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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첩 누명까지 썼지만, 한국서 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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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간첩 누명까지 썼지만, 한국서 살고 싶다" [심층 인터뷰 ②] '탈북자' 유우성, 그가 말하는 '애국심'
2004년 4월 25일, 그는 처음 대한민국 땅을 밟았다. 그 날을 잊을 수 없다. 공항 통유리로 눈부신 햇살이 쏟아져 들어왔고, 바닥은 반질반질 윤이 났다. 화장실에 들어가면 불쾌한 냄새 대신 좋은 향이 났다. 사람들은 모두 친절했다. 따뜻하고, 밝고, 깨끗했다. 한국의 첫인상은 그랬다.

"'내가 천국에 왔구나' 싶었어요. 정말 좋았어요. 딱 하나, 공기가 탁한 것만 빼면요."

한국에 온 게 실감 나지 않아 한 시간이 넘도록 뜨고 지는 비행기들만 멍하니 쳐다봤다. 겨우 정신을 차리고 공항 보안관을 찾아 '탈북자 신고'를 했다. 어깨에 총을 멘 사람들이 달려왔다. 그들과 함께 공항을 나서면서도 그는 앞으로 펼쳐질 밝은 미래를 머릿속에 그렸다.

▲지난달 25일 항소심 선고 공판이 끝난 뒤 언론 인터뷰를 하는 유우성 씨. ⓒ프레시안(서어리)

지난달 25일은 그가 한국에 온 지 딱 10년이 되는 날이었다. 서울시 공무원 간첩 사건 피의자이자 간첩 증거 조작의 피해자인 유우성 씨. 그는 이날 법원으로부터 두 번째 '간첩 무죄' 선고를 받았다. (관련 기사 : "
"간첩 무죄, 땅땅땅"…뭉개진 검찰 자존심", "유우성 사건, 국정원 '불법 구금' 인정됐다")

누명을 벗었으니 기쁜 건 당연하다. 그러나 10년 전 상상과 너무도 다른 지금 자신의 모습을 생각하면 속상하고 착잡했다.

"첫 번째 계획은 대학교에 가는 거였어요. 7~8년 정도는 대학에서 다시 의학 공부하기, 10년 후에는 병원에 들어가고 결혼하기, 15년 정도 지나면 아이 키우기. 이런 구체적인 계획들을 세웠어요. 워낙 바깥 활동을 좋아하니까, 적응하는 게 어렵지 않을 거라고 믿었어요. 어느 정도 정착하면 아버지랑 동생도 곧 데려올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그러나 지금 그가 서 있는 곳은 병원도, 대학교도 아닌 법원이었다. 남들은 운이 좋다고 할 만큼 좋은 변호사들을 만났고. 언론에서도 많이 주목한 덕에 무죄를 얻어냈지만, 그는 이미 많은 것들을 잃어버렸다. 간첩 누명을 쓰기 전까진 비록 계약직이었지만 서울시 공무원으로 일했고, 대학원에 다니고 있었다. 이젠 일터에선 잘린 지 오래고, 학업을 이어갈 수 있을지 없을지도 불투명한 상태다. '탈북 화교'라는 신분 때문이다.

"간첩 누명까지 썼지만, 그래도 한국에서 살고 싶다"

유 씨는 25일 선고 공판에서 국가보안법 혐의에 대해선 모두 무죄 판결을 받았다. 그러나 화교 출신이면서 탈북자로 가장해 정착지원금을 타낸 혐의가 인정돼 사기죄, 북한이탈주민보호법 위반 등으로 징역 1년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았다.

법무부는 유 씨를 중국 국적자로 간주하고 '집행유예를 선고받은 외국인은 강제퇴거 심사대상'이라며 추방 의사를 내비치고 있다.

"저는 한반도에서 태어났어요. 중국에선 살아본 적도 없어요. 그런데 얼굴도 모르는 조상님들 때문에 그냥 탈북자가 아닌 탈북 화교가 됐어요. 나고 자란 한반도에서 나가라면 전 대체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겠어요."

이미 중국에서도 한국 국적을 취득했다며 유 씨의 국적을 박탈했다. 한국에서마저 쫓겨난다면 유 씨는 무국적자 처지에 놓이게 된다.

주변 사람들은 유 씨에게 '똑똑하니까 어딜 가든 성공할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이런 얘기는 유 씨에게 위로가 되지 않는다. 유 씨가 정착하고 싶은 곳은 이 나라, 대한민국이기 때문이다.

