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한산성>의 첫 공연은 오는 4월 29일 하남 문화예술회관을 시작으로 5월 3일 성남 아트센터, 5월 20일 서울 남산국악당에서 열린다. 9월 이후에는 복원된 남한산성 행궁 뜰에서 이뤄질 예정이다. (티켓은 무료며 문의는 031-510-5409)
<남한산성>은 호국의 성지 남한산성에 얽힌 이야기를 병자호란을 중심으로 풀어내며, 남한산성의 고난의 역사를 비장과 해학에 실었다. <남한산성>의 사설과 작창은 임진택 명창이 맡았으며 소리는 1부와 2부로 나누어 각각 명창 한승석과 임진택이 맡아 총 2시간 넘게 완창하게 된다.
임진택 명창의 창작판소리는 창작판소리 3대 유파 중 하나로, 정통 판소리의 법통을 그대로 따르면서도 일반시민들이 흥겨움과 유쾌함으로 소리판에 참여하도록 즐길 수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실제 작년에 공연한 <백범 김구>는 민족의 아픔을 비장한 각오와 해학의 웃음이 담긴 창작판소리로 승화시켜 국악계뿐만 아니라 일반 관객에게도 높은 평가를 받은 바 있다. 서사의 전개에 따라 진양조(가장 느린 장단)에서 휘모리(매우 빠르게 휘몰아치는 장단)까지, 상황별로 적절한 장단에 맞춘 소리와 아니리(창자가 말로 하는 부분)는 관객들을 숙연하게 했다가 폭소하게 하기도 했다.
창작판소리 열두바탕 추진위원회(위원장 김도현, 예술총감독 임진택)가 1년여에 걸쳐 준비해온 <남한산성>은 그동안 비공개 내부시연을 통해 남한산성 관계자, 판소리 전문가의 평가와 토론을 거쳐 작품의 완성도를 높여왔다. 지난 11일에는 경기문화재단 다산홀에서 공개 시연회를 가지기도 했다.
▲ <남한산성> 시연 중인 임진택 명창. ⓒ창작판소리 열두바탕 추진위원회 |
임진택 명창, 1년여에 걸쳐 <남한산성> 준비
판소리의 역사를 돌아보면, 19세기 조선시대에는 <춘향가>, <흥보가>, <심청가>, <수궁가>, <적벽가>는 물론이요 <변강쇠타령>, <배비장타령>, <강릉매화전>, <옹고집전>, <장끼전> 등 12바탕 판소리가 있었다고 하나, 20세기 일제시대에 들어서면서 판소리가 쇠퇴하기 시작하여 현재는 다섯바탕 판소리만 제대로 전승되고 있다.
그런데 옛 전통판소리와 창작판소리의 다른 점은 옛 판소리는 특정한 작가가 없이 수많은 광대들의 참여로 각 바탕의 판소리가 형성되었다는 점이다. 거기에 비해 창작판소리는 특정한 작가가 있어 의도적으로 창작한 새로운 바탕의 판소리를 말한다.
창작판소리의 효시로 1900년대 원각사 시절 김창환 명창에 의해 만들어진 <최병두 타령>을 꼽기도 하나, 엄밀하게 말하면 <최병두 타령>은 '창극'(다수의 인물이 무대상에 등장해서 창을 음악언어로 하여 전개하는 일종의 음악극)으로 공연된 것이었다.
이는 한 사람의 광대가 부채를 들고 판에 나서서 어떠한 이야기를 아니리와 소리로 엮어나가는 '판소리'와는 엄연히 장르가 다르다. 그래서 판소리 연구자들은 창작판소리의 선구자로 <열사가> 류를 만든 박동실 명창과 <성웅 이순신가> <성서판소리>를 창작한 박동진 명창을 꼽는다.
하지만 본격적인 현대의 창작판소리는 대학문화운동패 출신인 임진택의 <소리내력>, <오적>, <똥바다>, <오월 광주>부터라는 주장도 제기된다. 서울대 외교학과 출신으로 서울대 문리대 연극반에서 활동했던 임진택은 당시 판소리, 탈춤 등 우리 전통문화의 가치를 새롭게 발굴해낸 김지하 시인의 영향을 받아, 1970년대 김지하의 담시 <소리내력>을 판소리조로 강창하면서 창작판소리꾼으로 나서게 된다.
이후 80년대와 90년대에는 일본의 경제침탈을 풍자적으로 비판한 <똥바다>, 광주민주항쟁의 피어린 실상을 판소리로 절규한 <5월 광주>, 그리고 김지하의 이름을 세계에 알린 그 유명한 정치적 담시 <오적>을 뒤늦게 판소리로 작창해 80년 이후 암울한 상황 속에서도 판소리를 통한 사회 비판과 풍자에 주력하였다.
이처럼 80년대 전후에 이미 작창한 <똥바다>, <오적·소리내력>, <오월광주>에 이어, 작년에 <백범 김구> 그리고 올해 <남한산성>까지, 그가 지닌 창작판소리 다섯 바탕에 일곱바탕을 더해 창작판소리 열두바탕을 완성하는 것이 앞으로 인생 목표라는 임진택 명창을 만나 소리꾼으로서 그가 걸어온 길에 대해 얘기를 들어봤다.
다음은 지난 19일 <프레시안> 사무실에서 임진택 명창과 박인규 대표가 나눈 대화를 재구성한 것이다. 임진택 명창이 말하는 창작판소리의 내력, 판소리를 하게 된 계기 등을 아래 전문으로 싣는다. 편집자
▲ 임진택 명창. ⓒ프레시안(최형락) |
나의 데뷔 무대는 서대문 구치소
나의 창작판소리 출세작은 1985년에 발표한 <똥바다>이다. 그러나 <똥바다> 이전에 나는 <소리내력>이라는 담시를 강창해 이름 없는 젊은 소리꾼으로 운동권에 알려져 있었다. 김지하 시인의 담시 <비어(蜚語> 중 한 편인 <소리내력>을 처음 강창한 건 1974년 감옥 안에서였다. 지금 생각해도 재미있는 것은 그 때는 판소리를 배우기도 전이었다. 판소리를 배우기도 전에 작창(장단을 정하고 선율을 붙이는 것)을 먼저 해버린 것이다.
