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내내 목소리의 떨림이 입술을 통해 전해졌다. 소리를 구성하는 그의 언어에는 간절함이 묻어났다. 때로는 머리를 손으로 감싼 채 무엇인가에 골몰하기도 하고, 신음에 가까운 탄식을 내뱉기도 했다. 지난날 거침없는 아버지의 붓(筆)을 위협하는 이들 때문에 하얗게 밤을 새웠던 딸과 손자, 그리고 (그의 표현에 의하자면) "막중한 자본독재의 압력 속에서" 오늘을 살아가는 청년을 이야기할 때 그의 눈에는 맑고 빛나는 것이 어른거렸다.
노년의 지혜는 지금 어디를 향해 있을까. '언론(말 길)'의 흐름이 더 이상 무소불위의 권력자와 비대해진 매체에 의해 차단될 수 없기에, 그는 '오늘날 말의 수로(水路)가 넓어져 누구나 언론의 역할을 할 수 있다'는 '호모 언론인'이란 말을 찾고 있다. 그가 살아온 궤적에 참으로 어울린다. '호모', 즉 '인간'의 성정(生性)에 자본과 그것을 추구하는 탐욕이 결부돼 나타난 비인간화 및 인간성의 퇴보는 더욱 간절하게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하게 만든다.
"당신들을 삼포, 사포, 오포를 넘어 전포(全抛) 세대로 만든 죄인으로 속죄한다. 내가 무슨 말을 할 수 있겠는가. 다만 우리 젊은이들이 절실하고 각박한 가운데 '인간이 혼자 힘으로는 살아갈 수 없구나' 하는 것을 자각할 필요는 있겠다. 친구가 적이 되면 안 되지 않은가. 언제까지 그렇게 살아야 하는가. 그렇게 살려고 태어난 것은 아닌 것 같다. (중략) 손이 닿는 대로 마주 잡고, 조금 더 밀도가 짙어지면 어깨동무도 하고 그렇게 연대의 정신을 가지고 이 길을 함께 걸었으면 좋겠다. 그게 내가 살 길이고 우리가 살 길이다. 나 같은 나이든 자들도 그런 고민과 어깨동무에 기꺼이 동참하고 싶다."
'이완구 녹취 파일'이 공개된 후, "이완구는 인간으로 환생하라!"던 그의 외침이 왜 그리 절실했는지 알 것 같다. 아마도 그가 작년 세월호 집회 때마다 보이지도 않는 곳에서 자리를 지키며 '유민아빠를 꼭 살려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과 진배없었을 것이다. 맞다. 이것이 진정 우리 언론과 우리 정치를 살리는 일이며, 인간 개인과 공동체를 살리는 일이다. 이제라도 우리는 나와 내 주위를 돌아보며, 내버려두어 점점 더 상실되어가는 인간성을 되찾고 '피(彼)자살자'로 죽어가는 내 옆 사람을 '생명의 삶'으로 이끌어내야 한다. 공평하지 않은 것을 알면서도 그것이 주는 이로움에 차마 포기하지 못했던 룰을 함께 고쳐나가야 한다.
인간주권을 동등하게 회복하는 것. 모든 사람에게 존재하는 자유의 융기가 공평하게 발현되도록 하는 것. 그것이 언론인 '김중배'가 말하는 한 국가를 살아가는 국민으로, 더 나아가 무국적 세계시민으로, 인간으로 살아가는 오늘의 조건이다. 세월은 흘렀지만 여전히 입술을 떨며 진실을 이야기하는, 우리와 어깨동무를 하고 있는 '김중배'가 여기에 있다.
- 인터뷰에 응해주셔서 감사하다.
나이는 많이 먹었지만, 사람과 사람 사이의 장벽을 허무는 것을 좋아한다. 인터뷰 제안을 받고 1년여를 망설였다. 스스로 나의 삶을 돌이켜봤을 때 실제로 내가 사회적으로 활동했던 삶은 자유인(自由人)으로서보다는 다분히 제한인(制限人)으로서의 궤적(軌跡)이었다. 날 때부터 있었던 '자유의 융기(隆起)' 같은 것이 80여 년을 살면서 거의 다 사라져 버리고, 오히려 움츠러든 요즘이지 않나 한다. 평생을 언론에 종사해왔는데, 가끔은 지난날 내가 써왔던 것에 대해 다시 생각하며 '아, 이건 잘못된 말인데!' 하는 것이 있다. 잘못 쓴 것 중에는 나 스스로 고치면 되는 것도 있지만, 나 혼자 고쳐서는 대세를 바꿀 수 없는 언어들이 이 시대 대한민국에 횡행하고 있다. '언론(言論)'이란 말도 그 예 중의 하나이다.
