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보의 종언
오후 2시, 일상을 멈추었다. 평소라면 아랍어와 페르시아어를 배웠을 시간이다. 새벽에는 나랏말로 글을 쓴다. 오전에는 남의 나라 말로 책을 읽는다. 오후에는 새 말을 익혀간다. 지난 2월 델리 입성 이래, 단조로운 일과를 반복한다. '인도에서 왜 아랍어와 페르시아어?' 할지도 모르겠다.
도로 간판에도 새겨져 있다. 대영제국에 앞서 무굴제국이 있었다. 무굴은 몽골의 적자였다. 서북에서 남진하여 델리에 터를 잡았다. 몽골화된 이슬람, 혹은 이슬람화된 몽골의 후예였다. 이슬람이 국교의 지위를 누리며 아랍어가 보급되었다. 조정은 페르시아어를 통하여 제국을 경영했다. 산스크리트어와 페르시아어 간의 사상 교류가 활달했다. 천 년의 전성기를 보낸 이슬람문명이 인도에 소개되었고, 힌두 문명의 정수를 담은 고전들이 아랍어와 페르시아어로 번역되었다. 토착 문화와 외래 문화가 대융합되었다.
지금도 인도는 이란과 지척이다. 파키스탄과 아프가니스탄을 사이에 두고 있다. 서인도는 아라비아해를 '지중해' 삼아 중동과 마주본다. 내 아랍어 선생님은 두바이에서 왔고, 페르시아 선생님은 테헤란에서 왔다. 벵골만에서는 동아시아가 가깝지만(Look East), 아리비아해서는 서아시아가 이웃(Look West)이다.
동아시아는 불교로 연결되었고, 서아시아는 이슬람으로 이어졌다. 이 남아시아와 서아시아 간 문명 혼합을 샅샅이 기록한 연구서들은 또 영어와 일본어가 많다. 오전과 오후, 하루를 통하여 반천 년 인도(사)의 유산을 훑어가는 셈이다. 이 땅에서 펼쳐졌던 힌두 문명과 이슬람 문명, 유럽 문명 간 교섭의 파노라마를 추체험한다. 이 '유라시아 르네상스'의 대장관은 콜카타와 델리를 살필 때 다루어볼까 싶다.
이날만은 1:1 수업을 받지 않고 단골 카페에 진을 쳤다. 커피도 짜이도 아니고, 킹피셔 맥주를 주문했다. 40도 불볕더위에 얼음을 넣어 마시는 킹피셔는 언제나 일품이다. 한 모금 목을 축이고, 노트북을 열었다. 유투브에서 라이브로 중계되는 JTBC 개표 방송에 접속했다. 지난 총선 때는 로스앤젤레스에 있었다. 이번에는 델리이다.
4년 사이 기술은 더 진보했다. 실시간으로 연결된다. 시공간의 장벽이 온라인을 통해 사라졌다. 하건만 나라꼴은 더 나빠졌다. 언론사와 여론조사 기관들의 예측은 더 흉흉했다. 180석을 운운했다. 나는 만반으로 취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심란한 마음으로 화면을 응시했다. 한 병을 비우고 두 병째를 시킬 무렵, 출구 조사가 발표되었다. 취기가 싹 가셨다.
설마 과반이 무너질 리야. 계속 주시했다. 인도양의 해가 지고, 달이 떴다. 12시를 지나 새 날이 되었다. 제1당마저 교체되었음을 확인했다. 그제야 인터넷 창을 닫았다. 노트북도 접었다. 마지막 잔을 깨끗하게 비웠다. 속이 시원했다. 후련했다. 昏君(혼군)을 혼쭐냈다. 혼꾸멍내주었다.
'백성은 배를 띄우기도 하지만, 침몰시키기도 한다'고 했던가. 국민들이 '배신의 정치'를 심판했다. 과연 민심은 무섭다. 가히 천심은 무겁다. 가뿐해진 마음으로 숙소로 향했다. 요금을 세 배로 뻥튀기하는 오토릭샤 기사가 전혀 짜증스럽지 않았다. 쏘아보지도, 실랑이도 하지 않았다. 옜다, 흔쾌히 지불했다. 기분을 좀 내었다. 기분 좋게 잠자리에 들었다.
