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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왜 <부산행>을 보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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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왜 <부산행>을 보는가? [민교협의 정치시평] 죽은 자들이 다스리는 나라
영화 <부산행>은 한국에서 처음으로 제작된 좀비 영화라고 한다. 흥행에 성공하지 못하리란 예상을 비웃듯이 9월1일 현재 1100만 관객이 들었다고 한다. 좀비는 죽었지만 죽지 않은 자들이며, 살아있지만 살아있지 못한 자들이다. 좀비는 그 시대의 인간답지 못한 자들, 인간이지 못하게 만드는 현실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은유이다. 그 이전 구미호나 흡혈귀는 물론이고, 한 때 유행하던 뱀파이어, 늑대 인간을 넘어 이제는 좀비가 우리 시대를 보여주는 대세인 듯하다. 시인 김혜순은 그의 시 '죽은 줄도 모르고'에서 이렇게 노래한다.

죽은 줄도 모르고 그는
황급히 일어난다.

텅빈 가슴 위에
점잖게 넥타이를 매고
메마른 머리칼에
듯하게 기름을 바르고
구더기들이 기어 나오는 내장 속에
우유를 쏟아 붓고
죽은 발가죽 위에
소가죽 구두를 씌우고
묘비들이 즐비한 거리를
바람처럼 내달린다.
(…)
죽은 줄도 모르고 그는
다시 죽음에 들면서
내일 묘비에 새길 근사한
한마디 쩝쩝거리며
관 뚜껑을 스스로 끌어올린다.

어쩌면 이 시대를 사는 우리는 죽은 줄도 모르고 허덕이는 좀비인지도 모른다. 죽었지만 죽지 못하는 자들이 원귀가 되어 세상을 떠돌 듯이 살아있으되 살아있지 못한 자들이 이 세상에 가득한 것은 아닐까. 살아있지 못하는 자들은 인간답지 못한 인간이며 자신이 이미 죽은 것을 알지 못하는 자들이다. 그들은 분열된 삶을 산다. 인간다움과 희망, 생명과 사랑을 원하지만 현실에서는 죽음과 같은 것들을 찾아 헤맨다. 그래서 그 죽음과 같은 것을 넘어서려는 본능에 산 자들의 생명을 원한다. 그것도 결코 채워질 수 없을 정도로 끝없이…. 좀비 영화는 무엇보다 지저분하고 꺼림칙하다 못해, 분하고 슬프고 허망하다. 좀비를 볼 때 나는 그 추악함과 비열함에 몸서리가 처지다가도 그 분열증에 너무도 가슴이 아파진다.

좀비 영화를 보면 도대체 인간이란 게 무엇인지 묻지 않을 수가 없다. 아니 인간은 누구인가? 철학적 인간학에서는 인간의 생물학적 사회적 특성을 넘어 인간의 인간다움을, 지성적 반성 능력과 함께 인간과 보편적 생명에 대한 공감에서 찾는다. 인간은 자신의 삶을 돌아보면서 죽음을 앞당겨 성찰하는 존재이다. 그의 지성적 능력은 자기 존재를 반성적으로 되돌아보게 한다. 그와 함께 그는 다른 사람들과 더불어 사는 존재이며, 또한 다른 생명과의 생태적 연관성을 감지하면서 살아가는 존재이다. 또한 삶의 목적 연관성을 설정하고 그를 향해 매진하는 존재이기도 하다. 그런데 과연 우리는 그런 삶을 살고 있는 것일까. 그렇지 못하다면 우리는 살아있으되 살아있지 못한 것이다. 그렇게 죽어있는 자신의 존재를 알지 못하는 존재, 죽었지만 죽지 못하는 자들이 지금의 우리가 아닐까.

