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초, 봄기운 가득한 연휴 2박3일! 아름다운 남해바다 여수의 섬들로 떠납니다. 특별히, 한반도 남부지역은 중생대 백악기 공룡왕국이었습니다. 여수의 섬들도 그 왕국의 영토였지요. 5월 섬학교(교장 강제윤. 시인, 섬여행가)는 제47강으로, 5월5(목)∼7일(토), <남해의 섬>연휴특집으로 여수 앞바다의 공룡섬들을 찾아갑니다.
여수시 화정면의 낭도(狼島)와 사도(沙島), 추도(鰍島) 등은 공룡들이 남긴 발자국들로 가득합니다. 사도와 추도는 공룡왕국의 중심 섬이었고 가장 많은 발자국 화석들이 남아있습니다. 특히 사도의 시루섬 거석들은 한국에서는 좀처럼 보기 드문 압도적인 풍경을 연출합니다. 사도와 추도의 돌담들은 섬마을 돌담의 원형을 가장 잘 간직하고 있습니다.
낭도(狼島)에는 무려 100년이나 된 막걸리양조장이 있습니다. <낭도주조장>입니다. 근처 섬 개도(蓋島)의 개도막걸리는 막걸리마니아들 사이에 꽤 유명하지만 낭도막걸리는 외부에 그다지 많이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이번 답사에선 그 백년 양조장의 물을 섞지 않은 막걸리 원주도 맛보게 됩니다.
이번 답사 길에는 더하여 그 무렵 섬에서 잡히는 쭈구미·문어 등 해산물 로컬푸드도 맛보게 됩니다. 동백섬 오동도(梧桐島)의 동백터널 길도 걷습니다. 공룡시대의 유물이 남아있는 여수 밤바다로 초대합니다.
강제윤 교장선생님으로부터 5월 연휴특집, <남해 낭도·사도·추도·오동도에서 2박3일>에 대해서 들어봅니다.
공룡시대가 남기고 간 신기루 같은 섬, 사도
공룡 시대로의 시간여행
오늘 사도 해안은 그대로 자연사박물관이다. 곳곳이 용암의 흔적과 공룡발자국 투성이다.
여수바다 섬들 곳곳에는 공룡발자국 화석들이 선명하게 남아있다. 사도 낭도 등 여수 바다 백악기 지층( 8100만년-6500만년)에서 발견된 공룡 발자국 화석은 무려 3,546점이나 된 다.
그중 사도에서 발견된 공룡발자국 화석은 모두 755점. 공룡들의 멸종 이후 오랜 세월이 흘러 사도는 인간의 땅이 되었다. 면적 0.36㎢, 해안선 길이 6,4km에 불과한 작은 섬 사 도가 한때는 500여의 주민이 살 정도 융성하던 시절도 있었다. 한때의 화려함은 신기루처 럼 사라져버리고 지금은 불과 40여 명이 살아가는 한적한 섬이다.
사도는 주변의 섬들 사이 바다를 에워싸고 있어 호수 안의 섬 같다. 그래서 옛적에는 사호(沙湖)라 했다. 진도의 관매도 앞바다가 조도로 둘러싸여 관매도가 관호라 불렸던 것과 같은 이치로 생긴 이름이다. 사도는 한때 ‘돈섬’이라고 불릴 정도로 부유했다. 어로기술이 주변 어느 섬보다 발달해 고깃배가 많았다. 그 시절에는 커다란 조기잡이 중선배가 여섯 척이나 있었고 작은 거룻배도 30척이나 됐다.
또 상고선을 부리는 주민들도 많았다. 상고선은 바다에서 조업하는 어선들로부터 생선을 사서 항아리에 소금을 넣고 저린 뒤 여수, 마산 등지로 내다 팔아 큰 이익을 얻었다. 사도의 융성은 어업 덕분이었던 것이다. 이때 번 돈으로 사도 주민들은 근처의 큰 섬 낭도에 8천여 평 산비탈을 구입했다. 그 산비탈을 개간해서 밭곡식을 길러 먹었고 땔감을 베어다 땠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사도는 더 이상 어업을 하지 않게 됐다. 고깃배들이 아주 사라져버렸다. 1959년 9월, 추석날 한반도를 강타한 태풍 ‘사라’ 때문이었다. 이때 30여 척의 어선들이 전부 부서져 침몰하고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빼앗겼다. 학교 옆에 있던 오래된 마을 숲도 완전히 사라져버렸다.
이후 많은 주민들이 바다가 무서워 섬을 떠나버렸고 섬은 한적해졌다. 섬에 남은 사람들도 더 이상 어선을 부릴 엄두를 내지 못했다. 트라우마는 섬 전체를 덮쳤다. 오랫동안 섬은
어선 없는 섬이었다. 그렇게 50여 년의 세월이 흘렀다. 섬사람들은 그저 농사를 짓거나 물이 빠지면 갯가에 나가 미역, 톳 같은 해초류를 뜯어다 팔며 생계를 이어갔다.
근래 들어서는 인근의 추도, 낭도 등과 함께 공룡발자국 화석이 발견되면서 관광객이 늘어나 관광업도 생계의 한 방편이 됐다. 지금은 조업을 겸하는 낚시 어선이 몇 척 생겼다. 공룡섬으로 이름이 나면서 이제 사도 입구 선착장에서 육지 사람들을 먼저 반기는 것은 두 개의 거대한 공룡 모형이다.
