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7월 10일 백선엽이 100세를 일기로 사망했다. 곧 이어 대전국립현충원 안장이 결정되었지만 그의 자격에 관한 대립과 갈등은 피할 수 없었다. 그건 그의 죽음 이전부터 예견된 상황이기도 했다. 친일 반민족주의의 이력을 지닌 그와, 그의 지지자들이 반공주의 군인의 삶을 근거로 사후 국립현충원 안장을 소망해왔기 때문이다. 그의 죽음 앞에서 한쪽은 반공주의의 화신이자 한국전쟁의 영웅이라는 논리로 안장을 지지했고, 다른 한쪽은 항일민족주의자를 토벌한 친일부역자라는 주장으로 안장에 반대했다.
친일인명사전편찬위원회가 제작한 <친일인명사전>(2009)은 백선엽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역사적 기록이 말해주는 것처럼 그는 부정할 수 없는 ‘적극적’ 반민족주의자였다. 백선엽의 안장을 결정한 국가보훈처가 그를 친일반민족주의자로 명기해놓은 것도 그 사실을 지지해준다. 이처럼 반민족주의 부역자로 살아왔고 그에 대한 객관적 기록이 있는데도 그는 어떻게 국가적 영웅들을 기리는 애국의 전당에 잠들 수 있었던 것일까?
이해하기 힘든 모순이지만 그렇다고 그렇게 놀랄 필요도 없다. 왜냐하면 서울과 대전의 국립현충원에는 친일반민족주의자로 확정된 이들이 이미 적잖이 안장되어 있기 때문이다(박한용, “친일파들의 국립묘지 안장실태”, 2012 참조). 그 중에는 김백일, 김용기, 신현준 등, 백선엽처럼 간도특설대 경력 소유자들 다수가 포함되어 있다. 그리고 이들 중 여럿은 한국 국립묘지의 기원인 서울현충원의 가장 높은 자리(장군묘역)를 차지하는 영광을 누리면서 잠들어 있다.
이들의 공통점, 일제 패망까지 만주국 혹은 일본국 장교로 지내다 해방 정국에서 한국군으로 변신해 성공한 사람들이다. 백선엽도 마찬가지다. 1945년 월남한 뒤 군사영어학교에 입교하고 그 이듬해 육군 중위로 임관했다. 한국전쟁은 비극적인 내전이었지만 그들에게는 반드시 그렇지만은 않았을 법하다. 북한 공산당과 맞서 싸워 나라를 구한 영웅이 되어 자신들의 반민족주의 행적을 ‘세탁’할 절호의 기회였기 때문이었다. 결국 그들은 자신들의 바람대로 되었고, 백선엽의 안장은 그 정치적 탈바꿈의 마지막 드라마였다.
한국 국립묘지의 역사는 1948년에 발발한 여순사건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러니까 한국의 국립묘지는 좌익․친공 군인들에 맞서 싸우다 전사한 우익․반공 군인과 경찰들을 안장하고 추모하기 위한 제도적 구상에서 시작되었다는 이야기다. 한국 국립묘지의 이념적 정체성이 ‘반공주의’와 ‘군사주의’ 혹은 ‘반공군사주의’ 위에 조형되어야 했던 이유는 거기에 있다. 그러한 역사적 연원은 국립현충원의 안장자격과 관련해 군인들에 대단히 관대한 이유, 특히 반공주의 실천에서 뚜렷한 족적을 남긴 군인이라면 다른 중대한 도덕적 흠결이 있더라도 적극적으로 안장 자격을 부여하는 이유를 설명해준다.
2011년 8월 안장된 안현태가 그러한 사례 중 하나다. 전두환 정권에서 경호실장을 지낸 그에 대해, 특정범죄가중처벌 등에 관한 법률 위반으로 2년 6개월의 실형을 선고받았음에도, 국가보훈처 국립묘지안장심의위원회는 그가 베트남 전쟁에 참전했고, 1968년 1․21 사태 때 무장공비를 사살해 화랑무공훈장을 받은 군인이었다는 사실을 들어 안장자격을 부여했다. 하지만 백선엽의 경우 안장심의위원회의 자격 심사도 필요 없었는데, 왜냐하면 전투에서 무공을 세운 퇴역군인은 자격 심사 없이 국립묘지에 안장될 수 있다고 국립묘지법이 규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안현태와 백선엽의 안장은 한국의 국립묘지, 특히 국립현충원이 얼마나 크고 심각한 내적 모순과 이념적 정체성의 혼란을 겪고 있는지를 말해주는 상징적 사건이다. 현충원은 상식적으로 수용하기 힘든 아이러니로 채워져 있다. 애국열사와 민족지사 묘역 옆에 또는 그 보다 위에 반민족주의 군인 묘역이 조성되어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고 있다. 국립묘지란 애국의 전범(典範)과 이데아가 구현되어 있는 장소라고 한다면, 그들은 모두 애국의 이상적 존재들일 터인데, 일제에 대항해 싸운 민족주의자와 일제에 부역한 반민족주의자가 모두 애국의 인물로 추앙받는 제도적․공간적 구도는 혼동과 비일관성 그 자체다.
