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당사자가 납치돼 생사도 모르는 상황에서, 그의 말들은 정말로 강한 인상을 주었다. 민주주의를 추구해 마지않는 신념을 가진 정치가의 그런 모습은 일본에선 볼 수 없는 것이기도 했다. 김대중 선생은 그때도 거의 죽을 처지에 놓여 있었지만, 결국에는 살아났다. 그를 납치해 바다로 수장하려 했던 배 위로 날아온 비행기가 어느 나라의 것인지는 여전히 미지에 머물러 있으나, 어쨌든 납치범들이 해상에서 김대중 선생의 살해를 단념한 것은 틀림없다.
그 후로 우리들은 '김대중의 원상복귀를 요구하는' 운동을 하려 했다. 그러나 그 운동은 한일 양국 정부의 정치적인 타협 탓에 불가능했다. 김대중 선생은 한국에서 시작된 민주화 운동의 중심에서 싸우고 (1976년) '민주구국선언'에 서명했으며, 체포당하고 투옥됐다. 그러는 동안 일본인들은 김대중 선생에 대한 관심을 거두지 않았다.
그러나 김대중 선생의 존재가 압도적으로 알려지게 된 것은 1980년 5월 '내란음모 사건'으로 체포되어 군법회의에 끌려가 사형 판결을 받은 때였다. 김대중 선생을 죽이려고 하는 이들은 그의 신원조사를 하면서 허위 정치 활동 경력을 섞고, 이런 저런 폭로를 한다는 전술을 취했다. 우리들도 이건 엄청난 일이라고 판단해, 김대중 선생의 연설을 모은 <민주구국의 길>을 냈다. 생사(生死)의 기로에 선 김대중 선생이 군법회의에서 한 말이 이후에 지하 루트를 통해 전해졌고, 일본에서부터 전 세계로 처음 알려졌다.
김대중 선생은 사형 구형을 받은 군법회의 제1심 최종진술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당국이 내게 형을 집행하려고 한다면 불가능한 일은 아니겠지만 그것이 과연 법의 정의에 따른 것일지 심사숙고해주었으면 싶다. 나는 나에 대한 관대한 처분보다는 다른 피고에게 대한 관용을 바란다. 결국 이분들에 대한 형의 책임자는 나이기 때문이다. (…)
그저께 구형을 받았을 때 나 스스로도 의외라 생각할 만큼 내 마음은 평온했다. 그리고 그 날은 공판정에 나갔던 탓도 있어선지 평소보다 더 잘 잤다. 이것은 내가 천주교인으로서 신이 바라신다면 이 재판부를 통해서 죽음을 당할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살 것이라고 믿으며, 이 전부를 신에게 맡기고 있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여기 앉아 계시는 피고들에게 부탁한다. 유언으로서, 내가 죽어도 두 번 다시 이러한 정치 보복이 있어서는 안 된다는 말을 남기고 싶다."
여기엔 폭력에 맞서는 정신의 광채가 빛나고 있다. 이런 진술은 사람들의 마음을 동요시켰다. "김대중 씨를 죽이지 말라"는 목소리가 일본은 물론이고 세계적으로도 널리 퍼진 것은 당연했다. 나는 당시 이렇게 썼다.
"이 이상주의적이며 현실주의적이고 민족주의·민주주의적 천주교인 정치가는, 큰 모순으로 갈라진 한국 국민을 단결시켜 민주주의를 통한 국가 건설과 민족통일이라는 난제에 맞서게 하는 열정을 불러올 수 있는, 단 한 명의 사람일 것이다. 한국 국민이 지금 김대중 씨를 잃는다면 해방 후 백범 김구를 잃은 것 이상의 비극일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일본 국민을 포함해 평화와 민주주의, 인간다운 삶을 추구하는 전 동아시아의 사람들에게 있어서 헤아릴 수 없는 타격이다."
물론 우리는 한국의 '소리 없는 목소리'도 움직이고 있었다고 믿는다. 미국의 레이건 대통령도 움직였다. 스즈키 젠코(鈴木善幸) 일본 수상도 움직였다. 그리고 김대중 선생은 이때도 구제되었다. 사형판결의 최종 확정을 기다리는 동안, 그리고 감형이 되어 감옥에 있는 동안 선생은 이희호 여사와 자제들에게 옥중 편지를 썼다. 그 복사본이 다른 천주교인의 손을 통해서 우리들에게도 전해졌고, 일본어로 번역해 이와나미서점(岩波書店)에서 <김대중 옥중서간>이라는 제목으로 1983년에 출판되었다.