- '언론'이라는 개념은 보통 학습과정에서 배운 '조선시대 사간원, 사헌부, 홍문관' 내지는 주로 <한성순보><독립신문><조선일보> 등의 신문을 비롯한 근대적 의미의 방송, 통신 매체 등으로 이해된다.
언론을 '언관(言官), 사관(史官)'과 비견할 때는 보통 '정상(頂上) 권력에 대한 가차 없는 비판을 하는 영역'을 의미한다. 우리 역사를 되돌아 봐도 신라시대의 고운(孤雲) 최치원 선생(857~?)이 쓴 글에서 원효시대(617~689) 때 언론은 '생각하고 의논한다'는 뜻의 '사의도(思議道)'라고 했고, 이것에서 '언도(言道)'라는 말이 나왔음을 알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선 '언론'의 원형격인 '말 길'은 보다 보편적인 소통의 생태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아야 옳다. 언론이라는 개념은 조선의 율곡선생(1536~1584)에 와서 절정을 이루었는데, 그는 '언로(言路)는 혈로(血路)와 같다'고 했다. '말 길이 막히면 동맥경화와 같이 나라가 부패한다'는 뜻이다.
이런 언론의 개념이 현대에 와서는 신문이나 방송 등 미디어를 중심으로 쓰이게 됐다. 이제는 팟캐스트, SNS 등 인터넷을 통해 만인에 의한 언론 행위가 가능해졌다. 그렇지만 여전히 사람들에게 언론은 조·중·동, KBS, MBC 등을 중심으로 하는 소위 대형 언론매체로 인식된다. 주요 언론이라 불리는 신문·방송 스스로도 자기들만 언론이라고 한다.
2012년 만들어진 <뉴스타파>에서 이듬해 5월 해외 조세피난처에 관한 탐사보도를 했을 때 모든 미디어가 그것을 따라 보도했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엄연히 언론의 역할을 하는 <뉴스타파>를 '인터넷 방송매체, 좌파매체' 등으로 치부했다. 자기들만 언론이고 다른 언론은 매체라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그들은 북한의 평양중앙방송을 '북한 언론'이라고 하지 않고 '북한 매체'라고 한다. 이렇듯 이미 대세가 된 말이 굉장히 많다. 그것을 문법학자가 아무리 잘못됐다고 지적해도 언중(言衆)이 그렇게 말하면 어쩔 수 없이 쓰게 된다. 그러나 국민 이전의 인민(人民), 모든 백성이 말하고 의논하는 '말 길'의 흐름을 '언론'이라는 바른 이름으로 되돌리는 게 중요하다.
- 선생께서 처음 접하고 이해했던 '언론'은 무엇이었나.
소학교 시절, 언문(言文)을 배웠다. 그때는 어릴 적부터 한문이나 붓글씨를 배웠다. 중학생이 되면서 우후죽순으로 생겨난 신문사 덕에 신문에 관심이 있었던 것 같다. 지금도 신문에 '독자투고'란이 있지만, 학생 때 재미삼아 투고를 했던 적이 있는데 게재되기도 했다. 그냥 이 정도지, 어떤 비범한 사람들처럼 '나는 이 길로 가야겠다'고 생각했던 것은 아니었다. 다만 책은 조금 많이 읽었던 것 같다.
8·15 광복을 맞아 일제가 물러가고, 아직 정부가 수립되기 직전에 초등학교 5학년이었다. 당시 반에서 나를 포함한 몇몇은 일본 강점기에 나온 방인근(1899~1975), 김내성(1909~1957) 등의 한국 소설을 많이 읽었다. 수업시간에 선생님 말씀은 안 듣고 책을 읽다가 들켜서 맞기도 했다.(웃음) 그러다 6·25 한국전쟁이 터지고 북한 인민군이 들어오면서 조선문학가동맹(1946년 출범)과 같은 기관지도 더러 읽었다.
- 1934년 태어나 일제 식민 지배, 태평양전쟁, 한국전쟁 시기에 유소년기를 보냈다. 혼란스러운 사회에서 식민 교육을 받거나 전쟁 물자를 대는 등 강제 노역을 해야 했고, 정부의 지시에 따라 행동하고 결정해야 하는 부분이 있었다. 당시 어떤 생각을 하던 소년이었나.
