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밤이었다. 생면부지의 사람들이 술잔을 주거니 받거니 하며 낯을 익히다 어느덧 불콰해진 얼굴로 어깨동무를 하던 밤이 있었다. 사랑방을 자처하며 오합지졸들을 끌어 모은 집주인은 묵혀둔 동치미 독 헐 듯 냉장고를 헐어 자꾸만 음식을 내왔고 밤도 좋고 술도 좋고 인심도 좋은 시간이었다. 막차 시간이 코앞이라는 사실 말고는 나쁠 게 하나도 없었다. 시간을 재고 있던 내가 적당한 때를 보고 일어서자 집주인이 덜컥 팔을 잡아끌었다. 진짜 보고 가야 할 사람이 아직 안 왔다는 것이다. 그게 누구시냐는 물음에 사랑방 주인장이 답했다. "일단 한번 만나봐."
나는 그날 막차를 놓치고도 한참이 지나서야 사랑방 자리를 정리할 수 있었다. 그렇게 놀고도 흥이 가시지 않아 집으로 돌아가는 택시 안에서 홀로 낄낄거렸다. 악기가 사람을 닮은 것인지, 사람이 악기를 닮은 것인지 여운을 길게 남기는 것이 나타난 사람이나 그가 들고 온 악기나 꼭 한 모습이었다. 나는 그녀가 배웅가라며 불러 준 천안도 삼거리를 제멋대로 흥얼거리며 아주 그냥 취해버렸다. 다음 날 두통을 부르던 숙취는 없었다. 그 밤엔 술이 아니라 사람에 취했던 것이다.
정민아, 가을밤에 만났던 그녀를 한 계절을 보내고 다시 만났다. 25현의 가야금을 연주하는 싱어송라이터, 국악기를 들고 홍대 앞 라이브클럽에서 공연하는 '희귀한' 뮤지션, 국악으로 포크와 재즈, 일렉트로닉 음악을 하고, 4개의 정규앨범과 다수의 프로젝트 음반을 낸 전업가수. 정민아를 소개하려면 이것저것 화려한 수식들이 많다. 심지어 그녀는 팬 카페와 페이스북 팬 페이지도 보유한 스타였다. (비록 팬 카페주인과 페이지 주인이 본인이기는 하지만) 그러나 이런 소개보다도 첫 대면과 동시에 속이 뻥 뚫리는 그녀의 호쾌함이 무엇보다 사람을 홀린다. 시원시원한 이목구비는 덤으로 봐도 좋고 망설임 없는 그녀의 행보는 일단 한번 만나보라던 사랑방 주인장의 자신감을 단연 인정하게 하는 대목이다.
"제가 그 전에는 대한민국의 사회, 정치적인 문제에 전혀 관심이 없었는데, 별 생각 없이 나갔던 광우병 촛불 집회에서 완전히 바뀌었어요. 그 당시에 수많은 경찰들이 거리를 메우고 길을 못 건너게 하는 거예요. 나는 자유로운 인간이라고 생각하고 살았는데 그게 아니었어요. 권력에 의해 한 순간에, 아무 때나 바스라질 수 있는 자유 안에서 살았던 거지요. 그저 길을 건너려고 하는 사람을 권력이 저렇게 탄압할 수 있다는 것을 한 순간에 알게 되면서 제 생각과 삶이 완전히 달라졌어요."
용산 참사, 이랜드 노조, 이주노동자,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과 폭력을 겪고 있는 여성들, 세월호 참사. 우리 사회의 이면을 앓고 있는 곳이라면 부르면 무조건, 부르지 않아도 찾아서 다녔다. 한 덩치 하는 가야금을 이고 지고 가야 하는 것은 그녀에게 결코 수고스러운 일이 아니었다. 음악으로 세상을 바꿔보리라는 포부는 없다. 음악이 상처를 치유할 것이라는 낙관도 없다. 음악이 힘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힘이 있든지 없든지 간에 해야 한다고 했다. 가만히 있을 수 없으니까, 몰랐던 것을 알게 됐으니까 다시 돌아갈 수가 없단다.
"저는 성수대교와 삼풍백화점이 무너졌을 때 정부 책임이 있다고 한 번도 생각해보지 않았어요. 당시 제가 봤던 어떤 보도에서도 그런 식으로 말하지 않았거든요. 그래서 그냥 사고가 났구나 하는 정도로 알고 무심히 넘겼던 거예요. '해결되지 않은 과거는 반드시 미래에 되돌아온다'. 이건 되게 명백한 진실 같아요. 세월호 참사를 그때의 저처럼 단순한 사고로 보고 있는 사람들이 많아요. 이 사건이 결코 단순한 사고가 아니라고 말을 해줘야 해요. 제 음악과 활동들은 침묵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여길 봐달라고 하는 외침이기도 하지만 이 사건이 어떻게 될지 우리가 지켜보고 있겠다는 의미이기도 해요."
