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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전' 없는 '안보국가', 대한민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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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전' 없는 '안보국가', 대한민국 [2014 평화 상상] 유능한 안보 국가와 시민 안전의 폐기
국가의 패악

세월호 참사가 깊은 슬픔과 분노를 자아내는 것은 많은 사람들이 죽었기 때문이 아니라 많은 사람이 국가에 의해 무고하게 죽임을 당했기 때문이다. 34년 전 5.18 계엄군의 잔혹함과 올해 같은 날 시민의 죽음을 애도하는 시민들을 무자비하게 폭행하고 잡아간 정권의 모습은 같다. 광주 시민들을 폭도와 좌익으로 몬 국가의 모욕 행동은 지금 똑같이 자행되고 있다. 희생자들의 죽음을 가슴에만 묻을 수 없는 이유가 두 참사에서 같다. "이런 게 국가냐?"라는 많은 시민들의 질문은 정당하고 깊은 울림이 있다.

이번의 무고한 죽임을 그동안 잘 보이지 않았던 많은 무고한 시민의 죽음과 연결시킨다면, 문제는 부패한 일부 관피아의 잘못으로 국한되지 않는다. 패악스런 국가의 모습이 모두 드러나고 있는 상황이다. 군주가 대통령 행세를 하고 있으며, 군주의 종복이 각료 행세를 하고 있으며, 군주의 친위대가 공권력 행세를 하고 있고, 유족을 감시하고 정보를 수집하는 범법자들이 경찰 행세를 하고, 봉건적 족벌이 기업 행세를 하고, 나치의 추종자들이 언론인 행세를 하고 있는 것이 현재 여기 국가의 모습이다. 그리고 국가의 안보(안전보장) 최고 책임자들은 모두 이번 참사가 자신의 소관이 아니라는 안전한 이념에 사로잡혀 있다.

이 국가의 안전보장에서 시민 안전은 존재하지 않았다. '시민들의 국가'로서의 국가 안전도 존재하지 않는다. 안보는 국가가 아니라 정치권력을 수호하는 목적으로 오히려 시민을 죽이는데 편리하게 동원되곤 했다. 세월호 참사 이후 국가 기관과 국가의 통제를 받은 언론의 모습은 오로지 소수 권력자의 안전을 보장하는 데 혈안이 되어 있는 모습이다.

국가의 책임을 묻는 행위는 또다시 범죄시되고 있다. 분향소에 나타나는 국가의 모습을 보면 도무지 시민의 아픔에 공감할 능력이 없어 보인다. 이러한 국가에서 시민의 안전은 '관심사가 아닌' 정도가 아니라 단지 성가신 이슈, 시간을 끌어서 잊혀졌으면 하는 돌출 사건이 된다.

돈의 광기?

세월호 참사의 원인을 돈의 광기, 신자유주의의 폐해, 관피아의 부패, 해경의 무능함, 정경유착 정도로 보는 것은 국가의 패악을 너무 좁게 보는 것이다. 이번 참사에서 대통령과 각료들이 보여준 태도와 언행, 그 극도의 무책임은 돈의 광기로 좁혀지지 않는다. 이들을 포함해서 주류 언론, 보수 정치세력 등 국가를 주도하는 권력층엔 무책임을 정당화해주는 장치가 있기 때문이다. 즉, 돈의 욕망과 부패 때문에 이러한 참사가 발생한 것으로 보기에는 놓치는 면이 너무 많다는 것이다. 핵심은 무엇이 국가의 책임 방기를 반복적으로 정당화해주는가에 있다.

"만약 강남 아이들이었어도 구조가 이랬을까?" 이 질문은 핵심을 찌른다. 이건희 수술과 세월호 침몰의 비교도 핵심을 찌른다. 군 복무 중에 억울하게 목숨을 잃거나 불구가 된 사람들은 어떤가? 국가방위를 위해서 저임금에 혹사당하다가 죽거나 자살을 하거나 불구가 되거나, 평생을 가는 모욕을 가슴에 앉고 살아야 하는, 아무도 기억해주지 않는 수많은 이들은 또 다른 죽임 아닌가? 세계 최고의 자살 파국은 또 어떤가? 세계 최고의 불행지수는 어떤가? 민주공화국이라는 대한민국에서 시민의 생명은 절대로 평등하지 않다. 그리고 특권층이 아니라면 시민의 생명은 국가가 책임지지 않는다.

