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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습기살균제 사건, 해피엔딩 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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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습기살균제 사건, 해피엔딩 될 수 있을까? [의료와 사회] 화학물질, 영화 소재가 되다

학창 시절에 소설의 특징 중 하나로 '개연성 있는 허구'라는 것을 배운다. 서사가 핍진성을 가지고 구축될수록 독자는 소설 속 이야기를 자신의 삶에 고스란히 투영시키기 마련이다. 그 속에서 화학반응을 일으키는 공감이 독자의 감동을 배가시킨다. 영화도 소설에서 중요시하는 '서사'라는 것을 주요 매개로 하는 종합 예술이다. 즉 소설을 원작으로 영화를 각색한다는 것은 어느 정도는 이야기가 탄탄하다는 것을 담보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동안 많은 영화들이 소설을 기초로 제작되었다.

그리고 소설보다 조금 더 현실적인 감동을 부여하는 것이 바로 실화를 바탕으로 제작된 영화이다. 아무래도 현실의 이야기는 상상 속 이야기보다 극적일 가능성이 적기 때문에, 영화화될 정도의 '사건'은 어쨌든 허구에 기초를 둔 소설보다는 좀 더 보는 사람의 감정선을 건드릴 수 있다. <에린 브로코비치>(스티븐 소더버그 감독, 줄리아 로버츠 출연, 2000)는 바로 실화에 바탕을 둔 영화이다. 그리고 이 이야기 역시 상상 속 이야기만큼이나 극적인 감동을 선사한다.

▲ 영화 <에린 브로코비치> 포스터.


<에린 브로코비치(Erin Brockovich)>는 1996년 미국 서부의 에너지 기업인 '퍼시픽 가스 앤드 일렉트릭(Pacific Gas and Electric, PG&E)'사의 압축공장에서 부식을 막기 위해 수년간 냉각탑들에 첨가했던 발암물질인 '중크롬(Hexavalent chromium)'이 지하수에 침투되어 공장 주변 힝클리 주민들에게 건강상의 위해를 끼쳐 법정 공방까지 갔었던 실제 사건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유능한 변호사도 아닌, 세 아이의 엄마이자 이혼 여성이자 법률회사의 평범한 기록 조사관인 에린 브로코비치는 거대 기업인 PG&E를 대상으로 단일 사건으로는 당시 최고 액수인 3억3300만 달러의 배상금을 받아내는 데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다.

영화의 주요 배경이 된 PG&E 사건보다 수적으로 더 많은 피해자를 양산한 것이 바로 현재 사회적 이슈가 되고 있는 '옥시레킷밴키저'(이하 옥시)를 위시한 가습기 살균제 사망 사건이다. 1994년 세계 최초로 유공(현 SK 케미컬)에 의해 폴리헥사메틸구아니딘(PHMG)이 가습기 살균제로 개발되고 나서 2011년에 첫 피해 사례가 보고된 이래 1528명의 피해자가 발생했고, 그중 239명이 사망했다(2016년 4월 현재). 충격적인 것은 SK 케미컬은 적어도 2003년에는 PHMG가 흡입 독성이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는 것이다. 다른 가습기 살균제 제조사도 마찬가지였다. 살균제 PHMG에 대한 유독성을 알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어느 기업도 제품 성분표시를 하지 않았다. 오히려 각종 향기를 첨가해 마치 안전한 제품인 것처럼 광고를 하며 소비자들에게 판매했다.

영화에 나오는 PG&E 사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중크롬의 위해성을 알리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중크롬이 몸에 이롭다'는 잘못된 정보가 담긴 안내책자를 마을 주민들에게 나눠주기도 했다. 또한 PG&E 본사는 이미 1966년 힝클리 지역으로 흘러드는 물이 오염되어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기밀을 누설하지 말 것을 지시했다. 물론 이 결정적인 사실을 에린 브로코비치가 밝혀내면서 자산 280억 달러 규모의 대기업을 굴복시킬 수 있었다.