찾아와 줘서 고맙소
“죽어야제. 부르면 가야제. 한 번씩은 간게로. 아이가, 아이가. 멜세 헛궁리만 하고, 몹쓸 궁리만 하고 사요.”
할머니는 마루에 앉아 멍하니 하늘을 보고 계신다.
“사는 게 힘드요. 자석들 있다 해도 못 가고. 즈그나 살어야제. 우리 집에 엎졌다가 가야제. 아들 서이 여수 사요. 오라 그래 쌓지만 안가요. 여가 펜치요.”
자식들은 모두 도시로 떠나고 노인은 혼자 섬 마을 낡은 집에 남아 생의 마지막 시간을 보낸다.
“큰 동네서 시집 와갖고 이리 사요.”
노인은 열일곱에 큰 섬 낭도에서 사도로 시집와서 지금껏 살았다.
“사는 것이 고생이다우. 영감하고 살다가 영감 가빌고. 갯것이나 뜯어 묵고 그락저락 살았소.”
할아버지는 배타고 고기잡이 다니고 그러다 63세에 가뭇없이 이승을 떠버렸다.
“젊었을 때 부지런히 잡수고, 댕길 때 다 댕기고 그라소. 늙으니까 아무데도 못 가겄소.”
“연세가 어찌 되세요 할머니?”
“겁나게 묵었응게 간다하제. 아이가, 아이가.”
92살, 할머니는 말씀하기도 힘겨운지 한마디 하실 때마다 신음소리를 토해낸다.
“늙어지면 사는 게 인생이 아니고 딱 가부러야 할텐디. 가지도 못하고.”
“한번 가면 못 돌아오실 길을 무얼 그리 서둘러 가려고 하세요?”
“그질(길) 같이 먼 질이 없소마는. 사는 게 어디 사는 거라 말이요. 갈 디도 못 가고. 고맙소. 이 구덕으로 찾아와서.”
사도 골목길을 돌아 보다 우연히 들어선 낡은 집 마당. 할머니는 낯선 길손이 찾아와 말상대라도 해주는 것이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다. 외로우셨던 것이겠지. 고단한 세월의 풍파를 견디고 살아남은 노인의 가장 친한 벗은 외로움뿐이다.
“놀러온 사람들이 그렇게 좋소. 말 한자리도 잘 해주고. 안아주고.”
노인에게는 가끔씩 사도에 놀러온 사람들이 말이라도 붙여주는 것이 가장 큰 낙이다.
“워치케 고마운가. 뭘 좀 부친다고 끌고 가는디 배까지 태워주고. 후제, 여름에 찾아오소 그랬소.”
노인에게 인사를 드리고 돌아서려는데 좀처럼 발길이 떨어지지 않는다. 용돈하시라고 만원 짜리 한 장을 쥐어드리고 돌아나가는 나그네의 등 뒤로 노인의 말씀이 와서 박힌다.
“아이고 고마워요.”
아무 것도 해드린 것 없는데 잠깐의 말상대만으로도 나는 고마운 사람이 되고 말았다. 작은 섬에서는 누구나 존재 자체만으로도 소중한 사람이 된다.
공룡시대의 흔적들
사도 해변은 중생대 공룡의 시대가 남긴 발자국들로 가득하다. 사도는 두 개의 무인도와 연결되어 있다. 사도와 하나로 이어진 중도 해변 얕은 바다에는 해삼과 소라와 게를 잡는 여행객들의 환호성이 이어진다. 공룡의 땅에서 작은 해삼을 잡으며 기뻐하는 이들. 저들은 어째서 공룡들을 뒤쫓을 생각을 않는 걸까. 공룡들을 따라 수천만 년, 수억 년 전의 세계로 시간여행을 떠나볼 생각을 하지 않는 걸까. 게나 해삼, 성게 따위는 신생대의 바닷가 어느 곳에서도 잡아볼 수 있는 것들이 아닌가. 어째서 저 영원처럼 머나먼 중생대의 바다를 헤엄칠 생각을 않는 걸까. 중도 중생대 해안을 지나면 시루섬(증도)이다. 사도와 중도는 다리로 연결되어 있고 중도와 시루섬은 모래톱으로 연결되어 있어 무시로 드나들 수 있다.
시루섬은 초입부터 거대한 바위 무더기들이 공룡처럼 무리지어 웅성거리는 듯하다. 혹시 저 바위들은 공룡들의 화석이 아닐까. 공룡의 혼들이 갇힌 것이 아닐까. 공룡들은 생멸의 과정을 따라 사라져 저 바위로 환생한 것은 아닐까. 멸종의 시대를 맞이한 공룡들은 화급히 몸 바꾸어 바위가 되었으니 비로소 영원을 얻었다. 삶도 없고 죽음도 없는 불생불멸의 경지에 들었으니, 저 공룡바위들은 모두가 그 자체로 하나의 돌부처들이다. 시루섬 뒤편 해안 절벽은 장대하다. 놀라울 정도로 거대한 바위들이 해안을 장식하고 있다.
