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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르스 헛발질, 아무도 'NO'라고 말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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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르스 헛발질, 아무도 'NO'라고 말하지 않았다! [안종주의 위험과 소통] 메르스 한 달, 전문가에게 묻는다
메르스 사태가 한 달을 넘기고 있다. 새로운 환자 수가 주춤하면서 벌써부터 종식 선언 기준일을 논의하고 있다고 한다. 정부가 전문가들과 협의해 마지막 환자가 발생한 뒤 28일(최종 잠복기의 두 배)을 종식 선언일로 할 계획이며 늦어도 8월 중순, 이르면 7월말을 목표로 정하고 있다고 한다. 불행 중 다행이다.

메르스를 잡기 위해 민관 합동 작전에 이어 군 인력도 투입했다고 하니 이제야 총력 대응이 시작된 것 같다. 내가 감염병 대처는 전쟁이므로 민-관-군이 모두 힘을 합쳐야 하며 초전박살을 하지 않으면 엄청난 비용과 희생, 인력이 들어갈 것이라고 경고한 것을 20여 일이 지난 뒤에야 실천하려는 모양이다.

처음부터 줄곧 위기 관리·소통 실패

정부는 메르스 초기 대응이 실패했다고 자인했다.

방역 당국과 새로 임명된 황교안 총리, 박근혜 대통령, 감염병 전문가, 언론 등 모두가 여기에 대해서는 토를 달지 않는다. 나는 여기에다 초기 대응뿐만 아니라 후속 대응도 실패했다고 줄곧 주장해왔다. 처음부터 위기 관리와 위기 소통, 역학의 개념이 상실된 전략과 전술을 펼쳤다. 열정도 없었다. 국민의 눈에는 진정한 반성이나 사과도 보이지 않았다.

'아몰랑'이라는, 누리꾼들이 내뱉는 조롱 섞인 신조어로 대변되는 박근혜 대통령의 리더십 실종, '문형표의 저주'란 비아냥거림으로 대표되는 방역 당국의 실패, '네버 엔딩 고비'란 별명을 새로 달게 된 최경환 부총리 등 관료들의 총체적 무능 따위를 꼬집거나 질타하는 목소리가 오랫동안 하늘을 찔렀다. 비판의 강도는 지난해 세월호 참사 때보다 더했으면 더했지 결코 덜하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보건의료진과 일선 관료, 국민 모두의 몸과 마음이 메르스로 고달팠고 당분간 더 그래야 할 것 같다.

나는 여기에 또 하나의 비판 대상을 도마 위에 올리려 한다. 다름 아닌 감염병과 역학 전문가들이다. 메르스 첫 환자가 확진, 발표된 날이 5월20일이다. 이날 이후부터 전문가들의 자문이 시작됐을 것이다. 처음에는 느슨하게, 자문을 맡은 전문가들도 소수에 그쳤을 것이다.

하지만 환자수가 불어나고 사망자도 나오기 시작하면서 6월부터는 이 분야의 내로라하는 전문가들은 거의 대부분 정부의 부름을 받았을 것이다. 특히 몇몇은 실권까지 가지는 자리를 차지하며 자문 역에 그치지 않고 실질적인 컨트롤 타워 노릇을 했을 터이다. 정부의 조직 발표를 봐도 그렇고 텔레비전 화면에 비친 그들의 모습을 보아도 그렇다.

계속되는 헛발질, 전문가들은 그때 무엇을 했는가?

하지만 6월 이후에도 정부의 메르스 대응은 헛발질의 연속이었다. 탈레반 식 매뉴얼에 집착할 때 전문가들도 동의를 해주었는가. 과연 전문가들은 국민의 바람대로 삼성서울병원 명단 공개를 적극 주장했는지 의심이 간다. 정부와 청와대가 박원순 서울시장을 상대로 치고받기를 할 때, 그럴 때가 아니라며 이를 적극 만류했는지 궁금하다. 삼성서울병원에 메르스 환자와 접촉자 관리를 죄다 맡겼을 때 이를 찬성했는지도 궁금하다. 이런 결정적 패착 순간마다 전문가들은 진짜 어떤 역할을 했는지 그것이 알고 싶다.

