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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년 전 나라 팔아먹은 조선 집권층, 지금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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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100년 전 나라 팔아먹은 조선 집권층, 지금은? [한반도 브리핑] 국가와 국민을 위한 길, '자주외교'일 수밖에 없는 이유
세월호 참사는 한국의 총체적 문제를 단편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개발 독재시기부터 만연되기 시작한 사람의 생명보다 돈이 먼저인 물질만능주의는 일본에서 폐물로 나온 선박의 수명을 연장시켜줄 뿐만 아니라 증축까지 허용되게 하였다. 여기에는 선주와 이익집단 그리고 행정과 치안을 담당하는 국가기관의 물질적 이해관계가 얽히고설킨 배경이 있다. 나아가 선장과 선원들을 우선적으로 구조한 배경에는 보험금과 관계가 있다는 추론도 강하게 대두되고 있고 많은 사람들은 이러한 추론에 고개를 끄덕이고 있다. 권력과 결탁한 부정과 부패는 정권뿐만 아니라 국가의 몰락까지 초래한다는 것을 우리는 역사에서 찾을 수 있다.

조선말, 이 땅에서 부정과 부패는 극에 달하고 있었다. 1874년 11월 흥선대원군을 축출한 명성황후는 전국에 민씨를 모아 세도정치를 폈다. 이것을 지칭하여 민씨척족정권(閔氏戚族政權)라고도 하는데 민씨척족정권은 인사행정의 문란, 매관매직, 관료층의 부패 및 국고의 낭비 등을 일삼았다. 이들의 폭정으로 인해 민중의 분노는 극에 다다랐으며 마침내 1882년 6월 9일 '임오군란(壬午軍亂)'을 계기로 폭발하게 된다. 1년 넘게 봉급체납에 시달리고 있던 구식군대에게 봉급으로 지급되는 쌀에 썩은 쌀과 모래를 넣고 그 합한 양마저도 적게 주었던 것이었다.

▲ 을사늑약을 강제 체결한 뒤 찍은 사진. 앞줄 한 가운데 검은 복장이 이토 히로부미이고 그 왼쪽이 조선주둔군 사령관 하세가와다. 이때 한국은 계엄 상태나 다름없었다. ⓒ프레시안 자료사진

당시 군대의 식량은 선해청(宣惠廳) 담상(堂上) 민겸호가 담당하고 있었는데 민겸호는 군인들에게 가야 할 군량미마저 착복하는 부정을 저질렀다. 모래 섞인 쌀을 받은 군인들은 민겸호에게 가서 항의하였으나, 민겸호는 항의하는 군인들을 폭행하고 죽이려 하였다. 이 소식을 들은 다른 군인들은 선혜청 고지기를 때려 부상을 입히고 선혜청 당상 민겸호(閔謙鎬)의 집으로 몰려가 저택을 파괴하고 폭동을 일으켰다.

군인들은 이 사실을 대원군에게 알렸고 대원군을 이것을 자신이 다시 정권을 회복하기 좋을 기회로 보고 자신의 심복인 허욱을 시켜 난을 일으킨 군인들을 지휘케 했다. 그리하여 군민(軍民)의 불평은 대원군과 연결되어 민씨 및 일본 세력의 배척운동으로 확대되었는데 이것은 민씨 척족들이 매관매직을 통해 자리에 앉힌 지방관들의 착복과 횡령이 심했고 이들이 들여놓고 뇌물을 상납받던 일본상인들이 쌀을 대량으로 구매하여 일본으로 가져가 조선에서 식량난을 부추겼기 때문이었다. 군인들은 민중들과 합세하여 일본 공사관을 포위, 불을 지리고 일본인 13명을 살해하였다.

민중들의 가세로 더욱 강력해진 군민은 명성황후를 제거하기 위해 창덕궁으로 진입하였으나 궁녀의 옷으로 변장한 명성황후는 궁을 탈출하고 자신의 척족중 하나인 충주목사 민응식(閔應植)의 집으로 피신했다. 절체절명의 위기를 맞은 명성황후와 민씨일파는 청나라에 구원을 요청했고 청나라가 신속히 군대를 파견함으로써 임오군란은 일단락 짓게 된다. 그러나 조선의 외교적 비극, 나아가 국가자체의 몰락은 그때부터 시작됐다.

명성황후는 청나라의 비호를 받고 다시 정권을 잡을 수 있었다. 이것은 민씨척족정권의 재정립과 이들의 부정과 부패가 다시 시작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이에 민중은 동학교도들을 중심으로 결집하고 대응한다. 동학교도들은 1893년 한양에 와서 동학을 정식종교로 인정해 달라는 것과 일본상인 축출, 탐관오리 처벌 등의 내용이 담긴 복합상소(伏閤上疏)를 고종에게 올린다.
임오군란을 겪은 명성황후는 봉기를 막기 위해 일단 이들의 의견을 수용하겠다고 하고 되돌려 보내고 나서 각 지방에 그들을 제거하라는 령을 내린다. 이에 대응하여 동학교도와 농민들은 1894년 갑오년 전라도 고부에서 민란을 일으키게 되고 이것이 전라도, 경상도 그리고 충청도 등지로 전파되면서 거국적 동학농민운동으로 발전하게 된다.

