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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 빌려주지만 '이자'는 없습니다!" [유라시아 견문] 이슬람 경제 : 진화하는 '아시아적 가치'

1997 : 복습

싱가포르에서 말레이시아로 가는 길은 버스를 이용했다. 1965년 싱가포르가 떨어져나가기 전까지 한 몸이었던 나라이다.

과연 입출국 절차는 간단했다. 출국 수속을 공항이 아니라 버스 정류장에서 밟았다는 점이 특이한 경험이었다. 지금은 쿠알라룸푸르까지 직행하면 다섯 시간 남짓 걸린다. 착공 중인 고속철이 완공되면 한 시간 대로 줄어든다. 탈식민의 여로에서 갈라섰던 두 나라가 재차 긴밀히 엮이고 있는 것이다. 분리 독립에서 대통합으로 판세가 뒤바뀌고 있다.

견문이 늘 계획처럼 되지는 않는 법이다. 예기치 않게 싱가포르 일정이 다소 늘어났다. 탓에 말레이시아 일정은 단축되었다. 왕년의 해상 무역 도시이자 유네스코 문화유산이기도 한 말라카는 보는 둥 마는 둥이었다. 고즈넉한 옛 도시에서 지긋하게 역사를 음미해보고자 했던 애초의 기대는 접어야 했다.

곧장 쿠알라룸푸르로 향했다. 처음부터 말레이시아 행의 목적은 뚜렷했다. 과거보다는 현재 그리고 미래에 초점을 두었다. 특히 이슬람 경제를 집중적으로 살피고자 했다. 말레이시아가 이슬람 금융과 할랄 산업의 메카이기 때문이다. 조바심은 기우였다. 쿠알라룸푸르 버스 역에 내리자마자 이슬람 금융 상품을 선전하는 간판들이 여럿 보였다. 숙소를 향해 걷는 20여 분 동안에도 이슬람 은행에서 발행하는 신용카드와 이슬람 보험 상품의 광고를 수시로 접할 수 있었다. 이슬람 경제는 이미 일상적이고 보편적인 듯 보였다.

말라카에서 쿠알라룸푸르로 가는 버스 안에서 새내기 시절을 한참 회상했다. 1998년 최초의 정권 교체와 더불어 대학생이 되었다. 외환 위기(IMF 구제 금융 사태)로 나라가 한참 혼란스럽던 시절이었다. 원인을 두고 이런저런 말이 참 많았다. 베스트셀러도 확연히 갈렸다. <공자가 죽어야 나라가 산다>(바다출판사 펴냄)가 '내 탓'에 치중했다면, <세계화의 덫>(영림카디널 펴냄)은 '남 탓'을 하는 쪽이었다. 덩달아 '아시아적 가치' 논쟁도 뜨겁게 달아올랐다. 당시 나는 오락가락이었다. 개발 독재를 엄호하는 유교 자본주의론이 탐탁지 않으면서도, 신자유주의로의 재편 또한 내키기가 않았다.

돌아보니 커다란 착시가 있었다. 당시 IMF(국제통화기금)에 맞서 '아시아적 가치'를 가장 소리 높여 외친 주역은 마하티르 모하마드였다. 그는 말레이시아의 수상이었다. 이슬람 국가의 총리였던 것이다. '유교'로 퉁 칠 수 있는 인물이 아니었다. 싱가포르가 정치적 영역에서 서구형 민주와 일선을 긋는 독자적인 통치 모델을 실현했다면, 말레이시아는 경제적 영역에서 신자유주의에 편승하지 않으며 또 다른 목소리를 내고 있었던 것이다.

그 차이를 깊이 인지하지 못했다. 솔직히 관심도 그리 크지 않았다. 당시의 나의 사고 지평이란 서구의 이론과 한국의 현실 사이를 맴돌고 있을 뿐이었기 때문이다. 동남아는커녕 동북아도 잘 몰랐다. 응당 이슬람 세계는 더더욱 멀었다. 그래서 17년이 더 지난 2015년이 되어서야 1997년 당시 말레이시아의 담론 지형을 복기하고 복습할 필요성을 느낀 것이다.