일어나니 이메일과 카톡 메시지가 여럿이다. 한반도와 아대륙은 3시간 반의 시차가 난다. 동방의 아침에서 남방으로 보내온 전갈들이다. '그래도 한국 민주주의는 건강하다, 아직은 살아있다.' 신이 난 모양이다. 잠이 확 달아났다. 속을 차려야겠다고 생각했다. 인도의 민주주의에 앞서 한국의 민주주의부터 잠시 짚고 넘어가야겠다. 쓰던 글을 미루고, 새 글을 쓰기 시작했다. 하루 밤 사이, 걱정의 방향이 바뀌었다.
뉴스가 뉴스를 덮는다. 오늘의 뉴스가 어제의 뉴스를 지운다. 뜻밖의 결과가 망각을 더욱 부추긴다. 선거를 앞두고 야당들은 가관이었다. 막장이었다. 난맥상의 연속이었다. 더한 막장이 못한 막장을 덮었을 뿐이다. 漁父之利(어부지리)였다. 어부지리로 제1당이 교체되었고, 어부지리로 제3당이 약진했다. '묻지 마 투표'였다. 비호남에서는 전국 여당을, 호남에서는 지방 여당을 심판했다. 진검 승부는 없었다. 반대편의 실력은 따지지 않았다. 재차 과거에 대한 회고적 투표였다. 미래에 대한 생산적 논쟁은 없었다. 소 뒤 걸음으로 쥐 잡은 격이었다.
그래서 큰일이다. 과잉 대표되었다. 실력에 어울리지 않는 과분한 의석을 가졌다. 표심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하는 소선구제의 혜택을 이번에는 야당들이 누렸다. 그런데도 딴소리다. 유권자의 현명한, 절묘한 선택이란다. 황금 분할이라며 과대평가한다. 서둘러 교화의 자세를 거두고 대중들의 집합 지성에 머리를 조아린다.
정당도 언론도 직시보다는 포장과 아부에 능하다. 기시감이 인다. 탄핵 바람을 탔던 정당이 있었다. 반짝하고, 금세 졌다. 실력 이상의 역할이 주어지자 지레 주저앉았다. 자질이 안 되고 자격이 부족한 이들에게 자리를 맡기면 사고가 나기 마련이다. 깜냥이 안 되고 재량이 아닌데도 과분하게 오르면 추락만이 기다릴 뿐이다.
야박해지자면 '기울어진 운동장'은 더욱 기울었다. 보수가 천하를 삼분했다. 야당들의 우경화가 우심했다. 강성 보수, 중성 보수, 연성 보수가 3당 체제를 이루었다. 진보 정당은 존재감을 잃었다. 소수의 명망가 집단이 되었다. 그 면면마저 이제는 식상하다. 곧 흡수 소멸될지 모르겠다.
얻은 바도 없지 않다. 어르신들이 20세기의 미망에서 벗어나셨다. 박정희 향수에서 깨어나셨다. 분단 체제에 기생했던 산업화의 기적이 흘러간 옛 노래임을 인정하신 것 같다. 불행한 개인사의 공주에 대한 연민과 동정만으로는 손주들의 장래가 열리지 않음을 수긍하신 것 같다. 그들마저 여왕의 오기와 독선에 학을 뗀 것이다. 해도 해도 너무 했다. 지지를 철회했다. 투표장에 가지 않는 것으로 탄핵에 동참하셨다. 반동과 복고의 세월에 그들이 제동을 걸었다.
그러니 오해는 하지 말자. 오판은 삼가야 한다. 민주화 시대의 적통을 자처하는 정당도 정당 투표에서 세 번째로 밀려났다. 정체를 알 길 없는 오합지졸 정당보다 모자란 성적표를 받았다. 제3당이 보수 표를 흡수해 주었기에, 수도권에서 승리하고 영남에서 선전했을 뿐이다. 나의 自力更生(자력갱생)보다는 남의 自中之亂(자중지란) 덕이었다.
도리어 '민주'도 '진보'도 낡은 느낌이 물씬하다. 근본적인 전환기, 이행기로 진입했다. 산업화+민주화=근대화로 질주했던 '장기 20세기'가 종언을 고하고 있다. 공연한 어깃장, 흰소리만은 아닐 것이다. 일국적 차원이 아니라 유라시아적 지평에서 조망할 필요가 있다. 마침 선거 운동 기간, 흥미로운 칼럼 한 편을 읽었다.
