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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위의 꿈' 부르던 보미 목소리가 듣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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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위의 꿈' 부르던 보미 목소리가 듣고 싶어요" [고잔동에서 온 편지<9>] 단원고 2학년9반 이보미 학생 이야기

태어난 곳은 부천, 일곱 살까지 산 곳은 아산, 초등학교 들어갈 무렵에야 안산으로 온 보미. 엄마는 별별 생각이 다 듭니다. "안산으로 이사 오지 말걸." 보미가 떠난 후로, 부질없는 생각들이 자꾸만 엄마를 괴롭힙니다.

보미에게는 다섯 살 터울의 언니가 있습니다. 언니가 보미를 거의 업고 키우다시피 할 정도로 돈독한 자매지간이었습니다.

"우리 애들은 단 한 번도 싸운 적이 없었어요. 애들 키우다 보면 말로 해결이 안 되는 경우가 많은데, 그럴 때 큰애한테 맡기면 됐어요. 둘이 샤워하러 들어가면 노랫소리가 끊이질 않았는데…."


▲보미 침대 위에 앉은 강아지 '보들이'와 옆에서 보들이를 쓰다듬는 보미 엄마. ⓒ프레시안(서어리)

"수의사 돼서 '보들이' 돌본다고 독하게 공부하던 우리 딸이"

보미는 막내지만, 동생이 하나 더 있습니다. 바로 강아지 '보들이'입니다. 다리 관절이 약한 소형견인데도 보미가 학교에 다녀오면 보미를 향해 1미터 높이까지 팔짝팔짝 뛰었습니다. 그때마다 보미는 보들이 다리가 아플까 봐 바닥에 드러누웠습니다.

보들이를 무척 아꼈던 보미는 수의사가 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수의사가 되려면 공부를 잘해야 한다는 선생님의 말에, 보미는 매일 악착같이 공부했습니다.

보미는 일단 목표가 생기면 밀고 나가는 악바리입니다. 엄마 표현에 따르면 한 마디로 '똑소리 나는 딸'이었습니다. 한 번 살을 뺀다고 마음을 먹으면 일기장에 매일 먹은 음식 칼로리양까지 적으면서 독하게 살을 뺄 정도로요.

수의사의 꿈을 이루기 위해 보미는 매일 도서관에 가 새벽 두 시에나 집에 들어왔습니다. 보미가 걱정된 엄마는 '무리해서 공부하지 않아도 된다'고 타일렀지만, 보미 고집을 꺾기엔 역부족이었습니다.

"수의사 돼서 우리 보들이를 봐줘야 하는데…. 우리 보들이도 언니가 여행가던 날 아침에 얼마나 울었나 몰라. 언니 나가니까 한쪽으로만 눈물을 막 흘리는 거예요. 우리 보들이, 슬프다고 엄마한테 말이라도 하지."


▲보미 앨범을 펼쳐 보는 엄마. ⓒ프레시안(서어리)

"보미가 부른 '거위의 꿈' 들으며 도보 행진 버텼어요"

보미는 '노래 거위의 꿈'을 부른 영상으로 사람들에게 많이 알려져 있습니다. 사고가 나기 두 달 전, 단원고 선배들의 졸업식 때 학교 대표로 부른 모습이 담긴 영상입니다. '세월호 참사 100일 추모회'에서는 가수 김장훈 씨가 대형 스크린 영상 속 보미와 함께 '거위의 꿈' 노래를 불러 먹먹한 감동을 자아내기도 했습니다.


보미의 노래 실력은 지금은 세상 사람들이 다 알아주는 정도지만, 정작 엄마는 보미가 노래를 잘하는지 잘 몰랐습니다.

"제가 큰애한테만 신경을 쏟느라 잘 몰랐는데, 나중에 보니 우리 보미가 정말 노래를 잘하더라고요. 여기저기 공연도 다니는 것 같았는데, 그래도 수의사 된다고 가수할 생각은 없었던 모양이에요."

보미가 부른 '거위의 꿈'은 세월호 추모 지정곡이나 다름없습니다. 도보 행진이든 어디든 세월호 관련 행사 때마다 보미의 낭랑하고도 애절한 목소리가 흘러나옵니다.

"집회 가거나 도보 행진할 때 힘들다가도 우리 보미 목소리 들으면 힘이 나요. 응원해주는 것 같아서요."