이 책이 나왔을 때 김대중 선생은 출옥에 이어 출국해 미국에 있었다. 미국에서 선생님의 서문이 도착했다. 그 글에서 그는 "우리나라에서 나의 역사적 사명은 닫혔던 문을 여는 것이라고 생각한다"고 했다. 열려야 할 첫 번째 문은 "지금 단단하게 닫혀 있는 민주주의의 문"이다. 제2의 문은 "6000만 민족이 꿈에도 잊지 못하는 조국통일로 나가는 문"이다. 또 선생은 "한국과 일본의 관계에 있어서도, 역시 문을 여는 역할을 하길 원한다", "나는 일본의 여러분과의 특수한 인연에 의해, 다른 어떤 한국인보다도 일본인들과 마음의 공감대를 가지고 있다고 믿고 있다"라고 썼다.
<김대중 옥중서간>은 한 장의 편지 속에 자신의 생각을 전하겠다는 놀랄 만한 에너지의 집중을 보여주고 있다. 그 내용엔 자기반성과 전진·향상에의 강렬한 의욕이 전해진다. 나는 이 책의 해설의 결말 부분에 이렇게 썼다. "한국 국민은 계속 고난 속에 있지만, 우리들은 이런 정치가를 갖고 있다는 가능성에 한 줄기 빛을 볼 수 있다."
내가 김대중 선생을 처음으로 직접 뵌 것은 1984년 12월 미국 워싱턴에서였다. 나는 국립문서관(National Archives) 계단이 있는 곳에서 그와 만나기로 했다. 약속 시간, 그 앞에 큰 차가 멈추었고 그 차 속엔 김대중 선생이 계셨다. 그 때 이미 김대중 선생은 한국에 강행 귀국할 것을 생각하고 있었다. 한국 민주주의의 회복을 위해서는 자신이 희생을 뒤돌아보지 않고 노력해야 한다는 강한 사명감을 가지고 계신 데 대해 나는 다시 한 번 강한 인상을 받았다.
선생님이 귀국하게 되자 필리핀의 야당정치가 베니그노 아키노 씨가 마닐라 공항에서 암살됐던 전례를 우려한 이들이, 미국에서부터 20명 가까이 동행했다. 그 안엔 내 친구인 브루스 커밍스 교수도 있었다. 우리들은 천주교인들과 함께, 나리타공항에서 일본정부의 위임을 받아 김대중 선생님 일행을 맞이했다. 그날 밤 나는 호텔방에서 김대중 선생과 <세카이> 편집장이었던 야스에 료스케 씨와 함께 지냈다. 불안한 밤이었다.
그러나 김대중 선생은 무사히 귀국했고, 그 이래로 1987년 6월 민주항쟁의 승리까지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한국의 민주화 운동은 비폭력 직접행동을 통해 군사정권 퇴진을 가져왔고, 대통령 선거를 통해 변혁을 전진시키는 국면으로 나아갔다. 군부 측에서 노태우 씨가 대통령 선거에 입후보한 데 맞서 민주세력 측에서는 김영삼, 김대중 두 사람이 나서는 분열 선거 양상이었으므로 누가 보아도 민주세력 측이 불리했다. 남북관계도 긴장 상태였으므로 이에 우려한 일본의 우리들은 분수에 넘치게도 김대중 선생에게 후보단일화를 부탁하는 편지를 보낸 적도 있었다.
결국 후보단일화는 실현되지 못했고 민주주의 회복 후 최초의 대통령 선거는 노태우 씨의 승리로 끝났다. 5년 후 김영삼과 김대중의 일대일 승부가 벌어졌고, 김영삼 씨가 승리했다. 김대중 선생은 두 번의 선거에 패한 끝에 결국 세 번째인 1997년 대선에서 당선됐다. 우리들은 앞의 두 번의 선거를 탄식하면서 지켜봤다.
그러나 되돌아보면, 이것은 필연적인 혁명의 도정이었다고 생각된다. 노태우 씨가 대통령이 된 것은, 군부 세력이 대통령 직선제를 받아들였다는 데에 의미가 있었다. 그리고 김영삼 대통령 때 전두환·노태우라는 두 명의 군인 대통령을 쿠데타 죄로 체포해 재판에 넘긴 것은 김영삼이기에 할 수 있었던 큰 일로, 군인의 정치참여를 끝내는 효과를 가져왔다. 김대중 선생이 두 사람 다음에 대통령이 되었기 때문에, 남북화해의 이니셔티브를 잡을 수 있었던 것이리라. 어느 날 내가 김대중 선생에게 이 얘기를 하고 의견을 여쭈었더니 "그런 시각이 (있을 수) 있습니다"라며 긍정적으로 대답했다. 이렇게 '김대중 대통령'의 출현은 한국의 민주혁명을 완성시키는 것이 되었다.