이 바위들은 시루섬의 얼굴이다. 절벽과 바위와 해안을 따라 놓여진 돌들. 만약 ‘신들의 정원’이 있다면 이곳이 분명하리라. 불사의 존재인 신들이 피었다 시드는 꽃들 따위로 정원을 가꾸었을 리 없지 않겠는가. 신들은 분명 저 견고한 바위들로 정원을 가꾸었으리라. 이 불가사의한 바위정원은 압도적으로 아름답다. 웅장하고 장엄하다. 어찌 경배 드리지 않으리. 신들의 정원 앞에서면 누구나 저절로 고개가 숙어지리라.
거북바위, 얼굴바위, 고래바위, 온갖 이야기와 전설들을 간직한 바위들. 바위들은 말 없는 말씀으로 자신의 내력을 들려준다. 용미암은 마그마가 지각을 뚫고 오르다 급격하게 식은 흔적인데 옛사람들은 저것이 제주 용두암에서 시작된 용의 꼬리라고 믿어왔다. 하지만 바위가 들려주는 이야기는 다르다. 저 장대하고 팽팽한 근육, 살아 꿈틀대는 꼬리. 제주의 용머리야말로 이 펄펄 살아 움직이는 용꼬리의 한낱 머리일 뿐이다. 머리보다 강력한 꼬리의
힘이여!
신생대의 오후, 이제는 신들도 화석이 된 것일까. 오늘 시루섬 해변에는 신들도 공룡도 자취 없고 나그네만 시름없이 앉아있다. 신들의 시대는 끝이 났다. 신들이 떠나며 버리고 간 정원. 신들의 정원이 이제는 사람들이 바다에서 뜯어온 미역을 말리는 건조장이 되었다.
나그네는 무엇보다 술을 좋아하지만 오늘 이 장엄한 바위 아래서는 단 한 잔의 술도 마시지 않으리라. 취한 정신으로 있다 가기에는 너무도 장엄한 풍경이 아닌가. 차고 맑은 정신으로 돌아가리라. 그리하면 섬들은 공룡들은 신들은 마침내 고양된 내 영혼에 경배하리라.
100년 술도가에서 막걸리 익어가는 섬- 낭도
아직도 이어지는 백년 막걸리의 전통
낭도는 초입부터 막걸리 익어가는 냄새로 방문객들을 유혹한다. 낭도 막걸리 섬이다. 전통막걸리를 만드는 낭도주조장 강창훈 대표는 낭도주조장의 역사가 100년이 넘었다고 주장한다. 작은 섬에 100년 역사의 막걸리양조장이 있다는 사실은 한국의 막걸리 역사를 새로 써야 할 만큼 중요한 사건이다. 하지만 강대표의 주장처럼 낭도주조장의 역사가 실제로 100년이 넘었는지는 더 정확히 규명해봐야 할 듯하다.
경기 고양의 배다리막걸리는 1915년, 경북 영양의 영양양조장과 경기 양평의 지평양조장은 1925년에 양조장 면허를 취득했다며 자신들이 한국에서 가장 오래된 막걸리양조장이라 주장하고 있다. 그런데 만약 낭도주조장의 역사가 100년이 넘는 것이 증명된다면 한국의 막걸리 역사는 새로 써져야 하고 낭도주조장은 한국의 막걸리양조장 1호의 영예를 안을 수 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아직 낭도주조장의 역사가 100년이 넘었다는 것을 증명해줄 물적 증거는 발견되지 않고 있다. 낭도 주민들은 강창훈 대표의 할아버지인 고 강봉경씨(생존해 있다면 109세)가 20대 초반부터 막걸리양조장을 시작했다고 증언한다. 강봉경씨가 낭도주조장을 처음 창업한 것인지 그의 선친인 고 강세원씨에게서 양조장을 물려받았는지는 불분명 하다. 만약 강세원씨가 창업했다는 증거가 있으면 낭도주조장은 100년이 넘었을 것이 확실시된다. 하지만 아직은 그 증거가 없다.
그러나 주민들의 증언만으로도 낭도주조장은 90년의 역사다. 근 백년이다. 낭도주조장이 100년이 넘었다는 증가를 찾아진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지만 못 찾아도 90년 역사의 섬
마을 막걸리주조장이란 대단한 유산이다. 나그네가 몇 차례 낭도를 방문하면서 마셔본 낭도막걸리는 약간 싱거운 듯한 느낌이었지만 강대표로부터 직접 얻어 마셔본 막걸리 원액은 그야말로 최상급이었다. 맑으면서도 진했고 달지 않은데도 감칠맛이 컸다.
낭도는 섬이지만 노인 인구가 다수를 점하다보니 어업보다는 농업 종사자가 더 많다. 낭도의 대표적인 농산물은 고구마와 콩이다. 낭도주조장에서 낭도 산 고구마를 원료로 막걸리를 만들면 어떨까. 나그네는 통영의 욕지도에서 고구마막걸리를 마셔본 적이 있는데 당원이나 아스파탐 같은 감미료가 가미되지 않았는데도 고구마막걸리는 부드럽고 달콤하기 이를 데 없었다. 나그네는 강창훈 대표에게 고구마막걸리를 만들어볼 것을 권유했고 강대표는 개발의지를 표했으니 머잖아 낭도 고구마막걸리를 맛볼 수도 있을 듯하다.
