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의미에서 레이몬드 윌리암스 이후로 새롭게 활성화되고 있는 'Culturology', 혹은 'Cultural Studies'의 올바른 우리말 번역은 삶의 방식, 혹은 생명의 존재방식에 관한 '섭생(양생)학'이거나 '섭생(양생) 연구'이다. 농업(agriculture: 곡식이나 가축을 기르거나 양육하는 삶의 방식)이라는 언어가 의미하는 바와 같이 영국이 산업혁명을 거치는 18세기 이전까지 'culture'는 물질적인 영역의 삶을 가꾸거나 양육하는 의미를 지니다가 산업혁명 이후에야 비로소 정신적인 영역의 삶을 가꾸거나 양육하는 의미를 지닌 형이상학적 의미의 개념으로 전환하기 시작하였다. 사회나 제도의 변화에 따라 언어의 의미가 변화하는 사회적 현상을 단지 형이상학적 의미만을 강조하는 근대적인 이해의 방식으로 고착시킨 사람은 흔히 영문학 연구의 창시자라고 일컬을 수 있는 매츄 아놀드(Matthew Arnold)라는 영국의 의미의 시인이자 교육 관료이다. 그는 1868년에 출판된 『문화와 무질서(Culture and Anarchy)』에서 "나는 문화의 신봉자이다"라고 선언하면서, 'culture'를 "완전성의 추구"인 동시에 지금까지 "이 세상에서 알려지고 생각되어진 최상의 것"으로 정의한다. 아놀드의 "완전성의 추구"나 "이 세상에서 알려지고 생각되어진 최상의 것"이라는 'culture'의 개념 정의를 통하여 마침내 영문학을 포함한 서구 유럽의 문학이나 철학의 텍스트들이 고전이나 정전이라는 이름으로 인문학 연구의 토대가 된 것이다.
매츄 아놀드의 'culture'에 대한 정의는 그의 독창적인 개념이 아니라 "세익스피어를 인도와도 바꾸지 않겠다"고 선언한 토마스 카알라일(Thomas Carlyle)이나 존 러스킨(John Ruskin) 그리고 윌리암 모리스(William Morris)와 같은 당시 영국의 대표적인 철학자나 사상가들의 계몽주의적 사고방식과 일치하는 것이다. 그들은 당시의 제국주의 영국을 대표하여 산업혁명을 통한 기계화와 도시화 그리고 제국주의적 식민주의와 자유방임주의 경제가 만든 물질 만능주의에 대한 환멸을 정신적이고 도덕적인 측면에 대한 강조와 더불어 교육과 사회적 계몽을 통한 "고급문화의 전달"(Giles and Middleton 10)로 영국의 중하층민이나 식민지 세계의 야만적인 인류를 구원할 수 있는 길이라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따라서 아놀드와 같은 사람들에게 'cultured'라는 언어는 이미 정전화되어(canonized) 있는 국가철학적 지식의 근간이 되는 철학이나 문학 그리고 미술과 음악에 친숙해진 "교양을 갖추고 있다"는 것을 의미했고. 이러한 교양을 갖춘 교양인(cultured man and woman)은 지식인보다 우월하거나 동일한 평가를 갖는다.
그러나 문제는 문화나 교양 혹은 인문학적 지식이라고 평가되는 철학이나 문학 그리고 미술이나 음악이 현재진행형의 새로운 구성물이 아니라 매츄 아놀드와 같은 국가나 국가제도의 근대적 지식인들에 의하여 검증된(혹은 검열된) 작가나 텍스트들의 구성물들이라는 것이다. 매츄 아놀드의 "완전성의 추구"나 "이 세상에서 알려지고 생각되어진 최상의 것"이라는 'culture'에 대한 정의는 역사학과 철학 그리고 문학을 중심으로 구성된 근대 대학교의 형성과 맥을 같이 하며, 신문이나 저널 등등의 국가장치를 통한 검증체계의 구성과 밀접한 연관관계를 지니고 있다. 그래서 오늘날 철학을 하지 않는 철학교수가 현재가 아닌 과거의 철학을 가르치고, 역사성이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 없는 역사학 교수들이 국정 교과서를 저술하며, 시나 소설을 쓰지 못하는 문학교수들이 시인과 소설가들을 평가하거나 비평이론의 잣대를 들이대며, 미술이나 음악의 세계와 동떨어져 있는 대학교수들이 미술비평을 하고 음악비평을 한다. 아놀드의 "완전성의 추구"나 "최상의 것"은 대학교를 비롯한 근대적 국가장치들에 의하여 제국주의적이거나 식민주의적 방식의 "위대한 전통"으로 축적되어 보존되고 있는 것이다.