'민주주의의 문'을 완전히 연 김대중 선생은 '조국통일의 문' 내지는 '남북 화해, 공존, 협력의 문'을 열 수 있었던 것이다. 대통령에 취임하는 동시에 김대중 선생은 '햇볕정책', '포용정책'을 내세웠다. 그리고 2000년 6월 평양을 방문해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과의 정상회담을 하고, 남북공동선언을 발표했다. 정말로 단단하게 닫혀 있던 문이 열린 것이다. 이는 사람들에게 한반도에서 이제 전쟁은 없다는 사실을 확신시켰고, 정신의 해방을 초래했다. 남북의 포용 체제가 시작되었다. 그러나 그 의미는 이뿐만이 아니었다. 동북아시아의 평화와 안전에 큰 의의를 가지게 된 것이다. 2000년 남북정상회담이 있었기에 2002년의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郎) 일본 수상의 방북과 북·일 정상회담이 실현된 것임에 틀림없다.
사실 원래대로라면 북·미의 관계개선도 촉진시키는 역할도 했어야 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는 안 됐다. 북·일 관계가 정상화될 것인가 하는 인상이 생겨나는 가운데, 순식간에 그 전망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렸다. 북한을 '악의 축'으로 보는 조지 부시 정권의 밑에서, 북·미 관계개선은 원천적으로 불가능했던 것이다.
북·일 관계 정상화나 북·미 관계개선은 빠진 채 남북의 포용 체제는 10년 가까이 계속됐고, 그것은 동북아시아의 평화를 지탱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 체제는 북한의 핵무기 개발을 막을 수는 없었다. 물론 북·미 간, 북·일 간 관계 개선이나 정상화를 이룰 수 없었던 건 김대중 대통령의 책임이 아니라 우리들의 책임이다. 그러나 남북 화해는 북·미 관계개선이나 북·일 관계 정상화 없이는 성립되지 않는 이상, 유감스럽지만 김대중 대통령의 노력도 끝까지 미치지 못했다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그렇다 하더라도 김대중 선생은 죽음을 앞에 두고서도 최후의 노력을 기울였다. 선생의 입원 전 그의 집을 찾아 조언을 구한 빌 클린턴 전 대통령이 평양을 방문해 김정일 위원장과 회담했다. 그 회담의 결과는, 그렇게 기뻐하는 김정일 위원장의 얼굴을 <로동신문> 지면에서 이제까지 본 적이 없었을 정도였다.
그리고 김대중 선생이 서거하자 북에서 서울로 조문단을 보냈다. 선생님의 장례식은, 그가 열어젖힌 문을 닫아서는 안 된다고 다짐하는, 하나의 커다란 시위였다. 그러나 남북 관계의 사태는 개선을 보이지 않고 있다. 결국 연평도 포격 사건이 일어나기에 이른 것이다.
김대중 선생은 또 하나의 문, '한일 관계의 문'도 열었다. 1998년 국빈으로 일본을 방문한 그는 국회 연설에서 일본 의원들에게 큰 감명을 주었고, 오부치 게이조(小淵惠三) 수상과 한일 공동선언을 발표했다. 거기에서 오부치 수상은 일본이 "식민지 지배에 의해 한국 국민에게 다대(多大)한 손해와 고통을 주었다"는 것을 인정하고, "통절한 반성과 마음속으로부터의 사죄"를 말했다. 이를 받아 김대중 대통령은 이러한 오부치 수상의 "역사 인식의 표명을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이것을 평가함과 동시에, 양국이 과거의 불행한 역사를 극복하여 화해와 선린우호 협력에 기초를 둔 미래지향적인 관계를 발전시키기 위해 서로 노력하는 것이 이 시대의 요청이다"라고 표명했다.
이에 따라 한일 관계는 "21세기를 향한 새로운 파트너십"이라고 선언되었으며 김대중 대통령은 한국에 일본 문화를 개방하겠다는 역사적 방침을 표명했다. 이것이 모든 게 새로운 한일 관계의 시작이었으며, 한류가 세찬 물줄기처럼 일본으로 흘러들게 되었다.
김대중 대통령은 과거사 피해자에 대한 일본의 보상 조치에 대해서 한국 정부 차원에서 더 이상 요구하지 않는다는 태도를 취했지만, 위안부 피해자나 강제동원 노동자 문제 등 해결되지 않은 문제의 존재를 강하게 인식하고 있었다. 한국 정부는 일본 정부에 위안부 피해자에 대한 보상 요구를 하지 않는다고 정한 뒤로, 1998년 5월 일본의 '아시아 여성기금'을 받지 않겠다고 서약하는 피해자들에게는 일화 300만 엔 정도의 생활 지원금을 지급하기로 결정했다.