가고 싶은 섬, 낭도
머지않아 다리로 내륙과 연결될 예정인 낭도는 전라남도에서 추진 중인 <가고 싶은 섬> 가꾸기 대상 섬으로 선정돼 기대에 부풀어 있다. 낭도선착장, 여산마을 초입,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은 두개의 플래카드다. ‘전남 6기 브랜드 시책, 가고 싶은 섬 가꾸기 확정 경축’. 플래카드를 내건 이들은 재경낭도향우회와 재여낭도향우회원 일동이다. 마침 낭도 <가고 싶은 섬> 추진협의회의 안내방송까지 나온다. 낭도 주민들은 물론 출향 인사들까지 <가고 싶은 섬> 사업에 대한 기대가 얼마나 큰 지 짐작이 가고도 남게 만드는 풍경이다.
전라남도의 <가고 싶은 섬> 가꾸기는 오랫동안 소외되었던 섬들을 가꾸는 사업인데 토목을 배제하고 자연과 문화, 인문자원을 바탕 삼아 섬들을 관광자원으로 만드는 일이다. 그동안 많은 섬 개발은 토목사업 위주로 진행돼 환경 파괴가 심각했다. 게다가 토목 위주 개발은 외부 개발업자들에게만 이익을 안겨줬을 뿐 섬 주민들에게는 별다른 혜택을 주지 못하고 끝나기 다반사였다. <가고 싶은 섬> 가꾸기사업은 이에 대한 반성에서 출발한 것인데 궁극적으로 주민들이 살고 싶은 섬, 청년이 돌아오는 섬을 만드는 일이다. 지금까지 섬 개발 사업 중 가장 바람직한 방향의 사업이지 싶다. 노령화와 섬의 어업경기 침체로 활력을 잃어가던 낭도 또한 <가고 싶은 섬> 가꾸기에 큰 기대를 걸고 있는 것은 그 때문인 듯하다.
낭도는 인근의 사도와 함께 공룡발자국 화석지로 유명하다. 화정면 인근 섬에서 발견된 공룡발자국 화석은 한 가구가 사는 작은 섬 추도에 가장 많은 1,759점이고 낭도가 그 다음으로 많은 962점이다. 낭도 화석들은 청석금 해변에 있는데 물이 가장 많이 빠지는 사리 대라야 볼 수 있다. 순천도호부에 속했던 낭도는 1896년(고종 33년) 돌산군(突山那) 설립 시 옥정면(玉井面)에 속했다가 1914년 여수군(麗水郡)이 설치되면서 화정면 소속이 되어 지금에 이르렀다.
낭도는 면적 5.03㎢, 해안선 길이 19.5km의 작지 않은 섬이다. 조선왕조의 공도정책으로 비워져 있던 낭도에 다시 사람의 거주가 시작된 것은 임진왜란 직후 강릉유씨가 들어와 정착되면서부터라 한다. 2001년 433명이던 낭도의 인구는 2014년 말 기준 298명. 많은 섬들이 그렇듯이 낭도 또한 급속도로 인구가 줄어들고 있다. 이 나라 많은 섬들은 이름의 유래조차 정확히 알 수 없을 정도로 섬에 대한 역사적 기록은 부실하다. 조선왕조가 공도정책으로 섬을 하찮게 대우했던 원인이 크다. 그래서 문자기록으로 섬의 역사를 알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사람이 살았어도 기록이 없으면 역사란 있어도 있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섬의 역사를 미력하나마 엿볼 수 있는 기록물이 있다. 구전으로 이어진 섬의 지명들이 그것이다. 섬의 지명은 섬의 역사를 재구성하는 데 가장 중요한 사료다. 낭도의 지명들 또한 다르지 않다.
모소금은 바위에 바닷물이 고여 소금이 되면 식용으로 이 소금을 채취했던 곳이고, 고막포는 고막(꼬막)이 많이 서식했던 곳이고, 도낙포는 옛날에 낙지가 많이 잡혔던 곳이다. 집뚜개[浦]는 해안 모양이 지붕처럼 생겼다 해서 집뚜개고 강남금이는 강낭콩 재배가 잘 됐던 곳이다. 여산마을 동북쪽의 이서나무끝은 옛날에 이서(자두)나무가 많이 자생했던 곳이라 붙여진 이름이다. 가장굴은 낭도 여산마을의 서북쪽에 있는데 옛날에 주민이 죽었을 때 마을과 가까운 곳에 임시로 장지를 정하고 가묘를 썼다 해서 가장굴이라 했는데 후일 사람이 터를 잡고 살기 시작하고부터는 신촌이란 이름을 얻었다. 답동은 논이 많았던 마을이라 하여 답동이었지만 지금은 모두들 큰 마을로 이주해 사람이 살지 않는다.
