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인화면으로
누가 김영오 씨를 단식으로 몰고 갔는가?
  • 페이스북 공유하기
  • 트위터 공유하기
  • 밴드 공유하기
  • 인쇄하기
  • 본문 글씨 크게
  • 본문 글씨 작게
정기후원
누가 김영오 씨를 단식으로 몰고 갔는가? [김기협의 페리스코프] 대처의 '불통'까지 벤치마킹 하나?
1999년 <타임>지가 선정한 '20세기의 가장 중요한 인물 100인' 중에 에멜린 팽크허스트(1858-1928)가 끼어 있다. "우리 시대 여성의 의미를 빚어낸 인물. 인류사회에 되돌릴 수 없는 형태의 변화를 이끌어냈다"라는 설명이 붙어 있다.

팽크허스트는 여성참정권연맹(WFL, 1889)을, 그리고 여성사회정치동맹(WSPU, 1903)을 만들어 영국의 여성참정권운동을 이끌었다. 1918년과 1928년의 선거법 개정을 통해 영국에 여성참정권이 확립되는 데 가장 큰 공로를 세운 인물로 기억된다. (1918년의 개정은 21세 이상의 남성과 30세 이상의 여성에게 투표권을 부여했다. 세계대전 때문에 남성 인구가 적은 상황을 감안해 잠정적으로 남녀 간의 차이를 둔 것이다. 1928년의 개정으로 21세 이상의 모든 남녀가 투표권을 갖게 되었다.)

팽크허스트의 그늘에 가려질듯하면서도 눈에 띄는 또 한 사람이 있다. 팽크허스트의 동생인 메리 제인 클라크(1852-1910). 언니 팽크허스트와 함께 WSPU 활동을 하다가 1910년 11월 상점 유리창을 깨트린 죄로 체포되었다. WSPU는 파괴 활동을 장려하는 적극적 투쟁노선을 취했고, 체포된 투사들은 단식 투쟁을 벌이는 일이 많았다. 클라크는 단식 투쟁에 참여하다가 강제 급식을 당했는데, 12월23일 응급상태에서 석방되고 사흘 후 숨졌다. 무리한 강제 급식이 사망의 원인으로 지목되었다.

강제 급식은 영국 교정 당국이 수감자의 단식 투쟁에 대응하는 통상적 방식이었는데 클라크의 죽음으로 비난 여론이 거세게 일어났다. 그 때문에 1913년 '건강위험수감자 일시석방법'이 만들어졌다. 단식을 강제로 금지하지 않고, 건강이 위험해지면 석방했다가 충분히 회복되었을 때 재수감한다는 정책이었다. 이 법에는 '고양이와 쥐 법'이란 별명이 붙었다.

▲ "강제급식 당하는 기분은?" <월드매거진> 1914년 9월 6일자에서

영국의 여성 참정권 운동가들이 시작한 20세기 단식 운동의 전통을 넘겨받은 것은 당시 영국의 지배를 받고 있던 아일랜드와 인도의 독립 운동가들이었다. 인도 하면 얼른 간디가 떠오르는데, 그보다 우리 사회에 덜 알려진 아일랜드 이야기부터 하고 싶다. 20세기 아일랜드 역사에서 단식 투쟁이 매우 큰 의미를 차지하기 때문에, 기독교 전래 이전의 고대 아일랜드 문화와 풍속에서 그 뿌리를 찾기도 한다. 불의에 대한 항의의 표시로 항의 대상자의 집 문 앞에서 단식을 행하는 풍속이 널리 존재했다는 것이다.

1920년을 전후해 많은 아일랜드 독립 운동가들이 옥중에서 단식 투쟁을 벌였고 여러 사람이 죽었다. 그중 가장 널리 알려진 사람이 테렌스 맥스위니(1879-1920)였다.

시인이자 극작가인 맥스위니는 1913년부터 독립 운동에 참여, 여러 번 체포당했다. 1918년 아일랜드 의회(Dáil Éireann) 의원으로 당선되어 활동 중 1920년 3월 고향인 코크 시장으로 있던 친구 토머스 매커튼(1884-1920)이 변장한 경찰대에게 암살당한 후 후임으로 뽑혔다. 그 해 8월 선동 문건과 암호용 난수표 소지 혐의로 체포되어 군사법정에서 2년형을 선고받고 잉글랜드의 브릭스턴 형무소에 수감되었다. 체포 직후부터 단식을 시작한 맥스위니는 69일째인 10월20일 혼수상태에 빠지고 닷새 후 죽었다. 혼수상태에 빠지기 직전에 있었던 당국의 강제급식 시도가 죽음의 직접 원인으로 지목되기도 했다.