어려서 자각을 못 하고 있다가 나중에 깨달은 것이지만, 일본 제국의 식민으로 태어나 8·15 해방이 된 후,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지 전까지 국적이 없는 그야말로 '세계 시민'이었다. 무국적자(無國籍者)라고 하기는 싫고.(웃음) 1948년에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후에야(좋은 일인지 아닌지 모르지만), 대한민국 국민이 될 수 있었다. 한국전쟁 당시 실제로 인민군이 한반도를 점령한 2~3개월 동안은 조선인민민주주의공화국의 인민이었을 수도 있겠다. 다들 자기 삶이 가장 기구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내 삶이 기구했다고 하고 싶지 않은데, 나도 너무 오래 산 것 같다.(웃음)
한국전쟁은 많은 아이들에게 세계에 대한 관심이나 시각을 눈뜨게 해준 계기가 됐다. 초등학교 입학하던 해에는 제2차 세계대전이 진행 중이었고, 동아시아에서는 일본이 미국과 태평양전쟁(1941~1945)을 치르는 중이었다. 학교에 일본 선생님을 비롯해 여자 선생님이 많았는데, 우리를 정말 잘 보살펴 줬다. 어떤 여 선생님은 사택에 오라고 해서 습자(習字) 도구를 선물해줬다. 그런데 일본이 전쟁을 시작하고 전쟁 물자가 부족해지면서 우리를 완전히 노동자 취급했다. 선생님의 인솔 하에 어린 학생들을 모심기에 대동했다. '근로 동원'이라고 했지만, 징용이었다. 당시 논에는 거머리가 많아서 정말 고생했다.
나는 전라도 광주에서 학교에 다녔는데, 무등산에 가서 송근(松根, 소나무 뿌리) 캐는 일도 했다. 송근에서 기름(송근유)이 나오니까 그렇게라도 일본의 전쟁 물자를 조달하고자 했던 것이다. 당시 일본인들은 말도 안 되는 무모한 전쟁에 우리를 이용했다. 그런데 그때는 당연히 그렇게 해야 하는 줄 알고 강제 노동에 따라다녔다. 지금 초등학생들을 그렇게 부려 먹으면, 아마도 혁명이 날 것이다.(웃음)
8.15 해방은 우리에게 무정부 상태를 의미했다. 자유란 개념은 없었지만, '이게 자유인가' 하는 생각도 해봤다. 결국 이 세상을 마주 보게 된 일이었다. 그런데 조금 있으니, 남북 간 전쟁이 터져 많은 사람들이 죽었다. 지금 학생들은 상상하기 어렵겠지만, 고등학교 1학년 나이에 의용군으로 끌려간 친구들이 있었다. 그 중 몇 명은 죽었다. 인민군이 내가 있었던 호남 쪽을 거의 무혈점령했는데, 전투에 의한 사망자라기보다는 1950년에 있었던 '보도연맹 사건'으로 많은 사람이 죽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무등산 가까이에 있는 지산동에 사람을 모아놓고 죽을 사람더러 자기 구덩이를 파라고 한 뒤 죽였다고 한다. 죽음의 참상이었다. 이런 것을 겪으면서 '유년시절 부모님으로부터 받았던 사랑이 가득한 인생(세상)과는 다른 것이 있구나' 하는 생각이 싹텄다.
- 소설책을 좋아하던 소년이 법대에 들어갔다. 전남대학교 법학과 1회 졸업생이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부모가 자식에게 법대나 의대에 가라는 것은 왜 만고(萬古)의 진리일까.(웃음) 세상이 변해도 변하지 않는 측면이 있어 안타깝다. 궁핍한 생활로, 6년을 다녀야 하는 의대를 못 갔다. 당시 전남대에 법대가 처음 생겨 17~8명의 학생을 뽑는다고 해서 갔다. 사람은 적응하는 동물이라고 하던데, 나 같은 사람은 적응을 잘 못하는 사람이었다. 수업은 엉터리로 들었지만 학점은 따야하니 시험을 보긴 봤는데, 내 시험답안을 채점하는 교수님들에게는 곤혹스러웠던 것 같다.
당시 전남대 법대 학장으로 계셨고 101세로 최근 고인이 된 기세훈(1914~2015. 초대 가정법원장과 사법연수원장 역임. 前 인촌기념회 이사장) 선생께서 나를 불러 "자네 답안지는 논문 같기도 하고 수필 같기도 하네!"라며, 학점을 줄 수도 없고 안 줄 수도 없어 결국 교수들끼리 합의해 학점을 주긴 준다고 했다. 그때만 해도 학생과 교수 간의 열린 교감(交感) 같은 게 있었던 것 같다. 이런 시절, 광주에서 문학동인 활동을 하기도 했다. 사실 그런 쪽이 더 재미가 있었다. 소설도 썼다 시도 썼다, 내 스스로 창작에는 소질이 없다고 생각하고 엉터리 문학평론도 해봤다.(웃음)
- 1957년 <한국일보>에서 기자 생활을 시작했다.