역사의 귀환
<파이낸셜타임스>를 즐겨 읽지는 않는다. 한 달에 한 번 정도 살핀다. 일반 기사들은 거의 보지 않는다. (기자들에게는 죄송한 말이지만) 하루만 지나면 가치가 없어지는 정보화 시대의 산업 폐기물에 가깝다. 인공지능이 주요 기사를 쓰게 될 날이 머지않았다고 여긴다. 주로 칼럼만 살핀다. 글로벌 공론장의 동향을 관찰하기 위해서이다.
그러다 반가운 이름을 접했다. 피터 프랭코판(Peter Frankopan). 실크로드 사를 전공한 역사학자이다. 내 킨들에도 그의 책이 저장되어 있다. 중국 신장을 주유하며 읽었던 기억이 난다. 칼럼의 제목은 더욱 눈에 들었다. 역사의 귀환(The return of history)이다. 패러디임에 분명하다. '역사의 종언'을 비틀었다. 혹은 비꼬았다.
독법이 과감하고 시원하다. 내 취향이다. 나는 이중 부정으로 점철된 글을 싫어한다. 판단 보류를 사려 깊음으로 포장하는 美文(미문)을 내켜하지 않는다. 과학과 객관을 표방하는 논문에도 호의적이지 않다. 장차 인공지능이 대신 쓰는 편이 나을 것이다. 근대적 역사학, 근대적 사회과학도 막간에 이르렀다고 여긴다. 是非(시비)를 가리고 褒貶(포폄)을 주저치 않았던 옛 학문의 미덕이 되살아날 것이다. 자신을 걸고 써야 한다. 자신을 지우고 쓰는 글은 문장(文)이 아니라 데이터(data)이다. 구태여 사람이 쓰지 않아도 된다. 인문은 人과 文의 결합이다.
프랭코판은 25년 전을 회고한다. 1991년이다. 소련이 해체된 해이다. 희망이 넘쳤다고 한다. 소비에트연방에서 15개의 공화국이 독립했다. 동서독은 통일되었고, 동서구는 통합되었다. 변화의 바람은 유럽, 서유라시아만으로 그치지 않았다. 남아프리카에서는 만델라가 대통령이 되었고, 남아메리카에서는 피노체트가 물러났다.
동유라시아도 보조를 맞추었다. 한국에서는 문민 정부가 출범하고, 여야 정권이 교체되었다. 독재와 억압의 시대가 종언을 고하는 듯 했다. 인류의 진보가 막바지에 이르렀다고 했다. 기민한 후쿠야마는 니체를 흉내 냈다. '최후의 인간'을 전망했다. 자유민주주의가 항상적이고 항구적인 상태가 될 것이다. 정치적 변동이 없는 그 (지루한) 세계에서 인류는 격렬한 스포츠와 위험도가 높은 사업 등으로 재미와 의미를 추구할 것이라고 했다. 크게 잘못 짚었다.
프랭코판은 지난 25년을 '(자유)민주주의의 쇠퇴'라고 정리한다. 승리와 도취의 기억은 이미 희미하다. 긍정과 낙관도 사라졌다. 테러와 난민의 세기에 진입했다. 유럽연합의 지속 여부마저 불투명하다.
그는 새 역사의 방향을 실크로드에서 찾는다. 실크로드에 자리한 국가들이 재차 역사의 중추로 복권되고 있음을 목도한다. 새로운=익숙한 미래가 열리고 있다고 한다. 수차례의 밀레니엄, 종교와 철학과 사상과 상품과 동식물과 사람들이 오고갔다. 폭력과 전쟁과 병균도 주고받았다. 그 유라시아적 연결망이 재부상하고 있다는 것이다. 역사의 종언은커녕 역사의 출발로 되돌아가고 있다고 한다.
응당 정치도 달라지고 있다. 이스탄불과 모스크바와 테헤란과 베이징을 주목한다. 종교와 문명이 상이한 옛 제국들에서 노정되고 있는 정치적 유사성에 착목한다. 황제와 차르와 술탄의 기억이 되살아나고 있다. 민주주의보다는 전통적인 제국적 통치(traditions of royal courts)에 근접해가고 있다.
강력한 권위를 가진 지도자(와 지배층)가 중간층의 발흥을 억제한다. 대자본에 식민화된 생활 세계, 시민 사회를 규율한다. 그래서 민주주의 국가들에서는 도저히 흉내 낼 수 없는 권위를 위임받고 행사한다.