1974년, 나는 긴급조치 4호 이른바 민청학련 사건에 연루되어 서대문 구치소에 넉 달간 들어가 있었다. 죄명은 은닉죄! 지명 수배된 선배를 숨겨줬다는 죄명이었다.
당시 민청학련 주모자로 김지하, 이철, 유인태 등이 수배를 받고 있던 상황이었다. 유인태 선배가 숨을 곳이 없다며 우리 집에 왔다. 당시 긴급조치 4호가 얼마나 어마어마했냐 하면 단순 은닉만으로도 최고 무기징역에 처할 수 있다고 겁주던 때였다. 우리 집도 안전치 않은지라 고민을 하다 옆 동네 큰누나 집 다락방에 숨겨주고 몰래 밥도 지어 올려주었다.
유인태 선배는 그렇게 일주일간 숨어 있다가 다른 곳으로 피했는데, 얼마 못가 딴 데서 잡혀버렸다. 그동안의 종적을 캔 결과 나는 범인 은닉죄로 감옥에 가게 됐다. 당시 서대문 구치소에는 단일 사건으로는 역대 최대숫자인 400명 정도가 한꺼번에 끌려갔다.
구치소 감방은 복도를 사이에 두고 길게 배열돼 있는 구조였다. 내가 있던 방은 7사 7방이었다. 어느 날인가 밖에서 여러 사람들이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얼른 창틀로 얼굴을 대고 "누구요?" 하고 소리치니 바로 그날 군법회의에서 사형 선고를 받고 옥으로 돌아오던 김지하, 유인태, 이철 등이었다. "어떻게 됐어요?" 다급하게 묻자 이들은 "사형이야, 사형. 으하하하하하" 호탕하게 웃으며 큰소리로 떠들며 지나갔다.
그 모습이 감방 안에 있는 죄수들에게는 무척이나 놀라운 광경이었던 듯했다. 사형을 받고도 호통치며 웃는 것을 보고 충격을 받은 듯했다. 그날 밤 감방장이 "오늘 오락이나 한판 할까" 했다. 취침 시간이 되자 간수들 몰래 오락시간이 시작되었다.
돌아가면서 죄수들이 별별 장기자랑을 하고 소리 죽여가면서 악 악 노래를 불렀다. 내 차례가 되자 감방장이 '너도 하나 해봐라' 라고 해서 나는 "아까 지나간 선배 중 김지하라는 유명한 시인이 있는데 그 분이 지은 담시를 한번 낭독하겠다"고 했다.
서울 장안에 얼마 전부터
이상야릇한 소리 하나가 자꾸만 들려와
그 소리만 들으면 사시같이 떨어대며
식은땀을 줄줄 흘려쌌는 사람들이 있으니
해괴헌 일이다.
이는 대개 돈푼깨나 있고 똥깨나 뀌는 사람들이니
더욱 해괴한 일이다.
쿵!
바로 저 소리다. (하략) - 비어(蜚語) 중 <소리내력> / 김지하 시 임진택 창)
김지하 담시에 곡을 붙여 즉흥적으로 판소리를 강창한 셈이다. 감방 사람들이 모두 놀라고 재미있어하더니 결국에는 엄청나게 감동한 눈치였다. 욕 한마디 했다는 이유로 유언비어로 몰려 사형에 처해진 '쿵' 소리의 내력이 긴급조치로 잡혀온 사람들 입장을 예언적으로 대변하기도 했지만, 감옥 안의 죄수들로서는 그 내용이 자기네 처지와 다를 바 없다고 생각하는 듯 했다. 실제 감옥 안에 몇 개월 동안 있어보니 그 안에는 하나같이 억울한 사람들 밖에 없었다.
<소리내력>은 세 편으로 묶인 담시 <비어(蜚語)>의 첫째 편이다. 시골에서 올라온 작고 힘없는 민중 안도(安道)는 열심히 뛰어 서울에서의 삶을 꾸려가고자 하지만 돈 없고 학벌 없고 "빽" 없는 그는 어느 한 모퉁이 발붙일 곳을 찾을 수가 없다. 부와 권력이 지배층에 독점되어 있는 암담한 현실이 안도의 발길을 곳곳에서 막았던 것이다.
지치고 지쳐 내뱉은 "에잇, 개 같은 세상" 한마디 때문에 유언비어 유포죄로 독재 권력에 체포된 안도는 500년간의 금고형에 처해져 목과 팔다리가 모두 잘린 채 독방에 갇힌다. 그러곤 서울 장안에 언제부턴가 "쿵~ 쿵~"하는 이상야릇한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원한에 사무친 안도가 머리와 팔다리가 없는 몸뚱이를 굴려 벽에 부딪치는 소리였던 것. 그 소리에 겁먹은 지배층은 안도를 다시 잡아 사형을 시키지만 "쿵~ 쿵~"하는 소리는 사라지지 않고 밤낮으로 끝없이 들려와 돈 있고 힘 있는 자들을 공포에 떨게 한다는 이야기다.
<소리내력>의 두 번째 공연은 4개월 만에 기소유예로 서대문 구치소를 나오던 날 밤이었다. 법무상 행정 착오가 생겨 뜻하지 않게 100여 명의 민청학련 관계자들이 하루를 더 감옥에서 보내야만 했다. 넓은 강당에 수용되어 하루를 더 보내려니 그 하룻밤이 지난 4개월보다도 더 길게 느껴지던 차에 누군가가 "우리 이러지 말고 좀 재미나게 밤을 보내자."고 제안하였고, 하룻밤을 지새운 그 날의 하이라이트는 나의 <소리내력> 공연이었다.