▲ 1966년 PG&E의 내부 문서에는 중크롬의 위해성을 숨기라는 본사의 지시가 담겨있었다. 영화의 한 장면. Ⓒgooggle.com


영화에도 잠깐 언급되지만 미국 현대사에서 최악의 환경 독성 스캔들이었던 '러브 캐널(Love Canal)' 사건1)을 비롯해서 <에린 브로코비치>의 PG&E 사건, 그리고 옥시 가습기 살균제 사건 외에도 반도체 산업을 비롯해 각종 유해물질을 다루는 작업장에서 발생한 크고 작은 사고들은 사실 같은 메커니즘으로 이루어져 있는 샴쌍둥이와 같은 존재다. 기업의 유해물질에 대한 감시를 소홀히 한 무능한 국가, 이윤 추구를 위해 위해성을 인지하고도 묵인한 기업, 그 기업에 복무한 전문가들이 트로이카처럼 엮여있다.

▲ MBC <서프라이즈>에 소개된 '러브 캐널' 사건. Ⓒgoogle.com


1994년부터 2011년까지 17년 동안 의사를 비롯한 환경보건학자, 독성학자, 화학자 등 아무도 가습기 살균제의 독성에 대해 사실을 파악하지 못했다. 물론 기업의 조직적 은폐가 결정적인 요소이긴 하겠지만, 전문가들이 사회에서 하는 역할에 대한 회의감마저 들게 된다. <에린 브로코비치>에서도 암에 걸리고 병이 생겨도 그것은 중크롬과는 무관하고 개인이 운이 없다고 말하는 의사가 있듯이 현실에서도 기업의 돈을 받고 유리한 보고서를 써 준 교수가, 또 다른 청부과학자들이 존재했다. 오히려 비전문가인 에린 브로코비치나 러브 캐널 사건에서의 가정주부 로이스 깁스와 같은 사람 덕분에 진실에 조금 더 다가갈 수 있었다.

▲ "우리 의사는 우리가 마시는 물이 암과 무관하댔어요." Ⓒgoogle.com


물론 <에린 브로코비치>를 완전히 해피엔딩이라고 할 수는 없을 수도 있다. 사건이 발생한 시점부터 '해피 엔딩'이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정확한 기록을 찾을 수는 없었지만 막대한 피해보상 비용을 받아낸 주민들 중 일부는 얼마 못 가 유명을 달리했을 것이다. 또한 많은 수의 주민들은 한 평생을 병마와 싸워야 할 것이다. 이것이 실화를 바탕으로 했지만 결국은 '영화'와 현실의 거리이다. 영화는 프레임 바깥의 인간의 삶과 역사의 궤적을 끝까지 추적하지는 않는다.

그럼에도 우리가 이 영화에서 해피엔딩을 읽어내는 것은, 현실의 조건이 <에린 브로코비치>의 수준에 한참이나 모자라기 때문이다. 지금 옥시 가습기 살균제 사건을 보라. 2011년 처음으로 원인 불명 폐질환의 원인이 가습기 살균제로 확정된 이후 5년이 넘어서야 겨우 대중들이 사건에 대해 인식하게 되었고, 기업이 사과와 배상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는 정도가 되었다. 배상액 자체에도 논란이 있지만 상대적으로 폐섬유화와 인과관계가 낮다고 판단된 사람들에 대한 배상은 논의조차 되고 있지 않은 실정이라 언제 합의가 될지는 더 두고 봐야하는 상황이다.

▲ 실화에 바탕을 둔 영화는 해피 엔딩으로 끝났다. Ⓒgoogle.com

하지만 지금 우리가 만들어 나가는 실화는 아직은 '열린 결말'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해피엔딩일 수도 있고, 그 반대일 수도 있다. 불행 중 다행인 것은 조금은 희망적인 조건들이 마련되었다는 것이다. 여소야대 정국이 만들어지면서 가습기 살균제 청문회에 대해 정치권이 합의를 했다. 여론의 직격탄과 시민사회단체의 주도로 불매운동이 광범위하게 이뤄지면서 옥시의 사과를 받아내고 그들을 배상 논의 테이블로 끌어올 수 있었다. 또한 몇 차례의 협의를 거쳐 배상의 규모나 범위도 커지고 있고 앞으로도 더 커질 것으로 기대된다.

