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영화관에 자주 가는 편은 아니다. 영화를 좋아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시간이 없어서다. 휴가도 가지 못한 이번 여름 유일한 가족 행사가 두 편의 영화를 같이 보는 것이어서 겨우 유행을 따라잡았다. <암살>과 <베테랑>. 두 편의 영화 모두 재미있었다. 하지만 불편했다. 씁쓸한 뒷맛은 두 편의 영화, 특히 <베테랑>이 너무나 현실적이어서 판타지처럼 느껴지기 때문이었다. 먹물 먹은 사람들이 흔히 하는 냉소적인 논평 한마디 남기지 않을 수가 없었다. 영화에서 그려진 것이 현실이라면 그걸 참고 용인하는 것이 말이 되는가 말이다. 모두가 알고 있다. 영화와는 달리 현실에서 친일파는 여전히 떵떵거리며 애국자 행세를 하고 있다는 것을. 망나니 재벌 3세는 그렇게 응징되지 않는다는 것을. 그러면 더욱 분노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그래서 뭔가를 행동해야 하지 않는가? 영화는 현실을 보여주지만 대리만족을 주는 판타지에 불과하다는 하나마나한 이야기를 내뱉었다. 나중에 다시 이야기 하겠지만 그때는 이런 냉소적인 비평이 나에게 되돌아 올 줄은 몰랐다.
영화 <베테랑>에 대해서 조금 더 얘기해 보겠다. <베테랑>의 주인공 서도철이 비리 형사에게(일본말을 사용하는 것이 적절하지는 않지만 영화대사 그대로 옮기자면) "우리가 돈이 없지 가오가 없냐?"라고 말한다. 사전에서 찾아보면 '가오'는 얼굴을 뜻하는 顔(안)자의 일본식 발음이니 체면 같은 것을 의미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허세의 의미도 강하지만 말이다. 어쨌든 말뜻은 이해할 만하다. 돈은 없지만 비굴하지는 말자는 이야기다. 당위적으로는 그 말이 맞다. 그런데 우리는 돈이 없어서 비굴해진다. 대단한 액수의 돈을 바라는 것도 아니다. 텔레비전 광고에 보통사람은 모두 당연히 가져야할 것처럼 나오는 모든 것을 가지고자 하는 것도 아니다. 최소한의 생계를 위해서는 수입이 있어야 하고 그것을 위해 굴욕을 참고 견딜 뿐이다. 윗사람은 아랫사람을 하인 부리듯 해도 된다는 낡고 낡은 권위주의적 문화가 물질만능주의와 오묘하게 결합된 한국사회에서 노동을 한다는 것은 굴욕을 참고 견디는 것에 다름 아니다. 그러면서도 노동의 미덕을 이야기하는 뻔뻔함이라니. 어쨌든 대부분의 사람들이 마음속으로는 서도철의 말에 동의하겠지만 현실에서는 결국 돈 때문에 비굴해진다.
개인적으로 영화 <베테랑>에서 가장 인상적인 장면은 서도철의 부인인 주연이 서도철에게 일갈하는 장면이다. 재벌3세의 범죄를 덮기 위해 측근 중 한 명이 사건을 추적하는 형사 부인에게 돈다발이 든 명품 가방을 들고 나타난다. 그 돈을 거부하고 서도철을 찾아간 주연은 "잘 살지는 못하지만 쪽팔리게 살지는 말자"고 외친다. 그리고 그 다음 대사(사실 정확한 대사는 기억이 나질 않는다)가 가슴에 와 박혔다. "진짜 쪽팔렸던 게 뭔지 아니? 돈을 보고 마음이 흔들렸다는 거야."
판타지에 가까운 이 영화가 담고 있는 진실은 세 가지다. 하나는 뻔뻔하고 부끄러움을 모르는, 그리고 특권 의식으로 똘똘 뭉친 한국의 지배계급의 존재다. 그리고 그들 앞에서 참고 견디던 굴욕이 더 이상 인내될 수 없을 때 직면하게 되는 좌절과 좌절했다는, 그리고 밟혀서 '꿈틀했다'는 것만으로도 되돌려 받게 되는 응징이다. 부와 권력 앞에 느끼는 굴욕이 타자의 일일 때 동정하면서도 침묵하지만 자신의 일이 되었을 때는 원초적 분노의 표출 말고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그 마저도 보복당하는 현실 말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서도철의 아내 주연의 짧은 대사를 통해 드러난 '흔들림'이다. 정의와 민주주의는 돈 앞에 무력하게 무너진다. 스스로 '쪽팔리게 살지는 말자'고 다짐하는 사람들조차도 돈 앞에 흔들릴 수밖에 없다. 정부와 자본이 선전하는 결과만을 중요시 여기는 천박한 이기주의에 따르면 도덕적으로 '쪽팔리지 않게 사는' 것은 무능의 다른 표현이다. 자신들이 내세운 천박한 원칙마저도 무시하며 부와 권력의 연줄망을 통해 사리사욕을 채우는 집단들을 보면서 '쪽팔리게 살지 말자'는 다짐은 스스로의 무능을 감추는 어줍잖은 자존심이 되어 버린다. 옳은 것과 좋은 것은 함께 갈 수 없는 것일까?