이후 창작판소리 <소리내력>의 본격 공연은 1974년 12월 31일 명동성당에서 이루어졌다. 긴급조치 해제와 구속자 석방을 위한 항의 및 기금마련을 위해 마련한 행사였다. 공식 공연이므로 내 소리에 누구라도 북을 쳐줘야 했는데, 학생운동권이나 재야에서는 판소리는 물론이요 북을 쳐줄 사람이 없어 춤꾼 이애주(현재 무형문화재 승무 예능보유자, 서울대 교수) 누님이 북을 쳐 주었다. 춤꾼이라 장단을 알았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 이날의 공연이 어찌보면 나의 첫 창작판소리 공식 공연이었다.
김지하의 <오적>을 판소리로 부르고 싶어 판소리계 입문
이때까지만 해도 나는 판소리를 배운 적이 없었다. 그냥 흉내내어 부른 셈이었다. 사실 나는 1970년 대학 2학년 학생이던 때 김지하 시인의 '오적'이 판소리 문체로 된 담시라는 것을 알고 판소리를 알아야겠다고 마음먹은 적이 있었지만, 그 당시는 판소리를 구경조차 하기 어렵던 때였다.
ⓒ프레시안(최형락) |
그런 중에 우연히 명창 정권진 선생의 수궁가를 보게 되었다. 우선 놀란 것은 체구가 작은 선생님이 무대에 나서 단가 한마디를 내는 순간 갑자기 무대공간이 꽉 찬 느낌을 주는 것이었다. 그러더니 선생님은 점잖게 재담을 하면서 관중을 판으로 끌어들이는 것이었다. 더욱 인상적인 것은 부채를 들고 펴는 듯 오므리는 듯 하며 물고기부터 산짐승 날짐승까지 동물들의 특징을 다 잡아내는 데 그 순간적인 포착이 놀랍도록 정확한 것이었다.
나는 그 공연을 보면서 너무나 재미있어 객석의 앞뒤 좌우로 옮겨 다니면서 무대를 세심히 관찰하였다. 너무 감탄했고 웃기도 한참을 웃었다. 그야말로 포복절도할 지경이었다. 예술 이론이나 연극을 모르는 분이 어떻게 저렇게 명연기를 펼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대학에서 연극반 활동을 해온 나이지만 혼자서 저렇게 표현해내는 연극을 나는 본 적도 상상한 적도 없었다. 나는 그 날 이후 판소리를 처음 본 소감을 주변사람들에게 엄지손가락을 세우면서 이렇게 말하곤 하였다. "판소리! 세계 최고의 모노드라마야."
다음날 나는 국악을 하는 김영동(국악 작곡가이며 연주자, 지휘자)에게 연락을 해 정권진 선생님을 찾아가 소개받았다. 첫 대면 자리에 나는 김지하 시인의 <오적> 필사본을 들고 갔는데, 예상대로 선생님이 물으셨다.
"서울대 나온 사람이 판소리는 뭐 하러 배우려는가?"
나는 <오적> 필사본을 꺼내놓으며 답하였다.
"새로 쓴 판소리 사설이 있는데, 이걸로 새로운 판소리를 만들고 싶습니다."
선생님은 다소 의아해 하시면서도 거절은 하지 않으시고, 이렇게 말씀하셨다.
"초보자를 혼자 앉혀놓고 내가 직접 가르치기는 그렇고, 단체로나 한번 모아서 배워보게나."
그리하여 나는 몇 달 후(그 기간 중에 명동성당에서 <소리내력> 공연이 있었던 셈) 겨울방학에 서울대 총연극반 후배들을 데리고 선생님이 계시는 이문동 국악예술학교를 찾아가 판소리를 처음 배우기 시작했다.
정권진 선생은 당시 국악예고에서 창악을 가르치고 있었는데, 극심한 정치적 탄압을 받고 있던 김지하 시인의 담시(譚詩) <오적> 필사본 뭉치를 들고 와 소리 배우기를 청한 청년을 정권진 선생은 약간 당황하면서도 마다 않고 제자로 받아 들였다고 한다. 선생은 판소리가 무시당하고 쇠퇴하고 있던 차에 마침 '대학 나온 남자 제자'를 두고자 하는 마음이 강하게 있었던 터였다고 한다.
역대 판소리 명창 중 최고의 대명창으로는 동편제의 송흥록과 서편제의 박유전을 꼽는데, 그 박유전 명창으로부터 정재근, 정응민, 정권진으로 이어져온 소리가 강산제 보성소리다. 임진택 명창은 운 좋게도 여기에 뿌리를 두고 있는 셈이다.
하지만 나는 판소리를 배운 후 몇 해가 지나도록 <오적>을 작창해내지 못하였다. 그것은 당시의 정치상황이 <오적>을 소리했다가는 당장 끌려가 치도곤을 당할 수 있다는 두려움도 있었고, 무엇보다도 나의 작창 능력이 <오적>을 판소리로 만들 만한 실력이 되지 못하였던 것이다.
<소리내력>은 판소리를 배우기도 전에 작창을 해 내었는데, 판소리를 배운 후에도 <오적>의 작창이 쉽지 않았던 이유가 <오적>의 사설이 묘사적이기보다는 개념적인 성격이 강한 탓이었음을 나는 한참 후에야 알게 되었다. 결국 <오적>의 작창은 1994년에야 완성되었으니, 정권진 선생님을 찾아가 소리를 배운지 20년 만의 일이다.
1970년에 발표된 김지하 시인의 담시 <오적>은 당시 한국사회의 지배계층을 을사보호조약 때 나라를 팔아먹은 을사오적에 비유해, 부정부패로 썩어 문드러진 권력층의 실상을 판소리 사설 형태로 풀어낸 최초의 담시다. 당시 <오적>은 엄청난 사회적 반향을 불러일으켰으며 박정희 정권은 <오적>을 게재한 당시 최고의 잡지 <사상계>를 폐간시키는 등 강경 대응으로 일관했다.
