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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주의를 영원히 힘으로 억누를 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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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주의를 영원히 힘으로 억누를 수는 없다 [한반도 브리핑] 이승만ㆍ박정희ㆍ전두환의 말로를 보라
폴 케네디의 <강대국의 흥망성쇠> (The Rise and Fall of the Great Powers)는 1988년에 발간되었지만 이제는 세계사 그리고 국제정치학에서는 고전으로 취급되고 있다. 이 책은 르네상스 이후 세계무대에 등장한 강대국들이 어떻게 강대국의 반열에 오르게 되었고 또 어떻게 강대국의 반열에서 물러나게 되었는지 소상히 논증하고 있다.

책은 수백 페이지가 넘는 방대한 분량이지만, 케네디는 강대국의 흥망성쇠에 관하여 한 가지 중요한 공통점을 찾아낸다. 케네디에 의하면 강대국은 결국 경제 규모 및 경제성장률의 우위, 즉 경제력에 의해 결정되는데 다른 국가들보다 우월한 경제력을 갖는 국가는 경제 성장의 확대와 함께 필연적으로 팽창을 추구하게 된다고 한다.

즉 강대국 반열에 오른 국가는 자신들의 이익을 군사적 수단을 통해 지키려는 경향성을 가지며 군사부문에 과도한 투자를 하게 된다는 것이다. 군사부문에 대한 이러한 과도한 투자가 지속될수록 경제력은 악화되어 마침내 국력이 쇠퇴하고 적당한 군사력을 유지하는 나라들이 새로운 강대국으로 부상한다는 것이다.

▲ G2 국가로 성장한 중국의 시진핑(왼쪽) 국가주석이 미국 버락 오바마 대통령과 지난 6월 정상회담을 가졌다. ⓒAP=연합뉴스

케네디는 이러한 강대국의 흥망성쇠에 관한 역사적 논증을 바탕으로 당시 미국과 소련의 양극체제는 서유럽, 일본, 중국 등의 5각 체제로 나아갈 것으로 진단하였다. 물론 케네디의 예상이 완전히 맞은 것은 아니지만 케네디의 책에서 흥미로운 점은 미국의 힘이 절정에 달하고 있을 1980년대 말 미국의 쇠퇴를 예견하였다는 점이며, 쇠퇴의 원인을 비교적 정확히 예견·분석하고 있다는 점이다.

케네디의 역작인 이 책에서 볼 수 있듯이 역사는 끊임없는 변화의 연속이지만, 변화는 무원칙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원인이 있고 그 원인의 바탕에는 변하지 않는 원리(原理)또는 법칙(法則)이 있다.

민주주의 사회에서 민주주의가 지켜지지 않을 때 국민들에 의해 민주주의가 다시 제자리를 찾아가는 것은 세계 민주주의 역사에서 변하지 않는 원칙과도 같다. 지금까지 민주주의를 확립한 사회가 반민주주의적인 사회로 잠시 퇴행한 적은 있어도 항시적 또는 고정적으로 퇴행한 적은 없다.

우리는 한국의 현대사에서 비근한 예를 찾을 수 있다. 한국의 초대 대통령인 이승만은 무소불위의 권력을 갖고 있었다. 이승만은 당시 한국의 후견국이라고 할 수 있는 미국의 강력한 지지를 받고 있었으며 군과 경찰을 확고히 장악하고 있어 그 누구도 그의 통수권에 도전할 수 없었다.

특히 특무대는 군과 경찰 위에 있으면서 정권 수호의 선봉에 섰다. 당시 특무 대장이었던 김창룡은 이승만 대통령에게 직보하는 등 참모총장보다 큰 권력을 행사하였다. 이승만 대통령의 전폭적인 신뢰를 받으며 전국적인 정보망을 갖춘 특무대는 큼직큼직한 정치적 사건을 모의·주도하는 등 경무대의 비밀경찰 역할을 수행하며 정권을 수호하였다.

당시를 돌이켜 보면 이승만 정권이 무너질 것이라고는 상상하기 어려웠다. 모든 권력 그리고 그것을 지킬 수 있는 수단을 이승만이 독점하고 있었으며 야당은 매우 무력하였기 때문이다. 이승만 정권은 또한 반공을 자신의 정권 유지에 가장 큰 명분으로 내세웠는데, 동족 상잔의 한국전쟁 끝난 직후이기 때문에 이러한 이승만 정권의 반공 (反共) 공세에 반기를 든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그것이 진정한 반공이 아닌 정권유지의 수단으로 전락하였다 하더라도 말이다.

또한 당시에는 대부분의 언론도 정권 감시자로서의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승만 정권을 비판한다는 것은 북한 공산당을 이롭게 하는 것이고, 이승만을 반대하는 것은 이적(利敵)행위가 될 수 있기 때문이었다. 나아가 당시 이승만은 국부(國父)로 추앙받고 있었으며 국민적 지지도도 높았기 때문에 이러한 성원과 지지를 바탕으로 자신의 정권수호와 유지를 정당화 할수 있었으며 그의 정권은 영원한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민주주의의 가장 기본적인 국민의 권리를 부정하고 유린하는 사태가 벌어지자 국민은 가만있지 않았다. 이승만 정권은 1960년 3월 15일 선거에서 12년간 지속된 장기집권체제를 연장하고, 승계권을 가진 부통령에 이기붕(李起鵬)을 당선시키기 위하여 대규모 부정행위를 저질렀다.