"저는 스스로 국민이 되기 위해서 북에서 건너왔습니다. 그래서 외국인들이 한반도에 대한 이미지가 나쁘다고 할 때, 남한은 북한 같은 나라가 아니라고 정확히 구별해 말해주기도 합니다. 올림픽, 월드컵 때 대한민국을 응원하는 것은 물론이고요.

무엇보다 이런 일을 당했어도 여전히 한국에서 살고 싶은 마음이 큽니다. 여기서 또 어떻게 애국심을 증명해야 할까요."

항소심 재판부도 그의 '애국심'을 인정했다. 재판부는 25일 "성공적 정착을 위해 탈북자 단체 등에서 적극 활동했고 대한민국에 기여하고 싶다고 각오를 다지는 점 등은 애국심을 갖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고 밝혔다.

▲유우성 씨. ⓒ프레시안(최형락)

사실 유 씨의 최종 목표는 '남한 정착'이 아니다. 통일된 조국에서 꿈을 펼치며 사는 것이다.

"한국에 올 때, 저는 20년 안에 한반도가 꼭 통일이 될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한국에 와서도 통일 관련 활동을 많이 했습니다. 만약 통일이 이뤄지면 제가 할 일은 명확해요. 북한에서는 의대를 졸업했고 한국에선 사회복지를 전공했기 때문에 북쪽 주민들에게 의학 지식이나 의료 복지 서비스를 제공하는 일입니다."

그는 스스로 통일을 준비했다. 남한 내 탈북자들의 정착을 돕는 것이다. 탈북자들이 한국에서 잘 정착해야 서로 편견이 줄어들고, 그래야 통일 후에도 서로 이해하고 살 수 있다는 생각이다. 이러한 생각에서 대학원 논문 주제도 '한국 내 탈북자들의 정착 문제'로 정했다. 유 씨는 국정원에 체포되기 전까진 낮에는 서울시에서 탈북자들을 지원하는 업무를 하고, 저녁에는 탈북자 지원에 관한 논문을 준비하는 '주경야독' 생활을 했다.

"탈북자들은 나를 부정해야 산다"

유 씨는 남한에 건너온 뒤 탈북자들을 위한 각종 지원 활동을 했지만, 정작 탈북자들은 유 씨를 탐탁지 않게 본다. 유 씨를 사기죄로 검찰에 고발한 이들은 탈북자들이고, 법정에 나와 유 씨가 간첩이라며 거짓 증언한 이들 다수가 탈북자였다. 탈북자단체 회원들은 늦은 밤에도 유 씨 집 주변을 어슬렁거리는가 하면, 매주 화요일엔 유 씨 변호를 맡은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 사무실 앞에 몰려와 시위했다. 그러나 유 씨는 그들이 불쌍하다고 했다.

"탈북자들은 알거든요. 나를 부정하지 않으면 다음 간첩이 자신이 될 수도 있다는 걸."

과거에도 그랬듯, 간첩 여부를 밝히는 것은 검사가 아닌 피고인 본인의 몫이다. 자신이 간첩이 아닌 증거를 내지 못하면 그대로 간첩이 된다. 30년 전 조작 간첩의 제1순위 표적이 재일동포였다면, 지금은 탈북자들이다. 탈북자들은 매 순간 자신이 간첩이 아님을 증명하며 살아야 하는 것이다.

검찰은 유 씨 사건 재판 도중인 지난 3월, "탈북자를 가장한 북한 보위부 직파 간첩"이라며 홍모 씨를 간첩 혐의로 기소했다. 유 씨 동생 가려 씨가 변호인 없이 국정원 합동신문센터에서 조사를 받았던 것처럼, 홍 씨 역시 합신센터에서 6개월간 조사를 받았다. 독방에서 조사를 받는 과정에서 홍 씨가 거짓으로 간첩 자백을 했다는 게 변호인 측의 주장이다.
(관련 기사 : "또 간첩 조작? 홍 씨 "국정원서 허위 자백"", "'유우성 사건' 2탄? 재판 공개 여부 또 쟁점")

"북한에 있는 가족과 전화하면 간첩이 되고, 보위부 사람 한두 번 만났다고 간첩이 됩니다. 한국에서도 주변에 국정원 직원 한두 사람 있지 않습니까? 그 사람들 만났다고 다 간첩이 되진 않을 텐데요."