<한국일보>에서 견습기자(지금의 수습기자)로 일하면서 장기영(1916~1977. 한국은행 부총재, 한국일보·코리아타임스 창간, 박정희 정권 부총리 역임)이라는 사람과 인연을 맺게 됐다. 참 특이한 사람이었는데, 기자들이 현장에 나가기 전에 출장비를 받으러 사장실에 가면 그 때마다 자기 멋대로 백지에 출장비를 써주곤 했다.(웃음) 그러면서 "현장에 가면 분명 유혹이 있을 거네. 당연히 뇌물을 주면 받지 말고 어느 정도 주는지 확인하고 와서 나한테 보고하면 그 돈을 주겠네"라면서 기자들이 현장에 나가 허위 기사를 쓰지 못하도록 했다. 당시만 해도 <동아일보>가 압도적인 1위였고, <경향신문>이 그 뒤였다. 그런데 장기영 사장은 항상 사장실 칠판에 '정상이 보인다'라고 써놨다.(웃음)
<한국일보>는 그때만 해도 굉장히 파격적인 시도를 했다. 견습기자가 쓴 기사인지 소설인지 모를 글을 신문에 내기도 했고, 젊은 사람을 편집국장으로 앉히기도 했다. 돌이켜보면, 당시 동료들과 함께 재밌게 신문을 만들었다. <한국일보>가 조간신문이었기 때문에 기자들이 밤늦게까지 기사를 쓰다 보면, 금방 밤 11시, 12시가 됐다. 그러면 기자들이 통행금지 때문에 집에도 못 가고, 편집국으로 스멀스멀 기어들어와 날이 밝을 때까지 술을 마셨다.(웃음) 당시 기자들은 지금보다 더 많이 술을 마셨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 통행금지가 풀리면 천막을 씌운 지프차에 열댓 명을 태워 집에 보내주곤 했다. 견습기자 출신이 많이 일할 수 있게 해줬고, 그래서 참 재밌었다.
고등학교 은사였던 고(故) 고재기(高在騏) 선생은 나 같은 사람에게 관심을 두고 <한국일보>에 실린 내 기사에 늘 피드백을 했다. 언젠가 내가 '휴전선 르포'를 썼는데, 선생께서 내게 편지를 보내 "잘 썼네. 그런데 자네는 취재는 조금해서 기사를 길게 쓰는 기능이 있는 것 같네. 허나 기자는 그렇게 하면 안 되네"라고 했다. 정곡을 찌른 거다. 정말 내 일생의 진정한 스승이었다. 내가 기사를 쓰는 굽이굽이마다 편지를 보냈다. 이 분의 조언과 격려로 기사 쓰기 훈련이 많이 됐다.
- 그 뒤로 기사를 쓰는 자세가 바뀌었나?(웃음)
노력은 하나, 여전히 미달이다.(웃음)
- 1963년에 들어간 <동아일보>에서 기자와 논설위원으로 일하다가 1982년부터는 기명 칼럼을 쓰기 시작했다. 위에서 결정한 것인가.
지금은 하루에도 수십 개의 칼럼이 나오지만, 그때만 해도 칼럼이 희귀한 시대였다. <조선일보>의 '선우휘 칼럼'이 유일했다. <동아일보> 칼럼은 '건넛집에서 이렇게 하니 우리 쪽에서도 해야 하지 않나' 하는 발상에서 시작됐다. 그런데 어떻게 하다 보니, 나 같은 사람에게도 차례가 왔다. 1973년부터 논설위원을 하고 있었고, 칼럼을 쓴 이후에도 논설위원만 약 16년을 했다.
- 20년 넘게 기자로 활동하면서 처음 기명 칼럼을 쓰게 됐을 때 소회가 어땠나? 다짐, 혹은 원칙이 있었는지?
기명 칼럼을 쓴다는 건 상당한 압박이 있는 자리였다. 특히 <조선일보>에서 글을 쓰는 이들은 주필(主筆, 편집 방향과 기사 게재 여부를 주관하는 최고 책임자)로, 이미 명성이 있는 사람들이었다. 나는 주필도 아닌 논설위원인데다가 상대가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여러 가지 연구를 했다. 아트 버크월드(Art Buchwald, 1925~2007)같은 유명 칼럼니스트가
- 당시 칼럼은 군사정권의 감시 대상이 됐다. 때로는 정부기관의 조사를 받기도 했고, 1984년에는 잠시 일본 도쿄대 연구소로 보내지기도 했다. 권력의 위협 속에 어떻게 계속 글을 쓸 수 있었나?