보미 영상이 크게 화제가 되면서 세월호에 관심 가지는 이들도 많아졌습니다. 그런 이들을 볼 때마다 엄마는 뿌듯함을 느낍니다.


"어떤 대학원생은 자기가 다니는 대학교에서 '16학번 수의학과 이보미' 이름이 적힌 인증서도 보내줬어요. 보미가 얼마나 좋아할까요? 10년 지나도 20년 지나도 세월호를 기억하겠다는 그 마음을 간직해주면 좋겠어요."

▲보미를 추모하는 사람들이 남긴 메시지가 빼곡한 사진이 걸린 액자. ⓒ프레시안(서어리)

"얼마나 힘들었는지 입술을 깨문 자국이…"

보미는 사고 후 약 열흘 만인 4월 25일, 182번째로 나왔습니다. 학생증을 목에 건 채였습니다.

"엄마가 자기 빨리 알아보라고 학생증을 걸고 있었나 봐요. 우리 애가 성실했어요. 누가 수학여행에 학생증을 가져가…."

보미를 마지막으로 본 생존자 학생에 따르면, 구명조끼를 보미한테 던져주는 순간 보미가 있던 객실에 물이 들어찼다고 합니다. 생전 보미와 친했던 그 생존자 학생은 "곧 보미가 올 것"이라며 보미 엄마를 다독여줬습니다.

"3~4일까지만 해도 에어포켓이니 뭐니 해서 생존 가능성이 있다고 얘기가 나왔잖아요. 우리 보미는 강하니까 친구들 다독거리면서 잘 살아있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렇게 열흘이 흘렀습니다. 보미는 꼭 자고 있는 것만 같은 모습으로 엄마 곁에 돌아왔습니다.

"이마가 조금 까지고 코에 멍이 좀 들어있었어요. 얼마나 힘이 들었는지 윗입술이 아랫입술을 깨물어서 자국이 나 있더라고요. 얼마나 힘들었을까…."


▲9반 희생자 학부모들이 단체로 만든 책자. ⓒ프레시안(서어리)

"울면 보미한테 또 혼날 텐데…"

찬 바닷속에서 고통스러웠을 딸 생각에 엄마는 하염없이 눈물을 흘립니다.

"이렇게 울면 보미한테 혼날 텐데… 그런데 제가 미안하다고 하면 '미안할 짓을 왜 하느냐'고 또 혼낼 텐데…."

눈물을 참느라 엄마는 베란다 밖을 쳐다봅니다.

"작년에 상록구로 이사 왔어요. 고층 아파트라 하늘이 잘 보여요. 밖을 내다보면 보미랑 가까운 데 있는 것 같아서 좋더라고요."

엄마는 적극적으로 유가족 활동에 나서는 편은 아닙니다. 그런 엄마도 특별법 제정을 촉구하며 일주일 동안 단식했습니다.

"보미 생각하면 일주일은 아무것도 아니죠. 저는 단식했을 때보다 4월이 오는 게 훨씬 더 괴로워요."


▲보미가 남긴 물건들과 보미 사진들. ⓒ프레시안(서어리)

지난해 이사를 하면서도 엄마는 보미 물건을 거의 그대로 가져왔습니다.

"친정 엄마나 동생이 보미 물건을 빨리 태워 보내라고 하는데 저는 그 말이 그렇게 서운할 수가 없더라고요. 내 눈앞에서 사라진다고 내 마음에서 없어지는 게 아닌데. 사망신고도 최대한 느지막이 48일째에 했어요. 더 이상 안 하기에는 애를 잡고 있다는 생각 들어서…."

사망신고를 한 다음 날인 49일째, 보미는 엄마 꿈에 나타났습니다. 처음에는 갓난아기 때 모습으로, 그다음엔 다섯 살 때 모습으로. 양파같이 동글동글한 얼굴형이 생전 보미 얼굴 그대로였습니다. 꿈속이라 희미했지만, 그렇게라도 얼굴을 보여준 보미가 엄마는 무척 고마웠습니다.

"어쩔 땐 제가 꿈에서조차 보미가 없다는 걸 알고 있더라고요. 그럼 자다가도 견딜 수가 없어서 깨요. 자다 깨고, 자다 깨고…. 밤에 혼자 있는 게 너무 무서워요."


▲보미 방에 걸린 사진들. ⓒ프레시안(서어리)

▲보미의 교실 책상. ⓒ프레시안(최형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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