단 한 명도 구조하지 못한 세월호 참사에 비해서 세종대왕상에 올라간 학생들의 시위는 아주 신속하게 단 10분 만에 진압 당했다. 유가족들의 KBS 방문과 청와대 방문은 당국에서 미리 모든 정보와 진상을 미리 파악한 듯 보였고, 전국적인 작전으로 아주 효과적으로 통제되고 폐쇄되었다.

▲ 지난 9일 박근혜 대통령을 만나기 위해 청와대 인근 청운동 주민센터 앞에 앉아있는 세월호 유가족들을 경찰이 둘러싸고 있다. ⓒ프레시안(최형락)

해경과 해군 그 누구도 아무런 선내 구조 활동도 하지 않고 또 하지 않으려고 버틴 것에 비해서, 그리고 해군에서 제작한 구조함이 수리중이라서 출동하지 못한 것에 비해서, 5월 17~18일 서울 중심가에서의 애도시위에는 대대적인 공권력 동원과 엄청난 인력 배치가 이루어졌다. 이때 국가의 자원 동원과 명령은 순식간에 이루어졌고 효과적이었다. 어떤 잡음도 없었는지 효과적으로 명령을 받은 경찰은 최고 지위부터 말단 병력까지 신속하고도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이들의 행동은 과감했다. 명령에는 담겨있지 않았던 듯한 무리한 힘과 행동을 비무장 시민에게 사용하는데 주저함이 없었다. 이동과 행동이 날렵했다. 그리고 이들은 평소에 아주 잘 훈련받은 모습을 보여주었다. 연행된 피의자를 집에 모시고 가서 친절하게 재워준 경찰은 물론 단 한명도 없다. 지난 주말 아마도 청와대의 모든 각료들은 비상한 마음으로 모든 정보를 취합하여 자신 소관의 업무라는 자세로, 사태의 추이를 예의주시하면서 수시로 보고 받고 명령을 내리고 있었을 것이다.

이 두 가지 안전의 차이는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명백히 보이는 차이는 '국가안보' 시스템과 '시민안전' 시스템에 큰 차이가 있다는 것이다. 시민의 생명이 평등하지 못한 만큼 안전 시스템도 완전히 다르다. 세월호 구조에 민간 잠수부들이 동원될 수밖에 없었고 그들은 원시적인 장비와 엉성하기 더할 나위 없는 구조체계에서 목숨을 잃어가며 사투를 벌였다. 이러한 모습과 검증되지 않는 고가의 외제 무기를 수십조 원의 혈세를 들여서 구입하는데 동원되는 관피아, 로비스트 및 언론 마피아의 모습을 비교한다면 두 안전 시스템에 투입되는 재원과 인력은 비교조차 되지 않는다.

이번 국가의 패악에는 국가 책임자와 책임 기관들의 무책임과 파렴치함이 중요한 요소다. 그러나 이들의 무책임과 파렴치를 정당화하는 힘은 별도로 존재한다. 시민의 안전이나 정경유착이나 죽음에 대한 애도가 별로 중요한 국가 관심사가 아니라는 국가 운영 원리인데, 이 원리는 '국가안보'라는 절대 진리에 의해서 정당화된다.

세월호 참사에 드러난 국가의 총체적인 무능함과 파렴치함은 준비 부족이나 무언가 고장나서 발생한 것이 아니라, 이 국가가 유능하기 때문에 일어났다. 고속으로 유능하게 질주하는 설국열차 대한민국의 경우 그 '설국'은 안보위협으로, 기관차는 안보국가로 설정되어 있다. 그 기관차에 들어가 보면 국가는 없고 기관사만 보인다. 국가안보는 기관차의 이름일 뿐이고 안보는 기관사를 위해 존재한다. 사실 "국가안보"라는 호칭은 기관사의 안보를 가리키는 것이다. 기관사는 매우 안락하게 생명을 유지한다.

안보국가는 설국이라는 가상의 위협을 설정해서, 내부에 전쟁을 벌이는 국가다. 단 그 전쟁이 전쟁이라 불리지 않고 국가안보, 줄여서 안보, 국익이라고 불릴 뿐이다. 국정원의 만행, 정경유착, 족벌체계, 무능한 재난대책, 무한한 안보예산은 안보국가에서 필수적인 정상성이다.