저명한 지식인 맥스위니의 탄압은 영국 정책의 야만성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면서 전 세계적 항의를 불러 일으켰다. 미국에서는 영국 상품 불매운동이 일어났고, 남아메리카의 4개국 원수가 교황의 개입을 공동으로 청원했다. 프랑스와 독일에서도 항의 시위가 있었다.

▲아일랜드 코크 시청에 있는 맥스위니 흉상.
맥스위니의 영향이 가장 크게 나타난 곳이 인도였다. 그가 죽은 이듬해 나온 책 <자유의 원리들>(Principles of Freedom)은 영어로 읽히는 것으로 모자라 여러 인도 토착어로 번역되어 나왔다. 마하트마 간디와 자와할랄 네루도 깊은 경의를 표했고 좌익 독립운동가로 국민적 영웅인 바가트 싱(1907-1931)도 맥스위니의 숭배자였다. 싱은 1929년 116일간의 옥중 단식을 강행했는데, 아버지가 중단을 권할 때 맥스위니의 말을 인용해 응답했다고 한다. "내 석방보다 내 죽음이 대영제국의 분쇄에 더 도움이 될 것입니다." 당시 런던에 있던 20세의 베트남 청년 응우옌 아이 쿠옥(호치민)도 이런 말을 남겼다. "저런 시민을 가진 민족이라면 무슨 일이 있어도 항복하지 않을 것이다."

맥스위니를 비롯한 아일랜드 투사들의 단식 투쟁이 동양인들에게 특히 큰 반향을 일으킨 까닭이 무엇일까. 단식 투쟁에는 '자살'의 의미가 부분적으로 들어 있다. 이 의미가 서양보다 동양에서 더 쉽게 받아들여진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16세기 말 중국에서 활동한 이탈리아인 선교사 마테오 리치(1552-1610)의 이런 기록이 있다.

"더욱더 야만적인 풍습은 자살을 하는 것인데, 생활고를 견디지 못하거나 큰 불행을 이겨내지 못하는 경우가 많지만, 이런 것보다도 더욱 어리석고 더욱 비겁한 동기는 미워하는 사람을 골탕 먹이기 위해 제 목숨을 끊는 일이다. 들리는 말에 의하면 해마다 몇 천 명의 사람들, 남자들만이 아니라 여자들까지, 자기 손으로 자기 목숨을 끊는다고 한다. 공적인 장소나 증오하는 상대의 집 문 앞에서 목을 매다는 것이 가장 흔한 방법이다. 그밖에는 강물에 뛰어들거나 독약을 먹는 것이 많이 쓰이는 방법이며, 이유는 별별 사소한 것들이 다 있다." (Matthew Ricci(L. Gallgher tr.), <China in the Sixteenth Century> p. 87)

기독교에서는 자살을 신의 섭리에 대한 저항이라 하여 일찍부터 죄악시했고, 유럽에서 근세까지 자살을 범죄시한 것도 그 영향으로 보인다. 유태교와 이슬람교 같은 다른 유일신교에도 비슷한 관점이 보인다. 동양의 주요 사상이나 종교에서는 자살을 부정적으로 보지도 않고, 설령 부정적으로 보더라도 죄악으로까지 보지는 않았다. 1960년을 전후한 베트남 승려들의 연이은 분신 자살은 동양인보다 서양인들에게 훨씬 더 큰 충격을 줬다.

아일랜드 투사들 중에는 확고한 자살 의지를 갖고 단식에 나선 사람들도 있었다. 자신의 죽음이 대영제국의 분쇄에 더 도움이 되리라고 한 맥스위니의 말도 그런 뜻이다. 그런 사람들이 자살의 방법으로 단식을 택한 것은 가톨릭신자로서 정체성과 함께 항의의 뜻을 살리기 위해서였다. 죽음에 이르는 결정적 책임을 영국 당국에게 맡기는 방법이었다.

단식의 첫 며칠은 체내의 글루코스(포도당 등)에서 에너지를 얻기 때문에 몸에 큰 변화가 없다. 며칠 후면 체지방 분해가 시작되면서 케톤체가 혈액 중에 증가하는 케톤증(ketosis)이 일어난다. 여기까지는 건강한 사람의 경우 쉽게 회복할 수 있는 일시적인 문제다. 그런데 약 20일이 지나면 근육과 장기의 세포를 파괴해 에너지를 얻는 '기아 상태'로 들어선다. 이 단계의 신체 손상은 회복하기 어렵고 건강한 사람이라도 생명의 위협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특별한 체질이 아닌 보통사람은 50일에서 70일 사이에 목숨을 잃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바가트 싱의 116일 외에는 100일을 넘는 단식이 확인된 예가 없다.