여기서 오적(재벌, 국회의원, 고급공무원, 장성, 장차관)이라 하는 짐승스러운 몰골의 다섯 도둑들이 서울장안 한복판 도둑소굴에서 벌이는 부정부패의 묘기 경연과 호화사치, 방탕한 생활은 시인의 통렬한 풍자를 통해 흉폭하고 타락한 실상을 남김없이 드러낸다.
또한 부정부패를 척결한답시고 나선 포도대장(경찰, 검찰, 정보부, 사법부를 은유함)은 무고한 민초 '꾀수'만 닦달할 뿐 정작 오적의 주구임이 적나라하게 폭로된다. 그러나 시인은 어느 맑게 개인 날 오적의 무리들이 벼락을 맞아 급살하고 육공으로 피를 토하며 거꾸러졌다는 이야기를 전하며 부패권력의 비극적 종언을 예언하고 있다.
아래는 <오적>의 일부.
~중략
예가 바로 재벌, 국회의원, 고급공무원, 장성, 장차관이라 이름하는
간뗑이 부어 남산만하고 목 질기기 동탁 배꼽같은
천하흉폭 오적의 소굴이렸다.
사람마다 뱃속이 오장육보로 되었으되
이놈들의 배안에는 큰 황소불알만한 도둑보가 곁붙어서 오장칠보.
본시 한 왕초에게 도둑질을 배웠으나 재조는 각각이라
밤낮없이 도적질만 일삼으니 그 재조 또한 신기에 이르렀것다.
하루는 다섯 놈이 모여
십년 전 이맘 때 우리 서로 피로써 맹세코 도둑질을 개업한 뒤
날이 날로 느느니 기술이요 쌓이느니 황금이라.
황금 십만 근을 걸어놓고 그간에 일취월장 묘기를
어디 한번 서로 겨룸이 어떠한가
이렇게 뜻을 모아 훔칠 도짜 한자 크게 써 걸어놓고 도둑시합을 벌이는데
~ 중략
임진택이 창작판소리계의 독보적인 존재?
사람들은 나를 일컬어 창작판소리의 독보적인 존재라고 하는데(웃음)… 독보적이라는 말은 전무후무하다는 말인데, 나 이전에 박동실 선생과 박동진 선생이 계셨으니 맞는 말은 아니고, 후에도 없다는 것 역시 지금 단정할 수는 없지 않은가? 나보다 더 뛰어난 창작 소리꾼이 후에 또 나올지 알 수 없으니 말이다. 다만 지금 현재로서는 박동실 박동진 두 분 명창은 돌아가셨고, 아직 뒤를 잇는 뛰어난 창작소리꾼은 보이지 않으니 잠정적으로 그렇게 불러준다면 과분하게 받아들이겠다.
앞서도 얘기했듯이 창작 판소리에는 삼대 유파가 있다. 이미 국문학계의 정설로 되어있다. 박동실 명창과 박동진 명창이 있고, 그 다음에 내가 있다. 박동실 명창은 누구인가? 해방 직후에 만들어진 <안중근가> <유관순가> <이준 열사가> 등 이른바 '열사가'류가 바로 그의 작품인데, 6.25 전쟁 중에 그가 월북한 탓에 그의 작품들은 한동안 금기시되었다가 최근에야 그 존재와 계보가 세상에 알려졌다.
ⓒ프레시안(최형락) |
그리고는 나의 정치적 판소리 3바탕 <오적·소리내력>, <똥바다> <오월광주>에 이어 지금 다시 추진 중인 열두바탕 프로젝트의 일환인 <백범 김구>와 <남한산성>이 나와 있다.
옛날 열두 바탕 판소리는 사설의 작가도 없고 작창을 처음부터 끝까지 한 이도 없다. 판소리는 300년 동안 수많은 명창이 이 대목 저 대목을 서로 만들고 붙이면서 집단창작을 한 것이다. 그런 정통 판소리 형성과정과 그리하여 변모 발전 완성된 판소리와는 다른 개념, 즉 판소리를 새롭게 창작한 최초의 인물이 박동실 명창이다.
박동실 명창은 젊은 시절부터 '오가전집'에 능통하고, 학식을 겸비한 명창으로 소문이 났다. 법제는 서편제의 큰 줄기로 전국적인 명성을 얻었고, 후진 양성에도 힘썼다. 특히 일제시대 나라의 독립을 위해 항거한 유관순, 안중근, 윤봉길 등 열사들의 행적을 담은 <열사가>를 창작하여 당대 현실을 반영한 작품들을 만들어낸 거의 유일한 명창이었다.
그러나 민족분단과정에서 북한에 남게 된 선생의 <열사가>는 남한에서 기피되어 명맥이 끊어지는 수난을 당하기도 하였다. 그의 제자들은 자신이 박동실의 제자라고 밝히지 못했다. 그랬다간 남한 땅에서 대접도 못 받고 인간문화재 지정에서도 결정적으로 불리했기 때문이다. 이후 남북관계의 변화를 맞아 제자들에 의해 그 소중한 가치가 복원되어 부분적으로 전승되고 있다.
내가 정권진 선생께 판소리를 배우던 70년대 후반, 고흥에 사시는 송영석 할아버지가 와서 국악예고 학생들을 운동장에 앉혀놓고 공연을 한 적이 있다. 그때 송영석 할아버지가 <안중근 열사가>를 불렀다. 안중근 열사가 하얼빈 역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하는 장면이었다. 알고 보니 이걸 만든 이가 박동실 명창이었고, 송영석 할아버지는 그 소리를 박동실 명창으로부터 직접 배웠다고 한다. 1945~50년 사이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창작 판소리의 또 다른 유파인 박동진 명창은 나이 50이 넘도록 뒤늦게까지 각고의 노력으로 득공을 하였으며, 넘치는 재담과 몸짓으로 좌중을 휘어잡는 솜씨가 일품으로 알려져 있다. 이 분이 판소리계에 남긴 큰 역할은 크게 두 가지이다.