안보국가에서 시민은 죽임을 당한다 – 국가권력층의 안전을 위해서

지금 표현된 시위나 집회 못지않게 사회 곳곳에서는 엄청난 자기 성찰이 일어나고 있고 그중에 "가만히 있어라"에 대한 눈물겨운 반성이 꽤 일어나고 있다. "가만히 있어라"에 대한 비판적 성찰과 침묵시위 등의 행동은 일상에서의 안보 국가를 해체하는 새로운 움직임으로 매우 의미가 크다. 교사들이 고백하는 "복종하라고만 교육해서 미안해"라는 교육현장에서의 반성도 마찬가지이다.

한국에서 돈의 광기는 일상에서의 통제와 복종에 의해서 정당화되고 체화된다. 돈의 광기에 순응하는 '어차피'의 세계를 형성하는 데에는 국가를 신화화하는 안보주의 이념이 결정적 역할을 한다. 온갖 부패가 통제되거나 드러나지 않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이를 매일 보고도 타인의 안전을 생각하지 못하고 말하지 못하는 이유는 조직이 가져올 처벌의 두려움과 국가로부터 보호받지 못할 믿음 때문이다. '어차피'의 세계다. 국가 권력과 유착한 종교세력과 기업이 긴밀한 마피아관계를 유지하는 것도 같은 이유로 정당화되어왔다.

안보국가는 시민안전을 체계적으로 폐기한다. 평범한 시민의 죽음은 애도되지 않는다. 독점된 안보 기준에 적합한 신하들의 죽음만 애도된다. 그래서 시민의 안전은 국가적 관심사가 되지 않는다. 안보국가의 전체주의적 목적을 위해서는 시민의 정신도 죽임을 당한다. 일상에서 자율적 판단과 사상은 불온시 된다.

'튀는' 모습, '나대는' 일에 대한 비난은 이렇게 매일매일 정당화된다. '바른 생활'이 안보 국가의 일상적 모습이 된다. 아이들에게도 군복을 입히고 군가를 부르게 하고 총기를 쥐어줘야 '바른 생활'이 완성된다. 그리고 "지금부터 복창합니다"라는 기계와 같은 '형님' 조교의 지시를 통해서 국가의 명령을 반복한다. "선실에 가만히 있어라"의 목소리는 이 기계적 목소리와 같았을 것이다. 이를 통해 시민적 자유의 죽음이 완성된다. 아동-청소년기부터 안보국가는 시민 생명을 폐기한다.

"더 이상 죽이지 마라"는 최근 학교 교사들의 호소는 국가를 향해서이기도 하지만, 나아가 학교와 미디어 등 일상에 침투한 안보국가성에게도 향해져야 한다. 더 이상 죽이지 않기 위해서는 안전보장의 의제와 시스템이 국가기관, 국가지도부 중심에서 시민 중심으로 전환되어야 한다. 세월호 참사를 반성한다면, 진정하게 시민안전을 위한 대책을 세우고자 한다면, 시민을 '가만히', '바르게', '똑바로', '조용히', '꼼짝 말고' 있게 하는 안보국가의 총체적 폐기가 최우선이다. 그로부터 시민을 위한 국가로의 재탄생이 시작되어야 한다.

4.19혁명과 5.16쿠데타, 5.18 학살과 저항, 6.10항쟁, 국가보안법, 중앙정보부, 공안기구, 국가정보원....안보국가는 표면적으로 국가의 안전을 보장하는 듯 행세를 한다. 실상은 국가를 사적 도구로 일삼는 안보 권력의 안전만 보장한다.

실제로 안보국가의 안보론은 안보나 치안으로 먹고 사는 집단의 안전만 보장한다. 그래서 일차로 시민 안전은 폐기된다. 국가안보 권력은 적에게 최대의 죽임을 가하기 위한 태세로 운영되기 때문에 안보국가는 근본적으로 죽임의 국가로 운영된다. 그 속에서 평민의 생명을 위한 살림의 시스템은 낙후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시민의 안전이 더욱 폐기된다. 죽임의 국가에서 살림의 국가로 변화하는 데에는 매우 커다란 전환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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