지난해 5월 홍대역과 합정역 사이에서 예술인 100팀의 버스킹(거리에서 연주와 노래를 하는 행위)이 있었다. 1인 시위의 기준이 되는 20미터씩을 사이에 두고 인간 띠처럼 이어 진행한 공연이었다. '세월호를 지켜보는 작은 음악가들의 선언'이라는 이름이 붙은 이 릴레이 1인 시위를 기획한 것도 그녀였다. 세월호 참사 500일에 맞춰 15인의 음악인이 함께 만든 '다시, 봄' 이라는 프로젝트 앨범을 만들기도 했다. 유쾌하게 그리고 더 없이 진지하게 인터뷰를 진행하는 중에 그녀의 눈망울이 유독 커다란 이유를 알게 됐다. 바라보고 있는 것도, 담아낼 것도 많은 사람이었다. 이쯤에서 그녀의 음악 이야기를 하는 게 좋겠다. 음악에 문외한이자 겨우 그녀의 말을 받아쓰는 게 일인 내가 음악을 말하겠다는 게 무척 우습지만, 음악이라 써놓고 정민아의 일상이라 읽으면 된다. 아닌 게 아니라 그녀가 작사 작곡하는 모든 노래가 생활밀착형이다.
"국악고를 거쳐 음대에 입학하면서 나름의 엘리트 코스를 밟고 있다고 생각했어요. 세상엔 계급이 있다고 생각하고 나는 좀 더 우월하게 살 것이다, 국립국악원 같은 안정적인 직장에 들어가 좋은 학벌의 집안 좋은 남자를 만나 결혼해 살겠다고 생각했죠. 정작 부유하게 살아본 적도 없으면서 부유한 미래를 꿈꾸는 철딱서니였어요. 그런데 이런 황당한 생각이 깨지게 된 게 생계를 위해 전화상담원 일을 하게 된 경험이었어요. 금방 그만두겠다던 그 일을 4년 반 정도 하게 됐는데 그때 내가 생각하지 못했던 삶을 보게 됐고 수많은 사람들이 수많은 직업을 갖고 그 자리에서 열심히 살아간다는 것이 얼마나 대단한 것인가 깨우쳤죠."
세상물정 모르던 철없는 음대생은 '국립'이 붙는 탄탄한 직장을 얻는데 족히 7번은 실패하고 당장 급한 생계부터 해결하고자 전화상담원 일을 시작했다. 엄마의 빚을 떠안고 살던 은미를 만난 곳이다. 집나간 엄마를 대신해 은미가 빚을 갚으며 집안 살림을 꾸리고 있을 때 은미의 아버지가 갑작스럽게 돌아가셨다. 은미는 3일장을 끝내고 돌아와 다시 전화기를 들고 웃으며 말했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정민아는 은미의 허락을 받고 곡을 만들었다. '은미 이야기'다. 1집 <상사몽>을 발표하고 전화상담원을 그만둔 정민아는 광화문역 7번 출구 앞에서 매일 아침 주먹밥을 만들어 팔기도 했다. 1집이 1만 장이나 팔리는 성과에 힘입어 과감히 퇴직을 결단했지만 보릿고개는 금방 찾아왔다. 주먹밥 장사를 시작한 첫날 2000원짜리 주먹밥이 36개나 팔렸다. 그 후 단 하루도 첫날보다 많이 팔아본 적이 없다. 쫄딱 망했지만 노래 한곡이 남아 3집 앨범에 실렸다. 곡 이름은 '주먹밥'.
정민아는 중학교 2학년 때 동네의 작은 교습소에서 가야금을 본격적으로 배우기 시작했다. 손으로는 가야금을 타면서도 락키드였던 그녀는 홍대 라이브 클럽을 들락거리며 록, 재즈, 헤비메탈 등의 라이브 공연에 흠뻑 빠져 살았다. 그런 그녀가 클럽 공연에 서게 된 것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일이다. 가야금을 들고 무대에 서기까지 실용음악학원에서 화성과 기타, 피아노 등을 배웠다. 작곡의 기본을 익히고 밴드들이 하는 앙상블 수업에 가야금을 갖고 들어가 장르가 다른 음악과 접목도 해봤다. 정민아의 음악은 그렇게 다져지기 시작했다.
