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더위가 언제 끝날까 싶더니 그래도 가을이 왔다. 서늘한 바람이 열기에 지친 우리 몸과 마음을 식혀주는 계절, 그런 중에 자연이 익어가고 사람도 무르익는 계절이 돌아왔다. 한 마디로 '성숙'의 계절이다. 가을에는 독서가 제격이라는 상투어 역시 이 성숙을 마음에 잇대어 떠올린 것이리라.
한데 우연찮게도 이 무렵 내가 푹 빠져 읽은 책 역시 성숙에 관한 이야기다. 한 나라 국민의 다수를 이루는 일하는 사람들이 세대를 이어 고통과 번민, 성취와 시행착오를 거듭하며 길을 찾아가는 이야기, '노동 계급'이라 불리는 사람들이 무르익는 이야기다. 영국 역사학자 셀리나 토드의 <민중 : 영국 노동 계급의 사회사 1910-2010>(서영표 옮김, 클 펴냄)이다.
이 책은 제1차 세계 대전 직전인 1910년부터 최근까지 한 세기 동안 영국 노동 계급의 역사를 다룬다. 영국 사학계에는 이미 이런 역사 서술의 모범이 있다. 에드워드 P. 톰슨의 <영국 노동 계급의 형성>(나종일 외 옮김, 창비 펴냄, 2000년)이다. 이 책은 산업 혁명 초입의 노동 계급을 당대인의 육성을 바탕으로 '아래로부터' 접근했다. 노동 대중이 삶의 존엄성을 지키려고 고투하면서 노동 계급이라는 새로운 전통을 스스로 '형성(make)'한 과정을 감동적으로 그려냈다.
토드의 <민중>은 <영국 노동 계급의 형성> 속 주인공들의 한 세기 뒤 후손들 이야기다. 양차 대전을 겪고 복지 국가를 만들었다가 다시 그 해체 과정을 겪은 이들의 역사다. 즉, 톰슨의 접근법으로, 톰슨이 다룬 역사의 먼 후속편을 기술한다.
그런데 이게 그렇게 재미있을 수가 없다. 책장을 넘길 때마다 살아 있는 사람들이 스쳐 지나간다. 마치 잘 만들어진 다큐멘터리를 보는 듯하다. 영화 <서프러제트>의 어느 장면에 잠깐 비쳤을 것 같은 100년 전 어느 중산층 가정의 하녀, 제2차 세계 대전 중에 폭격을 피해 낯선 시골에 소개된 노동자 가정의 어린 아이, 동향의 같은 또래가 '비틀즈'라는 이름으로 대성공을 거뒀다는 소식에 뿌듯해하는 1960년대 리버풀의 젊은이가 책장에서 튀어나와 말을 걸고 저마다 속사정을 털어놓는다.
그래서 <민중>을 읽다보면 이 책이 남의 나라 역사서인 것도 잊고 그저 사람 사는 이야기들에 푹 빠지게 된다. '영국 노동 계급의 사회사'라는 딱딱한 부제에 겁먹지 말자. 웬만한 소설도 이보다 흥미진진할 수는 없다.
어떤 교과서에도 들어맞지 않는 현실 노동 계급
<민중>은 3부로 구성돼 있다. 1부는 '가내 하인, 1910-1939'이고, 2부는 '민중, 1939-1968'이며, 3부는 '빼앗긴 사람들, 1966-2010'이다. 각 부의 제목이 그 시절 노동 계급의 처지를 잘 보여준다.
제2차 세계 대전 전에는 고용 계약의 당사자로도 인정받지 못해 '하인' 신분을 받아들여야 했다면, 전쟁이 끝나고 나서는 복지 국가 수립과 함께 똑같은 그 사람들이 '민중'의 다수이자 전형으로 부상했다. 이것으로 이야기가 끝이었으면 좋으련만, '빼앗긴 사람들'이라는 제목의 단락이 뒤따른다. 이 대목에서 주인공은 신자유주의의 득세 탓에 노동권과 복지 제도를 박탈당한 처지로 '되돌아온다'.