박정희 정권 초기만 해도 중앙정보부(1961~1981)가 언론을 그렇게 탄압하지는 않았다. 가혹행위는 없었고, 몇 번 불려 가 조사받은 정도였다. 어느 해 전라도에서 큰 물난리가 있어 취재 차 가 있는데, 당시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이 비상열차를 타고 내려와 수해복구에 동참했다. 당일 내 기자 직감으로 수해복구 인력이 많아도 너무 많다고 느꼈는데, 아니나 다를까 박정희 의장이 가고 난 다음날에는 현장에 사람이 하나도 없더라. 그래서 그날 '볼 때와 안 볼 때'(<동아일보> 1963년 7월 11일 자 현지 르포(2) '가난과 주림과 한숨만이…')라는 제목으로 기사를 썼다.(웃음) 그랬더니 그걸 가지고 나중에 왜곡보도라고 괴롭히더라.
박정희가 1972년 유신 선포에 이어 계엄령을 선포한 이후, 사회부장에서 논설위원으로 옮기면서 학생들이 데모하는 것을 단 한 줄도 쓰지 못했다. 당시 <동아일보>는 석간신문이었다. 그때만 해도 가판(신문의 초판, 즉 1판을 일컫는 말로 <동아일보>는 2005년 4월 2일 이후 가판을 내지 않고 있다)이 굉장히 많이 나갔는데, 각 가정이나 지방에 배달되는 최종판에 몰래 데모 기사를 넣고 종적을 감추기도 했다.(웃음) 그러다 인쇄 과정에서 들켜 해당 기사 발행이 중단되는 등 정권의 기사 검열이 갈수록 심해졌다. 정말, 비참한 시절이었다. 그래서 '이발사들에 의하면 요즘 귓병 환자들이 많아졌다'더라 하는 식의 어처구니없는 기사를 머리기사로 올린 적도 있다. 해서도 안 되는 그런 글…. 우리의 소심한 저항이었다.(웃음)
칼럼을 쓰기 시작하면서는 안기부(1981~1999년, 국가정보원으로 개편되기 이전)에 불려다녔다. 이때부터 정부기관이 언론에 대한 지식을 갖게 된 것 같다. '어떤 사람이 쓴 글을 보고 그 사람이 다음에는 이런 글을 쓸 거다'라는 점을 대충 파악한 것이다. 그때부터는 미리 압력을 가하기도 하고, 전화로 위협도 했다. 그러면 나는 '알겠다. 다시 생각해보겠다'라며 끊었지만 내용을 바꾸지는 않았다. 지금도 참 가슴 아프게 생각하는 게, 어느 날 새벽 집 위층에 있다가 아래층에 내려와 보니 눈이 퉁퉁 부은 딸이 덜덜 떨며 앉아 있더라. 밤새 안기부 사람의 전화를 받았던 것 같다. 우리 딸이 전화를 받으니, 거기다 대고 '네 가족 다 죽인다. 어쩐다'라며 퍼부었던 것 같다. 어린애가 충격을 받아서 잠도 못 자고 거기 계속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까지 했던 사람들이다. 지금은 그 딸이 시집가서 손자도 낳고 그 손자가 군대에 가서 내가 면회도 가고 그랬다. 세월이 이렇게 흘렀다.(웃음)
- 기자를 비롯해 언론에 종사하는 사람들도 사주가 운영하는 회사에서 일하는 노동자다. 이들 역시 때로는 국가의 통제를 받기도 하고, 사주에게 압력을 받기도 한다.
최근 공개된 '이완구 녹취 파일'은 충격이었다. 그러나 이것이 대한민국 언론의 현실이다.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의 언론통제는 표독하고 교활한 측면이 있어 소위 우리말로 (어울리지 않는 것 같지만) '당근과 채찍'이 있었지만, 요즘은 권력이 직접 손에 피를 묻히기보다는 하수인을 통해 통제한다. KBS, MBC 사장을 자기 권력의 하수인에 적격인 사람을 선임(일명 '낙하산 인사')해 대집행하는 수법이다.
언론 통제의 방식이나 양태는 다르지만, 과거나 지금이나 굉장히 가혹하다. 정부의 언론 통제 상황에서 회사는 자기가 죽는 줄도 모르고 계속 자기 노동자들을 죽이고 있다. 해고하는 것은 목을 자르는 것이 아닌가. 이명박 정권에 이은 박근혜 정권에서 얼마나 많은 기자와 PD가 잘려나갔는가. 지난 1월 MBC가 회사의 부당한 처우를 풍자한 권성민 피디를 또 잘랐다. '대집행'의 몰상식한 잔혹함이 끝날 줄을 모른다.
