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락된 세금을 낸다던 약속도 어겼다. 금융실명제법은 자산의 차명 보유를 금지한다. 차명 자산이 드러나면 과징금을 내야 한다. 하지만 이 회장은 과징금을 내지 않았다. 금융실명제법에 따르면, 이 회장이 내야할 세금과 과징금은 수조 원 규모다. 정부는 수조 원대 세입 손실을 입었다.
이 회장의 대국민 사과 이후인 2008년 말, 삼성 측은 이 회장의 약속이 지켜졌다고 밝혔다. 하지만 삼성 측도 거짓말을 했다는 논란에서 자유롭지 못하게 됐다.
4조4000억 원대 차명 자산, 실명 전환 없이 인출
발단은 지난 2007년 10월 김용철 변호사의 양심고백이다. 당시 김 변호사는 삼성이 천문학적 규모의 비자금을 관리하며, 정·관·법조·언론계에 뇌물을 준다고 밝혔다. 김 변호사는 삼성 비자금 규모를 10조 원대로 추산했었다. 이를 수사하기로 한 조준웅 특별검사팀은 삼성이 차명으로 보유한 자산 약 4조5000억 원을 찾아냈다. 조 특검은 이를 회삿돈을 횡령한 게 아닌 상속 자산으로 규정해서 논란이 일었다. 특검 수사가 끝난 2008년 4월, 이 회장은 대국민 사과를 했다. 차명 자산의 실명 전환, 미납 세금 납부 등이 포함됐다.
하지만 당시 밝혀진 차명 자산의 거의 전부인 4조4000억 원이 실명 전환되지 않았다. 이 회장이 돈을 빼갔다. 낸다던 세금도 내지 않았다.
국회 정무위원회 소속 박용진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15일 발표한 내용이다. 금융감독원이 박 의원에게 제출한 ‘2008년 조준웅 특검 시 확인된 은행별 차명계좌 및 실명전환 현황’ 자료가 근거다. 이 자료를 보면, 차명으로 관리된 64개 은행계좌 가운데 1개만 실명 전환됐고 957개 증권계좌는 실명 전환이 전혀 이뤄지지 않았다. 계좌에 있던 돈 4조4000억 원을 이 회장이 인출한 사실이 금감원 자료로 확인됐다.
금융위, 수상한 유권 해석…자체 발간 <금융실명제 종합편람>에도 어긋나
이 회장은 대체 왜 그랬을까. 배경에는 금융위원회의 유권해석이 있다. 당시 금융위원회는 이 회장 측이 차명으로 관리한 계좌에 대해 "금융실명제에 따른 실명전환 대상이 아니다"라고 해석했다. 이를 근거로, 이 회장은 기존 차명 계좌를 해지한 뒤 찾은 돈을 자기 계좌에 넣었다. 이는 '명의 변경'이며, 금융실명제법에 따른 '실명 전환'과는 다르다.
금융위원회 측 해석의 근거는 1997년 4월 선고된 '노태우 전 대통령 비자금 사건' 판례다. 하지만 금융위원회가 인용한 대목은 이 사건에서 다수 쪽 대법관 2명의 보충 의견이었다. 보충 의견은 법적 구속력이 없다. 그런데 금융위원회는 이를 바탕으로 유권해석을 한 것이다.
게다가 이듬해인 1998년 8월 21일에는 "차명계좌는 당연히 실명전환 대상"이라는 대법원 판결도 나왔다. 심지어 이 판결문은 금융위원회가 2008년에 발간한 <금융실명제 종합편람>에도 실려 있다. 요컨대 금융위원회는 "차명계좌는 당연히 실명전환 대상"이라는 판례를 알고 있으면서도, 굳이 시기적으로 앞선 판례에서 보충 의견을 찾아내 인용했다. 이명박 정부 초기였던 당시, 금융위원회 위원장은 전광우 연세대학교 석좌교수다.
박용진 "수조 원대 세금 및 과징금, 추징할 수 있다"
박용진 의원은 "결국 삼성은 대국민 약속을 하나도 지키지 않았고 금융위원회는 이건희 회장에게 면죄부를 준 것"이라면서 "지금이라도 징수하지 못한 과징금과 이자 및 배당소득세를 추징해 경제정의와 공평과세를 실현해야 한다"고 밝혔다.
또 박용진 의원은 "수십 년간 차명계좌를 유지해 이자 및 배당소득이 엄청날 것으로 예상되는 만큼 경우에 따라 과징금과 소득세를 수조 원까지 추징할 수 있다"면서 "아직 10년 시효가 살아있는 만큼 금융위원회도 금융적폐를 청산한다는 사명감을 가지고 속도감 있게 추진해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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