만약에 하나 이런 결정적 패착 때마다 '아니 되오'라고 전문가들이 의견을 밝혔는데도 무시를 당했다면 지금이라도 학자의 양심을 걸고 이를 용기 있게 밝혀야 한다. 그런 패착이 모두 전문가들의 의견을 수렴해 나온 것이라면 이 또한 전문가의 양심을 걸고 심각한 판단 착오가 있었다고 고백해야 한다. 그 고백 방식은 어떤 것이어도 좋다.

감염학과 역학의 전문가들이라면 다 아는 내용이긴 하지만 존 스노와 칼튼 가이두섹에 대한 이야기를 되새기며 왜 우리가 메르스 사태를 이렇게까지 크게 만들었는지에 대해 성찰하는 계기로 삼았으면 한다.

ⓒ청와대

열정으로 콜레라 유행 막은 영국의 존 스노

영국의 의사 존 스노(John Snow)는 역학의 아버지로 불리는 인물이다. 스노는 19세기 빅토리아 시기 영국의 다른 의료계 명망가와는 달리 요크셔 노동자 가정에서 1813년 태어났다. 스노는 런던 대학에서 의학사 및 의학 박사 학위를 받고 외과의사로 개업해 성공했다. 특히 에테르와 클로로포름을 이용한 마취 실력으로 더욱 유명했다. 1853년 봄에는 여덟째 아이를 출산한 빅토리아 여왕의 클로로포름 마취를 담당해 최고의 명의로 신분 상승을 이뤘다.

1848~1854년 영국 런던은 세 차례에 걸쳐 콜레라가 대유행을 했다. 위생 개혁가인 에드윈 채드윅과 의사이자 통계학자인 윌리엄 파와 같은 당대의 최고 공중보건 전문가들은 콜레라의 원인은 도시의 시궁창과 하수도에서 흘러나와 공간에 가득 찬 나쁜 기운(miasma) 때문이라는 이른바 장기론(瘴氣論)을 신봉하고 있었다.

반면 스노는 콜레라에 감염된 환자의 배설물에 직접 접촉하거나 배설물에 오염된 물을 마셔 생긴다고 믿었다. 자신의 감염론을 입증하기 위해 스노는 콜레라가 발생한 빈민촌을 가가호호 방문하여 증거를 모았다. 스노는 열악하고 불결한 지역을 찾아가서 급수 펌프 시설별 이용 가옥 수와 콜레라 사망자 수를 일일이 확인했다. 런던에 식수를 제공하는 회사의 자료도 모았다. 스노는 한 지역에서 치명적인 질병이 무리지어 나타난다는 사실에 주목했다. 두 자료를 취합해 콜레라 발생 지도를 만든 스노는 특정 상수회사의 상수도가 오염돼 콜레라 발생이 높다는 가설을 세웠다.

그는 콜레라가 유행한 소호 인근 브로드가의 펌프의 손잡이를 바꾸도록 했다. 그러자 물 펌프 담당자는 아예 물 펌프를 폐쇄했고 그 지역에서 기적 같이 콜레라가 사라졌다. 존 스노와 브로드 가의 물 펌프는 만유인력을 발견한 뉴턴의 사과, 증기기관을 발명한 와트의 물주전자만큼이나 유명한 과학사의 전설이 됐다. 콜레라를 막아내고자 했던 열정과 집념이 그를 위대한 역학자로 만들었다.

감염 내과 의사 200명보다 역학자 1명이 더 나을 수도

역학은 개별 환자를 진단하고 치료하는 임상 의학과 달리 인구 집단을 대상으로 질병의 원인을 파악하고 대처 방법을 찾는 의학의 한 분야다. 그의 삶과 런던 콜레라 역학 조사 이야기를 되짚어볼 때마다 감염병 환자를 치료하는 감염 내과 임상 의사 200명보다 존 스노와 같은 위대한 열정의 역학자 한 명이 감염병 확산을 막는데 더 큰 일을 해낼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스노가 역학 조사를 발표한 지 약 30년이 지나 독일의 세균학자 로베르트 코흐가 콜레라의 병원체인 '콜레라균'을 발견하게 된다. 그 균은 물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었다. 콜레라 환자의 배설물에도 균이 포함되어 있었다. 콜레라균이 섞인 물을 마시면 콜레라에 감염된다는 것이 증명된 것이다. 병원균이 발견되기도 전에 콜레라의 유행을 막아낼 수 있었다는 것은 정말 대단한 일이다. 스노의 열정과 역학의 힘이 수많은 생명을 구했다.