오죽 답답했으면, 지난달 9일 당시 이완구 국무총리 후보실 앞에서 기자회견을 한다고 같이 가자고 해서 늙은 놈이 주책없이 가서 떠들었다. 그때 이완구의 녹취 파일은 '이완구의 양심선언'이라고 했다. 그리고 "우리가 이완구를 살리자. 이 사람이 총리후보직에서 사퇴하고 인간으로서 첫걸음을 다시 딛게 하자. 이것이 이완구를 살리는 길이다. 이완구는 인간으로 환생하라!"고 외쳤다. 그랬더니 경찰이 와서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이 어쩌고저쩌고' 하던데, 모르겠다. 사람을 구하고자 한 말인데….(웃음)
그래서 내가 더더욱 자유를 말하기 어렵다. 공포와 폭력으로부터의 자유, 예술이건 학문이건 새로운 것을 창조하는 자유, 더 나은 삶을 위한 무엇을 향한 자유, 피동적인 반사로서의 자유가 아닌 적극적인 자유. 이런 자유를 모색하면서 삶을 살아야 하는데, 노동은 저렇게 '피폐상태'다. 언론뿐만 아니라, 대다수의 노동자들이 그런 자유를 찾기 어려운 시대, 특히 표현의 자유를 억압하고 착취하고 질식시키는 시대에 살고 있다. 내가 너무 격했나.(웃음)
- 1991년 자본의 논리에 잠식되어가는 언론현실을 개탄하며, 30여 년간 일해 온 회사를 나왔다. 이후 한겨레신문(1993~94), 참여연대(1994~99), 언론개혁시민연대(1998~2001), MBC(2001~2003), 언론광장(2004~), 자유언론실천재단(2014~) 등의 활동을 이어갔다. 특히 시민사회단체 활동가의 삶을 살기란, 쉽지 않았을 것 같다.
<동아일보>를 나오면서 다시는 글 쓸 기회가 있을까 생각했다. 그러나 상당한 행운이 있었다. 당시 <일요신문>에서 칼럼을 써달라고 해서 계속 글을 쓸 수 있었고, 이게 최저생활비는 되더라. 또 참여연대 대표를 오래 하니까 친구들이 "참여연대 대표는 얼마 받고 다니느냐?"라고 묻길래, "마이너스 얼마 받고 다닌다"라고 했다.(웃음) 시민단체 대표들이 돈을 받고 다니는 줄 아는, 오히려 자기 돈을 내고 다니는데 그런 인식이 전혀 없는 '꼰대'들도 있다. 그런 삶을 쭉 살아왔다.
- 자본이 없는 신문사와 시민운동 조직의 어려움은 예상했던 것보다 더 컸을 것 같다. 돈이 갖는 힘을 현실적으로 경험하고, 자본의 필요성을 피부로 느끼셨지는 않았나?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물적 토대가 있어야 하니까 당연히 돈이 없으면 어렵다. 한겨레신문을 짧게나마 경영하면서 우리나라 신문의 현황을 적나라하게 봤다. 사실 신문사는 구독료로 운영되는 것보다는 광고로 운영된다. 그런데 소위 대기업 재벌 광고주들은 자기 기업에 좋지 않은 기사를 쓰는 매체를 기피하고, 노골적으로 광고를 끊는다며 압력을 가한다. 독립적인 신문은 여기서 절대적인 고민을 하게 된다. 구독료를 많이 올릴 수 있으면 좋지만, 그것은 또 쉽지 않은 문제다. 만약 한겨레가 구독료를 올린다고 해도 계속 읽을 열성 독자들은 3~4만 명 정도일 거다. 그것에 비하면, 공영방송 MBC는 경영이라는 측면에서 천국이었다. 광고주들이 저절로 달라붙고, 좋은 프로그램을 잘 만들면 경영이 원활했다. 그렇게 자본이 갖는 힘이 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삶이라는 것이 돈이라는 것만으로 유지되고, 어떤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지 않나. 참여연대의 젊은 활동가를 보면, 박봉 속에서 불철주야 열정적으로 일한다. 정말 대단한 젊은이들이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이들이 이 일을 일생동안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이들에게 나이가 들어도 시민사회단체 활동을 통해 전망이 있다는 것을 보여줘야 한다. 모든 사람이 박원순 서울시장이나 김기식 새정치민주연합 의원, 박원석 정의당 의원과 같은 길을 걸을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들에게 어떤 미래를 보여줘야 하는데,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이 컸다.