마을대동제로 복원되어야 할 당제
낭도의 최고 봉은 상산(280m)이다. 섬의 산치곤 낮지 않은 산이지만 가파르지 않고 완만해 오르기 쉽다. 상산 가는 길의 명물은 5년 된 소나무다. 그늘 아래 앉아 있는 것만으로도 휴식이 되는 나무다. 이 나무 아래 앉아서 바라보는 여수 바다 풍경은 더없이 평화롭다. 실제로도 이 나무는 휴식의 나무로 유명하다, 옛날에 낭도에서 고된 머슴살이를 하던 이들의 사랑방이자 피난처였다 한다. 땔감을 하던 머슴들은 이 소나무 아래 쉬며 고달픔도 잊고 주인 흉도 보며 시름을 달랬다 한다. 상산 가는 길에 마주하는 건너 섬 사도의 풍경 또한 절경이다. 상산 정상에는 봉수대터가 있다. 왜적의 침입을 감시하던 봉수대. 이곳에서 올린 방화불이나 연기 신호는 전라 죄수영이 있던 여주의 종고산까지 전해져 이귑함을 알렸다. 참으로 중요한 군사시설이다.
상산 트레킹을 마치고 내려오는 길. 여산마을 뒤안 당산에는 아직도 당제를 모시는 신당인 당집이 남아있다. 낭도의 마을대동제인 당제는 4년 전까지만 해도 마을에서 주관해 치러졌다. 하지만 이제 당제는 더 이상 마을대동제가 아니다. <가고 싶은 섬> 낭도추진협의회 강창훈 위원장에 따르면 “마을총회에서 교회를 다니는 장로들이 마을 돈으로 당제를 모시는 것을 문제 삼아” 마을행사로서의 당제가 중단됐다고 한다. 낭도에서는 교인들과 비교인들 사이의 갈등이 큰 듯하다. 섬 주민 90% 정도가 교인이라 하니 교회의 영향력이 막강함을 알 수 있다.
마을총회의 당제 중단 결정 이후, 당제의 지속을 원하는 마을 사람들 30여 명이 낭도민속보존회를 결성했으며 지금은 낭도민속보존회 주관으로 당제를 모신다고 한다. 하지만 실제 당제는 민속보존회원뿐 아니라 교회에 다니지만 당제도 소중히 여기는 주민들과 출향인사들도 함께 참가해 치러지고 있다 한다. 섬 내부의 갈등관계에서 비교적 자유로운 출향인사들의 후원이 큰 힘이 된다고 한다.
낭도의 당제는 제관들이 정월 열사흗날 당집에 올라가서 음식을 준비해 당할머니, 당할아버지에게 제사를 올린 뒤 보름날 마을로 내려와 바닷가에서 용왕제를 올리고 막을 내린다. 대부분의 섬과 마을들에서는 당제가 사라진지 오래다. 그런데도 낭도에서 수백 년을 끊이지 않고 당제가 이어져오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그 의미는 크다. 인천의 소래나 연평도의 경우 당제가 사라지고 교회가 풍어제를 풍어 예배로 흡수했지만 근래에는 다시 마을 전체 차원에서 당제가 복원됐다. 문화재인 동시에 관광자원으로 당제를 복원시킨 것이다.
당제는 우리 민족의 민간신앙이이기도 하지만 본질은 마을대동제다. 협소하게 종교적인 시각으로 봐야 할 이유가 없는 소중한 문화재인 것이다. 낭도당제가 다시 마을 전체 차원에서 치러졌으면 싶은 마음이 간절한 것은 그 때문이다.
낭도의 카니발, 가장무도회
카니발은 가장을 하거나 가면을 쓰고 행하는 축제다. 가장과 가면 행렬에는 악령, 잡귀들을 위협해 쫓는 주술적 의미가 담겨있다. 놀랍게도 낭도의 세시풍습에도 이런 카니발이 있었다. 낭도의 카니발은 정월 대보름 달집태우기 때 행해졌다. 일반적인 달집태우기와는 달리 낭도의 달집태우기에는 가장을 한 사람만 참여할 수 있었다. 여성들은 남장을 하고 남성들은 여장을 했다. 전문적인 연희패거리에서 하는 탈춤 같은 가면극이 아니라 전 주민이 참가하는 가장행렬로서 카니발은 이 땅에 극히 희귀한 풍습이다. 지금은 중단됐지만 50년 전까지만 해도 낭도에 실존했던 풍습이라니 흥미로운 일이다. 낭도의 카니발은 이 땅 민속놀이의 한 장을 추가할 수 있는 획기적인 풍습이다.
옛날 낭도의 달집태우기에 참가하는 마을사람들은 모두 성역할을 바꾸고 나왔다. 여자는 남장을 하고 남자는 여장을 하고 참가했다. 여자는 갓을 쓰고 남자는 치마, 저고리를 입고 나와 달집을 태우고 풍악을 울리고 춤을 추며 축제를 즐겼다. 낭도에는 여산, 규포 두 개 의 큰 마을이 있는데 당시에는 여산마을 한 곳에만도 350호 1,000여 명이 살았으니 그 풍경이 장관이었을 것이다.
이 카니발은 낭도 처녀 총각들이 짝을 맺는 연애의 시간이기도 했다. 한마디로 해방구였던 것이다. 평상시 여자라 수줍어하던 처녀들도 이날은 남자가 되어 더 적극적으로 좋아하는 총각에게 구애를 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낭도의 카니발이 다시 재현된다면 얼마나 멋진 행사가 될까. 생각만으로도 설레게 하는 축제가 될 것이다. 섬마을의 카니발!