▲ 말라카. ⓒ이병한

1997년 중엽부터 말레이시아 통화인 링깃의 가치가 급락하고 주식 시장이 폭락하기 시작했다. 마하티르는 즉각 국제 투기 자본을 지목했다. 아시아 금융 위기는 해외 투기꾼들의 탐욕과 무책임의 소산이며, 투기적 활동을 규제하는 제도적 장치가 미비한 국제 금융 시장의 구조적 문제라고 성토했다. 그래서 고정 환율제와 자본 통제로 맞대응했다. IMF의 처방과는 정반대로 응수한 것이다. 그리고 조기에 금융 위기에서 벗어났다.

평판은 크게 갈라졌다. 서구에서는 이단자로 취급했다. 말레이시아서는 경제 주권을 지킨 민족주의자로 받들었다. 양쪽 모두 일면적이고 편파적이었다. 마하티르는 누구보다 적극적으로 경제 개방과 세계화를 추진했던 인물이다. 그가 발표했던 '비전 2020'은 말레이시아를 선진 산업 국가로 변모시킴으로써 가장 현대적인 무슬림 국가를 만들겠다는 포부를 담고 있었다. 즉 민족주의도 반서구주의도 반쪽자리 독법이다. '비서구적 세계화'를 추진했다고 하는 편이 적합할 것이다. 그래서 일국적 발전주의에 그치지도 않았다. 이슬람과 세계화를 결합시킴으로써 무슬림 세계의 첨단이 되기를 도모했다.

그런데 마하티르와는 또 다른 지점에서 당시의 금융 위기를 진단하는 세력도 있었다. 제 1야당, 파스이다. 당시 말레이시아의 정치 세력은 크게 둘로 나뉘었다. 여당이 암노(UMNO·United Malays National Organization, )였고, 야당이 파스(PAS·Parti Islam Se-Malaysia)였다.

암노는 말레이 중산층에 화인 자본가들이 연합하여 지배 체제를 구축하고 있었다. 파스는 이슬람에 기초한 정당이었다.

물론 말레이시아는 무슬림이 다수를 이루는 이슬람 가였기에 암노 역시 이슬람을 적극 동원했다. 다만 근대화와 세계화를 성취하기 위한 훈육 기제로서 이슬람을 활용한 것에 가까웠다. 그래서 암노가 말하는 이슬람이란 초기 자본주의 정신을 일구었다는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거의 판박이였다. 마하티르가 주창했던 '신 말레이인'이 바로 자본주의에 적응한 이슬람의 상징이었다.

반면 파스는 이슬람에 기반을 두고 근대화와 세계화를 교정하려는 세력이었다. 여와 야가 보수/진보, 좌/우로 나뉜 것이 아니라, 이슬람과 근대화에 대한 태도로 갈라진 것이다. '어떤 이슬람인가'가 관건이었다. 파스의 아시아 금융 위기에 대한 독법은 한층 과격했다. 기독교와 이슬람 간 앙숙 관계의 연속으로 간주했다. 십자군 전쟁에 빗대는 견해도 분출했다. 유태인을 배후로 지목하기도 했다. 그래서 금융 위기의 근본적 원인 또한 세속화와 서구화 자체에 있다고 여겼다. 따라서 이슬람 율법(샤리아)에 기초한 이슬람 국가를 세우는 것만이 근본적 해법이라 주장했다.

지나친 감이 없지 않다. 설득력도 떨어진다. 1997년 금융 위기를 함께 겪은 태국(타이)이나 한국 등에는 적용하기 어려운 주장이다. 지극히 내부적인 발언이라고 하겠다. 마하티르의 집권 세력과 척을 지고 무슬림을 정치적으로 최대한 동원하기 위한 내수용 언설에 가까웠다.

그럼에도 음미할 대목 또한 적지 않다. 신자유주의라는 당대의 지배 질서가 윤리와 도덕이 결여되어 있다고 비판하는 지점은 부정하기 힘든 진실이다. 종교와 철저히 단절된 세속주의가 경제 위기의 근원이라는 지적 또한 막 싱가포르에서 만나고 온 프라센지트 두아라의 독법과도 상통하는 것이었다. (☞관련 기사 : 프라센지트 두아라와의 대화)

게다가 이들은 서구의 자본주의만큼이나 마하티르의 경제적 민족주의에도 비판적이었다. 쿠알라룸푸르의 상징이 된 페트로나스 트윈 타워부터 호사스러운 새 총리 관저까지 낭비가 심한 건설 프로젝트를 단호하게 성토했다. 절제와 검소를 강조하는 이슬람 윤리에 위배된다는 것이다. 실은 그런 대규모 사업이 서구가 비판하는 정경유착과 부패의 핵심 고리이기도 했다. 집권당과 결탁한 친인척 기업들에게 혜택이 돌아가는 경우가 다반사였기 때문이다.