첫째는 처음으로 판소리의 '완창'을 시도했다는 사실이다. 이는 판소리 공연사에 획기적인 사건이었다. 특히 박 선생이 가진 판소리 분량은 굉장히 방대했다. <춘향가>가 웬만큼 길어도 5시간 분량인데 이 분은 8시간을 했다. 모든 <춘향가> 판본을 취합한 것이었다. 정권진 선생님 말씀으로는 동편제나 서편제로는 완창은 기운이 다해서 쉽지 않다고 했다.
하지만 박동진 명창이 이를 해낼 수 있었던 것은 그 분의 법제가 중고제이기 때문이다. 경기충청 지방의 소리제라고 할 수 있는 중고제는 창보다는 이야기에 더 중점을 두는 편이고 책을 읽는 강창 형식이 많이 차지하고 있어서 완창하기에 덜 힘이 든다.
박동진 명창의 또 다른 업적은 실전된 판소리를 복원하고 신작판소리를 창작했다는 점이다. 이 분은 혼자 힘으로 없어진 판소리들인 <변강쇠 타령> <배비장 타령> <강릉매화전> <장끼전> <옹고집전> 등을 복원했다. 그러한 그가 <이순신장군 일대기>, <성서 판소리> 등의 방대한 창작판소리를 남긴 것은 더욱 획기적인 업적이다.
이게 얼마나 대단하냐 하면 박동진 명창의 소리 분량이 복원 판소리까지 합쳐 100시간이나 된다. 다른 여타 명창들의 경우 다섯바탕을 다 더해도 15~20시간 정도의 분량인 것을 본다면 박동진 명창이 지닌 판소리의 양은 엄청나다. 사실 내가 지금 가지고 있는 창작판소리 다섯바탕을 모두 합해도 아직 10시간이 되지 않는다.
'광대 임진택' 하면 뭐니뭐니해도 <똥바다>가 유명하지요
<똥바다> 역시 김지하 시인의 담시이다. 원래 제목이 '분씨물어'(糞氏物語, 우리말로 바꾸면 분씨 이야기 정도 된다)였는데, 나중에 판소리로 만들면서 작가 자신이 원 제목까지 <똥바다>로 바꾸었다. 어떤 사람은 제목을 '똥빠다'라고 읽는 사람들이 있던데(웃음), 똥 '바다'이다. 북에는 '피바다', 남에는 '똥바다'(웃음).
박정희 시대에는 김지하 시인의 <오적>이 문학 작품으로 정권에 타격을 줬다. 마찬가지로 전두환 시절에는 예술투쟁으로 제일 앞장섰던 게 <똥바다>였다. 1985년과 1986년 대학가를 돌아다니며 2년 여간 공연을 했다. 당시 대학에서는 집회가 안 되니 창작탈춤이나 마당극을 만들어 대학생들을 모았다.
당시 대학가에서는 내 <똥바다> 공연에 가장 많은 학생들이 모였고, 학생회 입장에서는 서로 내 공연을 초청하려고 하였다. 공연하러 가는 날 담당형사가 와서 공연히 나를 붙들고 거의 연금시키다시피 하여 공연 약속을 못 지킨 일도 있고, 학교 측에서 불허하여 교문에서 나를 못 들어오게 하기도 하였다.
그래서 나중에는 전날 미리 집을 나와 학교 담을 넘어 들어간 적도 있었다. <똥바다> 공연 후에는 모인 학생들이 집회와 시위를 하기 일쑤였고, 학생회 간부들이 경찰에 쫓겨 어디로 도망쳐버리고 연락이 끊어져 공연료를 받지 못한 경우도 여러 번 있었다.(웃음)
판소리 <똥바다>는 5공 전두환 시절에 민중문화운동의 선두에 서있던 작품이다. 그런 와중에 누가 <오적>을 판소리로 하자는 이야기가 나왔는데, 역시 망설이다 실행하지 못하였다. 그때 내 생각에는 <똥바다>까지는 어떻게 해보겠지만, 오적을 하면 대번에 잡혀가 무지하게 맞을 거라 생각했다.(웃음)
<똥바다>는 원래 한일관계를 풍자한 작품이었으나 사람들은 다들 한국의 군사독재 정권을 풍자하는 내용으로 받아들이면서 통쾌해하기도 하고 분개해 하기도 하였다. 미학 용어 중에 '카타르시스'라는 개념이 있다. 우리말로 하면 정화(淨化)라 할 수 있는데, <똥바다>가 주는 미적 체험은 '정화'를 넘어 거의 배설(排泄)의 통쾌함을 안겨주는 그런 느낌이었던 것 같다.
<똥바다>는 해방으로 한반도에서 물러난 일본의 경제침탈을 경계한 작품으로 발상이나 전개가 기상천외하다. 대대로 조선 땅에서 똥 때문에 죽은 일본인 가문의 자손 '좆도마떼'가 그 원수를 갚기 위해 잔뜩 먹기만 하고 똥을 참았다가 기생관광단의 일원으로 한국에 입국, 실컷 여자들과 놀아난 뒤 드디어 이순신 동상 위로 기어 올라가 참았던 똥을 다 내싸지르다 그만 새똥을 밟고 미끄러져 자기가 싸놓은 똥바다에 떨어져 죽는다는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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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설까지 직접 쓴 최초의 창작판소리 <오월 광주>
<오월광주>는 광주항쟁이 일어난 지 10년 되던 1990년 5월에 공연한 판소리이다. 오월 광주를 판소리로 만들게 된 동기는 우선 광주항쟁 10년이 되는데 이를 기릴만한 작품을 내야 하지 않겠는가 하는 의무감에서였다. 내가 염두에 두고 있었던 벗은 항쟁 당시 시민군 사령관으로 도청을 끝까지 사수하다 죽은 윤상원이었고, 윤상원을 마음속에 새겨둘 작품을 반드시 남겨야겠다, 판소리로 그 작업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판소리 사설을 따로 써줄 사람은 없고, 그래서 내가 직접 자료들을 구해보면서 사설을 쓰기 시작했다. 사설 쓰는 데 반년, 작창하여 소리 수련하는데 반년 해서 1년정도 걸려 완성하였다. 연습할 공간이 마땅찮아 30평짜리 아파트 두 평짜리 좁은 방 하나에다 방음벽과 방음창을 보강해놓고 연습을 하였는데, 맨 마지막 장면 도청을 사수하던 마지막 밤을 그려나가면서 여러 번 울었다. 저절로 통곡이 나오더라.