2.
부산대학교 국문과 교수 한 분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총장직선제 사수를 외치면서 자신의 몸을 던졌다. 충격적인 사건이다. 아마 이기적인 이익추구를 모든 판단의 근거로 삼고 있는 재벌 총수들과 고위 관료들, 정치인들의 눈에는 한심한 일로 보일 것이다. 매일 매일 자신들의 뱃속을 채우기 위해 생목숨을 죽음으로 몰아가면서도 어떤 동정도 느끼지 않는 사람들이 인간의 목숨은 가장 존귀한 것이라는 둥 장광설을 늘어놓을 것이 뻔하다. 하지만 그 분의 죽음은 최고의 지성이라 불리는 대학교수들에게까지 강요되는 굴욕에 대한 저항이었을 것이다. 그 분이 스스로의 목숨을 내걸고 외쳤던 것은 총장직선제만은 아니라는 말이다. 지난 번 칼럼(☞관련기사 : 교육부 장관님 교육은 사고파는 상품이 아닙니다!)에서 이야기했던 것처럼 교육부가 앞장서서 대학을 취업학원으로 전락시켜 자본의 부속품으로 만들고, 교수 간의 경쟁을 부추겨 학문적 업적을 논문 편수로 계산해서 금전적으로 보상해 주는 왜곡된 문화를 조장하는 데 대한 저항이다. 이러한 현실에 대부분의 교수들이 자괴감을 느낀다. 어떤 교수들은 부끄러워한다. 그런데 이미 구조화된 대학의 상업화와 경쟁 문화 속에 생존하기 위해 적응한다. '돈이 없지, 가오가 없냐'는 서도철의 대사는 적용되지 않는다. 돈이 없기 때문에, 더 정확히 말하면 살아가기 위해 굴욕을 참는 것이다. 여기서 그치지 않고 학생에 지도마저도 '건당'으로 계산해서 돈으로 보상하겠다는 교육부의 지침을 받아들이는 것은 굴욕을 넘어 치욕적이다.
부끄러운 현실이다. 치욕적이다. 교수들에게 영혼을 팔라고 한다. 그걸 교육경쟁력 강화라고 말한다. 개별적인 체념과 불만 표시를 넘어선 집단적인 행동은 대학 운영에 차질을 불러올 정도의 금전적 보복으로 돌아온다. 직선제를 지키겠다는 공약으로 당선된 부산대 총장이 느꼈을 압박은 개인이 아닌 총장으로서 교육부와 권력을 상대하는 것이 얼마나 힘든 것인가를 짐작하게 한다. 돈이면 다 되는 줄 아는 경제적 동물들이 인간으로 남고자 하는 사람들을 협박하고 인간성을 버리지 못하면 불이익을 주겠다고 으름장을 놓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치욕과 굴욕을 받고 있는 대학교수들은 머리로는 분노한다. 하지만 분노는 머리로 하는 것이 아니다. 가슴으로 하는 것이다. 가슴에서 치밀어 오르는 분노가 있어야 행동할 수 있는 것이다. 어쩌면 머리로는 분노하지만 우리의 몸은 경제적 동물이 되라는 협박이 구조화된 일상에 적응해서 돈의 논리에 자동반응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철학자 푸코는 이를 규율권력이라고 불렀던 것 같다. 고(故) 고현철 교수님은 마음으로 치욕과 굴욕을 느꼈을 것이다. 그리고 이 굴욕과 치욕에 익숙해져 있는, 그리고 머리로만 생각하는 대학구성원들에게 좌절했을 것이다. 우리가 잊고 있었던 인간으로서의 감수성을 갖고 있었기에 인간임을 포기하라고 강요하는 현실을 견딜 수 없었을 것이다.
3.