1960년대의 영국은 매츄 아놀드가 추구했던 근대적 문화, 혹은 18세기 후반부터 형성되기 시작하여 19세기 중반부터 국가적 제도로 확립된 근대성의 대중적 절정기라고 할 것이다. 바로 이 순간에 레이몬드 윌리암스는 "culture"의 의미가 매츄 아놀드를 비롯한 근대적 지식인들에 의하여 왜곡되었을 뿐만 아니라 "culture"의 의미 왜곡을 통하여 정신/몸, 문명/자연, 국가/국민, 남성/여성, 서양/동양, 백인/흑인, 인간/동물 등등의 수많은 이분법적 사고방식과 삶의 양식이 근대적 삶과 세계를 지배하도록 만들었다는 것을 폭로한다. 이것이 서구적 근대 인문학의 위기, 혹은 서구적 근대 대학의 위기를 불러온 학문적 배경이다. 이러한 학문적 배경은 1960년대 영국과 프랑스를 비롯한 서구 유럽 엘리트 교육의 장으로서의 대학이 여성과 노동자와 농민의 자녀뿐만 아니라 아프리카나 아시아계 이방인들의 대학입학을 통한 엘리트 교육의 한계와 대학교육의 보편화라는 사회적이거나 정치적인 배경과 더불어 서구 근대 인문학의 위기, 혹은 서구 근대 대학의 위기를 더욱 강화시켰다. 이러한 서구 근대 인문학의 위기와 서구 근대 대학의 위기는 1990년대 이후 대한민국을 비롯한 지구촌 세계의 대부분에서 일어나고 있는 전 지구적 현상이 되어버렸다.
문제는 "차이(difference)"이다. 레이몬드 윌리암스의 'culture'에 대한 정의, 즉 삶의 방식이나 생명의 존재방식에서 드러나는 시간적이고 공간적인 "차이"는 각각의 개인이나 집단, 혹은 사회나 국가를 서로 다르게 생성적이거나 생산적인 삶의 방식이나 생명의 존재방식으로 구성하는 중요한 요소이다. 따라서 고급문화나 대중문화, 서양과 동양, 남성과 여성, 백인과 흑인, 인간과 동물 등등에서 나타나는 삶의 방식이나 생명의 존재방식에서 드러나는 차이는 영문학을 비롯한 서구적 근대 인문학이 서구적 근대 대학제도를 통하여 만든 차별이나 서열의 토대가 아니라 'culture'의 근원적 의미, 즉 시간적이거나 공간적으로 서로 다른 섭생이나 양생의 구조를 살피는 토대가 된다. 이런 측면에서 남아프리카공화국 출신의 아프리카너 소설가이자 영문학 교수인 존 쿳시(J. M. Coetzee)는 스위스 출신의 문학사가 폴 줌쏘르(Paul Zumthor)의 말을 빌려 "17세기 이후부터 오늘날까지 (서구) 유럽은 하나의 암처럼 전 세계에 퍼졌다. 처음에는 아주 은밀하게 퍼져나갔지만 얼마가 지난 이후부터는 굉장히 빠른 속도로 (서구) 유럽은 (삶의 방식에서 단지 그들과 다르다는 의미에서) 이 세계의 수많은 동물들과 식물들, 그리고 그곳의 주민들과 언어들이 존재하는 삶의 방식들을 파괴하고 있다"고 이야기한다.