병원체를 발견하기도 전에 병의 확산을 막은 인물은 또 있다. 미국의 의사이자 바이러스 학자인 칼턴 가이두섹 이야기다. 1946년 하버드 대학교에서 의학 박사 학위를 받은 그는 1949~52년 하버드 대학교 소아 과학, 감염 질환 분야의 연구원으로 있었다. 그 이듬해부터 3년 동안 워싱턴 D. C.에 있는 월터리드 육군의료센터 연구소와 테헤란에 있는 파스퇴르 연구소에서 일했다.

가이두섹은 1955년 오스트레일리아 멜버른에 있는 월터 엘리자홀 의학연구소에 초청 연구원으로 가서 연구하다 1950년대 후반 파푸아뉴기니 고원 지대에서 고립된 채 석기 시대 생활을 하던 포레 부족을 몰살시키다시피 한 괴이한 병에 관한 보고서를 접하게 된다. 모험심에 불탄 가이두섹은 이 유행병을 연구하기 위해 포레 지역으로 들어갔다.

파푸아뉴기니 오지 오가며 '쿠루'병 확인

이 질병은 거의 대부분 여성과 어린이들에게만 생겨 운동 실조, 경련, 마비, 치매를 일으켰다. 첫 증상이 일어난 지 1년 안에 죽었다. 포레족은 이것을 쿠루, 즉 경련병이라고 불렀다. 그들은 그 원인이 주술이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열정의 가이두섹은 한 마을에서 다른 마을로 3000킬로미터를 걸어 다니며 혼자 역학 조사를 수행하고 자료와 샘플을 모았다.

그는 쿠루의 가장 중요한 실마리가 환자의 뇌라고 생각해 유가족과 원주민 원로들에게 애걸하여 부검 허락을 받았다. 뇌는 스펀지 모양의 퇴화가 광범위하게 이루어져 있었고 단백질 플라크도 있었다. 도끼와 담배를 주고 숨진 환자의 뇌를 얻기도 했다.

그는 매우 천천히 자라는 슬로(slow) 바이러스가 이런 퇴행성 신경질환을 일으킨다고 보았다. 파푸아뉴기니 당국은 이를 토대로 1960년대 초반 포레 족의 식인 풍습, 즉 사망자의 뇌를 가족, 친척들이 먹는 것을 금지했다. 그러자 쿠루병 환자가 줄어들기 시작했다. 가이두섹은 이런 공로로 블럼버그와 함께 1976년 노벨 생리의학상을 받았다.

가이두섹 박사는 쿠루로 죽은 사람의 뇌 조직을 갈아 동물에 넣어주면 비슷한 병에 걸린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그는 병을 옮기는 병원체를 찾으려고 끈질기게 노력했지만 1976년 노벨 생리의학상을 탈 때까지도 여전히 성과가 없었다.

가이두섹이 풀지 못한 의문을 해결한 과학자는 스탠리 프루시너 교수였다. 그는 1982년 핵산이 아닌 단백질성 감염 입자(프리온, prion)가 쿠루병이나 양의 스크래피병, 그리고 사람에게서 발생하는 크로이츠펠트-야코브병(CJD)의 병원체라는 담대한 주장의 논문을 <사이언스>에 투고했다. 그도 이 공로로 나중에 노벨생리의학상을 수상했다.

노벨상을 수상한 세계적 과학자들과 역학의 아버지를 들먹이며 우리 (의)과학자들의 열정을 따지는 것이 지나친 요구가 아닌가하는 생각도 물론 해보았다. 하지만 메르스 사태가 우리나라를 보건 후진국으로 전락하게 만들었다는 점에서, 또 우리나라의 역학 조사와 감염병 대응 능력이 형편없다는 사실을 전 세계에 알렸다는 점에서 전문가들 또한 자성할 부분이 있다는 것을 그들의 이야기를 통해 꼭 말해주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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