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희연 서울시교육감은 교육청 문에 들어설 때마다 가끔씩 어색하단다. '내가 얼마 전까지는 여기서 시위를 했었는데' 싶어서라고. 시민운동가로 일할 때가 가장 마음 편했다던 그가 이제는 달라졌다. 까칠한 질문은 슬쩍 피해갈 줄도 안다. 딱딱한 정책 쟁점을 쉽게 풀어 설명하는 요령도 늘었다.
올 한 해 동안 겪은 지독한 마음고생으로 단련된 덕분인지도 모르겠다. 그는 지난해 6월 교육감 선거 당시 상대 후보였던 고승덕 변호사의 미국 영주권 의혹을 제기했다는 이유로 기소돼 1심에서 당선 무효 형을 선고받았다. 형이 확정되면, 교육감 직에서 불명예 퇴진할 뿐 아니라 30억 원에 달하는 선거비용도 물어줘야 한다. 한마디로, 파산이다. 그런데 지난 9월, 항소심 재판에서 뒤집어졌다. 법원은 '선고 유예' 처분을 했다. 대법원에서 최종 확정되면, 앞서 선고됐던 당선 무효 형은 취소된다.
죽다 살아난, 그래서 더 담대해진 그를 기다리는 과제가 많다. 박근혜 정부는 역사 교과서 국정화를 밀어붙인다. 거꾸로 돌아가는 시계를 바로잡아야 한다. 곽노현 전 교육감이 시작했다가 중간에 흐름이 끊긴, 진보적 교육 의제들이 제대로 뿌리 내리게끔 하는 일도 절박하다. 조희연 교육감이 겪은 시련을 마음 아파하고, 그를 응원했던 이들 가운데 많은 수가 혁신학교 학부모들이다. 그들의 기대에 부응해야 한다.
"대학 문제 건드리겠다"
조 교육감은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그의 속이야기를 듣는 자리가 마련됐다. 지난 21일 저녁 <프레시안>과 팟캐스트 <시사통 김종배입니다>가 공동 주관한 '정치통(通)' 공개 방송이다. 시사평론가 김종배 씨와 유승찬 '스토리닷' 대표가 진행했다. 이 자리에서 조 교육감은 한국 교육의 다양한 쟁점들에 대해 이야기했다. 서울시교육청의 업무영역에만 갇히지 않았다. 당연한 일이다. 학교는 사회의 축소판이다. 학교를 바꾸는 건, 사회를 바꾸는 일이므로, 행정 구획에 갇힌 사고방식으론 할 수 있는 게 없다. (☞ )
그는 "대학 문제를 건드리겠다"고 말했다. 자사고, 특목고를 정점에 둔 '고교 서열화' 체제는, 서울대, 연고대 등을 정점에 둔 '대학 서열화' 체제와 맞물려 있다. 이 문제를 공론화하겠다는 게다. 그는 최근 프랑스를 방문한 경험도 소개했다. 프랑스는 1968년 혁명을 통해 기존의 학벌 구조를 허물었다.
사실, 이런 주장은 새롭지 않다. 진보 진영에서 자주 나왔던 내용이다. 다양한 분석이 진행됐고, 온갖 대안이 제출됐다. 문제는 의지다. 이런 내용이 선거 공약으로 채택돼도, 유권자들은 잘 몰랐다. 선거 운동 과정에서 전면에 내세우지 않기 때문이다.
'고교 서열화'를 부추기는 자사고 문제 역시 마찬가지다. 조 교육감은 "자사고 폐지 법안을 낸 의원조차 안 도와줬다"고 토로했다. 국회의원 입장에선 자기 지역구에 자사고가 들어서기를 바라는 유권자들을 거스르기가 쉽지 않다. 그러니 공식적인 입장과는 달리, 자사고 문제에 대해 소극적으로 대응한다. 시사평론가 김종배 씨는 "정치인에게 교육 문제는 '잘해야 본전'"이라고 설명했다. 오히려 그래서, 제대로 된 교육정치가 필요하다. 쉽지 않은 일이므로, 잘 해결하면 든든한 자산이 된다. 차분하게 대화를 이끌던 김종배 씨는, 조 교육감이 대학 문제를 거론한 대목에서 목소리 톤이 높아졌다.