이는 결코 옥시가 도덕적인 책임을 통감해서가 아니다. 물론 몇 년 동안 끊임없이 문제 제기를 해 온 피해자들이 있었고, 또 마치 내 일처럼 분노해서 직간접적으로 싸운 사람들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우리에게 해피엔딩은 현재의 배상 논의가 잘 마무리가 되는 것에도 있겠지만, 무엇보다도 더 이상 비슷한 종류의 피해자가 재발하지 않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러기 위해서는 현재 사건의 책임자와 책임기업을 확실히 처벌하고, 법으로도 기업의 유해물질 취급에 대한 감시망을 좀 더 촘촘하게 구축해야 한다. 그리고 이제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이 또 다른 에린 브로코비치 중의 한 명이 되어 지속적인 관심과 지지를 보인다면 해피엔딩도 전혀 불가능하지만은 않을 것이다.

사족 1 : 첨언하자면 <에린 브로코비치>는 또 다른 주제 의식으로 관람을 할 수 있다. 영화는 에린 브로코비치가 구직 인터뷰를 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의대 진학이 장래희망이었던 에린은 결혼과 첫 아이가 생기면서 꿈을 포기한다. 그리고 육아와 더불어 직장생활을 하는 여성이 가지는 고뇌도 엿볼 수 있다. 일에서 유능해질수록 가정에는 신경 쓰지 못하면서 육아를 담당하는 남자친구, 아이와의 갈등도 생겨난다. 학력을 중시하고 일과 육아를 병행하기 너무나 어려운 우리 현실에서 에린 브로코비치와 같은 사람이 얼마나 생겨날 수 있을까 하는 것도 함께 고민해보기 바란다.


사족 2 : 영화에는 영화의 모델이 된 실제 에린 브로코비치가 식당 웨이트리스로 까메오 출연한다. 짧은 시간이지만 실제 에린 브로코비치와 줄리아 로버츠가 분한 영화 속 에린 브로코비치를 비교해 보시길….
▲ 영화에 실제 출연한 에린 브로코비치. Ⓒgoogle.com
러브 캐널(Love Canal) 사건


미국의 한 화학회사는 1942~1953년 사이에 건설하다 중단한 운하의 웅덩이에 약 2만2000톤의 유독성 화학폐기물과 원자폭탄 개발을 위한 맨해튼 프로젝트에서 발생한 유해성 폐기물을 매립했다. 그 후 진흙과 표토로 그 폐기물을 덮어버리고 이 지역을 나이아가라 교육위원회에 기증했는데, 이 매립지에 초등학교, 운동장, 그리고 949가구에 이르는 주택단지가 세워지게 되었다. 1976년에 주민들은 화학물질 냄새가 나고, 운하에서 놀던 아이들이 침출수에 의해 화상을 입는 일이 생겨 주민들이 시청에 항의를 했다.

그러다 가정주부였던 로이스 깁스(Lois Gibbs)를 중심으로 주민들이 자체적으로 실시한 조사결과, 운하 근처에 거주하는 주민들일수록 출산장애·유산·여러 종류의 암, 그리고 신경·호흡·신장 관련 질환의 발병률이 비정상적으로 높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주민들이 끈질기게 항의한 끝에 주 정부에서도 역학조사를 실시하였고, 그 결과 주민의 주장이 입증되어 1978년에 학교 폐지 및 운하근처 주민의 이주가 결정되었다. 지미 카터 대통령은 이 운하를 연방 재해지역으로 선포하였다.  

▲ '러브 캐널' 만드는 방법. Ⓒ//www.mywisepre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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