항의 방법으로 단식 투쟁이 널리 채택된 것이 황혼기의 대영제국에서였다는 점이 흥미롭다. 여권 운동가도 아일랜드와 인도의 독립운동가도 대영제국 내의 마이너리티를 대표하는 입장이었다. 체제의 전복 대신 여론에 호소함으로써 당국의 각성을 촉구하는 항의 방법을 그들이 택한 것은 막강한 물리력을 가졌으면서 여론에 약한 체제의 특성에 맞춘 것이었다.

단식 투쟁은 '투쟁'이란 말이 어색할 정도로 비폭력적인 항의 방법이다. 그러면서도 더 없이 결연한 의지를 담을 수 있는 것이기 때문에 여론 환기에 효과적인 방법이다. 여론이 정치에 큰 영향을 끼치는 20세기 후반의 정치 환경에서 자살, 테러 등 극단적 표현 방법이 널리 채택되는 가운데, 단식은 '소통'을 촉구한다는 점에서 온건한 표현 방법이다.

40일째 단식을 이어온 김영오 씨가 병원으로 이송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단식도 중단한다는 말을 함께 들었는데, 이제 보니 병원에 가서도 단식 계속을 고집하고 있다고 한다. 그분의 뜻이 이뤄지기 바라는 마음보다 이제 단식을 빨리 거두기 바라는 마음이 더 바빠진다.

그분이 바라는 특별법이 그리 별난 것이 아니라고 보지만, 대한민국 정치권은 그 정도 당연한 일도 제대로 해낼 능력이 없는 것 같다. 그러면 그분이 결국 목숨을 잃어야 하나? 특별법 없이도 단식을 중단시킬 수 있는 길이 없을까?

무능한 정치권이 때 맞춰 필요한 조치를 취하지 못하더라도, 그분의 뜻을 이 사회가 널리 이해하고, 그 실현을 위해 함께 노력할 것이라는 믿음을 줄 수 있는 데 한 가닥 희망을 걸 수밖에 없다. 새누리당 인사들이 그런 믿음을 등지는 망언을 툭툭 던지고 있지만, 신경 쓸 필요 없다. 원래 그런 동네라고 치부하면 된다. 종교계든 정치계든 모든 사람들이 김 씨 등 세월호 유가족들에게 조금이라도 더 믿음을 키워줄 수 있는 표현 방법을 열심히 찾아야 한다. 그 몫을 문재인 의원이 열심히 찾고 있는 것이 고맙다.

▲세월호 침몰 참사로 희생된 고 김유민 학생의 아버지 김영오 씨가 22일 오전 건강 악화로 병원으로 이송되고 있다. 김씨는 수사권·기소권을 포함한 세월호 특별법 제정을 촉구하며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40일째 단식 중이었다. ⓒ연합뉴스

박근혜는 언젠가 어느 대통령을 "참 나쁜 대통령"이라고 한 일이 있다. 대통령 역할을 잘못하는 것으로 본다면 "나쁜 대통령"으로 부를 수 있다. 그런데 나는 박근혜를 그렇게 부르고 싶지 않다. "참 나쁜 인간"일 뿐이다. 대통령 역할을 잘하고 잘못하는 문제가 아니라 아예 외면하고 있다. 근무시간 중에 일곱 시간이나 소재에 의혹을 남기는 사람이 너무 바빠서 유가족을 못 만난다고? 무서워서 못 만나는 건가, 싫어서 안 만나는 건가?

황혼기 대영제국의 문제들을 부각시키던 단식 투쟁이 영국인의 자존심을 완전히 땅바닥에 떨어트린 사태가 1981년 일어났다. 북아일랜드 분리주의자 10명이 옥중 단식으로 목숨을 잃은 '보비 샌즈 사건'이다. 정부의 '불통'이 어떤 문제를 일으키는지 단적으로 보여준 사태다.

1980년 10월27일 북아일랜드의 메이즈 교도소에서 7명의 죄수가 단식 투쟁을 시작했다. 6명은 아일랜드공화군(IRA) 소속, 한 명은 아일랜드민족해방군(INLA) 소속이었고, 그들의 요구 사항은 제네바협약에 의거한 전쟁 포로 대우를 해달라는 것이었다. 아일랜드가 1922년 이후 독립의 길을 걸을 때 북아일랜드는 분리되어 영국에 남았고, 1960년대 후반 북아일랜드의 마이너리티가 되어 있던 가톨릭계 주민들이 일으킨 인권운동이 부당한 탄압을 받자 그 반발로 북아일랜드를 아일랜드로 돌려보내라는 분리주의 운동이 자라나고 있었다.

