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촛불은 세상을 바꿀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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촛불은 세상을 바꿀 수 있다 [작은책] 촛불과 국제경제
12월 9일 박근혜 대통령의 탄핵소추안이 국회에서 가결됐습니다. 50여 일 만에 2만 촛불은 230만 횃불이 됐고, '박근혜 퇴진'을 외치며 광화문 광장에서 청와대 100m 앞까지 진출했습니다.

<함께자리>는 이번 주 이슈로, △ 촛불과 국제경제 △ 촛불과 생태환경 △ 촛불과 인문정신을 준비했습니다. 각각의 글은 박 대통령의 2차 대국민담화와 3차 촛불집회 전후에 작성됐지만, 당시로 돌아가 촛불의 의미를 여러모로 살펴보려고 합니다. 국민의 명령이 국회를 움직였다면, 이제는 꿈이 실현되는 나라를 만들어야 하니까요. 편집자.

30년 후의 그날들

연재 이름을 '희망의 경제학'이라고 정해 놓고, '불행의 정치경제학'만 얘기하고 있습니다. 어떻게든 월간지 <작은책>의 어린 독자들에게 출구를 알려 드리고 싶었는데, 세상은 점점 더 어두워졌죠. 대통령을 비롯한 한국 정부는 나라를 절망의 수렁으로 밀어 넣었는데, 결국 그게 최소한의 국가제도도 작동하지 않은 탓이라는 사실이 밝혀졌습니다. '브렉시트'에 이어, 미국에서도 '트럼프'라는 반지성적 인물을 대통령으로 뽑는 일이 벌어졌으니, 앞날은 더욱 어두워졌습니다.

하지만 촛불이 켜졌습니다. 촛불 하나는 가수 정태춘의 노래에서처럼 불빛 아래서도 흔들리지만(노래 '촛불' 가사), 100만 촛불은 세상을 바꿀 수 있습니다.

<뉴욕타임즈>는 도널드 트럼프가 대통령이 될 확률을 실시간으로 계산해 보여 주었습니다. 우리 시간으로 지난 수요일 오전 11시 반, 저는 눈을 의심했습니다. '트럼프 당선 가능성 70%'? 불과 두 시간 전쯤 오건호 박사에게 "미국 대선은 걱정 안 해도 되겠네"라는 얘기를 들었으니까요. 놀랍게도, 화장실 갔다 오니 잠깐 사이에 87%로, 점심을 먹고 오니 95%로 변했습니다.

대통령이 제구실을 할 수 없다는 걸 뻔히 아는데, 앞으로 무슨 일을 할지 모르는 사람이 미국의 대통령으로 당선되다니요? 트럼프 후보를 누가 찍었는지 살펴보면, '브렉시트'에 찬성했던 영국의 상황과 유사하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백인(21%p 격차), 남성(12%p 격차), 대학 중퇴 이하(8%p 격차)입니다. 지역적으로는 5대호 부근, 과거 철강이나 기계산업이 발전했다가 지금은 쇠퇴한 '러스트벨트'가 트럼프 지지로 돌아섰습니다. '브렉시트' 역시 마찬가지였지요. 맨체스터나 셰필드, 요크셔와 같이 탄광과 제조업 노동자가 많던 곳이 찬성했습니다.

영화 <빌리 엘리어트>(스티븐 달드리 감독, 2000)이 감동적으로 보여 주었듯이 영국 중북부 지방은 노동자 의식이 대단히 높은 곳입니다. 미국의 '러스트벨트'도 마찬가지로 대규모 파업을 일으킬 수 있는 몇 안 되는 곳이었죠. 하지만 이들은 고립주의와 보호무역주의, 심지어 인종주의를 선택했습니다. 영국과 미국의 선동적 정치가들이 지난 50여 년간의 불평등 심화와 실업, 그리고 임금의 정체가 유럽연합(EU)나 아시아, 그리고 이민 때문이라고 뒤집어씌웠는데 놀랍게도 계급의식이 투철했던 장년, 노년 노동자들이 그 말을 믿었다는 얘깁니다.

열심히 살았는데 도저히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자신들의 상대적 지위가 떨어지고, 아이들의 미래까지 캄캄한 이유를 내부가 아닌 외부에서 찾도록 만든 겁니다. 한마디로, 우리가 세계화의 루저(loser, 패배자)가 된 것은 외국 정부의 불공정한 정책과 이민자들 때문이라는 거죠. 이제 이들은 불만을 터뜨릴 만만한 상대를 찾게 되었습니다. 1930년대 나치를 지지한 독일 국민들이 놀랍게도 유대인 탄압에 동조한 것도 비슷한 상황이었습니다.

<빌리 엘리어트>는 과거의 정신을 고수하면서도 세상의 변화를 인정하는 우직한 노동자들의 모습을 담담하게 보여 줍니다. 현재의 상황은 그들이 돌변해서 '브렉시트'와 '트럼프'를 지지하는 '비이성적 집단'이 된 듯합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벌어진 걸까요?

▲ 지난 11월 12일 100만 명의 시민이 '박근혜 퇴진'을 외치며 촛불을 들었다. ⓒ사진공동취재단

'트럼프 시대',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

기실 이들의 분노와, '시애틀 반세계화 운동'부터 '오큐파이(Occupy) 운동'까지 광장을 메웠던 사람들의 분노는 같은 물줄기에서 솟구쳐 나왔습니다. 선진국에서는 벌써 약 50여 년간, 그리고 우리는 20년 가까이 거대 자본가와 국제기구, 수많은 지식인들이 우리의 찬란한 미래를 보장하리라고 선전했던 강물, 즉 '세계화'의 흐름이 바로 그것입니다.