왕년의 제국들 사이에 자리한 중앙아시아 국가들도 이런 경향을 따르고 있다. 최근 카자흐스탄, 우즈베키스탄, 아제르바이잔에서도 선거가 있었다. 공히 현역 대통령들이 재선되었다. 지지율이 80%를 오르내린다. 유라시아 도처에서 구미의 모델이 더 이상 환영받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들은 그들의 미래를 그들 자신의 과거 속에서 구한다.
나는 그의 시대 인식에 기본적으로 공감한다. 다만 지난 200년의 '진보'만큼이나 역사의 귀환 또한 순탄치만은 않을 것이다. 과거의 반복과 복제만도 아닐 것이다. 그래서 단어를 고쳤으면 좋겠다. 귀환(Return)만으로는 충분치 않은 진술이다. 20세기의 경험을 삭제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역사에 단절과 비약은 없는 법이다. 누적과 축적이 있을 뿐이다. 사회주의와 자유주의의 득과 실을 두루 겪었다. 그 담금질의 시간을 간과할 수 없겠다. 따라서 재생(Revival)이나 소생(Resurgence), 혹은 중흥(Renaissance)이라는 말이 더 어울린다. 역사가 종언을 고한 것이 아니다. 진보가 종언을 고한 것이다. 역사'들'은 귀환하고 있다. 문명'들'도 회생하고 있다. 국지적 근대가 물러나고, 지구적 근대가 만개한다.
<파이낸셜타임스>는 구미의 주류 신문이다. 주류 가운데서도 주류이다. 그런데도 이런 칼럼이 실린다. 시각은 보수적일지라도 수준은 갖춘다. 방향도 잡는다. 실로 좌/우는 부차적이다. 관건은 깊이와 방향이다. 이 칼럼을 읽은 날, 진보 정당에서 운영하는 팟캐스트를 들었다. 총선 이후 당명을 사민당으로 바꾸잔다. 1990년대 논객을 대표하는 이의 입에서 나온 말이다.
이제서 사민주의? 그 본산인 유럽에서도 퇴화하고 있는 이념이다. 유럽조차 유럽식으로 근대적 정치의 이념형과 멀어지고 있다. 하물며 21세기 천하의 중심이 되고 있는 동아시아에서 20세기의 사민주의를 내세우자고? 시대착오이다. 고루하기 짝이 없다. 魂(혼)이 비정상이다. 魄(백)과 분리되어서이다. 여태 '친밀한 적'에서 헤어나지 못했다. 실소가 터졌다가, 이내 혼자서 진지해져 버렸다.
아직도 유럽의 '지방 방송'을 세계 담론인양 설파하는 유로파들이 적지 않다. 그들이 상징 자본을 누리며 과도한 발언권을 행사한다. 좌와 우, 보수와 진보, 민주 대 독재라는 진부한 구도를 거듭 설파하고 주입한다. 그래서 새 사상과 새 정치의 출현을 가로막았던 것이다. 이번에도 야권 연대에만 집착하고 안달했다.
그들이 협박하고 겁박했던 것과는 달리 야권의 단일 대오 형성이 아니라 보수의 분화를 촉발시킴으로써 정치 개편과 정권 교체의 물꼬를 틀 수 있었다. 이쯤이면 공론장도 물갈이가 시급하다. 올드 미디어는 물론이요, 뉴미디어와 소셜 미디어에도 새 담론이 부재하다. 무엇보다 인식과 사상의 지리 감각부터 혁신하고 쇄신해야 한다.
나로서는 부디 (동)아시아를 연구하는 '신진대장부'들부터 浩然之氣(호연지기)를 발휘해주기를 바랄 뿐이다. 그래야 서쪽으로 기울어진 공론장도 균형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좌우만이 아니라 동서와 고금 간에도 중도를 취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야 선거에 일희일비 하지 않고 백년대계를 세우는, 치국과 평천하에 일조하는 大學(대학)의 본연도 감당할 수 있을 것이다.
문명의 재생
자유(민주)주의의 종언을 앞서 짚은 이가 있다. 세계 체제론의 이매뉴얼 월러스틴이다. 냉전의 종식을 자유주의의 승리라고 하지 않았다. 세계 체제의 위기라고 했다. 사회주의에 이어 자유주의도 종언을 고할 것이라 했다. 석학의 통찰이다.