영국 당국이 1971년 8월 계엄조치의 성격을 가진 '수용소 정책(internment)'을 펴면서 죄수의 신분 문제가 일어났다. 1975년 12월까지 시행된 이 정책 아래 1981명이 재판 없이 수용되었는데, 처음에는 그들을 죄수로 취급하려고 했다. 그러나 거센 항의 앞에 1972년 7월부터 수감자를 '특수신분(SCS, Special Category Status)'으로 대우하기 시작했다. 전쟁포로에 준한 신분이었다. 이 신분은 판결을 받은 죄수들에게도 적용되었다.

1976년 3월 영국 당국은 SCS 제도의 철폐를 발표했다. 수용소 정책을 폐기하면서 롱 케시 수용소의 이름을 메이즈 교도소로 바꾸고, 이제부터 들어오는 수감자는 일반 죄수와 같이 대우하기로 한 것이다.

그러나 수감자들은 범죄자가 아닌 정치범으로서 특수신분의 계속을 요구했다. 이 직후 수감된 18세의 IRA 전사 키에란 뉴전트는 죄수복을 거부하며 담요만을 걸치고 지냈다. 이후 수백 명 수감자가 뉴전트의 뒤를 따랐다. 이것을 '담요 투쟁(blanket protest)'이라고 했다.

당국은 죄수복을 입지 않고는 화장실을 이용하지 못하게 하는 조치로 대응했다. 그러자 수감자들은 감방 안에서 요강을 사용했다. 요강을 화장실에 가져갈 수 없으므로 다른 곳에서 비울 수밖에 없었는데, 요강을 비우다가 폭행을 당하는 일이 이어졌다. 이에 수감자들은 감방 벽에 똥을 바르고 목욕을 거부하며 항의했다. '오물 투쟁(dirty protest)'이었다.

1980년의 단식 투쟁은 담요 투쟁과 오물 투쟁의 연장선 위에 있는 것이었다. 브렌던 휴즈가 이끈 이 단식이 40일을 넘기자 영국 정부도 양보할 기색을 보이기 시작했다. 수감자들의 요구에 대한 정부의 답변서가 런던을 떠나 벨파스트에 도착했을 때 휴즈는 답변서를 보지 않은 채 단식 53일째 날인 12월18일 단식 중지를 선언했다. 동료 한 사람의 생명이 위독한 지경에 이르렀기 때문이었다.

5개항으로 요약된 수감자의 요구는 실상 대단한 것이 아니었다. 실정법의 테두리 안에서 충분히 취할 수 있는 조치였다. 그 정도 요구를 들어주는 데 인색했다가 이듬해 재개된 단식 투쟁으로 열 명의 목숨이 희생되는 상황이 닥치자 영국이 과연 문명국 맞느냐는 비판이 국내외에서 터져 나왔다. 5개항의 내용은 이런 것이었다.

1. 죄수복을 입지 않을 권리.
2. 강제노역을 하지 않을 권리.
3. 수감자끼리 자유롭게 교류하고 교육과 오락 활동을 조직할 권리.
4. 매주 한 차례 면회를 갖고 편지 하나와 소포 하나를 받을 권리.
5. 투쟁 과정에서 박탈당한 혜택의 회복.

막상 도착한 정부 답변서의 내용은 만족스러운 것이 아니었다. 예컨대 죄수복 아닌 복장을 정부가 지급하고, 수감자가 자기 옷을 입는 것은 계속 금지한다는 식이었다. 수감자들은 2월 4일 정부의 조치가 부족하다고 주장하면서 단식 투쟁의 재개를 통보했다. 그리고 정부의 응답이 더 없자 제2차 단식 투쟁을 시작했다.

1981년의 제2차 단식 투쟁은 참여자들이 시차를 두고 참여하는 방식을 취했다. 홍보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해서였다. 3월1일에 27세의 IRA 지도자인 바비 샌즈가 단식을 시작하고, 한두 주일마다 한두 명씩 추가로 동참했다. 열 명의 수감자가 목숨을 잃은 후 북아일랜드 장관(직할통치를 위해 영국 정부 내에 만든 자리)이 온건한 인물로 바뀌고 문제 해결에 성의를 보이자 10월3일에 투쟁을 끝냈다. 그 사흘 후 신임 장관 제임스 프라이어는 수감자의 요구를 대부분 수용하는 조치를 취했다.

목숨을 잃은 10인의 명단은 아래와 같다.


