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 여성들이 삼삼오오 모여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한 여성이 말했다. "저기 나, 요즘 몸이 좀 이상해. 매달 있던 월경이 요즘 없어." 다른 여성이 이 말을 듣고 "너도 그래? 나도 그런데 (…) 나도 얼마 전부터 그게 사라져 고민하고 있었어." 생리대 사용 후 이상 몸에 이상 증세를 느낀 여성의 대화는 아니다. 1995년 경남 양산에 있던 엘지전자부품에서 일하던 여성 노동자들이 나눈 대화 내용이다.(안종주의 <위험증폭사회> 중에서)
엘지전자부품에서는 1994년 말부터 월경이 사라져 생리대가 필요 없는 여성 노동자들이 하나둘씩 늘어나기 시작했다. 아직 결혼하지 않은 여성은 물론이고 결혼 뒤 아기를 가지려는 여성에게서도 월경이 사라졌다. 이는 정말 예삿일이 아니었다. 아기를 가지고 싶어도 가질 수 없는 것은 엄청난 비극이지 않은가.
하지만 생리 문제는 입 밖에 쉽게 꺼내기가 어려운 사생활 영역에 속한다. 속으로 답답해 하다가 우연히 누군가가 먼저 이야기를 꺼내자 모두들 이구동성으로 동병상련하는 말을 털어놓은 것이다. 우리나라 최초의 생식독성 직업병 사건은 이렇게 시작됐다. 당시 산업안전공단이 원인규명에 나섰다.
여성 노동자의 월경이 사라진 회사, 엘지전자부품
월경이 사라진 공장 여성 노동자들이 일하던 곳은 전자제품의 부품으로 쓰이는 택트(TACT) 스위치 조립부서였다. 조립공정에는 세척제를 사용했는데 세척제 성분이 '2-브로모프로판(Bromopropane)'이라는 화학물질로 공단 조사 결과 드러났다. 이 성분이 들어 있는 세척조에 전자부품을 담그는 일을 여성노동자들이 맡았다.
1994년 3월 이전에는 프레온을 세정제로 사용했는데 지구오존층 파괴 주범으로 프레온이 꼽히자 그 뒤부터는 일본에서 들여온 '솔벤트 5200'이라는 상품명을 지닌 세정제를 사용한 것이 화근이었다. 이 '솔벤트 5200'이 곧 2-브로모프로판 용액이었던 것이다.
엘지전자부픔은 당시 일본에서 새로운 세정제를 들여오면서 일본 쪽이 무해하다고 해 이를 그대로 믿고 아무런 안전성 검사 없이 사용해왔다. 사건이 언론에 보도되고 사건의 파장이 커지면서 여성노동자뿐만 아니라 남성 노동자들도 정자 감소증, 무정자증, 정자 운동 감소증, 고환 이상 등의 건강 이상을 호소하는 사례가 생기기 시작했다.
화학물질 가운데 무독성은 드물다. 어떤 식으로든지 유해할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 그런데도 대기업인 엘지전자부품은 이를 곧이곧대로 믿었다고 밝혔다. 이해하기 어려운 대목이었다. 이 물질을 가장 먼저 사용한 일본에서는 생식 독성 문제가 일어나지 않았다. 아무런 안전 장비 없이 무방비로 일한 우리와는 달리 일본 노동자들은 작업하면서 회사가 지급한 호흡보호구를 착실하게 착용하는 등 안전에 신경을 썼기 때문이었다.
1995년 남자 노동자들도 정자 감소, 무정자증 등 피해
이미 우리나라에서는 유해 화학물질에 노출된 여성노동자이 생리불순과 불임을 겪었다. 남성도 비슷한 피해를 입었다. 1년 이상 부품조립 부서에서 일한 노동자 25명 가운데 90%에 가까운 22명이 생식 장애 질환에 걸렸다.
그리고 22년의 세월이 흘러 이번에는 유해물질을 취급하는 노동자가 아닌 보통 여성들이 월경이 없거나 월경주기가 불규칙한 등 생리 불순 현상에 시달리고 있다. 이를 호소하는 여성의 숫자가 수만 명에 이르고 있다. 이들은 특정 회사 생리대 제품을 사용해오다 이런 건강 이상이 생겼다며 회사 쪽에 부작용을 호소하고 나섰다. 상당수는 소송까지 준비하고 있다. 이른바 릴리안 생리대 파문이다.