▲ 영화 <부산행>. ⓒ레드피터

지금 이 나라의 현실을 돌아보면 정치와 경제, 언론과 법이 죽었음을 시인하지 않을 수가 없다. 그뿐일까, 학문과 예술이, 일상의 삶이 무너진 터전 위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삶의 벼랑으로 내몰리지만, 이 나라를 지배한다는 자들은 죽음과도 같은 행태를 반복하고 있지 않은가. 그 아래에서 죽지 못해 사는 우리들은 이 생명과 삶을 그 죽음에 바치고 있지는 않은가. 이런 이야기가 과장되었다고 생각할테지만 어차피 현실에서 좀비는 없고, 지금 우리는 먹고 마시고, 또 그렇게 흥청거리며 살고 있지 않은가. 그러니 이런 비유야 어차피 비유로 받아들이고 가볍게 던져버려도 좋을지 모른다.

그런데 돌아보면 참 죽음과도 같은 삶을 사는 것이 우리가 아닌가. 이 나라를 다스린다고 말하는 그들은 정말이지 좀비처럼 말기적 행태를 반복하고 있다. 스스로 죽은지도 모르고 일어나 "구더기가 기어 나오는 내장 속에" 그 수많은 풍요와 욕망의 우유를 게걸스럽게 쏟아 붓고 있다. 그러면서 죽은 줄도 모르고 "내일 묘비에 새길" 그 권력에 탐닉하고 있다. 그렇게 죽은 자들을 보는 우리도 그 죽은 자들의 빛나는 관을 향해 매진한다. 우리도 이제 죽은 자가 되려 한다. 좀비가 사라지는 순간은 아침의 시간이며, 해가 비치는 시간이며, 우리가 그 빛을 받아들이는 순간이다. 죽음을 넘어 삶으로 향하는 순간, 죽은 줄도 모르는 자들을 넘어서는 순간은 바로 이때가 아닌가. 죽은 자들이 다스리는 나라를 넘어서는 것은 산 자들이 빛과 아침을 맞이할 때만이 가능하다.

문화인류학에 의하면 인류는 약 15만 년 전 쯤 출현해서 도시 문명과 국가를 건설한 것이 대략 1만~1만2000년 전 쯤이라고 한다. 그 뒤 기원적 6~7세기에 전 세계에서 공통적으로 자신을 반성하는 지성적 작업이 체계화되면서 이른바 사유하는 학문이 등장한다. 그것이 철학이든, 또는 그 어떤 다른 이름이든 인류는 공통의 길을 걸었다. 인간이 인간일 수 있음과 인간이 이룩한 현대 문명의 모든 것이 가능했던 이유를 알고 그리로 돌아설 수 있을 때 우리는 그를 토대로 해서 우리가 나아가게 할 참다운 미래를 조명하고 만들어갈 수 있을 것이다. 인류는 물질적 현재를 넘어서고 그를 통합하는 형이상학적 상상력과 함께 다른 인간을 포함한 생명과 함께 하는 감정과 지성, 행동 때문에 인간이 되었으며, 또 그렇게 현대 문명을 만들 수 있었다. 또한 그렇게 할 수 있을 때만이 인간은 다른 생명과 함께 하는 우리의 미래를 조망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 못할 때 우리는 살아있되 살아있지 못한 것이며, 죽었으되 그 죽음을 알지 못하는 자일 뿐이다. 좀비와 같은 자들을 철학에서는 반인간(homo ferens)이라 부른다. 대략적 인간이거나 인간 아닌 인간이거나, 뭐 그런 종류를 말한다. 인간다움을 알지 못하고 인간답게 살지 못할 때 우리는 흡혈귀나 늑대 인간이거나 요괴 인간과 같은 좀비가 된다. 대략 인간이 아니라 인간다운 인간이 되는 것은 그를 향한 의지와 결단에 달려있다. 인간이 되기 위한 빛을 보지 못하고 그 빛을 향해 나아가지 못하면 우리는 인간이 되지 못한다. 죽은 자들이 다스리는 나라를 벗어나야 우리는 인간이 된다. 그 빛은 무엇이며, 또 언제 그를 벗어나는 빛이 비출까. 그 새벽을 우리는 어떻게 열어갈 수 있을까. 그 길은 전적으로 너와 나에게 달려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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