<오월 광주>는 80년 오월 광주에서 벌어진 항쟁 열흘간의 기록으로 계엄군의 만행에 대항하여 일어선 광주시민들의 투쟁 과정과 특히 도청을 끝까지 사수하다 산화한 시민군들에 대한 추도의 뜻을 담았다. 아래는 <오월 광주>의 일부.
이때는 어느 땐고.
1979년 10월 유신독재자 박정희 씨가
그의 오른팔인
김재규의 총에 맞아 비명에 간 뒤,
통일주체국민회의라 허는 데에서
최규하씨가 대통령으로 선출되고,
~ 중략
식사를 마친 후
윤상원 일어나며
"이제 최후의 결전의 시기가 왔소.
어린 여고생 고교생들과 여성들은 밖으로 피하시오."
(설움이 담긴 느리고 진중한 목소리로)
어떤 고등학생 하나 울부짖으며
"우리 누나가 공수놈들한테 무자비하게 학살되었소.
원수를 갚고야 말 터이니 부디 함께 있게 해주시오."
윤상원 기가 막혀
"너의 심정은 알겄다만
살아남아 증언할 사람도 있어야 하지 않겠느냐.
너는 꼭 살아서 너의 형들이 어떻게 장렬히 죽어갔는지를
~ 중략
<오월광주> 판소리를 만들면서 나는 몇 가지 판소리에 대한 새로운 생각을 갖게 되었다. 첫째, 판소리에서는 흔히 풍자와 골계 해학이 중요하다고 말하곤 하는데 나는 판소리에서 비장과 절규가 못지않게 중요하다는 점을 깨달았다. 노래는 '부르는 것'이지만 소리는 '지르는 것'이고 '외치는 것'이다. 판소리에 절규가 없다면 그것은 이미 판소리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또 하나 더 중요한 깨달음은 '판소리는 영화(영상)'라는 사실이었다. 판소리가 영화라니? 무슨 뜬금없는 얘긴가 할 것이다. 판소리와 관련한 옛 명언에 '이면'이란 개념이 있다. '이면'이니까 '표면'의 반대말인데, 옛 사람들이 "판소리는 이면이 있어야 한다", "판소리는 이면이 좋아야 한다" 또는 "이면을 잘 그려야 한다"는 말을 왜 했는가를 이제야 알 수 있었다.
판소리는 기본적으로 광대의 모습을 보여주고 소리를 들려주는 것이지만, 판소리의 감흥이 깊어지면 관중은 더 이상 광대를 쳐다보지 않고 소리만을 들으면서 그 소리 내용으로 하여 자기 자신이 어떠한 장면을 상상하여 그리게 된다. 춘향이 몽룡과 이별하는 장면이랄지, 심청이 밥 빌러 다니는 장면이랄지, 흥부가 박을 타는 장면이랄지, 적벽대전에서 군사들이 몰살당하는 장면이랄지, 이 모든 장면들을 눈으로 보듯 그려주는 것이 이면을 살리는 방법이며, 이면을 잘 살려야만 관중들은 실제로 감흥을 받게 된다.
그러한 관점에서 영화 기술이 없던 시절에 판소리는 영화적 기법을 활용한 예술인 셈이다. 미학적 표현을 빌리면 청각의 시각화라고나 할까? 나는 판소리 <오월광주>가 열흘간의 시민항쟁을 그린 한편의 영화라는 착각에 빠져들곤 했다.
10여 년간의 공백기, 축제 총감독으로 10년 세월
1994년 학전소극장에서의 <오적> 공연을 마지막으로 한 동안 판소리를 하지 않았다. 그리고는 1999년에 내가 만든 세 바탕의 창작판소리를 모아 동숭아트홀에서 발표공연을 가졌는데, 그리고 나서 다시 10년 동안 판소리를 하지 않았다.
짧게는 11년이고 길게는 17년을 쉰 셈이다. 내가 판소리를 작파한 이유는 정치지형이 바뀌었기 때문이었다. 내가 했던 판소리는 거의 정치적 판소리였다. 시대의 핵심을 건드리는 정치 풍자 판소리였다. 이 판소리는 시대에 대응하고자 했던 많은 사람들에게는 엄청난 감동을 불러 일으켰다.
그런데 정치지형이 바뀌고 민주화도 조금 성장하면서 한 시대의 저항과 궤를 함께 했던 우리 민중문화운동, 즉 마당극 판소리 등이 자기 역할, 자기 길을 잃었다. 같이 저항했던 사람들도 더 이상은 이런 작품을 원하지 않았다. 예전에 비합법테이프로 만들었을 때는 날개 돋친 듯이 나갔던 작품들이 정작 공연윤리위원회의 심의를 받아 공식 CD로 만들어 내놓니 구매하는 사람이 없었다.
1999년의 발표공연에도 관객이 별로 없었다. 창작판소리 세 바탕을 공연한다는 것은 문화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사건인데, 알아주는 이가 없었다. 그래서 실망하였고, 판소리를 더 이상 할 마음이 없어졌다.
그 무렵 나는 축제를 발견하였다. 민족극운동협의회 의장으로 1997년과 98년 과천 세계마당극큰잔치를 기획하면서 처음 축제에 눈이 뜨였다. 그러면서 생각을 정리해 보았다 "축제(페스티벌)는 마당굿과는 상반되는 개념인가?" 당시에 나는 작품 단위 하나, 극 단위 하나가 중요한 게 아니라 그 극이 존립할 수 있는 판(마당굿적 상황)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어려운 여건에서 개별 공연만을 하려고 할 게 아니라 그 공연이 놓일 수 있는 마당굿적 상황, 판을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것이 페스티벌이다. 그리고 결론을 내렸다. "페스티벌이야말로 현대의 마당굿이다."