파스가 더 많은 경제 개방과 더 시장 친화적인 구조조정을 주문하는 IMF와 달리 독자적 대안으로 제시한 것이 바로 '이슬람 경제'로의 전환이었다. 문득 갈팡질팡하던 새내기 시절 읽었던 또 다른 책들이 떠올랐다. 에른스트 프리드리히 슈마허의 <작은 것이 아름답다>(이상호 옮김, 문예출판사 펴냄)와 헬레나 노르베리-호지의 <오래된 미래>(양희승 옮김, 중앙북스 펴냄) 등은 자본주의의 대안으로 불교 경제학을 설파하고 있었다. 종교(영성)와 경제(세속)의 재결합을 꾀한다는 점에서, 양자는 이슬람과 불교의 차이를 넘어 공명하는 바가 있었다.

▲ 말레이시아 익스프레스 버스. ⓒ이병한

2057 : 예습

1950~60년대 많은 신생 독립 국가들이 출범했다. 그러면서 자국을 식민지로 전락시켰던 서구의 자본주의와는 다른 경제 체제를 모색하기 시작했다.

주지하듯 일부는 소련을 전범으로 삼아 사회주의로 기울었다. 반면 자신의 문명에 근거한 변화를 꾀하는 쪽도 있었다. 1970년대부터 본격화된 이슬람 부흥(dakwah) 운동이 그것이다. 더불어 이슬람 경제에 대한 관심도 점차 증가하였다. 1960년대 중엽에 이미 독자적인 분과 학문으로 확립되었고, 1980년대 초부터는 정책 실험이 시작되었다. 이란, 수단, 파키스탄이 선도적이었다. 즉 '경제의 이슬람화'는 새 천 년에 불쑥 등장한 핫 트렌드가 아니다. 20세기 후반, 이슬람 세계의 탈식민과 함께 점진적으로 확산, 심화되어온 것이다. 일종의 이슬람 판 '개혁 개방'이다.

이슬람 경제는 자본주의와 공산주의의 양자택일이 아니라 제3의 길을 추구한다. 자본주의는 '개인의 자유'라는 환상, 혹은 허상에 도취되어 있다. 그래서 자기 이익 추구를 맹목적으로 숭배한다. 반면 공산주의는 개인에 대한 국가의 총체적인 지배와 억압으로 귀결되고 만다. 따라서 이슬람 경제는 개인의 이익 및 사회적 책임 사이에 균형을 도모한다. 애초 종교와 경제, 정신적 생활과 물질적 생활은 불가분이었다. 근대 경제학은 인간의 삶에 있어서 물질적 생활만을 절대시하는 잘못된 가정에 기초하고 있다. 경제는 인간 생활의 한 요소일 뿐이다. '경제적 인간(호모 이코노미쿠스)'을 부정하는 것이다.

근거는 역시 이슬람의 성경, 코란이다. 코란은 사유 재산을 인정한다. 상업과 산업 활동을 통해 이윤을 창출하는 기업가를 독려한다. 빈부 차이 또한 속세의 불가피한 현실로 수용한다. 그럼에도 가진 자는 사회 전체를 위하여 정의로워야 하고, 동정심을 발휘해야 한다. 생산적 경제 활동이 곧 종교적 의무를 수행하는 예배와 합치되도록 살아야 한다. 그래서 코란은 사기, 독점, 매석, 투기, 고리대를 엄격하게 금지했다. 도박성, 불확실성, 착취적 요소를 포함한 경제 활동을 일절 금지시킨 것이다. 무함마드가 메디나를 통치했던 마다니 사회(masyarakat madani)가 이상적인 이슬람 경제의 원형적 모델로 거듭 환기되었다.

말로만 그치지도 않았다. 파스가 집권한 지방이 실제로 있었다. 클란탄(Kelantan) 주와 트렝가누(Trengganu) 주가 대표적이다. 중앙의 세속적인 암노 정부에 맞서서 이슬람 사회를 건설하는 실험장이 된 것이다. 일각에서는 '신정 국가'의 비관용성과 종교적 극단주의만 부각시킨다. 그러나 그러한 시각이야말로 또 다른 비관용성과 극단주의의 산물이다. 이참에 살펴보니 의외로 흥미로운 구석이 많았다.