이 여정을 훑으며 드는 첫 번째 인상은 일단 "노동 계급은 존재한다"는 것이다. 19세기의 반항적 사상가들이 이 집단의 존재와 역사적 의의를 강조한 이후 이를 반박하거나 재확인하는 일이 사회과학계의 일상사가 됐다. <민중>의 몇몇 대목에도 가령 복지 사회와 대중문화의 등장으로 노동 계급은 사라진 것 아니냐는 식의 논의들이 소개된다. <민중>은 그때마다 번번이 노동 계급이 실재함을 확인했을 뿐이라고 적는다. 이 책의 마지막 장을 향해갈수록 읽는 이도 저자의 이런 평가에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그렇다고 노동 계급을 강조하는 주장들이 다 들어맞은 것도 아니다. 과거 좌파의 이러저런 분파들이 제시했던 노동 계급관 말이다. <민중>의 주인공들은 항상 이런 시나리오의 단순한 전개를 넘어서는 선택과 행동을 거듭하며 자신들의 삶을 짜나갔다. 그래서 그 결과물은 늘 어떤 기존 시나리오보다도 복잡하고 역동적인 것이 되었다.
우선 혁명적 사회주의가 꿈꾼 영웅의 형상은 좀처럼 등장하지 않았다. 현실의 노동 계급은 자본주의에 위기가 닥치면 진실을 깨닫고 떨쳐 일어나 투쟁 대열에 합류하는 사람들은 아니었다. 물론 <민중>이 적극 재조명하는 것처럼 비록 소수이기는 해도 앞장서서 싸우는 이들은 분명히 있었다. 1930년대 대공황 와중에 실업 문제 해결을 외치며 런던으로 기아 행진을 벌인 이들이 그런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이런 목소리가 노동 계급 전체의 의지로 모이기까지는 혁명적 사회주의자들이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장구한 시간과 더 복잡한 우여곡절이 필요했다. 너무 어려워서 영국 노동 계급의 오랜 역사에서도 한 번 있을까 말까 했다. 그리고 그 가장 비슷한 사례조차 혁명가들이 마음에 그렸던 광경과는 판이하게 달랐다. 1926년 총파업 같은 사건이 웨스트민스터 습격으로 비화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영국 노동 계급에게 가장 '혁명'에 가까웠던 사건은 전쟁의 얼굴로 나타났다. 파시즘에 맞선 총력전을 통해 노동자들은 국가의 경제 개입이 작동한다는 사실을 확인했고, 그 과정에서 자신들이 이전과는 전혀 다른 대우를 받을 수 있음을 감지했으며, 그 결과가 1930년대 실업 대란과는 정반대되는 사회 현실일 수 있다는 점에 벅찬 기대를 품었다. 그래서 전쟁이 채 끝나기도 전에 치른 총선에서 '전쟁 영웅' 처칠을 내버리고 단호히 노동당을 선택했다. 이는 의례적인 선거 결과가 아니었다. 사회 세력 관계의 극적인 변화를 보여주는 결과였다. 이와 함께 복지 국가 건설이 시작됐다.
혁명의 익숙한 이미지와는 별로 닮은 구석이 없었던 이 '혁명'의 요체는 자본주의의 일상에서 익숙했던 경쟁과 착취와는 정반대되는 원리를 집단적으로 경험했다는 점 그리고 이 원리가 사회 전체에서, 즉 노동 계급 자신뿐만 아니라 중간층과 지배 계급에게까지 새로운 규범으로 인정받았다는 점이었다. 그 원리란 협력과 동지애였다. 적의 포화 속에 부족한 물자로 버티며 미래의 승리를 다져가는 데 이보다 우월한 원리란 있을 수 없었다. '시장'은 말도 꺼내지 못할 처지였다. 여기에서부터 이후 30년 정도는 버틸 복지 국가의 싹이 움텄다.