1996년께에 해외를 다니며 축제를 관람하였다. 와! 유럽 사람들 진짜 예술을 가치있게 즐기고 있었다. 놀랐다. 눈이 번쩍 뜨이는 느낌이었다. 나도 한번 만들어보자 해서 시도한 것이 과천 마당극큰잔치였다. 그 안에서 마당극, 야외공연들을 취합하려 했다. 마당극을 따로 보러 오지는 않지만 축제에는 많은 사람들이 오기 때문이었다. 대성공이었다. 젊은 시절 아비뇽을 가보았다는 어느 연로한 예술계 인사는 "내가 사는 곳에 아비뇽 못지않은 축제가 이루어진다는 것이 꿈만 같다"고 말씀하시기도 하였다.
거기에 광주항쟁을 다룬 마당극들도 다시 초청을 하였다. 인산인해를 이뤘다. 다른 곳에서 보면 과격하다고 느낄만한 작품들이 축제 안에서는 관객들의 반응이 달랐다. 같이 울분을 토하고 공감을 했다. 보수적이고 완고한 생각을 하던 사람들까지도 축제 안에서는 잠재된 신명이 솟구치는 것 같았다. 과연 축제는, 페스티벌은 현대의 마당굿판이었다.
이후 10년 동안 축제를 많이 기획했다. 90년대 후반부터 2000년대 중반까지 세계통과의례페스티벌 집행위원장, 남양주 세계야외공연축제 집행위원장, 전주 세계소리축제 총감독, 실학축전 총감독, 가야세계문학축전 총감독, 황토현 동학축제 총감독 등을 맡아 곳곳에 축제를 일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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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거든 '광대 임진택 가다'란 말 듣고 싶다
그러다 2010년 <백범 김구>로 다시 판소리로 돌아왔다. 이유는 단순했다. 그 무렵 내 나이도 벌써 환갑이 다 되었는데, 내 마음 속에서 딱 한 명 부러운 인물이 있다면 그건 박동진 명창이었다. 몇 해 전 돌아가셨지만, 그 분이 쉰이 될 때까지 다른 명창들은 그를 두고 '광대'라고 했다. 조금은 그 분을 폄하하는 단어였다. 하지만 지금은 일반 대중과 전문가들이 20세기 5대 명창에 박동진 명창을 꼭 집어넣는다. 그는 명창보다 큰 광대이셨던 것이다.
박동진 명창이 돌아가셨을 때는 신문기사 1면에 부고기사가 났는데 제목이 '광대 박동진 가다'였다. 그때 표제를 보고 엄청 부러웠다. 내가 죽으면 과연 '광대'라는 말이 붙을 수 있을까. 그래서 부러웠다. 명창으로, 광대로 남기 위해선 자기 분야에서 뚜렷한 족적을 남겨야 된다고 생각했다. 박동진 명창은 자기 분야에서 독보적인 족적을 남기셨던 것이다.
내가 과거에 발표한 판소리들은 바둑판에 비유하면 사석이 돼 있다. 다시 바둑을 두지 않으면 계속해서 사석이 될 수밖에 없다. 이를 살려내기 위해 창작판소리 12바탕을 기획했다. 세종대왕에서부터 백범 김구까지가 그것이다. 지금까지 내가 불렀던 <소리내력>, <오적>, <똥바다>, <오월 광주> 말고도 새로 12바탕을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하는 것만이 내가 처음 스승 정권진 선생님을 찾아갔던 초심으로 돌아가는 것이요, 정권진 선생님이 나를 제자로 받아주신 깊은 뜻을 발현하는 것이라고 나는 확신한다.
창작판소리 열두바탕을 기획하고 <백범 김구>로 컴백
내가 구상한 새로운 판소리 열두바탕의 소재는 세종대왕에서부터 백범 김구에 이르는, 역사상 귀감이 될 뿐 아니라 오늘에도 살아있는 위대한 인물들이다. 그렇게 구상한 인물들 중 가장 후대의 인물을 가장 먼저 창작하게 된 셈인데, 나는 이것이 아주 잘된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왜냐하면 역사인물을 소재로 하게 되면 자칫 당대 현실성이 약화되기 십상인데, 백범 김구 선생님은 역사인물이지만 우리의 시대현실 속에 아직 그대로 살아있는 당대적 인물이기 때문이다. 창작판소리 <백범 김구>의 사설은 내가 썼지만 사실은 이 사설을 쓰신 분은 백범 선생님 자신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선생님이 <백범일지>를 남겨주시지 않았다면 이 창본 사설이 나오기는 불가능하였을 것이다.
판소리 문체는 산문과 운문이 혼용되는 이야기체여야 하는데, 백범일지야말로 한글과 한문이 잘 어우러지고 산문과 운문이 막힘없이 혼융되어 있는 이야기체 문학의 정수라고 나는 평가한다. 만일 백범 선생이 독립운동가가 아니셨다면 벽초 홍명희 선생과 같은 위대한 소설가가 되셨을 것이다. 그만큼 <백범 일지>에서 풍겨나는 문학적 향취의 품격은 매우 높다.
작년에 판소리 <백범 김구>의 완창을 다섯 번 정도 하였다. 세 시간이 넘는 대작이어서 혼자서 다 하지는 못하고, 왕기석 왕기철 형제명창과 셋이서 나누어 분창하였다. 그래도 내가 맡은 분량이 1시간 20분 정도 되었다.
백범 김구 기념관을 비롯해서 선생이 한때 머물렀던 마곡사에서도 공연하였고, 선생이 계시던 경교장에 가까운 정동극장에서도 공연하였고, 국회의사당 내 헌정기념관에서도 공연하였다. 앞으로 경교장이 정비되면 꼭 그 곳에서 공연을 하고 싶고, 민족적 갈증을 느끼는 해외 동포들을 위한 공연을 생각하고 있고, 또 각 급 학교 순회공연을 위해 분량을 대폭 줄여 압축판을 만들 생각도 가지고 있다.