사회운동을 다루는 환경사회학이나 도시사회학, 비판사회이론을 강의하는 사회학이론 시간에 학생들에게 강조하는 것이 비판과 소통이다. 시장만능주의 시대의 지배적 이데올로기는 사람들을 집합적인 정체성(계급, 시민, 여성 등등)이 아니라 고립된 단자(monad)인 소비자, 투자자, 고객으로 호명한다고 비판한다. 모두가 앞만 보고 달리면서 멈출 수 없는 상황에 힘들어 하지만 멈추어 서는 순간 경쟁에서 뒤쳐질 것이라는 두려움에 계속 달리게 된다고 말한다. 이것은 사회적 연대의 토대가 약화된 것의 결과이고 이러한 상황을 변화시킬 수 있는 것은 모두가 같은 불만을 가지고 있음을 확인하는 것이라고 강조한다. 개인으로 고립되어 있을 때는 자본과 권력의 강요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모든 문제를 개인의 능력 탓으로 생각하게 되지만, 서로 이야기하고 토론할 수 있는 사회적 관계들을 만들게 되면 현실의 모순을 인지할 수 있는 감수성이 길러지게 된다고 가르친다. 그리고 그것으로부터 비판과 저항의 연대가 형성될 수 있다고 말이다.
하지만 정작 내 자신은 그렇게 하지 못했다. 지난 번 칼럼에서 자세하게 다루었고 앞에서도 잠깐 언급했던 '국립대학의 회계 설치 및 재정 운영에 관한 법률'과 동 법의 시행규칙(교육부령)에 근거해 마련된 '교육부 교육·연구 및 학생 지도비 비용 가이드라인(안)'이 사단이 되었다. 처음부터 그랬지만 최종 확정이 되고 나니 화가 솟구쳤다. 이미 무감각해진 감수성이 되살아나는 것 같았다. 총장직선제를 간선제로 바꾸어야 한다는 학교 당국의 설명에 아무 말 없이 방관했던 스스로에 대해서 화가 나기도 했다. 뭔가를 해야 했다. 그래서 선택한 것이 교육, 연구, 학생 지도비 지급에서 학생지도비 계획서를 제출하지 않는 것이다. 학생지도를 건수로 표시한 그 계획서 말이다.
지금 돌아보면 학생들에게 가르쳤던 것, 그리고 <베테랑>을 보고 던졌던 냉소적인 논평이 나에게 다시 돌아온다. 동료 교수들과 소통하고 함께 행동할 어떤 계획도 하지 않았다.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그저 내가 느낀 분노를 즉자적으로 표현했을 뿐이었다. 논문과 칼럼에서 원자화된 사회를 질타했지만 내 스스로 고립된 개인으로 소통을 포기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자족감을 주었을 뿐이었다. 현실을 다루는 영화를 보면서 대리만족을 느끼듯이 스스로 한 행동에서 위안을 얻고 '나는 그래도 저항했다'는 정말 '쪽팔린' 자기 정당화 말이다.
하지만 정말 부끄러웠던 것은 그런 선택을 하면서 흔들렸다는 것이다. 영화 <베테랑>의 "진짜 쪽팔렸던 게 뭔지 아니? 돈을 보고 마음이 흔들렸다는 거야"라는 대사가 떠올랐다. 공부하고 가르친 것을 실천하지 못한 것, 동료교수들과의 소통과 연대마저도 귀찮아하는, 이미 나의 마음속에 자리 잡은 개인주의적 심성을 깨달았을 때보다 훨씬 부끄러웠다. 그리고 부끄러움의 자리에 고현철 교수님의 죽음이 비집고 들어왔다. 이제 부끄럽기 보다는 아팠다. 사회에 대해서, 교육 현실에 대해서, 소위 큰 것에 대해서는 목소리를 높였지만 정작 '나'에 대해서 반성하지 못했던, '나'를 '우리' 속에서 찾으려는 어떤 시도도 할 생각을 하지 않았던 '내'가 '나'를 아프게 했다.
솔직히 아직도 막막하다. 다른 많은 사람들처럼 답답하고 화나지만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잘 모르겠다. 스스로에 대한 부끄러움을 넘어서 어디로 가야할지 방향을 찾기 어렵다. 이 역시 우리 모두가 원자로 파편화되어 서로 소통하고, 연대하고, 함께 행동하는 것을 잊었기 때문일 지도 모르겠다. 처음에는 불편해 하고 언짢아했지만 언제부터인가 당연해져 버린 개인주의 문화 말이다. 머리로는 거부하지만 그것보다 더 빠르게 비교하고 경쟁하는 데 나서는, 시장문화에 의해 규율화 된 우리들의 몸이 문제인 것이다. 이렇게 컴퓨터 모니터 앞에 몸을 웅크리고 숨어서 글자 몇 자 적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것이 없다는 패배주의적, 좀 더 정확하게 말하면 현실순응주의가 문제인 것이다.
어떻게 해야 할까? 혼자서는 답을 얻을 수 없다. 그래서 '우리'가 필요한 것이다. '우리'들로부터 응답을 기다려 본다.
(☞바로가기 : 민교협의 정치시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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