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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가에게 드릴 독립훈장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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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가에게 드릴 독립훈장이 없다 [기고] 독립훈장의 신설이 필요하다
나는 요즈음 대한민국에 대해 깊은 의구심을 품고 있다.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 대한국민은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한다고 헌법 전문은 명시하였다. 일본제국주의의 침탈에 맞선 선열들의 피나는 희생으로 대한민국 정부가 건립되었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는 상식이다. 그런데 대한민국의 상훈법에는 독립유공자를 예우하는 ‘독립훈장’이 없다. 새마을훈장도 있는데 독립훈장은 없다. 이상한 나라가 아닌가? 전국의 300여 학교에서 5만 여 명이 참여한 광주학생독립운동은 그야말로 '제2의 3.1운동'이었다. 1920년대의 모든 고뇌와 분노가 응어리 되어 분출한 독립투쟁의 대화산이 광주학생독립운동이었다. 이 운동의 주역이 성진회와 독서회였고, 성진회와 독서회를 만든 이가 장재성 선생이었다. "1929년 11월 3일 광주학생 사건이 일어났다. 학생사건이 일어났다기보다 일으킨 분이 나의 오빠 장재성이다"는 여동생 장매성의 회고는 사태의 핵심을 찌르고 있었다. "우리는 피 끓는 학생이다. 오직 바른 길만이 우리의 생명이다." 고교 시절 기념탑에 새긴 비문을 보면서도 정작 기념탑의 주인이 장재성이라는 사실을 그땐 몰랐다. 장재성 선생은 이 일로 4년의 옥고를 치렀다. 출옥하여 다시 일본으로 유학을 갔는데, 일본 경찰은 또 장재성을 투옥하였다. 일제 강점기 장재성 선생은 도합 7년이나 옥고를 치렀다. 청춘을 옥중에서 보낸 것이다. 우리는 장재성 선생이 언제 어디에서 죽었는지도 몰랐다. 1950년 장재성 선생은 광주형무소에 수감 중이었는데, 6.25가 터지자 이승만 정부는 형무소에 수감 중인 장재성을 총살하였다고 한다. 일제 치하에서 청춘을 바쳐 독립운동을 한 분에게 대한민국이 준 것은 독립유공의 서훈이 아니라 총살이었다. 그것도 불법 총살이었다. 부끄러웠다. 남 보기가 너무나 부끄러웠다. 이러고도 '의향 광주'라고 떠들어 온 내가 너무 부끄러웠다. 이러고도 '광주정신'을 헌법 전문에 넣자고 할 수 있는 것인지, 청와대의 높으신 분에게 따지고도 싶었으나, 나부터가 부끄러워 아무 말을 하지 못했다. 그래서 우리는 2020년 새 해에 들어 몇몇 지인들과 함께 <장재성을 생각하는 모임>을 만들었다. 서거 70주년을 맞이하는 올 해 늦었지만 선생의 추모제를 올리기로 하였다.
▲ 1943년 장재성(35) 선생과 부인 박옥희(32), 큰아들 장상백(1) ⓒ장재성 기념사업회
지난 5월 27일, <장재성 기념사업회>를 창립하면서 우리는 하유성 광주 보훈청장께 72인의 서훈 요청서를 제출하였다. 72인 가운데에는 광주고보(광주일고 전신) 출신 독립유공자만이 아니라, 광주농고, 목포상고 출신 독립유공자도 포함되었고, 함경도 출신 독립유공자도 다수 포함되었다. 함경도의 유족들에게 독립유공자의 서훈 소식이 전달된다면 얼마나 좋을까,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남북화해의 첫 걸음이 아닐까, 내심 기대가 컸다. 한 달 후 국가보훈처로부터 답신이 왔다. 그런데 72인 중 29인에 대해선 '심사를 할 수 없다'(심사비대상)는 답변이 왔다. 참담하였다. 장재성 선생을 비롯하여 광주학생독립운동의 정신적 지주였던 송 홍 선생, 광주학생독립운동의 물질적 지주였던 최상현 선생이 모두 심사비대상이라는 것이다. 어쩌자는 것이냐? 정해두 선생은 광주학생독립운동으로 옥고를 치르고 나와 면서기를 했는데, 이 일이 친일 흠결에 해당하여 서훈을 줄 수 없다는 것이다. 이기홍 선생은 광주학생독립운동으로 퇴학을 당했고, 이후 농민운동을 하다가 4년의 옥고를 치렀다. 일경은 1941년 독립투사들을 감시하려고 대화숙을 만들었는데, 이 대화숙에 들어간 것이 친일행위라는 것이다. 독립운동가의 목에 훈장을 달아드리지는 못할망정 ‘친일행위자’라는 주홍글씨를 새겨 넣었으니 “이것도 나라인가?” 유족들의 피맺힌 한을 어찌할꼬? 독립투사들이 일경에게 얼마나 혹독한 감시를 받으며 살아야 했는지 과연 보훈처 공무원들이 알기나 할까? 도대체 대한민국의 공무원이라 하는 자들이 항일투사의 삶과 인격을 심사할 자격이 있는지 나는 준엄히 묻는다. 통일된 나라를 만들기 위해 김구 선생이 평양을 방문한 것처럼 장재성 선생도 해주를 방문하였다. 돌아와 김구 선생은 저격을 당했고, 장재성 선생은 또 투옥되었다. 1949년도의 일이다. 그런데 인민군이 한강 이남으로 남하하자 대한민국 정부는 아무런 법적 절차도 거치지 않은 채 수감 중인 장재성을 총살하였다. 그러고도 지금까지 아무런 사죄의 변이 없다. "설령 100명의 사람들 중 99명이 동일한 의견을 갖고 있다 하더라도 99명이 한 사람의 의견을 묵살하는 것은 일인의 독재자가 99명의 의견을 묵살하는 것과 같다." 고교 시절 배운 존 스튜어트 밀의 금언이다. 오랜 세월 잊고 지냈던 밀의 금언을 새삼 떠올리는 까닭은 무엇인가? 건국한 지 72년의 세월이 지났다. 단 한 명의 독립투사가 아직까지 예우를 받지 못하고 있다면 대한민국은 직무유기의 범죄를 범한 것이다. 만일 백 명의 독립투사가 독립유공의 예우를 받지 못하고 있는 것이 잘못된 법 때문이라면 그 법은 폐기되어야 할 악법이다. 광주학생독립운동의 주역들 수백 명이 아직도 서훈을 받지 못하고 있다. 항일 투사의 수는 10만 명이 넘는다고 한다. 그런데 지난 72년 동안 서훈을 받은 이는 고작 1만5000명이다. 현행의 법을 그대로 존치할 경우 10만 명이 넘는 항일투사의 공적을 심사하는데 요청되는 시간은 500여 년이라는 셈이 나온다. 특단의 대책을 세워야 한다. 7월 6일 오전 11시 유족들과 함께 기념탑 앞에서 헌화를 하였다. 하늘도 슬펐을까? 추모제를 올리는데 비는 주룩주룩 내렸다. 독립훈장을 신설하자. 1945년 8월 15일 이전 독립운동의 공적만으로 서훈 여부를 판결하자. 이것만이 민족사의 정의를 바로 세우는 첩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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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광우
<철학콘서트>, <사랑하라>, <철학의 신전>, <역사콘서트> 외 다수의 저서를 집필하였다. 현재는 (사) 인문연구원 동고송의 상임이사, <장재성 기념사업회>의 운영위원장을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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