1979년 5월에 출범한 대처 정부는 제1차 단식 투쟁에 이어 제2차 단식 투쟁까지 냉담한 태도를 지켰다. 법령 개정 없이 행정 조치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까지 외면하며, 조금이라도 양보하면 세상이 뒤집어질 것처럼 엄살을 떨기만 했다. 결국 국제 여론을 못 이겨 해결에 나설 때도 북아일랜드 장관을 교체해서 해결을 맡기고 중앙 정부의 개입을 피했다. 이 모습을 보며 한 소련 기자가 대처 수상에게 '철의 여인(Iron Lady)'이란 별명을 붙였다.

이 과정에서 일어난 정치적 파장을 검토해 본다. 우선 '불통의 여인' 대처 수상의 업무수행 지지도가 23퍼센트까지 떨어졌다. 영국 수상의 지지도 조사가 시작된 이래 최저 기록이었다. 대처는 1990년까지 수상직을 지켰지만, 이듬해 4월 포클랜드 전쟁이 일어나 주지 않았다면(또는 그가 일으키지 않았다면) 그 해를 넘길 수 없었을 것이 확실하다. 가정법에 "확실하다"는 말을 쓴 것은 여기에 이견을 가진 사람을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더 중요한 것은 북아일랜드 사태의 악화였다. 민권운동에 대한 부당한 탄압 때문에 가톨릭계 주민의 반발이 꾸준히 늘어나 오기는 했지만 영국으로부터의 분리를 확고히 주장하는 사람은 아직 소수였고, 더군다나 무장 투쟁에 나서는 사람은 극소수였다. IRA 등 무장투쟁단체들은 상징적인 존재로 퇴화해 있었다.

그런데 수십 명의 수감자들이 '북아일랜드 분리'도 아니고 수감 조건의 개선을 요구하며 비폭력적 항의 방법을 들고 나섰는데, 마땅히 취해야 하고 쉽게 취할 수 있을 것 같은 조치를 거부하며 줄줄이 죽어나가게 하고 있으니 보는 사람들의 마음이 어땠겠는가. 좀 못마땅한 일이 있어도 영국 국민으로 살아가려던 온건한 사람들마저 "저게 우리 정부 맞아?" 하는 생각이 들지 않을 수 없었다. IRA 등 분리주의 세력이 폭발적으로 성장하고 투쟁 방법도 갈수록 과격해졌다.

격화된 분위기 때문에 영국 정부는 선거법을 개정하는 수모까지 겪어야 했다. 단식 중이던 투쟁 지도자 바비 샌즈가 4월 9일 북아일랜드 한 선거구의 보궐선거에서 영국 하원의원으로 당선되었다. 단식 40일째로 접어들어 사망 위험이 긴박해지던 시점에서의 이 당선이 여론에 큰 자극이 되었다. 단식 중단을 권하기 위해 교황까지 특사를 보냈다.

5월 5일 샌즈가 죽은 후 분리주의에 대한 동정심이 더욱 고조되었다. 6월 11일 아일랜드 총선거에서까지 몇 명의 북아일랜드 분리주의자들이 옥중 출마로 당선되었고, 그 무렵의 북아일랜드 지방선거에서도 분리주의 세력이 약진했다. 영국 의회는 샌즈가 비운 의석에 다른 수감자가 출마하는 것을 막기 위해 서둘러 선거법을 개정했다. 복역 중인 수감자의 출마를 금지하는 것이 개정 내용이었다.

사태가 악화되는 동안 대처 수상은 "범죄는 범죄일 뿐, 정치가 아니다"라며 수습 노력을 거부했다. 범죄가 왜 정치가 아니라는 걸까? 범죄를 외면하는 정치는 그 자체가 범죄가 되는 것 아닐까? 대처의 '지도력'을 논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나는 그가 정치의 지도자가 아니라 투쟁의 지도자일 뿐이라고 본다. 그는 지지자와 반대자의 패싸움을 통해 권력을 농단했고, 그 과정에서 영국의 국론을 분열시키고 국격을 형편없이 떨어뜨렸다. 그를 벤치마킹 대상으로 여기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이 개탄스럽다.

이 기사의 구독료를 내고 싶습니다.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매번 결제가 번거롭다면 CMS 정기후원하기
10,000 원
결제하기
일부 인터넷 환경에서는 결제가 원활히 진행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kb국민은행343601-04-082252 [예금주 프레시안협동조합(후원금)]으로 계좌이체도 가능합니다.
프레시안에 제보하기제보하기
프레시안에 CMS 정기후원하기정기후원하기

전체댓글 0

등록
  • 최신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