탈북자들이 기를 쓰고 유 씨 추방 집회를 벌이는 것은 '나는 간첩으로 만들지 말라'며 수사기관에 신호를 보내는 것이란 얘기다.

"안타깝죠. 권력 기관에 잘 보이지 않으면 안 된다는 강박, 이건 생존 본능이에요. 북한에 있을 때부터 힘센 사람에 굴복해야 한다는 걸 배운 거죠. 남한에 와서 온전히 제대로 직장 잡고 잘 정착하면 그런 일은 안 할 텐데 말이에요."

그래서 유 씨는 더더욱 탈북자들의 정착을 돕고 싶어한다. 그러나 현실이 따라주지 않는다. 법무부에서 추방 카드를 만지작거리는 이상, 취업은 고사하고 학업을 이어갈 수 있을지조차 장담할 수 없다.

"이런 사건이 있을 때마다 탈북자들 사이에선 공포가 생겨요. 제가 간첩으로 몰린 건, 성공하고 싶어서, 잘 정착하고 싶어서 열심히 했던 활동들이 빌미가 된 거거든요. 입 닥치고, 쥐죽은 듯 살아야 해요. 이제 탈북자 사회는 움츠러들 수밖에 없어요."

▲기자에게 항소심 선고 공판 소회를 밝히는 유우성 씨(왼쪽). ⓒ프레시안(최형락)

"세월호-조작 간첩 사건, 30년 뒤에 또 재연될 것"

유 씨의 변호인 양승봉 변호사는 지난달 11일 최후변론에서 이렇게 말했다.

"제 돈과 시간을 써가며 일을 했습니다. 그런데 계속 미안했습니다. 왜 미안한가. 굉장히 민망하지만 저는 그것이 애국심이라고 결론 내렸습니다. 대한민국 국가기관이 한 너무나 가혹한 행위에 대해 변호인이기 전에 대한민국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미안함을 느낍니다. 그게 저는 애국심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국가기관에 대한 애정과 신뢰가 있었기 때문에 실망감이 너무나 컸습니다."

양 변호사의 말대로, 대한민국 국가기관은 유 씨에게 너무나 가혹한 행위를 했다. 유 씨의 삶은 거의 조각났다. 직장도 잃었고, 주변 사람들의 신의를 잃었고, 시간을 잃었다. 그러나 엄청난 일을 저지르고도 국정원과 검찰은 별말이 없다. 오히려 검찰은 '간첩죄 무죄'라는 항소심 판결에 불복하며 대법원에 상고를 신청했다. 반성의 기미를 찾을 수 없다. 수사기관들은 끝도 없이 추락하고 있다.(관련 기사 : "검찰, 간첩 증거 조작 관여해놓고 여전히 '떳떳'?")

"국가가 개인을 이렇게 제멋대로 간첩으로 만들어 버리고…. 정말 30년 전 수사기관이나 지금이나 다를 게 없어요."

유 씨는 지난 주말 안산에 있는 세월호 합동 분향소에 다녀왔다. 그는 세월호 참사와 본인 사건이 크게 다르지 않다고 했다.

"유가족들, 추모하는 사람들을 보는데 가슴이 너무 아팠어요. 얼마 전 희생자 유가족이 언론에 보낸 글 중에 정말 공감이 되는 얘기가 있었어요. '과거 사고에서 대충 넘어가서 이번에 더 큰 피해가 왔다'는 겁니다. 세월호 사고나, 제 사건이나 마찬가지라고 봐요. 20~30년 전에 바로잡지 않았기 때문에 사건이 재발했듯, 이번 기회에 제대로 잡아야 해요. 국정원, 검찰을 그대로 놔둔다면 30년 뒤에 지금 저와 제 동생에게 벌어졌던 일들이 누군가에게 일어날 겁니다."


▲유우성 씨. ⓒ프레시안(최형락)

유우성 씨가 간첩 멍에를 벗고 대한민국 땅에서 평범하게 살 날이 올 수 있을까. 위 인터뷰는 지난달 25일 항소심 선고 공판이 끝난 뒤, 유 씨가 최근 1년간 '출근 도장' 찍듯 다녔던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방법원 앞 모처에서 만나서 나눈 이야기를 정리한 것이다. 인터뷰 1편(관련 기사 : "뻔뻔한 검찰-국정원, 절대 옷 벗지 않겠죠")은 지난 1일 발행됐다. 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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