실상 낭도에는 빼어나 풍광이나 문화유적이라 할 만한 것은 많지 않다. 낭도가 난개발의 바람을 피해갈 수 있었던 이유다. 덕분에 섬은 우리들 고향의 원형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섬의 풍경은 안온하고 자연스러워 더없이 평화로운 느낌을 준다. 하지만 낭도는 지금 연륙교 공사가 한창이다. 3∼4년 후쯤 연륙교가 완공되면 낭도에는 관광객들과 육지의 문물이 물밀듯이 몰려올 것이다. 지나치게 많은 관광객의 유입은 난개발의 욕망을 부채질할 것이다.
주민들도 개발의 유혹에서 벗어나기 쉽지 않지만 더 큰 문제는 낭도의 전망 좋은 땅들의 70% 이상이 외지인 소유라는 점이다. 거대자본을 등에 업은 외지인들은 호텔과 리조트, 펜션, 대형식당 등을 세우려 들 것이다. 이들 시설이 무분별하게 들어서면 낭도의 보물인 자연스런 경관들이 훼손될 것은 불을 보듯 환하다. 밀려드는 차량들을 위한 도로 확장의 요구가 생길 것이고 이 또한 경관 파괴로 이어질 것이다.
공룡발자국 화석이 있는 낭도가 아직은 문화재보호법과 수자원보호구역 설정으로 보호받고 있긴 하지만 이 장치들이 언제 허물어질지 알 수 없다. 이미 외부자본이 수자원보호구역 해제를 위한 로비를 하고 있다는 소문도 들린다. 섬은, 섬개발은 누구를 위한 것일까. 섬에 다리가 들어서는 것이 결코 섬 주민들만을 위한 일이 아님을 낭도에서 또 한 번 느낀다. 전남도가 <가고 싶은 섬> 가꾸기를 하는 일은 참으로 다행스런 일이지만 전남도의 힘만으로는 섬을 지키는 일이 결코 쉽지 않다. 국가 차원의 관심과 정책적 지원이 있어야 섬은 진정한 주민들의 섬으로 거듭날 수 있을 것이다. 낭도, 섬의 마지막 시간들이 애틋하게 흘러간다.
<학습자료>
[오동도] 한국의 대표적인 동백섬, 오동도를 모르는 사람은 드물다. 면적 0.12㎢, 해안선길이 14㎞. 방파제로 여수 본토와 연결되었으니 더 이상 섬이라 할 수 없지만 이름은 섬으로 남았다. 멀리서 보면 섬의 모양이 오동잎처럼 보여서 오동도라 했다고도 하고 옛날에는 오동나무가 유난히 많아 오동도란 이름을 얻었다고도 한다. 현재는 동백나무와 신이대, 참식나무·후박나무·팽나무·쥐똥나무 등 193종의 희귀 수목이 울창한 숲을 이루고 있다. ‘동백섬’ 또는 ‘바다의 꽃섬’ 등의 별칭으로 불리기도 한다. 임진왜란 때는 이순신 장군이 이곳에 최초로 수군 연병장을 만들었고 오동도의 신이대로 화살을 만들기도 했다고도 한다. 1933년에 길이 768m의 서방파제가 준공되어 육지와 연결되었다. 한려해상국립공원 지역이다. 소라바위·병풍바위·지붕바위·코끼리바위·용굴 등 기암절벽이 절경을 이룬다.
섬학교 2016년 5월5(목)∼7일(토), 제47강 <남해 낭도·사도·추도·오동도에서 2박3일> 일정은 다음과 같습니다.
<5월5일(목)>
07:00 서울 출발(6시 50분까지 서울 강남구 압구정동 현대백화점 옆 공영주차장에서 <섬 학교> 버스에 탑승바랍니다. 김밥과 식수가 준비돼 있습니다. 답사 일정은 현지 사정에 따라 일부 조정될 수 있습니다). 제47강 여는 모임
-점심식사(화정면 토박이 국밥집 : 열무냉면, 해물칼국수, 돼지국밥 중 택1)
-백야도항 출항
-사도 도착
-사도 걷기(3km)
사도포구-둘레길-중도다리-중도양면해수욕장-증도 거북바위-얼굴바위-용미암-사도마을
-저녁식사 겸 뒤풀이(추도에서 그 무렵 잡히는 해산물요리 : 쭈꾸미 문어 등)
-자유시간 및 취침(<땅이네민박>과 이장님댁. 다인실)
<5월6일(금)>
06:00 기상. 아침산책
-아침식사(사도 섬밥상)
-사도 출항(여객선 이용)
-낭도 도착
-낭도 걷기(6km)
낭도출장소-삼거리-쉼터(5백년송)-상산정상(283m)-쉼터-삼거리-당산-여산마을-숙소
-점심식사(낭도 <도가식당> 백반과 ‘백년’막걸리 원주)
-낭도 출항
-사도 도착
-자유시간
-추도 탐방(대절선 이용)
-저녁 식사 겸 뒤풀이(추도에서 그 무렵 잡히는 해산물요리 : 쭈꾸미 문어 등)
-휴식 및 자유시간. 취침(<땅이네민박>과 이장님댁. 다인실)
<5월7일(토)>
07:00 기상. 아침산책
-아침식사(사도섬 밥상)
-사도 출항
-백야도항 도착
-동도 동백숲 산책하기
-점심식사(화양식당> 장어탕)
-여수어시장 장보기
-서울 향발. 제47강 마무리모임
준비물은 다음과 같습니다.