환경시민단체인 여성환경연대가 제기해 파문이 일고 있는 생리대 유해성 논란은 릴리안 제품뿐만 아니라 유한킴벌리 등 생리대를 제조·판매하는 다른 회사로까지 불똥이 튈 조짐을 보이고 있다. 여성들은 그렇다고 생리대를 사용하지 않을 수도 없고 어찌할 바를 몰라 전전긍긍하고 있다. 어떤 제품이 안전성이 100% 보장되는지를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생리대 접착제, 포름알데히드 성분만 검사해 합격 시켜줘
현재 유해성이 의심받고 있는 부분은 생리대 패드를 옷에다 부착하는 접착제 부분이다. 이 접착체는 '스티렌부타디엔공중합체(SBC, Styrene-Butadiene Copolymer)' 성분으로 돼 있다. 회사 쪽은 이 성분은 발암물질도 아니고 유해하지도 않다고 주장하고 있다. 하지만 여성환경연대는 대학에 맡겨 접착제 부위를 분석한 결과 휘발성유기화합물(VOCs)이 10종이나 됐다며 이것이 문제를 일으켰을 가능성이 높다고 지적했다.
현재 의약외품으로 생리대를 관리하고 있는 식약처는 생리대의 안전성과 관련해 커버, 흡수체, 사이드 커버, 접착제, 방수층 등에서 형광증백제, 포름알데히드, 카드뮴·납·비소·크롬·수은 등 중금속, 프탈레이트계 가소제 등에 대해서만 검사를 해 왔다.
여성환경연대가 문제를 삼은 접착제의 경우 포름알데히드만 검사 대상으로 삼았다. 다른 휘발성유기화합물은 아예 검사대상에서 빠져 있는 것이다. 식약처 검사 결과 접착제에서 다른 휘발성유기화합물이 나온다면 그동안 생리대 안전 그물망에 큰 구멍이 나 있었던 것이 된다.
생리대가 유해하다면 아기 기저귀와 노인 요실금 패드는?
만약에 하나 이 접착제가 문제를 일으켰다면 생리대뿐만 아니라 일회용 기저귀를 차는 아기들과 요실금으로 고생해 패드를 차는 사람이 많은 노인들도 안전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이 때문에 현재 생리대의 유해 여부를 가리기 위해 긴급하게 유해화학물질 검출 조사에 들어간 식품의약품안전처의 결과가 나오기까지 소비자들의 불안과 찜찜함이 가중될 것으로 본다.
여성 생리대와 아기 기저귀, 노인 요실금 패드 등은 어쩌다 혹은 간혹 쓰는 것이 아니라 아기의 경우 짧게는 1~2년, 요실금 패드와 생리대는 길게는 40년 이상 사용하기 때문에 만약 시판중인 생리대 대부분이 유해성이 있다는 판정이 나면 엄청난 파장이 예상된다. 더구나 유해 생리대 사용으로 불임이 생긴다면 이는 비극이자 회복하기 어려운 고통이 아닐 수 없다.
릴리안 제품을 사용하고 난 뒤 생리 이상 등을 여성들이 호소한 것이 1년 가까이 된다고 한다. 여성환경연대가 조사를 벌인 것도 여성 소비자들의 이런 불만이 쌓였기 때문이다. 식약처가 이런 사실을 사전에 알고 있었는지는 확실치 않다. 몰랐다면 소비자들이 식약처보다는 시민단체에 더 신뢰를 보낸다는 것 이외에 달리 해석할 길이 없다.
1978년 미국에서 삽입식 생리대 탐폰이 독성쇼크증후군 일으켜
생리대가 실제로 엄청난 사회 문제가 된 적이 있다. 삽입식 탐폰에 의한 독성쇼크증후군(Toxic Shock Syndrome)이 미국에서 1970년대 후반 큰 파문을 일으켰다. 이 질환은 어린아이에게서도 나타나는데 여성의 경우 주로 흡수성이 매우 좋은 탐폰을 사용한 경우 생겼다. 문제가 발생한 뒤 이런 유형의 생리대는 시장에서 사라졌다.
이 증후군은 포도상구균이 생리혈을 흡수한 탐폰에서 빠르게 증식하면서 독소를 분비해 발진, 쇼크, 인후통 등을 유발하며 심하면 콩팥·폐부전으로 급진전돼 숨질 수도 있다. 당시 10대 후반에서 20대 중반 사이의 젊은 여성들에게서 이 증후군이 많이 생겼다.
생리대에 유해 화학물질 성분이 사용됐고 이로 인해 여성들이 생리불순 등 생식 장애에 시달렸다면 이는 가습기살균제에 이은 또 하나의 화학물질에 의한 국민 건강 위해 사건이 될 것이다. 현재 생리대 사용으로 건강 피해를 입었다고 주장하며 집단소송 카페에 가입한 사람만 27일 현재 2만5000명을 넘어섰고 소송비용까지 낸 사람이 25일 현재 4000명을 넘어섰다고 한다. 앞으로 피해 인정 여부를 놓고 뜨거운 법정 공방이 벌어질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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