하지만 사회과학자의 한계도 노정했다. 세계를 중심-반주변-주변이라는 도식으로만 파악했다. 자본주의 세계 체제가 사회주의 세계 체제로 이행하는 또 다른 단선적 진보만을 전망했다. 그래서 글로벌 친목 모임 이상의 의미를 찾기 힘든 세계사회포럼에 과도한 기대를 걸기도 했다. 무엇보다 문명이라는 역사 공동체의 저력을 전혀 고려하지 않았다. 세계 체제론에는 유교 문명, 힌두 문명, 이슬람 문명의 고유함과 독자성이 비집고 들어갈 틈이 전혀 없다. 자본과 국가를 규율할 수 있는 지역적 동학, 고전문명의 유산을 간과한다.
이쪽에 방점을 둔 이는 새뮤얼 헌팅턴이었다. '문명의 충돌'을 예언했다. 9.11이 상징적이다. 그러나 과장이었다. 기독교 문명과 이슬람 문명의 충돌이었다. 이슬람 문명과 중화 문명은 그러하지 않았다. 힌두 문명과 이슬람 문명도 전면전으로 치닫지 않았다. 중화 문명과 힌두 문명은 불화와는 거리가 멀다.
갈수록 더 약여한 현상은 문명 간 길 닦기와 다리 놓기이다. 중화 문명은 철두철미 인문주의이다. 유일신을 믿지 않는다. 인문 정신으로 종교를 포섭한다. 힌두 문명은 넉넉한 다신교이다. 예수도 마호메트도 싯다르타도 공자도 여럿 중 하나로 흡수해버린다. 이들 문명권에서 공히 실크로드가 환기되고 있다. 오래된 길을 복기하고 복구하고 있다.
한국도 미래의 영감을 스스로의 역사에서 구할 때가 되었다. 특히 대당제국기의 신라/발해, 몽골제국기의 고려, 대청제국기의 조선은 유력한 청사진이 되어줄 것이다. 그 세 차례의 '유라시아 시대'에 한반도 국가들이 어떠한 이니셔티브를 취했던가, 혹은 그러하지 못했던가를 곰곰이, 꼼꼼히 따져봄직하다.
고려는 삼국 시대를 정리했다. 조선은 고려 시대를 갈무리했다. 그런데 대한민국은 스스로의 관점과 언어로 조선을 마감하지 못했다. 그래서 민주화 이후 갈피를 잃은 것이다. 100년간 따라하고 따라갔을 뿐, 독자적인 길을 개척하지 못한 것이다. 100년 전 '自强(자강)'을 강조한 이가 백암 박은식이다. 지금이야말로 자강의 적기이다. 자각하고 자강해야 한다. 자업으로 자득해야 한다.
민의 열망은 이미 끓어오르고 있다. 바닥에서 새 기운이 꿈틀거린다. 문제는 그 여망을 받아 안을 엘리트 집단이 부재하다는 점이다. 민심과 천심을 받들어 지상의 길을 개척할 전위 집단이 없다는 점이다. 다른 백 년을 이끌어갈 신진대장부들이 등장하지 않았다. 요사이 정도전이 뜬다고 들었다. 징후적 현상이다.
헌데 그도 평지돌출이 아니었다. 누적과 축적의 소산이었다. 목은(牧隱) 이색을 잊을 수 없겠다. 당대 유라시아의 최첨단이었던 신유학을 이 땅에 보급했다. 그의 문하에서 정도전도 정몽주도 자라났다. 韜光養晦(도양광회), 30년 한 세대를 절치부심했다. 해방 100주년을 준비하며 새 정치에 앞서 새 사상을, 새 정당보다는 새 학당을 세울 때이다.
잠시 우회했다. 샛길에 든 것만은 아닐 것이다. 정당과 학당, 정파와 학파의 차원에서도 인도인민당(BJP)은 흥미로운 사례이다. 정파와 종파가 긴밀하게 결부되어 있다. 정당이 종교 사회 단체(RSS)의 산하 조직이다. 정교 분리가 아니라, 종교의 가르침을 정치를 통해 실현하고자 한다. 성으로 속을 규율하고자 한다. 속을 성으로 정화하려 한다.
힌두교(古)와 민주주의(今)가 공진화한다. 그래서 '改新(개신) 힌두교'라고 할법하다. 인도의 민주주의에서 가장 인상적인 실험 또한 이 대목이 아닐까 싶다. 영국산 민주주의의 표피가 벗겨지고, 진피에서 새살이 돋아나고 있다. 혼과 백의 분단체제를 극복해가고 있다. 다시 본궤도로 진입한다. 구자라트로 가는 기차에 올랐다. 21세기의 인도가 출발한 곳이다. '2002'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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