민씨척족정권은 다시 청나라를 불러들여 이들을 진압하려 한다. 조선의 간청으로 청나라가 조선으로 출병하자 일본도 1887년 청나라와 맺은 텐진조약 (갑신정변 후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와 이홍장(李鴻章)이 조인했으며 주요 내용으로는, 청·일 두 나라 군대가 조선에서 철수하고, 장래 출병할 때는 서로 통고한다는 협정)을 빌미로 조선에 군대를 보내게 되어 청나라와 일본 간의 전쟁 즉 청·일 전쟁이 조선 땅에서 벌어지게 되었다.
일본이 1894년 청·일 전쟁에서 승리하고 그 여세를 몰아 조선 정계에 압력을 가해오자 명성황후는 친러시아적인 태도를 보임으로써 일본에 대항했다. 명성황후는 삼국간섭(일본은 중국과의 전쟁인 청·일 전쟁에서 승리하면서 중국과 맺은 '시모노세키 조약'으로 중국의 랴오둥 반도, 타이완, 조선에 대한 간섭권을 얻게 되었으나 일본이 중국 대륙을 침략하려는 의도를 알아챈 러시아가 프랑스, 독일과 힘을 합쳐 랴오둥 반도를 청나라에 돌려줄 것을 요구하는 등의 간섭)에 의해 일본이 만주를 반환하는 모습을 보고 (즉 일본이 러시아에 꼬리를 내리는 모습을 보고) 외교정책을 친러시아로 전환한 것이었다.
명성황후는 조선의 이권을 러시아에 보장하며 러시아로 하여금 일본을 견제하도록 유도하였고, 이것은 일본이 황후를 시해하는 빌미가 되었다. 이후 일본은 러시아와 전쟁에서 승리하고 1905년 조선의 외교권을 박탈하는 이른바 을사조약 (乙巳條約)을 강제로 체결하고, 조선은 일본의 식민국으로 전락하는 길을 걷게 된다.

작금 한국에서의 부정부패가 조선말 시기의 것과 같은 수준 (level)과 정도(degree)는 아닐 것이다. 그러나 개발독재시기부터 만연하기 시작해 이제는 우리 사회의 지배 이념 (dominant ideology)이 돼버린 물질만능주의는 세월호 참사와 같이 일어나서는 안 될 사건의 배경이다.

수운 최제우(水雲 崔濟愚)는 '사람이 곧 하늘이다(人乃天)'라고 하였다. 시간은 다르지만 조선 말기에도 사람보다는 물질이 우선시 되고 있었다는 것을 물질 우선인 서학에 맞서 동학을 다시 세우고 인내천을 강조하였던 수운선생을 통해 알 수 있다.

세월호 참사는 '단순한 교통사고'가 아니다. 그리고 세월호 참사의 진상규명과 다시는 이와 같은 참사가 나지 않도록 시정을 요구하는 유족들의 요구는 결코 무리한 억지가 아닌 당연하고 정당한 것이며 사람이 최우선이 되어야 한다는 국익의 궁극적인 목적에도 부합한다.

작금 한반도를 둘러싼 국제정세는 조선 말기의 것과 비교하여 많은 유사점을 보이고 있다. 유일 초강대국의 지위가 흔들리고 있는 미국은 한·미·일 삼각동맹을 통해 중국을 견제하려고 하고 있으며, 이를 위해 일본이 집단 자위권을 가져 전쟁을 할 수 있는 국가로 용인해 주고 있다. 한국의 제1 무역국인 중국은 이를 저지하기 위해 한국을 우방국인 북한보다 먼저 방문하여 한국과 우호적 관계를 안착시켜 한·미·일 삼각동맹에서 한국을 떼어내려 하고 있다. 미국과의 관계가 우크라이나 사태로 더욱 악화되고 있는 러시아는 다시 극동으로 눈을 돌려 중국과 합동군사훈련을 실시하며 미국의 압박에 대응하고 있다. 또한 경제협력을 통해 북한과의 관계를 개선시키고 러시아 극동개발을 추진하고 있으며 한국의 참여도 요청하고 있는 상태이다.

이렇듯 현재 한국은 미국, 중국, 러시아, 그리고 일본 (일본은 박근혜 대통령 당선 이후 줄곧 한일 정상회담을 요청하고 있다)으로부터도 러브콜을 받고 있다. 조선 말기와 현재의 한반도를 둘러싼 국제정세가 유사성을 보이는 것은 한반도를 둘러싼 강대국들 모두 한반도를 자국 이익의 관점에서 이용하려 하기 때문이다.

과거의 위정자는 민중들을 착취와 억압의 대상으로만 보고 자신의 권세와 척족의 이익만을 위해 이 나라, 저 나라에 붙어 의지하며 주변 강대국들을 한반도에 끌어들여 전쟁까지 하게 하고, 결국에는 국가를 다른나라에 넘겨주었던 치명적인 우(愚)를 범했다. 진정으로 국가와 국민을 위해서는 자주 외교가 필수적이라는 것은 과거의 우에서 얻을 수 있는 뼈아픈 교훈이다. 그리고 자주 외교는 민(民)을 위한, 또 민이 주인 되는 정치를 폈을 때만 가능하다는 사실은 과거의 우에서 배울 수 있는 또 다른 소중한 교훈이다.

많은 사람들이 세월호 참사는 대한민국의 총체적 문제의 축소판이라고 한다. 세월호 참사의 철저한 진상 규명과 이에 따른 치밀하고 확고한 시정은 민을 위하고 민이 주인 되는 정치와 자주 외교로 가는 중요한 관문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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