무안해지는 것은 혁명가들만은 아니다. 개혁적 사회주의자들도 마찬가지다. 개혁주의가 제시한 비전과는 달리 현실은 노동당 의석이 늘면 그에 비례해서 개혁의 성과가 쌓이는 식으로 전개되지는 않았다. 사회 세력 관계가 크게 흔들리기 전까지는 실업 수당에 따라붙는 자산 조사 요건을 폐지하는 일마저 벅찼다. 반면 중요한 개혁들은 차곡차곡 쌓여나간 게 아니라 한 차례 밀물이 밀려들어올 때 한꺼번에 실현됐다. 게다가 신자유주의 시기에 겪은 것처럼 한 세대의 성취가 무참히 뒤집어질 수도 있었다.
무엇보다 현실의 노동 계급은 개혁주의자들이 상상한 것처럼 정당과 노동조합 엘리트의 뒤를 따르며 약간의 성과를 따낼 때마다 흡족해하는 다루기 쉬운 사람들은 아니었다. 한 걸음을 내딛고 나면 그들의 눈길은 본능적으로 다음 걸음을 향했다. 생계 문제에 숨통이 트이면 그들의 관심은 이내 보다 높은 수준의 자유를 향했다.
완전 고용이 실현돼 실업이 두렵지 않게 되면 이제는 작업 현장에서 노동자 자치를 추구했고, 공공 주택에 입주하고 나면 집주인 대신 관료가 '갑질'하는 걸 두고 보지 못해 주민 조직을 만들었다. 개혁주의자들은 이런 힘을 모아 사회 개혁을 앞으로 더 밀어붙이는 데 실패했다. 그리고 이렇게 한 걸음 더 내딛으려는 시도가 실패하는 순간, 지배 계급은 곧바로 이제까지의 개혁 성과조차 역전시키려는 공세에 돌입했다.
<민중>은 기존 좌파 이론들을 검증하려는 책은 아니다. 하지만 위와 같은 대조 작업을 통해 확인할 수 있는 중요한 진실이 있다. 그간 대부분의 좌파 이론은 자본주의의 '성장'에 대한 분석과 비판으로부터 노동 계급의 '성숙'의 전망 또한 추론했다. 마치 전자를 뒤집으면 후자의 윤곽이 드러날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성장과 성숙은 전혀 다른 종류의 이야기다. 성숙이 성장의 뒤를 따르는 것도 아니며 성장의 반전이 성숙을 뜻하는 것도 아니다. 성숙의 고유한 시간이 있다. <민중>은 노동 계급 자신의 목소리를 통해 이 진실을 설득력 있게 드러낸다.
성장과 성숙은 전혀 다른 종류의 이야기다
<민중>을 읽으며 대조 작업을 벌일 만한 또 다른 대상은 한국 노동 계급의 현재 상황이다. 세월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몇 세대 전 영국 노동자들의 육성에서 지금 이곳의 외침들을 떠올리지 않기 힘들다. 가내 하인과 공장-사무실 노동자의 경계선에서 왔다 갔다 한 20세기 초 영국 여성들은 비정규직 노동 시장에 갇힌 요즘 한국 여성들의 모습으로 환생한다. 실업 수당 지급의 전제 조건인 자산 조사 때문에 가족이 생이별하는 장면은 기초생활보장제도의 부양 의무자 조건이 낳은 '송파 세 모녀' 사건과 겹쳐진다.
저자가 영국 노동 계급의 생활에서 일어난 변화를 추적하면서 가장 중요하게 바라본 두 문제 역시 사람 살림살이가 다 엇비슷함을 실감하게 한다. 그것은 교육과 주거 문제다. 전후 영국 복지 국가의 정책 중 노동 계급의 일상을 가장 크게 바꾼 것은 국민보건서비스(NHS)와 함께 지방자치단체를 통한 공공 주택 대량 보급이었다. 또한 노동 계급 자녀들이 초등학교 수준에서 학업을 마치는 게 아니라 대거 중등학교에 진학할 수 있도록 만든 것 역시 중대한 변화였다.