- 앞으로 하고 싶은 활동이 있나.
지금이 또 한 번의 '문명 전환기'로 보인다. 문명의 변곡점에는 거칠게 이야기해서, 두 가지 요인이 있었다고 보는데, 하나는 기술의 발전이고 다른 하나는 미디어의 변화인 것 같다. 제국이 형성되기 위해서는 대(大) 전원(田園)을 유지할 수 있는 수로의 개설이 있어야 했다. 어떤 나라든 치수(治水)를 통해 왕권을 확립하지 않았나. 그런데 이런 산업기술은 오늘날 한계를 맞이했다. 이것은 디지털기술, 나노기술, 바이오 기술에 이르는 다양한 기술로 대체되고 있다.
두 번째가 바로 '미디어의 변화'다. 문자가 발명되고 사람의 말이 기록되면, 인간 문명은 정말 획기적으로 변했다. 특히 사고의 획기적인 변화를 일으킨 것 중 하나가 '은유'라고 생각한다. 우리가 쓰는 말과 문자에 많은 은유가 발생했고, 이 은유법은 사람들의 상상과 이야기에 윤활유로써 자양을 주고 활력을 줬다. 그러니 박근혜 대통령도 이야기 중에 '불어터진 국수'라는 표현도 하는 게 아닌가.(웃음)
인쇄술에 견줄 나위도 없이, 인터넷의 발달은 미디어를 통한 언론의 기능은 더욱 다양해지고 보편적이게 됐다. 이런 것이 우리 문명을 바꾸는 데 일조한다. 사실 나는 말을 하나 발명하고 싶은데 '호모 언론인'을 만들고 싶다. 인간 속에 있는 여러 가지 요소 중에서 '말하고 논하는' 특징을 표현하는 것인데, 실제로 미디어의 발전으로 만인이 언론인의 역할을 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나 같은 꼰대가 어떤 지혜를 내놓을 때 근사할 수 있게 되는 게 아닐까.(웃음)
그러나 무엇보다도 이 사회의 젊은이들이 지금의 비인간적인 폭력의 고통과 억압의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는 계기를 만드는 일, 이들이 자신의 후손에게 나처럼 부끄러운 자가 되지 않게 하기 위한 계기를 만드는 일에 종군하고 싶다. 팔십이 넘었지만, 근래 각계 단체 사람들과 87년 체제를 넘어 진정한 민주주의의 새 지평을 열고자 하는 모임에 동참하고 있다. 의미 없이 말만 하는 것이 아니라, 계속 행동하고 동참하고자 한다.
조금이라도 더 민주적인 세상에서 살아야 하지 않을까? 그게 안 되니까 세월호 참사로 딸 유민이를 잃은 김영오 씨가 40일 넘게 단식한 것이다. 나는 그때 그 사람이 꼭 죽을 것 같았다. '저 사람 죽으면 안 돼…'라면서 단식에 동참하려고 했지만, 어떤 무리가 서울 광화문 광장 인근에서 폭식 투쟁한 것은 말할 것도 없고 김 씨를 향해 "뒈지지도 않을 거면서 쇼한다"라고 한 것을 듣고 "민주주의고 나발이고 인간이란 무엇인가, 인간성을 살릴 수 있는 일은 무엇인가"를 고민했다.
- 동시대 청년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당신들을 삼포, 사포, 오포를 넘어 전포 세대로 만든 죄인으로서 속죄한다. 내가 무슨 말을 할 수 있겠는가. 말 하면서도 무리라고 생각하지만, 우리 젊은이들이 절실하고 각박한 가운데 새로운 시대를 열어가기 위해 자기 나름대로의 전망을 얻으려고 노력하는 과정에서 인간이 혼자 힘으로는 살아갈 수 없구나 하는 것을 자각할 필요는 있겠다. 친구가 적이 되면 안 되지 않은가. 언제까지 그렇게 살아야 하는가. 그렇게 살려고 태어난 것은 아닌 것 같다. 우리 조상들 말에 '백지장도 맞들면 가볍다'고 했다. 현재 우리 젊은이들이 만유인력뿐만 아니라 신기술이 강철판 같이 짓누르는 전대미문의 막중한 자본독재의 압력 속에 살아가고 있지만, 이것을 혼자가 아닌 함께의 힘으로 저항해야 하지 않을까. 손이 닿는 대로 마주 잡고, 조금 더 밀도가 짙어지면 어깨동무도 하고 그렇게 연대의 정신을 가지고 이 길을 함께 걸었으면 좋겠다. 그게 내가 살 길이고 우리가 살 길이다. 나 같은 나이 든 자들도 그런 고민과 어깨동무에 기꺼이 동참하고 싶다. 그런데 언제까지 살 수 있을지 모르지만…. 눈물이 날 것 같다.(웃음)
- 김중배에게 자유란?