줌쏘르의 말을 더 들어보자. "(서구 유럽이라는) 이 암의 징후들 중의 하나는 분명히 처음부터 우리가 문학이라고 부르는 것이었다. (서구 유럽의 근대) 문학(혹은 인문학)은 (대학과 같은 근대적 제도를 통하여) 스스로를 강화시키고 번영하여 (각각의 시간과 공간 속에서 서로 다른 삶의 방식으로 존재하는) 목소리를 부정하면서 인류의 가장 거대한 영역들 중의 하나인 오늘날의 그것이 되었다. ... 이제 특권화 된 (문학, 혹은 서구적 근대 인문학의) 글쓰기를 멈출 때가 되었다."(Coetzee Elizabeth Costello 45) 이러한 줌쏘르의 말은 『철학이란 무엇인가?』에서 들뢰즈가 "우리(서구 유럽)에게는 현재에 대한 저항이 결여되어 있다"라는 말과 일치한다. 즉, "(섭생이나 양생의 구조를 지탱시키는 새로운) 개념들의 창조는 그 자체로서 미래의 어떤 형식에 구원을 청하며, 아직은 존재하지 않는 새로운 땅과 새로운 민족을 요청한다. (서구) 유럽화는 하나의 생성을 구축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속박된 민족들의 생성을 방해하는 자본주의의 역사를 구축할 따름이다. 바로 이점, 즉 창조의 상관체로서 결여된 하나의 땅과 하나의 민족의 구축이라는 점에서 (끊임없이 차이를 만들어내는 삶의 방식이나 생명의 존재방식을 구성하는) 예술과 철학은 다시 합치한다."
들뢰즈가 말하는 끊임없이 차이를 만들어내는 삶의 방식이나 생명의 존재방식을 구성하는 새로운 "예술과 철학"의 결합은 "17세기 이후부터 오늘날까지 (서구) 유럽은 하나의 암처럼 세계에 퍼졌다"고 말하는 줌쏘르의 서구적 근대의 문학이나 인문학에서 벗어나는 길이며, 또한 서구적 근대의 문학이나 인문학을 "문화(culture)"로 포장하여 "이 세계의 수많은 동물들과 식물들, 그리고 그곳의 주민들과 언어들이 존재하는 삶의 방식들을 파괴하는" 서구화와 유럽화와 근대화에서 벗어나 섭생이나 양생의 새로운 삶의 방식이나 생명의 존재방식을 추구하는 윌리암스의 문화학이나 문화연구와 일치하는 것이다. 더 나아가 들뢰즈는 획일화와 동일성에서 벗어나 끊임없는 생성의 차이를 만들어내는 삶의 방식이나 생명의 존재방식을 구성하는 새로운 "예술과 철학"의 결합을 바둑의 구성방식에서 찾는다. 따라서 들뢰즈가 바둑에서 발견하는 바둑의 존재론과 인식론과 실천론의 종합은 들뢰즈가 자신의 모든 저서들을 종합하는 듯한 『철학이란 무엇인가?』에서 이야기하는 예술적 지식과 철학적 지식과 과학적 지식의 종합과 일치한다. 바로 이점이 들뢰즈의 바둑의 발견과 윌리암스의 문화의 발견이 서로 일치하는 지점이다.
들뢰즈의 바둑의 발견을 통하여 드러나는 형상을 창조하는 예술적 지식과 개념을 사유하는 철학적 지식, 그리고 기능을 발견하는 과학적 지식의 결합은 서구적 근대의 대학이나 인문학이 단지 바르톨로뮤 디아스의 희망봉 발견이나 콜럼부스의 아메리카 대륙 발견을 통하여 17세기 이후부터 만들어진 서구, 백인, 남성 중심주의의 예술적 형상과 철학적 개념을 토대로 구성된 서구, 백인, 남성 중심주의의 과학적 기능을 발견하는 서구적 근대 대학의 과학적 인문학을 넘어서는 새로운 인문학이라고 할 것이다. 오늘날 대한민국을 포함하여 전 지구적으로 확산되어 있는 서구적 근대 대학의 과학적 인문학은 시간과 공간의 차이에 따라서 삶의 방식과 생명의 존재방식이라는 지속적인 차이의 생성을 만들어내는 예술적 형상의 창조와 새로운 철학적 개념의 사유를 억압하고 통제한다. 따라서 들뢰즈의 바둑의 발견을 통하여 드러나는 바둑 인문학은 마치 서구 유럽의 중세가 기독교 신학이라는 종교적 지식의 지배를 통하여 예술적 지식의 구성과 철학적 지식의 형성을 억압한 암흑의 시대인 것처럼 17세기 이후부터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는 서구적 근대가 예술적 형상의 세계와 철학적 개념의 장 속에서 만들어지는 과학적 기능의 명제를 통하여 구성되는 과학적 지식의 지배를 통하여 서구적 근대와 다른 새로운 예술적 지식의 구성과 철학적 지식의 형성을 억압하고 있는 또 다른 암흑의 시대였다는 것을 드러낸다.