아래는 <백범 김구>의 일부
~ 중략
그때여 윤봉길이 홍구공원 도착하니
물통 메고 도시락 든 상해의 왜인들이
일장기 흔들면서 천장절 경축식장에 모여들 제
윤봉길 차에서 내려 물통 메고 도시락 들고
일장기 흔들면서 행사장에 입장한다
군악대 연주 속에 기미가요 울리면서 경축식이 시작될 제
단상에는 일본군대 최고 수뇌 요인들이 줄줄이 앉았구나
윤봉길 거동 봐라
일장기 내던지고 군중 속을 헤치더니 경축대로 뛰쳐나간다.
물통폭탄 도시락폭탄 뇌관을 재빨리 제거터니
휙 휙 단상 위로 투척하니
경축대 한 복판에 떨어진 폭탄들이 쾅! 쾅!
벽력같은 소리내며 연속으로 폭발한다.
~ 중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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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소리로 풀어낸 남한산성의 역사
판소리 <남한산성>은 처음 열두바탕 목록에는 들어있지 않았던 작품이다. 작년에 경기도의 역사인물들 즉 세종대왕이나 다산 정약용을 소재로 판소리를 만들고자 경기문화재단에 협의하였는데, 뜻밖에도 경기문화재단에서 '남한산성'과 'DMZ'를 제안하여왔다. 매우 좋은 제안이어서 경기도의 현안과 방책에 맞추어 순서를 바꾸기로 작정하게 된 것인데, 지금은 나 자신이 아주 만족스럽게 생각한다.
창작판소리 <남한산성> 사설을 쓰기 위해 나는 먼저 남한산성을 오르는 일부터 시작하였다. 성곽을 이리저리 둘러보고, 대문과 암문을 드나들어보고, 행궁터와 수어장대 매바위 등을 둘러보고, 청군들이 화포를 올려놓고 쏘았다는 망월봉을 찾아보고, 서문 옆 전망대에 서서 한강과 북한산을 바라보며 바람을 맞으며 작품을 구상하였다.
남한산성과 병자호란에 관한 문헌과 도서들도 찾아 읽어보았다. <숲과 역사가 살아있는 남한산성>, <남한산성과 팔도사찰> 같은 친절한 책들을 먼저 접했고, 나만갑의 <병자록>에서부터 정약용의 <비어고>, 그리고 명지대 한명기 교수의 역저 <정묘·병자호란과 동아시아>를 숙독했다. 김훈 선생의 명품소설 <남한산성>을 읽고 몇 번이나 감탄하였고, 홍성암 선생이 쓰신 대하장편소설 <남한산성>은 너무나 흥미진진해서 며칠 밤을 새워서 읽었다.
원래 판소리의 소재는 춘향이나 심청이나 흥부같은 특정한 전형적 인물이다. 그런데 판소리 <남한산성>의 특징은 한 인물이 주인공으로 등장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주인공은 남한산성 자체다. 거기에 무능한 인조를 비롯한 최명길, 김상헌 등 주화파와 척화파의 인물들, 그리고 김류와 김자점 같은 못된 정승관리들, 윤집 오달제 같은 기개 높은 삼학사 등 다양한 인물들이 등장한다.
만일 <남한산성>을 인물 중심으로 꾸민다면 그 중 서흔남이라는 대장장이 이야기가 재미있다. 인조가 호란이 발생해 한밤중에 급히 도망쳐 산성을 오를 때, 대장장이자 나무꾼인 서흔남이 이를 도와줬다. 그 다음날 인조는 서흔남에게 선물을 주기 위해 불렀으나 서흔남은 임금이 입은 곤룡포를 보고 그걸 달라고 졸랐다. 임금 옷은 임금의 자리를 상징하는 것으로 이는 임금 자리를 달라는 은유적인 표현이나 다름없으니, 이게 만일 설화가 아니라 사실이었다면 광해군을 몰아내고 임금 자리에 오른 인조의 입장에서는 큰 충격을 받았을 터, 죽음을 면치 못했을 것이다.
실제 서흔남은 병자년의 기록들에도 나온다. 정탐꾼으로 걸인 행세를 하며 성 안팎을 다니며 정보를 수집했다. 한 번은 청나라 '칸'이 삼전도에 왔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이를 확인하기 위해 청군 진영에 갔다가 붙잡힌 적이 있다. 거기서 서흔남은 기지를 발휘해 미친 걸인인 척 하면서 칸 앞에서 오줌을 싸서 위기를 모면했다. 이건 설화가 아닌 실화인데, 설화보다도 더 재미있는 소재지만 판소리로 형상화시키기엔 무리가 있어 일단 보류했다.
아래는 <남한산성>에서 서흔남이 나오는 대목.
~ 중략
"그대가 없었다면 짐이 큰 고초 겪었을 터
큰 상을 내릴지니 소원을 말해 보라."
서흔남이 뜻밖이라 아무 말도 못허다가
상감이 입고 있는 곤룡포를 가만히 살펴 바라보니
황금으로 수를 놓은 용 두 마리가 황홀허여
"나으리가 입고 계신 그 옷이 갖고 싶소이다."
신하들이 깜짝 놀라 서흔남을 끌어내니
임금이 만류를 허며, "참으로 순박한 백성이로다.
곤룡포 한 벌을 가져다가 이 백성에게 하사하라."
대장장이 서흔남은 하사받은 곤룡포를
무명으로 겹겹이 싸서 반닫이에 넣어두고
아침마다 절을 하며 평생을 정성껏 섬기다가
다 살고 죽은 후에 그 곤룡포와 묻혔더라.
그 뒤야 뉘가 알리 더질 더질.......
내년에는 다산 정약용을 판소리로…
내년은 다산 정약용의 탄생 250주년이다. 경기문화재단과 <다산 정약용>을 판소리화 하는 논의를 하고 있다. 제목은 판소리 <목민심서>가 될 가능성이 높다. 어쨌든 앞으로 1년에 한 작품씩 창작 판소리를 만들어갈 작정이다. 기대해 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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