물론 이와 동시에 교육과 주거를 둘러싼 두 나라의 역사적 맥락과 가치 체계가 상당히 다르다는 것도 확인할 수 있다. 영국 노동자들이 오래 된 불량 주택에서 벗어나 현대식 주거 공간을 경험하게 된 것은 지방자치단체를 통해서였다. 반면 한국에서는 이 역할을 대규모 아파트 단지를 건설한 민간 건설 업체가 맡았다. 대처 정부가 지방자치단체 소유 주택을 매각한 뒤에 영국과 한국이 별 차이가 없게 됐다고는 해도 이런 서로 다른 역사적 경험은 지금도 짙은 그림자를 드리운다.
교육 문제도 그렇다. 한국의 노동 대중은 양반처럼 교육받아 양반 사이에 낀다는 오랜 전통에 따라 경제 능력을 뛰어넘어 자녀들을 고등 교육에 진출시켜왔다. 그래서 교육 문제의 중심에는 항상 대학을 둘러싼 엄청난 경쟁이 있다. 반면 산업화 과정에서 중간층 이상의 문화와 완전히 단절됐던 영국 노동 계급은 복지 개혁 이후에야 중등 학교 이상의 교육 과정에 적극 참여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영국에서는 입시 경쟁보다는 대학을 포함한 교육 전반의 무상화가 주된 관심사다.
영국과 한국 노동 대중의 생활사가 이렇게 엇비슷하면서도 사뭇 다르기 때문에 두 나라 대중의 성숙의 이야기도 달라질 수밖에 없다. 이것은 누구는 앞서고 누구는 뒤쳐졌다는 따위의 문제가 아니다. 압축이나 추월을 말할 문제가 아니다. 자본주의의 성장이라면 그렇게 이야기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자본주의를 교정하고 더 나아가서는 변형, 대체할 수도 있을 주체의 성숙과 관련해서는 그럴 수 없다.
달리 말하면, 성장은 메뉴얼화할 수 있을지 몰라도 성숙은 그럴 수 없다. 그저 서로 다른 이야기들이 있을 뿐이다. 매뉴얼의 세계에서는 항상 앞서간 자가 주인공이지만, 이야기의 세계에서는 모두 다 저마다의 이야기 속에서 주인공이다.
<민중>은 영국 노동 계급의 이야기에서 그들이 가장 주인공답던 순간이 어느 때였는지 강렬히 증언한다. 가진 자들은 결코 보여줄 수 없었던 협력과 동지애를 사회 전체에 퍼뜨렸던 때가 바로 그 순간이었다. 노동 계급의 '윤리'라 할 만한 것이 눈에 뚜렷이 들어오던 때가 그 순간이었다.
우리는 어떻게 우리의 이야기에서 그런 순간을 만들어낼 것인가? 한국 노동 계급은 과연 그런 희귀한 순간을 열어낼 수 있을 것인가? 답은 모르겠지만, <민중>의 '후기'에 저자가 남긴 마지막 메시지가 위안과 격려가 될 수는 있겠다.
"20세기의 진정한 성취는 그들 자신의 삶에 대한 더 많은 결정권을 추구했던 보통 사람들에 의해서 이루어진 것이다. (…) 통상적으로 그들은 성공에 대한 큰 희망을 갖지 않은 채 무언가를 변화시키는 일에 착수했지만 종종 변화의 속도는 용기를 북돋아줄 정도로 급격했다. (…) 과거가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것이 있다면 바로 이것이다. 민중이 더 나은 미래를 원한다면, 우리가 그것을 우리의 힘으로 만들어낼 수 있고 만들어내야만 한다." (<민중>, 546~54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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