나는 당시 아시아 여성기금을 다른 이들에게 호소하는 사람으로서 이러한 조치가 혼란을 불러올 것을 우려하여 김대중 대통령께 수차례 편지를 보내 재고를 부탁했다. 아시아 여성기금을 받은 위안부 피해자들은 한국 사회에서 비난을 받고 있었으므로, 그 수취 사실을 숨기지 않을 수 없어 '(일본 정부의) 아시아 여성기금을 받지 않는다'는 서약서에 서명하는 사람이 속출했다. 결과적으로 이 사람들은 한국 정부가 주는 생활 지원금도 받게 된 것이다. 이 사태로 기금은 지급을 정지해야만 했지만, 다음에 한국 정부로부터 지원금을 받은 피해자가 아시아 여성기금에 신청을 할 경우, 기금으로서는 결국 지급을 막기는 어렵다. 어떤 식으로든 이 돈을 둘러싼 싸움이 피해자들을 괴롭히게 될지도 모른다.
1998년 12월 나는 무라야마 도미이치(村山富市) 전 수상과 함께 청와대에 방문해 김 대통령을 만나 이 건에 대한 요청을 했다. 김 대통령은 자신은 아시아 여성기금을 받지 말라고도, 받아도 좋다고도 말하지 않겠다며 피해자 '할머니'들과 운동단체와 상의를 잘 해주었으면 싶다고 말했다. 또 합의가 잘 되어 기금을 받으면 좋다며, 정부는 문제 삼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한 번으로 안 되면 몇 번이라도 상의를 해줬으면 한다고 말했다. 고마운 일이었다.
그렇지만 아시아 여성기금을 비판하는 사람들과의 면담은 결국, 결실을 맺지 못했다. 위안부 피해자들의 곤란한 입장은 해결되지 않은 채, 아시아 여성기금은 2007년 해산해버렸다.
대통령에서 물러난 김대중 선생의 처소를 나는 몇 번인가 방문했다. 2007년 가을 서울에 있는 자택을 방문했을 때 김대중 선생은 직전의 독일 방문에 대해 얘기하면서, 독일인이 여전히 과거를 반성하는 노력을 다하고 있는 것에 강한 인상을 받았다고 했다. 그러면서 어째서 일본은 독일처럼 할 수 없는 걸까, 양식 있는 일본인들이 목숨을 걸고 사태를 바꾸려 노력해야 하는 게 아니냐고 말씀했다. 최초의 만남에서부터 25년 동안, 그 때 들었던 의견만큼 엄격했던 건 없었고, 나는 선생의 비판 앞에 몸 둘 바를 몰랐다.
2008년 12월 9일, 나는 김대중 선생에게 민주화 운동에 관한 인터뷰를 부탁했다. 인터뷰가 끝난 뒤 나는 아시아 여성기금을 받은 할머니들에 대해서, 앰네스티를 위해 발언해 달라고 말씀드렸다. 김대중 선생은 자신은 공직에서 물러난 몸이므로 무엇을 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생각해 보겠다고 대답했다. 내가 말씀드린 것의 의미는 이해해주신 것 같았다. 그러나 그것이 선생과의 최후의 만남이었다.
그가 서거했을 때 시청 앞 광장 분향소 앞에서 애도를 표하는 시민의 대열을 보며 내가 느낀 것은, 김대중 선생은 고난 속에서 성공을 쟁취한 한국 현대사를 대표하는 인물이며, 한국인의 지혜와 용기와 굴하지 않는 씩씩함을 대표하는 인물이라는 것이었다. 그 지혜와 용기와 씩씩함은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번역=안은별)
* 필자 와다 하루키는 1938년 일본 오사카 출생으로 1960년 도쿄대 문학부를 졸업한 뒤 1966년부터 대학 강단에 섰다. 원래 전공은 러시아현대사이지만 1973년 김대중납치사건을 계기로 한국의 민주화운동에 관심을 갖게 되면서 김대중·김지하 구명운동 등 한국의 민주화운동을 지원하는 시민운동을 펼쳤다. 학문적으로도 한국전쟁과 북한현대사 등으로 한반도 관련 주제로 연구범위를 넓혔다. 1998년 정년 퇴임 한 후에는 '여성을 위한 아시아평화국민기금' '북일 국교촉진 국민협회' 활동 등을 통해 일본의 전후 보상, 민간 차원 북일 국교 정상화 촉구 활동 등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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