"저는 제가 상위 1%라고 생각해요. 사람들이 흔히 생각하는 그런 1%가 아니라, 음악가로 먹고 살 수 있는 정도가 된다면 상위 1%라고 생각하거든요. 풍족하지는 않지만 이제 전화상담원을 하거나 주먹밥을 판다거나 하지 않아도 공연하고 음반팔고 하는 정도로 먹고 살 수는 있어요. 되게 감사한 일이에요."
상위 1%치고는 참 소박한 생활을 하는 중이지만 그 덕에 4집 앨범까지 나올 수 있었다. 4집 앨범을 준비하며 그녀 스스로 가사를 주우러 다녔다고 하는데, 팔도의 도서관을 찾아다니기도 하고 이십여 년 전 서른세 살이던 엄마와 손을 잡고 찾아갔던 수리산 한증막도 다시 갔다 왔다. 서울 수원 전주 부산을 왔다 갔다 하며 그녀가 주워담은 순간은 다름 아닌 사람의 순간이었다. 커다란 눈망울을 하고 바라 본 사람들의 작고 외로운 순간순간들을 곡으로 담아냈다. 벌거벗은 몸으로 태어나 벌거벗은 몸으로 가는 것이 사람이라고 담백하게 노래해 주는 이, 젊은 엄마의 외로움을 알아봐준 이, 작고 상처받은 사람에게 충분히 아름답다 말해주는 이, 가난한 아가씨의 뒷모습을 바라봐 주는 이가 있다는 게 어쩐지 안심이 되었다. 정민아의 음악이 전하는 진심이었다.
"만약 운이 좋아서 악단시험에 붙었다면 이런 세상을 몰랐겠죠. 이제는 세상이 이상하다는 것을 모르고 살았던 것이 이상해요. 저번에 세월호 미사에서 신부님이 하신 말씀이 중에 세월호 이전과 이후에 뭐가 변화됐느냐는 질문을 한다면, 그냥 그 이전과 이후에 변화된 삶을 사는 거라고. 제가 광우병 집회에 나가 일순간에 세상을 보는 시각이 달라진 것처럼 그 이전과 이후는 절대 같지가 않잖아요. 그렇게 살아야 하는 것 같아요. 저도 이제 그냥 제 이야기로만 노래를 만들 수 없어진 거예요. 어떤 목적이 있어서가 아니라 제 스스로가 그렇게 변화됐으니까. 화상입기 전과 후의 삶이 다른 것처럼."
그녀를 만나면 엉덩이가 무거워진다. 웃음도 많고 입담도 좋지만 사람을 향해 열려 있는 그 품이 넉넉해서 한 자리 차지하고 들어앉아서 사는 얘기 풀어놓다 보면 몇 시간이 금방 지나간다. 언제고 오래 머물러 지켜보고 싶은 마음에 앞으로 어떤 삶을 살 것이냐 물었다. 그녀의 대답은 '모르죠'와 '무계획'이었다. 그런 건 없단다. 그럼 당장 할 일은 무엇이냐 물었다. '역사교과서 국정화 저지 콘서트'란다.
정말 못 말린다. 아니 말리지 않고 싶다. 삶에 대한 거창한 계획을 늘여놓지 않은 그녀가, 하루하루 필요한 곳에 가서 자리하겠다는 정민아의 즉흥이 너무 미더워서 그렇다. 누군가 내게 정민아를 어디서 만날 수 있느냐고 묻는다면 우리 사회의 가장 낮은 곳에 가보시라, 그곳에 그녀가 있다.
바꿈, '세상을 바꾸는 꿈'(☞바로 가기 : )은 2015년 7월에 출범한 시민 단체입니다. 흩어져 있는 사회 진보 의제들을 모아 소통하고 공동의 지혜를 그러모으는 장을 만들어보려 각계각층의 다양한 사람들이 모였습니다. 바꿈이 기획한 '기억을 기억하다'는 많은 이가 외면하고 잊어가는 이 땅의 현실을 온몸으로 살아내고 있는 얼굴들을 만나 그의 기억을 함께 나누려는 기록 연재입니다. (필자)
<1> '기억'을 기억하다 : "진실을 요구하는 일에는 '강단'이 필요하다"
<2> '기억'을 기억하다 : "현실이 이러니 우리가 할 말 없지요"
<3> '기억'을 기억하다 : "4.11 총선에서 10만3811표 얻었어요"
<4> '기억'을 기억하다 : "세월호 특위, 이번이 끝이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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