일단 지방과 농촌에 기반을 둔 정당답게 '農本(농본)'을 중시했다. 도시 중산층을 핵심 지지층으로 삼는 암노와 달리 농업과 산업의 공진화를 추구했다. 그래서 집권 5년 만에 클란탄 주를 말레이시아의 대표적인 곡창 지대로 탈바꿈시켰다. 사회 복지의 향상과 부패의 척결도 돋보였다. 농민층의 빈곤율은 크게 떨어졌고, 출산 휴가는 60일로 크게 늘어났다. 저렴한 공공 주택 보급도 확산되었다.

주지사가 앞장서서 일상의 변화도 선도했다. 이슬람 교사 출신의 주지사는 검소하고 청렴한 생활로 타의 모범이 되었다. 사치와 낭비 대신에 '적절한 소비'를 강조했다. 그 자신이 몸소 '깨끗한 정부'의 상징이 된 것이다. 정신과 물질의 균형과 조화도 도모했다. 오피스, 쇼핑 센터, 호텔 등 상업과 관광이 발전하는 만큼이나 이슬람 사원과 이슬람 학교도 늘어났다.

고리대를 없앤 이슬람 전당포도 성업을 이루었다. 이슬람 경제에서는 이자를 원천적으로 인정하지 않는다. 불로소득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슬람 전당포에서는 대여금 이자 없이 저렴한 수수료만 부가하도록 했다. 혹시 기일 내에 갚지 못하더라도 저당물을 몰수하지 못하도록 했다. 경매에 붙여 대여금과 밀린 수수료를 공제하고는 차액은 저당자에게 돌려주도록 한 것이다.

코히랄(Kohilal) 이라는 생활협동조합도 눈길을 끈다. 식품과 화장품 등 신체와 관련된 이슬람 상품을 생산하고 판매하는 협동조합이다. 대량 생산과 대량 소비의 대항마로써 이슬람적 생산-소비망을 개척한 것이다. 전자를 이슬람 금융의 원형으로, 후자를 할랄 산업의 원조라고 할 수도 있겠다. 이슬람 경제의 창조적 근대화를 꾀한 지방 정부의 실험이 새 천 년 말레이시아의 국책으로 승격된 것이다.

1997년과의 차이도 바로 여기에 있다. 더 이상 서구 자본주의에 맞서 '아시아적 가치'를 항변하는 선에서 그치지 않는다. 이슬람 경제로부터 대안적 발상을 얻고 현장에서 실험하며 부단하게 진화하고 있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동남아시아의 역동적 변화에 기여하고 있으며, 나아가 글로벌 이슬람 세계에도 새로운 영감을 선사하고 있는 것이다.

유럽식 세속화도 아니요 중동식 근본주의도 아닌, 이슬람의 새 출로와 새 활로를 열어가고 있다. 말레이시아가 독립 100주 년을 맞이하는 해는 2057년이다. 21세기의 한복판, 말레이시아의 장래와 이슬람 세계의 미래를 예습하는 차원에서라도 이슬람 금융과 할랄 산업의 현재를 한층 꼼꼼하게 살펴볼 필요가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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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한
20대는 사회과학도였다. 서방을 선망했고, 새로운 이론의 습득에 골몰했다. 30대는 역사학자였다. 동방을 천착하고, 오랜 문명의 유산을 되새겼다. 자연스레 동/서의 회통과 고/금의 융합을 골똘히 고민했다. 그 소산으로 1000일 <유라시아 견문>을 마무리 짓고 40대를 맞이했다. 개벽학자이자 지구학자이며 미래학자를 지향한다. 인간 이전의 자연적 진화는 물론이요, 인간 이후의 자율적 진화에, 인간만의 자각적 진화를 두루 아울러야, 지구의 진화에 일조할 수 있는 미래학자의 자격이 갖추어진다고 생각한다.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공진화, 하늘과 땅과 사람의 공진화, 생물과 활물과 인물의 공진화, 만인과 만물과 만사의 공진화, 개벽학과 지구학과 미래학의 공진화, 이 모든 것을 아울러 깊은 미래(DEEP FUTURE)를 탐구하는 깊은 사람(Deep Self), 무궁아(無窮我)이고 싶다. www.byeongh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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