'자유'를 자유주의로 이야기할 때는 그것이 갖는 폭이 다르고 양면이 있기도 하다. 극단적으로 말하면, 신자유주의 체제에서 자유를 누리는 쪽과 핍박을 받으며 자유를 착취당하는 쪽이 존재한다. '신자유주의'라는 이름 아래, 자기가 죽는 것도 모르게 혹은 자기가 스스로 결단해 죽음에 이르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1년에 1만 5000여 명이 목숨을 끊는다고 한다. 하루에만 40명이 목숨을 끊는다. 날마다 이런 식이다. 이런 세상을 어떻게 해야 할까?
중국의 젊은 네티즌 이야기인데, 중국 정부에서 천안문 사태를 뜻하는 '6월 4일'(1989년 4월 15일 호요방 당총서기 사망 이후 폭발한 민주화 요구에 대해 중국 정부는 무력으로 맞섰다. 6월 4일 새벽 장갑차를 앞세운 채 천안문 광장에 모임 시민들을 유혈 진압했고, 이로 인해 민간인 3000여 명이 부상하고 200여 명이 사망했다)을 쓰지 못하게 했더니, 나중에는 5월 31일에 나흘을 더해 '5월 35일'이라고 표현했다고 한다. 참, 젊은이들다운 재치다. 이들이 요즘 자살자를 가리켜 '피(被)자살자'라는 말을 쓴다고 한다. 맞는 말이다. 오늘도 죽고 있는 수많은 자살자 중에 분명 많은 이들이 바로, 피자살자다. 군대에서 죽은 사람들 역시 더 이상 말할 것도 없는, 너무나 분명한 피자살자다.
나와 동갑이면서 존경하고 좋아하는 여성이 있는데, 바로 제인 구달(Jane Goodall, 1934~)이다. 그는 침팬지 연구를 통해 '생명 주권'을 이야기한다. 나는 자유를 '인간 주권'이라고 생각한다. 인간에게는 자기 주권을 자각하고 원래 진화의 방향으로 자신을 끌어나가는 힘의 원천이 있다고 생각한다. 이 '인간 주권'을 가지고 잠재하는 야만성을 함께 다듬어 인간다운 진화의 길을 열어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이 '인간 주권'의 자유는 평등한 상관관계 함수로 모두에게 주어져야 하는 것이다. 만유인력이 참 절묘한 것 같다. 칼 폴라니(Karl Polanyi, 1886~1964)는 '만유인력이란, 중력을 뚫고 나는 새의 힘'이라고 했다. 땅을 딛고 비상하는 힘, 모두에게 적용되는 그 힘이 자유가 아닐까.
이 연재는 한림국제대학원대학교 정치경영연구소의 기획, 취재, 집필에 의해 진행됩니다. 인터뷰 및 정리는 비례대표제포럼 손어진 간사와 한림대국제대학원대 정치경영연구소 조경일 연구원이 담당했습니다.
정치경영연구소가 하는 일 중의 하나는 '진보적 자유주의'의 한국적 함의를 정치 및 정책적 맥락에서 찾아내는 일입니다. 과연 자유는 진보적인 걸까요? 그렇다면 그 구체적 의미는 무엇일까요? 진보적 의미의 자유를 스스로 누리고 있거나 타인을 위하여 퍼트리고 있는 사람들은 누구일까요? 나의 자유와 타인의 자유, 개인의 자유와 사회적 자유, 그리고 자유와 평등은 상호 어떠한 관계에 있어야 하는 걸까요?
정치경영연구소의 청년 연구원들이 자유와 관련된 이 많은 문제를 현실에서 해결 또는 극복해가고 있는 분을 직접 찾아 나서기로 작정했습니다. 우리 사회의 대표적인 자유 이론가 혹은 실천가들께 (자신과 타인을 위한) 자유를 실천하는 방식에는 어떠한 것들이 있는지 여쭤보겠다는 겁니다. 아마도 그분들은 젊은 저희에게 자신들의 진솔한 삶의 이야기를 들려줄 겁니다.
앞으로 모든 인터뷰 내용은 잘 정리하여 여기 이 자리에 항상 올려놓겠습니다. 여러분도 저희와 함께 이 자유의 향연을 즐겨주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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