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대우조선해양에 혈세 4조2000억 원을 지원하는 주체가 '서별관 회의'라고 홍기택 전 산업은행장이 폭로했다. 더 충격적인 것은 이 중요한 회의에 회의록을 남기지 않았다는 점이다. 회의록이 없으니 누가 찬반을 했는지 기록이 없고, 결국 누구도 책임지지 않고 4조2000억 원을 집행했다. 혈세를 이렇게 무책임하게 집행해도 되는지 놀랍다. 이렇듯 많은 공직자는 민감한 사안에 대해 책임을 회피할 목적으로 체계적인 기록 생산 및 보존을 싫어한다.
반면, 없어져야 할 기록은 끝까지 살아남아 시민들을 괴롭힌다. 대표적으로도 빚 관련 기록이 그렇다. 그중에서도 '소멸 시효 완성 채권(죽은 채권)'은 빚을 갚을 의무가 지난 채권이지만, 여러 편법을 사용해 대부 업체는 빚 독촉에 나선다.
예를 들어, 대부 업체들은 죽은 채권을 소액으로 매입한 뒤 법원에 지급 명령을 신청하거나 채무자로부터 '몇 만원이라도 갚으면 원금의 50%를 감면하겠다'는 식으로 채무자를 속여 채권을 부활시키고 있다. 지급 명령 신청에 대해 2주 이내에 이의 신청을 하지 않거나, 소액이라도 갚으면 채권이 부활한다는 것을 악용한 것이다. 불행히도 채무자는 이런 사실을 잘 알지 못한다.
죽은 채권이 부활하는 순간, 이들은 악마로 변신해 수많은 사람을 고통에 빠뜨린다. 전 남편이 15년 전 빌린 채권이 부활해 원금의 4배를 요구받은 사연. 3살·7살 남매가 아버지가 사망한 후, 4500만 원의 빚이 상속된 사연. 자녀들 학원비로 빚을 져 아이들 앞에서 협박받은 사연. 지옥에서나 일어날 것 같은 일들이 대한민국 곳곳에서 일어난다. 사연을 듣다 보면, '헬조선'이 무엇인지 실감하게 된다.
이번 국정 감사에서 이 괴물 같은 죽은 채권을 소각시키는데 앞장선 의원이 있다. 더불어민주당 제윤경 의원(초선, 비례대표)이다. 제윤경 의원은 국회의원이 되기 전에, ''을 창립하고 죽은 채권 문제를 파고든 전문가다.
지난 13일 제윤경 의원은 금융감독원 대상 국정 감사에서 SBI저축은행 임진구 사장을 상대로 한 증인 신문에서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한다.
제윤경 의원 : SBI저축은행이 보유하고 있는 2조 원 상당의 죽은 채권을 어떻게 정리하려고 하느냐?
임진구 사장 : 사회 단체 등 관련 기관에 양도할 계획을 세우고 적극 (소각) 추진하겠다.
예상 밖의 대답이었다. 언론에 많이 보도되지 않았지만, 2016년 국정 감사 최고의 보석 같은 장면이었다. 이 말 한마디에 2조 원이 넘는 죽은 채권이 소각되는 길이 열린 것이다. 이후 소각 계획을 발표한 자료를 보면, SBI저축은행이 보유하고 있는 죽은 채권은 2조750억 원이다. 이중 개인 대상 채권은 9698억 원으로 소각할 경우, 총 11만 9000여 명이 혜택을 받는다. 국회의원 질문 하나에 약 12만여 명이 혜택을 받게 된 것이다. 이는 전체 죽은 채권 중 개인 채권의 30%에 해당하는 엄청난 양이다.
이후 해당 기관들의 채권 소각은 탄력을 받고 있다. 제윤경 의원실에 따르면 '러시앤캐시'는 460억~470억 원을 시민 단체에 무상으로 양도하는 방식으로 탕감하기로 했고, '㈜산와'대부도 현재 자회사인 '㈜와이케이'대부에서 보유 중인 약 1만 2000 건 총 167억 원을 소각하기로 했다. 이 두 기관은 추가로 개인 신용 대출 중 금리 35% 이상을 적용받는 고객 중 연체 없는 고객에 대하여 '16년 10월 말까지 27.9%로 인하'하기로 제윤경 의원과 합의한다. 빚더미에서 힘들어하던 채무자들에게 단비와 같은 소식이다.
여당과 국회의장 갈등, 증인들의 불출석과 무성의한 답변, 질문 내용을 이해하지 못한 황당한 질의 등 별다른 성과 없이 종료될 뻔했던 2016년 국정 감사. 하지만 초선 의원의 집요한 활동으로 죽은 채권 기록을 없애는 성과를 얻게 되었다. 이런 기록이라면 많이 사라질수록 빚으로 고통 받는 사람에게 좋을 것이다.
2016년은 유독 공직자들의 무책임한 행태가 많은 논란이 되고 있다. 경찰청장은 백남기 어르신을 죽음에 이르게 한 살수 관련 보고서를 폐기했다고 답변했다. 폐기는 공공기록물법을 위반이지만, 문제가 없다는 태도를 보였다. 이후 보고서는 멀쩡히 존재한다는 것이 밝혀져 더 문제가 되었다. 공직자의 책임성을 고민하게 하는 장면이다.
이처럼 고위 공직자들은 이해관계에 따라 기록을 없애고, 은닉한다. 반면 공공기관에서 없애야 할 죽은 채권 기록은 좀비처럼 살아남아 시민들을 괴롭힌다. 참으로 기가 막힌 역설이다. 이런 모순적인 현실에서, 전문성을 무장한 채 열심히 일하면 어떤 성과를 낼 수 있는 지 생생히 볼 수 있었다. 제윤경 의원의 노력에 큰 박수를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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