걷기 편한 차림(가벼운 등산복/배낭/등산화. 풀숲에선 반드시 긴 바지), 모자, 선글라스, 스틱, 무릎보호대, 식수, 윈드재킷, 우비, 따뜻한 여벌옷, 간식, 자외선차단제, 헤드랜턴(또는 손전등), 세면도구, 세수수건, 멀미약, 필기도구 등(기본상비약은 준비됨) *승선용 신분증을 꼭 지참하세요(지참하지 않으면 승선할 수 없습니다).
▶이번 일정은 현지 사정에 의해 일부 변경될 수 있으며, 기상 악화로 섬 체류가 연장되는 경우 추가비용이 발생할 수 있습니다.
▶섬학교는 생활 속의 인문학 체험공동체인 인문학습원(대표 이근성)이 지원합니다.
섬 여행을 떠나기 전에 강제윤 교장선생님이 쓴 <당신에게, 섬> <섬택리지> <섬을 걷다> <걷고 싶은 우리 섬> <어머니전> 등 섬 답사기를 참고하면 섬 여행의 의미가 더욱 깊어질 것입니다.
강제윤 교장선생님은 섬왕국 전라남도의 <가보고 싶은 섬>가꾸기 자문위원이며 사단법인 섬연구소 소장으로, 섬들의 고유한 문화와 가치를 지키고 보존하는데 힘을 보태고 있습니다. 1988년 계간 <문학과 비평> 겨울호로 등단했습니다. 서남해의 아름다운 섬 보길도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을 보냈습니다. 뭍으로 이주해 살다 성인이 된 뒤 다시 고향 섬으로 돌아가 10여 년을 살았습니다. 보길도 시절에는 하천 정비를 명목으로 보길도의 숲과 하천을 파괴하려는 시도를 막아냈고, 고산 윤선도 유적지를 파괴하고 대형 댐을 건설하려는 토목세력에 맞서 33일간 단식으로 섬을 지켜내기도 했습니다.
2005년 보길도를 떠난 뒤에는 한국의 모든 유인도(500여 개)를 걸어서 순례하겠다는 서원을 세우고 8년째 섬들을 걷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400여 개의 섬을 걸었고 여전히 섬을 걷고 있습니다. 프레시안에 <섬을 걷다> <통영은 맛있다>, 한겨레에 <섬에서 만나다>를 연재했습니다. <당신에게, 섬> <섬택리지> <걷고 싶은 우리 섬> <통영은 맛있다> <어머니전> <섬을 걷다> <그 별이 나에게 길을 물었다> <보길도에서 온 편지> <숨어사는 즐거움> <올레, 사랑을 만나다> <부처가 있어도 부처가 오지 않는 나라> <자발적 가난의 행복> 등의 저서가 있습니다.
교장선생님은 <섬학교를 열며> 다음과 같이 얘기합니다.
우리는 모두 바다로부터 왔습니다. 지구 최초의 생명이 바다에서 잉태됐듯이 우리 또한 어머니의 자궁이라는 바다에서 생명활동을 시작합니다. 생명의 원천인 바다. 바다를 보면 막혔던 숨통이 트이고 평온함이 드는 것은 그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어머니 바다, 그래서 프랑스어 ‘어머니[mère]’에는 ‘바다[mer]’가 들어 있고 한자의 ‘바다[海]’에는 ‘어머니[母]’가 들어있습니다. 원초적 기억이 언어를 통해 우리의 기원을 암시해 줍니다. 어머니의 품처럼 너른 바다. 우리가 섬으로 가고 싶어 하는 것도 실상은 바다에 대한 그리움 때문이 아닐런지요.
바다나 강, 호수 등의 물로 둘러싸인 육지의 일부를 섬이라 합니다. 한국에는 4,400여 개의 섬이 있습니다. 그중 사람이 사는 유인도는 500여 개, 나머지는 무인도입니다. 한국은 ‘섬나라’입니다! 그럼에도 많은 사람들에게 섬은 미지의 세계입니다. 방송 매체 등을 통해 섬들이 소개되고 몇몇 섬들이 피서지나 관광지로 유명세를 타면서 섬을 찾는 사람들이 부쩍 늘었지만 소수에 불과합니다. 여전히 대부분의 섬들은 척박함과 절해고도의 고독과 유배지, 그도 아니면 현실도피적인 낭만의 이미지에서 자유롭지 못합니다. 섬은 여전히 먼 곳으로만 느껴집니다. 수만 리 먼 나라들을 자유롭게 오가면서도 바로 우리 곁의 섬들을 멀게만 느끼는 것은 왜일까요. 단지 물리적 거리 때문이 아닙니다. 심리적 거리감이 더 큰 요인입니다. 그것은 오랜 세월 이어져온 육지 중심의 사고에 기인한 바 큽니다. 불과 이삼십 년 전까지만 해도 육지 사람들은 섬사람들을 ‘섬놈’이라 부르면서 멸시하곤 했습니다.