들뢰즈가 발견한 바둑의 풍경이 아직까지 살아있는 동아시아에서 서구적 근대가 형성되기 이전의 중국과 조선을 대표하는 유교적 지식의 인문학이 왕국과 왕국의 대결이라는 형상적 세계 속에서 형성된 왕과 선비 차, 마, 포, 상, 졸과 같은 개념들을 과학적 명제로 전환시켜 장기판에 각각의 삶의 방식과 생명의 존재방식을 과학적으로 코드화 한 장기의 인문학인 것처럼, "17세기 이후부터 오늘날까지 하나의 암처럼 전 세계에 퍼진" 서구적 근대의 인문학은 바르톨로뮤 디아스의 희망봉 발견과 콜럼부스의 아메리카 대륙 발견 이후의 국제화와 세계화라는 형상적 세계 속에서 형성된 킹, 퀸, 비숍, 나이트, 룩 그리고 폰과 같은 개념들을 과학적 명제로 전환시켜 체스판에 각각의 삶의 방식과 생명의 존재방식을 코드화 한 체스의 인문학이다. 이런 측면에서 들뢰즈는 과학적 명제를 통하여 "코드화 되어 있는" 장기나 체스와 비교하여 바둑의 세계는 "공간을 영토화하고 탈영토화 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체스와 장기가 왕이나 국가를 위한 전쟁이라는 코드화 된 삶의 방식과 생명의 존재방식을 구성한다면 바둑은 삶 그 자체와 생명 그 자체를 위한 전쟁이라는 영토화와 탈영토화라는 삶의 방식과 생명의 존재방식을 구성한다. 따라서 들뢰즈의 바둑의 발견을 통하여 구성되는 바둑 인문학은 삶 그 자체와 생명 그 자체를 위한 전쟁기계의 삶의 방식과 생명의 존재방식을 탐구하는 것이다.
물론 이 세계는 가로 19줄과 세로 19줄이 만드는 361개의 점들이라는 바둑판의 세계보다도 더 많은 점들로 구성되어 있다. 이러한 오늘날의 바둑판은 가로 17줄과 세로 17줄로 구성된 예전의 바둑판이 그 어떤 사건을 통하여 가로 19줄과 세로 19줄이라는 오늘날의 것으로 새롭게 변형된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알파고와 이세돌의 바둑 대결이 4승 1패라는 알파고의 승리 이후에 가로 21줄과 세로 21줄이 만드는 441개의 점들로 구성된 새로운 바둑판의 구성이 중국과 대만 그리고 한국과 일본을 비롯하여 새롭게 확장되고 있는 유럽과 미국 등등의 수많은 바둑인들을 위하여 오늘날의 바둑계에 필요한 새로운 혁명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은 한국기원을 비롯한 바둑인들이 고민할 일이고, 가로와 세로가 17줄이든 19줄이든 혹은 21줄이든 간에 바둑을 구성하는 초반의 예술적 지식과 중반의 철학적 지식 그리고 종반의 과학적 지식에는 변함이 없다. 바둑판과 이 세계를 구성하는 이 세 개의 지식은 마치 바둑의 초반부와 중반부 그리고 종반부가 서로 겹치기도 하고 혼합되기도 하지만 "무한성을 복원시키는 유한성의 형상을 창조"하는 예술적 지식과 "무한성의 (예술적 형상들)에 (철학적 개념이라는) 일관성을 부여함으로써 무한을 구원하고자 하는" 철학적 지식, 그리고 관계적 기능이라는 "지시관계를 얻기 위해 무한을 포기하는" 과학적 지식은 바둑 인문학을 구성하는 삶의 방식이거나 생명의 존재방식, 그리고 푸코가 말하는 "존재의 기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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