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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 어쩌다 '백기사' 찾는 신세가 됐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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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 어쩌다 '백기사' 찾는 신세가 됐나 삼성물산 자사주 전량, KCC에 매각 결정
고(故)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의 동생이 삼성물산 '백기사'가 됐다. 정상영, 정몽진 부자가 대주주인 KCC가 삼성물산 자사주를 전격매입하기로 했다. 미국 헤지펀드 엘리엇 매니지먼트(엘리엇)가 삼성물산 지분 7.12%를 전격 매입하며 시작한 공격에 대한 방어조치인 셈. 하지만 삼성물산 소액주주 모임은 엘리엇 편에 섰다.

문제는, 엘리엇과 삼성이 다투는 속에서 한국 재벌의 병폐가 다시 나타났다는 점이다. 회사 재산을 총수 일가의 경영권 방어라는 '사익'에 동원하는 관행이다. 미국 헤지펀드의 공격 빌미가 된 문제가, 방어 과정에서 더 깊어졌다. 한마디로 악순환이다.

삼성물산 '백기사' 정상영, 故 정주영 회장 막내 동생

제일모직과 삼성물산의 합병 여부를 결정하는 임시 주주총회가 다음 달 17일에 열린다.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23.24%지분을 보유한 제일모직은 삼성그룹 지주회사 격이다. 최근 주가를 기준으로 산정한 제일모직과 삼성물산의 합병 비율이 제일모직에 유리하다는 지적이 종종 나왔다. 이는 제일모직 대주주인 이 부회장이 삼성물산을 장악하는데 든 비용이 너무 싸다는 지적도 된다. 아울러 삼성물산이 보유한 삼성전자 지분을 너무 싸게 얻었다는 뜻도 된다. 요컨대 이 부회장이 삼성전자를 장악하는데 드는 비용을 삼성물산 주주들이 부담한다는 것. 삼성 경영권 승계가 임박한 가운데 불거진 쟁점이다.

임시 주주총회 의결권을 행사할 수 있는 주주 명부는 11일 확정된다. 그보다 하루 전인 10일, 삼성물산이 이사회를 열고 자사주 전량(5.76%)을 KCC에 매각하기로 했다. 자사주는 의결권이 없다. 따라서 주주총회에서 의결권을 행사하려면, 이른바 '백기사'를 찾아 매각해야 한다. KCC는 지난 8일에도 삼성물산 지분 0.2%를 장내 매수 했었다. 10일 사들이기로 한 5.76%를 합치면, KCC가 보유한 삼성물산 지분은 5.96%가 된다. 이 회사는 제일모직 지분도 10.18%를 보유하고 있다.

삼성물산 '백기사'가 된 KCC는 건축용 도료 등을 만드는 기업이다. 1958년 설립된 금강스레트공업이 모태다. 정몽진 KCC 대표이사는 정상영 KCC 명예회장의 장남이며, 정 명예회장은 고(故)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의 막내 동생이다. 정상영 명예회장은 전에도 종종 다른 재벌 가문의 '백기사'를 자처했다. 정몽진 대표 역시 주식 투자에 적극적이다.

소액주주는 엘리엇 편

임시 주주총회에서 삼성물산이 제일모직과의 합병 안을 통과시키려면 출석 주주 3분의 2 이상 찬성과 발행 주식 총수의 3분의 1 이상 찬성을 얻어야 한다.

삼성 계열사 및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 김신 삼성물산 대표이사 등이 보유한 삼성물산 주식을 합치면 13.99%다. 여기에 KCC가 보유한 삼성물산 지분 5.96%를 합치면, 19.95%가 된다.

삼성물산 대주주인 국민연금도 10일 9.92%까지 지분율을 늘렸다. 국민연금은 삼성 편에 서리라는 게 일반적인 시각이다. 삼성 측 우호지분은 약 30%가 되는 셈이다. 임시 주주총회 불참자 등의 변수를 고려하면, 삼성이 17% 정도의 지분을 더 확보해야 한다는 게 일반적인 관측이다.

삼성물산 소액주주 및 외국인 주주들의 향배가 열쇠를 쥐고 있다. 이들은 삼성 측에 썩 우호적이지 않다. 지난 5일 결성된 '삼성물산 소액주주 연대' 인터넷 카페 회원 154명도 합병 반대를 위해 자신들이 보유한 삼성물산 주식 67만주(지분율 0.43%)에 대한 주권을 카페에 위임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엘리엇 측에 서겠다는 선언이다.

주주총회 안건 분석 자문기관인 서스틴베스트도 제일모직과 삼성물산의 합병에 반대하도록 권고하는 의견서를 국내 자산운용사들에게 발송했다. 지난 9일 보낸 의견서에서 서스틴베스트는 "삼성물산의 주가순자산비율(PBR) 수준이 역사적 최저 수준인 시점에 합병 비율이 산정됐다"며 "제일모직 지배주주 입장에서는 최적의 상황이지만, 삼성물산 일반 주주의 입장에서는 주주가치 훼손이 극대화되는 시점"이라고 지적했다.

삼성물산 외국인 지분 역시 10일 33.97%까지 늘어났다. 이들 역시 엘리엇 편에 설 가능성이 높다. 시세 차익 등을 기대하기에는 그 편이 낫기 때문이다.

회사재산인 자사주, 경영권 방어에 쓰는 게 옳은가?

다음 달 17일 임시 주주총회까지 삼성과 엘리엇은 우호 지분 확보를 위한 물밑 교섭을 치열하게 벌일 전망이다. 그러나 이런 승부와는 별도로, 나오는 질문이 있다. 삼성물산이 KCC에 매각하기로 한 자사주는, 삼성물산의 재산이다. 삼성물산의 가치를 극대화하는데 쓰는 게 옳다. 그런데 왜 삼성 경영권 승계라는, 이재용 부회장의 사적 목적을 위해 써야 하나? 이런 물음이 나온다. 회사 재산을 총수의 사익에 동원하는 관행이, 한국 재벌의 불안정한 지배구조를 낳았다. 이런 맹점을 미국 헤지펀드가 파고들었다. 그런데 방어하는 과정에서 또 같은 관행이 반복됐다. 지배구조 문제는 더 곪아간다.

회사가 보유한 자사주를 경영권 방어 목적으로 매각하는 건, 법리적으로도 논란거리다. 회사 전체의 재산인 자사주를 대주주의 경영권 확보를 위해 매각할 수 없다는 취지의 판례가 있다. 대림통상의 경영권 분쟁에 대한 서울서부지방법원의 2006년 판결이다. 그러나 이와 다른 취지의 판결도 나온 적이 있어서, 삼성물산의 자사주 매각 건은 법리 논쟁도 함께 부를 전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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