다시 그렇다.
충북 단양군의 통계 연보를 참고하면, 2007년에 여덟 곳이던 의원 수는 2012년에 여섯 곳으로 줄었다. 그나마 도시에 모여 있으니 2개 읍 6개 면 가운데에 다섯 개 면에 의원(한의원과 치과 포함)이 없다.
인구가 약간(2007년 3만2399명에서 2012년 3만1253명으로) 감소하기는 했다. 그러나 노인 인구가 빠르게 늘어나는 만큼 이만한 인구 감소로 전체 의료 수요가 줄었을 리는 만무하다. 2012년 현재 65세 이상 노인 비율이 23.3%나 된다. 의료 기관이 줄어든 이유야 말하지 않아도 뻔하다.
어찌 단양만의 특별한 사정이라 할 수 있을까. 약간의 편차는 있을지언정 군 지역, 농어촌은 어디 없이 비슷한 사정을 갖고 있을 것으로 짐작한다. 혹 '잘 나가는' 곳이라고 해봐야 오히려 예외다.
농촌 인구가 줄고 노인의 비중이 높아진다는 것은 상식이다. 하지만 이런 종류의 무미건조한 숫자로 농촌을 모두 설명할 수 없다. 계속 줄어드는 의료기관이 대변하는 일상이 눈에 선하지 않은가. 몇 퍼센트(%) 숫자 뒤에 숨은 현실 세계, 삶의 터전이 해체되고 있다는 것이 보인다.
FTA 대책이 그 무엇이든 이런 현실을 다 담기는 불가능하다. 그런 뜻에서 이번 FTA는 중요한 계기지만 그것으로 멈추어서는 곤란하다. 다른 무엇보다 질문을 바꾸어야 한다.
생활과 삶의 터전으로서 농촌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묻는다. FTA의 부정적 효과, 특히 경제 효과가 어떨 것인가를 묻는 것이 아니다. 거기에 따르는 대책도 그 다음 과제로 물러난다. 농촌을 어떻게 할 것인가가 먼저, 그런 다음에 FTA(그 안에서의 농업)를 어떻게 할 것인가를 물어야 한다.
이렇게 해야 하는 근거는 농촌과 농민의 삶이 권리라는 데에서 출발한다. 어느 지역에서 무엇을 하고 살든 품위 있는 삶을 유지하는 것은 기본권이다. 게다가 현재의 농촌과 농민은 사회적으로 국가와 정책에 의해 제약된, 역사적 결과물이 아닌가. 심지어 권리가 아닌 '응분의 몫(desert)'으로 생각해도 그들은 그럴 자격이 있다.
우선, 아무리 어려워도 기본 방향에서 출발해야 한다. 경제 단위로서의 농촌과 농업이라는 틀을 바꾸자. 어떤 개혁으로도 '돈이 되는' 농업이 되기는 어려워 보인다. 시장 원리를 거부해야 한다는 뜻이다. 더 구체적인 방안을 내는 것은 우리의 능력을 넘지만, 일본의 경제학자 우자와 히로후미가 말하는 '사회적 공통 자본'으로서의 농촌에 공감하는 바가 크다.
"하나의 국가가 단순히 경제적인 관점에서만이 아니라 사회적, 문화적인 관점에서도 안정적인 발전을 이루기 위해서는 농촌의 규모가 어느 정도 안정적인 수준으로 유지돼야 한다. (…) 특히 한 나라의 사회적, 문화적 수준을 계속 높게 유지하기 위해서는 농촌에서 태어나고 자란 젊은이들의 수가 언제나 일정한 수준으로, 그들이 도시에서 태어나고 자란 젊은이들과 끊임없이 접촉하는 것을 통해 우수한 문화적, 인간적 조건이 창출되는 것이 필요하다." (<사회적 공통자본>(이병천 옮김, 필맥 펴냄), 55쪽)
지나치게 이상적이고 비현실적이라는 비판은 감수하려 한다. 그러나 이를 정책 제안이 아니라 원리로 보면 다른 의미의 현실성을 얻는다. 주류의 경제적 관점을 벗어나야 실마리가 보인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경제 단위로부터 정의로운 삶의 공간으로 시각을 전환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렇게 출발하면, 교육과 복지, 의료에 충실해야 하는 것은 바로 따라 나오는 요구다. 특히 의료는 농촌 생활을 걱정하게 하는 가장 중요한 요인이다. 앞서 살펴본 사례 그대로다. 최소한을 넘어 품위 있는 생활이 가능한 수준으로 끌어올려야 한다.
누가 할 것인가. 현재의 정치경제적 권력 관계를 생각하면 중앙 정부의 역할을 훨씬 더 키워야 한다. 분만, 응급 의료, 노인 복지 등의 대책이 산발적으로 있었지만, 더 종합적이고 수준 높은 지원이 필요하다.
당장은 일반적인 의료 대책조차 급하다. 의무적으로 복무하는 공중보건의조차 줄어들면 무슨 대책이 있는지. 정부의 소극적 태도가 아쉽고 답답하다. 1970년대 말과는 전혀 다른 상황이지만, 농어촌을 중심으로 한 일차의료 또는 일차 보건 의료의 체계와 네트워크를 재구성해야 하지 않을까. 중앙 정부가 나설 것을 촉구한다.
복지나 교육은 자꾸 지방 정부에 떠맡기려는 태도가 영 미덥지 않다. 보육과 급식을 두고 한바탕 소란이 있지만, 다른 보건과 복지 사업도 크게 다르지 않다. 재정이 부족한 지방 정부로서는 중앙 정부가 지원하겠다고 한들 반가워하기 어렵다.
매칭 사업이 대부분인데, 지방 정부가 어느 정도 비율만큼 돈을 대야 하기 때문이다. 아예 중앙 정부 지원을 거부하는 일도 늘어나고 있다. 보건복지 수요가 늘면 이런 일이 더 많아질까 걱정스럽다.
두어 가지 급한 일만 짚었지만 이게 다가 아니라는 것은 더 말할 필요도 없다. 그러나 이만해도 농촌과 농민의 문제를 다시 '사회화'해야 한다고 주장하기에는 충분하리라고 판단한다.
거듭 말하지만 FTA에서 농업 전체로, 그리고 경제적인 것에서 사회적인 것으로 이동해야 한다. 이렇게 되면 농촌과 농민은 한국 사회의 권리와 정의를 가늠하는 또 다른 리트머스 시험지 노릇을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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