"가리봉동에 중국인 원어민 학교 만들자"
조 교육감은 원래 사회학자다. 공공성과 시민이라는 키워드를 오래 부여잡았었다. 이날 대화에서도 드러났다. 그는 "교육의 중심은 공교육"이라고 거듭 강조했다. 교육의 바탕은 공공성에 둬야한다는 이야기다. "(공공 부문이 약한) 미국조차 퍼블릭 스쿨(공립학교)가 교육의 중심이다. 귀족학교는 2~3퍼센트에 불과하다"고 했다. 그러나 우리 현실은 반대다. 아이들이 실제로 공부하는 곳은 학원이다. 이걸 바로잡아야 한다는 의지가 대화 내내 드러났다.
공교육에 대한 강조와 국가주의 편향은 전혀 다르다. 조 교육감은 다문화 교육에 대한 다양한 아이디어를 제시했다. 예컨대 서울 가리봉동에는 중국인 아이들이 많다. 한국 학부모들은 이 지역을 기피하는데, 시각을 바꿔보자는 게다. 가리봉동 지역 학교를 '중국어 원어민 학교'로 삼자는 것. 중국 문화와 언어를 자연스레 익히는 공간이다. 아울러 그는 우리 아이들이 한국 국적과 함께 세계 시민 국적을 가져야 한다고 했다. 또 영어만이 아닌, 다양한 세계어를 배웠으면 한다고도 했다.
"학생은 '교복 입은 시민'"
조 교육감은 "군인을 군복 입은 시민으로, 학생을 교복 입은 시민으로 대우"하는데서 시작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어 그는 "아이들을 싸구려 노동력으로만 써서는 미래가 없다"고 말했다. 아이들이 노동자, 시민으로서의 정당한 권리를 깨우치고 누리게끔 하는 것 역시 교육의 역할이라는 말이다. 이처럼, 학교와 사회는 그의 생각 속에서 늘 한 묶음이었다.
한국 교육을 병들게 하는 '대학 및 고교 서열화' 체제를 바꿔야 한다는 주장 역시 마찬가지. 그는 부모들이 자식의 학벌에 집착하는 이유로 "사회의 불안"을 꼽았다. 학벌을 일종의 '구명조끼'로 여긴다는 게다. 따라서 학벌 구조에 대한 문제제기는, 사회의 불안정을 완화하는 노력과 함께 이뤄져야 한다. 아이에게 '구명조끼' 입히지 않아도 불안하지 않은 사회가 돼야 한다는 것.
하지만 병은 너무 깊어졌다. 조 교육감은 '서열화와 경쟁' 구조가 초등학교, 심지어 유치원까지 장악한 현실을 토로했다. 결국 근본적인 방향 전환이 불가피하다. 조 교육감은 "과거에는 '한 명이 만 명을 먹여 살린다'는 믿음에 따른 교육을 했다. 이런 교육은 이제 안 통한다"라고 말했다. "대신, '온리 원(Only One) 교육'으로 가야 한다"라는 게다. 한두 개의 잣대로 아이들을 줄 세우기보다, 아이 하나하나가 그 자체로 목적이 되는 교육. 요컨대 '수직적 서열화'가 아닌 '수평적 다양성'을 향해야 한다는 이야기다.
"학생인권옹호관실, 획기적으로 강화하겠다"
그러나 누리과정 자체를 비난해서는 안 된다는 게 조 교육감의 생각이다. 무상보육은 무상급식과 함께 사회적 합의라고 봐야 한다는 것.
역사 교과서 국정화 논란 역시 '국정 교과서 vs 대안 교과서' 구도로 흘러가는 건 위험하다는 의견이었다. 일단은 교과서 국정화를 막는데 힘을 모아야 한다는 것이다.
아울러 서울시교육청에 있는 '학생인권옹호관실'을 획기적으로 강화하겠다고 밝혔다. 서울시교육청 학생인권옹호관은 지난 4월 충암고 교감이 급식비 미납 학생에게 폭언을 한 사건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큰 역할을 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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