이러한 생각의 뿌리는 조선왕조의 폐쇄적인 해양정책에 잇닿아 있습니다. 본래 우리의 인식은 육지 중심의 편협한 틀에 갇혀 있지 않았습니다. 옛날 이 땅의 사람들은 바다를 이용해 세계와 소통했습니다. 세계로 향하는 통로로 기능했던 바다가 단절의 바다로 전락한 것은 조선시대에 와서입니다. 고려와는 달리 조선은 명나라의 해금(海禁)정책을 추종해 적극적인 ‘공도(空島)’정책을 폈습니다. 섬과 바다를 포기한 것입니다. 그 이전까지 바다와 섬은 육지보다 더욱 활력 넘치는 삶의 터전인 동시에 문명교류의 중심 공간이었습니다. 하지만 조선시대 수백 년 동안 섬에 사람이 살지 못하는 비정상적인 상황이 계속되면서 바다와 섬은 점차 잊혀지고 버림받은 공간이 됐습니다. 사람의 거주가 시작된 이후에도 섬은 유배지로 이용되면서 고립이 심화됐습니다.
해양왕국이었던 백제나 장보고의 청해진이 바다와 섬을 기반으로 세계와 소통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1976년 거문도의 장촌마을 해변에서는 한(漢)나라 때의 화폐인 오수전이 다량 출토되었습니다. 외딴 섬처럼 보이는 거문도가 실상은 고대부터 국제해상교류의 중간 기착지였다는 증거입니다. 지난 2000년에는 흑산도의 읍동마을에서 신라시대부터 고려시대까지 이어진 국제해양도시의 흔적들이 확인된 바 있습니다. 고려시대 예성강 입구에 있던 벽란도는 개경에 출입하는 외국인들이 통관 절차를 밟던 국제무역항이었습니다. 고대부터 고려시대까지 우리는 바다와 섬을 통해 일본과 중국은 물론 동남아, 인도, 아라비아까지 소통했습니다. 이 땅이 세계를 향해 열려 있을 때 언제나 그 중심에는 바다와 섬들이 있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땅이 좁은 것은 알면서도 우리의 바다가 얼마나 넓은 줄은 잘 모릅니다. 오랫동안 좁은 땅에 갇혀 살면서 몸도 마음도, 시야도 폐쇄적으로 변해버린 까닭입니다. 섬에서는 우리가 얼마나 넓은 바다의 주인공인가를 금방 깨달을 수 있습니다. 섬에서 바라보면 대륙 또한 바다에 둘려 쌓인 큰 섬에 지나지 않습니다. 육지 중심의 사고를 벗어나는 순간 우리는 충분히 크고 드넓습니다. 섬은 한없이 넓은 바다를 향해 무한히 열려 있습니다. 그러므로 섬이야말로 우리가 잃어버린 개방성과 열린 사고를 되찾기 위한 최적의 사유공간입니다. 물론 섬은 숙명적으로 외롭습니다. 하지만 섬사람들에게는 외로움이나 슬픔마저도 흥으로 승화시킬 수 있는 해학과 가락이 있습니다. 섬에서는 슬픔도 가락을 타면 흥이 됩니다.
오랜 세월 섬들은 제각각 고유한 문화와 전통을 이어 왔습니다. 곁에 있는 섬도 같은 섬은 없습니다. 하지만 외래문물의 유입으로 많은 섬들이 원형질을 잃어가고 있습니다. 멀지 않은 시간에 이 나라 많은 섬들이 사라질 것을 예감합니다. 이미 많은 섬들이 육지와 연결되었거나 연결되고 있습니다. 다리가 놓이면 섬은 더 이상 섬이 아닙니다. 어쩌면 우리는 배를 타고 섬으로 가는 마지막 세대가 될지도 모릅니다. 끝내는 소멸해 버릴 섬들, 섬의 풍경들. 더 늦기 전에 섬으로 가야 할 이유입니다.
몇 년째 걷기 열풍이 지속되고 있습니다. ‘움직이는 존재’[動物]인 사람이 걷고자 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래서 걷기에 대한 열망은 일시적 유행이 아니라 본능의 회복운동입니다. 걷기는 길에 대한 갈망에서 비롯된 바 큽니다. 길의 본뜻은 무엇일까요. 한자 ‘길道(도)’자는 辵(착)과 首(수)로 이루어진 회의문자(會意文章)입니다. 그래서 언젠가 신영복 선생님은 "辵(착)은 머리카락 휘날리며 사람이 걸어가는 모양이며 首(수)는 사람의 생각을 의미하니 길(道)이란 곧 사람이 걸어가며 생각하는 것"이라고 풀이한 바 있습니다. 저는 그 뜻을 길이란 통로인 동시에 사유의 길이고, 사유를 통해 자신과 소통하고 세계와 소통하는 길이란 의미로 이해합니다. 그러한 길의 정신을 구현하기에 섬보다 더 좋은 곳은 없을 것입니다.
섬은 어느 곳보다 걷기 좋은 공간입니다. 아직까지 ‘섬길’의 주인은 사람입니다. 많은 걷기 길들이 만들어지고 있지만 섬은 부러 돈 들여 걷기 길을 만들 필요도 없습니다. 대부분의 섬들은 그 자체로 최상의 길이기 때문입니다. 섬에서는 사람이 안심하고 걸으며 사유할 수 있습니다. 섬길을 걷는 일은 분명 이 시대의 정신을 비옥하게 하는 소중한 토양이 될 것입니다. 섬으로 가야 할 또 하나의 이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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