저는 자유무역 자체, 특히 지식의 생산과 확산에 찬성합니다. 그러나 이런 세계화가 진전되면 언제나 이익을 보는 집단과 손해를 보는 집단이 갈리기 마련입니다. 제조업이 중국과 동아시아로 이전함에 따라 영국과 미국의 제조업이 쇠퇴 일로를 겪은 건 사실입니다. 하지만 그 반대급부로 영국과 미국의 금융업이나 첨단산업은 어마어마한 이익을 얻었습니다. 아예 지적재산권, 서비스, 투자 분야를 무역협정에 집어넣어서 상대 국가의 법과 제도를 바꿔 버렸죠. 하지만 좌우를 떠나, 미국과 영국의 정부는 국제 경쟁을 빌미로 노동자의 임금을 줄이고 부자들의 세금을 깎아 주는 데 진력했습니다.

영국의 노동당이나 미국의 민주당이 보수 정당들에 비해서는 상대적으로 나은 정책을 펼쳤습니다만, 토니 블레어나 빌 클린턴, 버락 오바마가 집권했던 시기에도 중산층 이하의 삶은 거의 개선되지 않았습니다. 이들 역시 첨단산업이나 금융업의 이해를 지지했고, 지적으로 세련된 모습을 보이려고 노력했기에 엘리트주의라는 오명을 뒤집어쓰기 딱 좋았습니다. 힐러리 클린턴이 트럼프에게 패한, 가장 큰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진보 쪽이 정권을 잡아도 나의 상대적 지위는 계속 떨어졌고, 공화당이나 보수당은 세상의 변화를 따라잡지 못한 당신들이 문제라고 모욕하는 상황에서 트럼프와 같은 이들은 '그게 다 중국인이나 멕시코인이 불법을 저질렀기 때문'이라고 주장하니, 솔깃할 수밖에 없겠죠.

트럼프 당선자의 경제정책은 체계적이지 않기 때문에, 어떤 일이 벌어질지 예측하기란 대단히 어렵습니다. 하지만 트럼프 당선자가 내년 1월 취임하자마자, 가장 먼저 무역 마찰을 일으킬 것은 확실합니다. 선거 기간 동안 주장한 대로, 중국산 제품에 45%의 관세를 물리는 것은 불가능하겠지만 오바마 시대에도 이미 증가하고 있던 반덤핑 제소와 환율 조작 시비는 훨씬 강해질 겁니다. 그러나 상호의존도가 높고 협상력도 만만치 않은 중국을 먼저 건드리지는 않을지도 모릅니다. 그렇다면 훨씬 만만한 한국이나 대만이 먼저 시험대에 오르겠죠.

트럼프 당선자는 '미국과의 군사동맹국에 대해서도 도와줄 만한 가치가 있느냐?'고 반문합니다(미국의 고립주의 전통이 그렇습니다). 따라서 웬만하면 다른 지역의 일에 개입하지 않고, 꼭 개입해야 한다면 비용을 당사국이 치르라고 주장할 겁니다. 예컨대 사드 포대를 늘리고 미국 무기를 사라든가, 미군의 주둔 비용을 늘리라고 하겠죠. 안 그러면 주한미군을 철수시키겠다고 으름장을 놓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어떻게 대응해야 할까요? '주한미군을 철수한다든가' '한미FTA를 폐기하겠다'고 하면, 그러라고 해야 합니다. 주둔 비용을 전담하라거나, 한미FTA의 제조업과 농업 관련 조항을 재협상하자고 하면 당당히 맞서야 합니다. 오히려 우리는 중국이나 다른 아시아 국가와 공조해서 미국의 공격적 보호주의를 무산시킬 수 있습니다.

아뿔싸, 박근혜 대통령이 이런 역할을 하리라고 기대하는 건, 나무에서 물고기 잡는 것보다 어렵습니다. 모든 권력의 원천인 국민들이 당장 사퇴하라고 요구하는 대통령은 외교도 할 수 없습니다. 힘이 있을 때도 판단을 잘 못해서 일을 그르치는데, 당장 존재 자체가 위태로운 대통령이라면 트럼프 당선자가 요구하는 것 이상을 주겠다고 나설 가능성이 높습니다. 심지어 자신의 생존을 위해 북한을 자극할지도 모릅니다.

이 암담한 상황에서 매주 토요일 촛불이 솟아올랐습니다. 그렇습니다. 당장 대통령이 물러나면 됩니다. 그의 역할을 대행할 총리는 국민의 뜻이 무엇인지 정확히 헤아려서 그 힘으로 좌충우돌의 미국 대통령과 협상할 수 있어야겠죠. 막 나가던 부시 전 대통령도 촛불에 밀려서 쇠고기 수입 요건을 완화한 적이 있습니다. 더 큰 문제가 걸려 있는 트럼프 시대도 마찬가지입니다. 국정농단뿐 아니라, 절박한 외교안보 문제까지 생각하면 박근혜 대통령은 즉각 물러나야 합니다. 30년 후, 또는 50년 후 우리 아이들이 오늘을 어떻게 기억할지는 오늘 우리가 무엇을 결정하고 행동하는지에 달려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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