구체적으로 이승만 정권은 전국적으로 유령유권자 조작을 통해 전체 투표의 약 40%를 사전투표로 진행시키고, 입후보 등록의 폭력적 방해, 관권 총동원에 의한 유권자 협박, 야당 인사의 살상, 투표권 강탈, 3~5인조 공개투표, 야당참관인 축출, 부정개표 등을 자행했다. 그 결과 자유당 후보의 득표율이 95~99%에 이르렀으나 하향조정하여 이승만 963만 표(85%), 이기붕 833만 표(73%)로 발표하였다.

여기에 대해 국민들은 가만있지 않았다. 우선 3월 15일 마산에서 부정선거에 항의하는 대규모 시위가 일어났으며, 이어 4월 19일 대규모 시위가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결국 4월 26일 대통령 이승만은 하야 성명을 내고 대통령직에서 물러나고 미국 하와이로 망명길에 올랐다.


유사한 사례를 보다 최근의 한국 역사에서 찾을 수 있다. 1979년 12·12 군사반란으로 정권을 잡은 전두환은 집권 내내 총칼을 앞세워 철권통치를 하였다. 전두환 정권은 1980년 11월 신문 28개, 방송 29개, 통신 7개 등 64개 언론사를 신문 14개, 방송 3개, 통신 1개 등 18개 언론사로 강제 통폐합했으며, 172종의 정기간행물을 폐간시키고 1천 명 이상의 언론인을 해직시킴으로써 언론을 완전 장악·통제하였다. 그리고 수천 명의 사복경찰을 전국 대학에 파견하여 대학들의 민주화 운동을 사전에 차단하고 감시하였다.

전두환 정권은 이른바 3S (Screen, Sex, Sports)로 국민의 관심을 정치에서 멀어지게 하는 우민화 정책을 폄으로써 정권의 안정적 유지를 꾀하였다. 컬러TV와 VTR이 보급되고, 영화관에서는 <애마부인>과 같은 애로물이 봇물을 이루었으며 프로야구, 프로축구, 민속씨름 등 유명 스포츠에 프로리그가 만들어져 국민들의 관심을 비정치 영역으로 모으려 하였다.

전두환 정권은 이승만 정권과 달리 경제에서도 커다란 성과를 냈다. 낮은 원유가, 낮은 이자율, 그리고 낮은 미 달러화라는 3저(低)현상에 기반을 두고 있지만, 이 덕분에 한국은 1986년 당시 사상 최초로 대외무역 흑자를 보게 되었으며 국민소득은 전두환 집권 초기 1980년 1598달러에서 집권 말인 1987년 3321달러로 두 배 이상 올랐다.

국민의 눈과 귀는 '보도지침'으로 대변되는 관제언론에 통제를 받고 있었으며 국민들의 배는 무역흑자 덕택에 예전에는 없어서 못 먹었던 바나나와 같은 수입상품으로 채워졌으며 아파트 분양 붐으로 누구나 '마이홈', 나아가서는 일확천금의 꿈을 가지게 되었다.

전두환 신군부는 군사반란으로 정권을 잡고 광주민주화 운동을 총칼로 제압하였지만 경제적 성공으로 국민들의 민주화에 대한 갈망을 잠재울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이에 전두환 정권은 1987년 4월 13일, 4.13 호헌조치라고 불리는 조치를 통하여 기존 5공 헌법을 유지하면서 1988년 2월 25일에 후임자에게 대통령직을 승계하겠다고 선언했다. 즉 대통령을 직선제가 아니라 자신이 그렇게 하였듯이 체육관에서 자신이 지명한 대의원에 의한 간접형식으로 뽑겠다는 것이었다.

4.13 호헌조치가 내려지자마자 신군부 정권의 강력한 탄압 의지에도 불구하고 각종 단체에서의 항의성 문건이 게시되었으며 가두시위가 시작되었고 급기야 6월 6.10항쟁으로 이어졌다. 이승만 정권과 같이 철옹성과 같았고 경제적으로도 성공하였던 전두환 정권도 국민의 민주화 운동으로 막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민주주의가 확립된 사회에서 민주주의를 역행할 수 없는 명제를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는 대목이다. 이렇듯 역사에서 변화는 예사(例事)이나 여기에는 원인이 있고 원인은 법칙에 근거를 두고 있다.

민주주의 사회에서 국민의 기본권을 침해하거나 방해한다는 것은 민주주의를 역행하는 것이며 이것은 반드시 국민적 저항을 받고 국민에게 무릎 끊을 수밖에 다는 것은 우리가 현대사를 통해 확인할 수 있는 사실이다. 그리고 이것은 그 어느 위정자(爲政者)에게도 예외 없이 적용된다는 사실임을 명심하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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