프랑스대혁명의 역사는 우리에게 근대 국립묘지의 원형적 아이디어를 전해준다. 혁명세력은 구체제와 싸우는 과정에서 자신의 몸과 마음을 바친 인물들을 안장할 묘지를 구상하고 파리의 한 언덕 위 성당을 그러한 장소로 용도변경하면서 그것을 ‘팡테옹’(Pantheon), 즉 만신전으로 명명했다. 그곳에 최초로 들어간 인물은 미라보(Mirabeau)였다. 구체제와의 대결이 진행되는 혁명의 초기 국면을 성공적으로 이끌어간 위대한 혁명가 미라보는 갑작스레 죽었다. 혁명세력은 그의 혁명사를 공적으로, 국가적으로 기념함으로써 혁명으로 탄생한 국가의 이념적 정체성과 애국의 본질이 무엇인가를 국민들에게 강렬한 방식으로 보여 주고자 했다. 근대 국립묘지는 그렇게 탄생했다. 그러니까 국립묘지는 한 국가의 이념적 정체성을 담아내고 있는 국민적 텍스트로 태어났다는 말이다. 그렇게 보면 국립묘지에 누가 안장될 수 있는가는 대단히 중대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그것은 당시 프랑스혁명세력의 고민이기도 했다. 최초로 안장되면서 국립묘지를 탄생시킨 미라보는 혁명가이면서 반(反) 혁명가였다. 그는 낮에는 혁명을 외치고, 밤에는 루이16세와 내통해 혁명의 전복을 모의했다. 그 기회주의적 사실이 밝혀지자 혁명세력은 주저 없이 미라보의 시신을 국립묘지에서 축출해 아무도 모르게 옮겨 묻어버렸다. 그러한 충격적인 사건으로 인해 혁명의회는 ‘10년 유예안’, 즉, 국립묘지에 안장될 자격을 지닌 애국적 인물이라고 하더라도 최소한 10년의 유예기간을 두어 그의 정치적 공과를 국민적으로 검증할 필요가 있다는 법률안을 통과시켰다.
한국의 보수는 반민족적, 반민주적 인물에 대한 비판이 제기될 때마다 다음과 같은 논리로 대응해왔다. 모든 역사적 인물은 공과가 있기 때문에 공은 공대로, 과는 과대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논리다. 한국전쟁에서 공을 세웠기 때문에 그를 안장할 수 있는 것이고, 그와 동시에 친일반민족주의의 과는 그것대로 기억하자는 것이다. 백선엽에 대한 국가보훈처의 모순적 태도도 다르지 않아 보인다.
프랑스 사례로 돌아가 보자. 미라보 또한 충분히 그럴만한 인물이었다. 비록 그에게는 반혁명 계획을 꾸민 과도 있었지만, 혁명의 거대한 물결을 만들어낸 국민의회 수립의 공을 지녔다고 평가받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혁명세력은 그렇게 판단하지 않았다. 그는 지체 없이 파묘되어야 했다. 그리고 국립묘지의 역사는 새롭게 시작되어야 했다. 문제의 본질은 무엇인가? 서로 맞교환되거나 상쇄될 수 있는 공과가 있고, 그럴 수 없는 공과가 있다는 사실이다. 혁명의 이념은 구체제의 이념과 섞일 수 없었다는 것이었고, 반동의 이념과 혁명의 이념은 서로 타협될 수 없다는 것이었다. 백선엽의 친일반민족주의와 반공주의가 서로 동등한 가치와 무게를 지닌 이념인지 우리는 묻지 않을 수 없다. 만약 그 둘이 양립한다고 말한다면 우리는 국가적 정체성과 국립묘지의 무원칙과 혼돈을 끝없이 반복할 수밖에 없다.
지난 2009년 11월, 프랑스 대통령 사르코지(N. Sarkozy)는 진보 지식인 까뮈(A. Camus)의 팡테옹 안장 계획을 발표했다. 프랑스 국립묘지 안장에 관한 최종적이고 궁극적인 결정권이 대통령에게 부여되어 있다는 점에서 그것은 충분히 실행 가능한 구상이었다. 하지만 프랑스 사회 여론은 대통령의 계획 철회를 요구했다. 사르코지와 같은 반 진보적 인물이 까뮈의 안장을 이야기하고 결정한다는 것은 적절하지도 합리적이지도 않다는 주장이었다. 결국 대통령의 정치적 구상은 무산되었다.
프랑스는 애국이라는 예민한 문제에 접근하기 위해 10년의 유예를 두었고, 최종 결정권자의 계획이라고 하더라도 사회적 반대를 무릅쓰고는 추진하지 않는 소통의 민주주의를 실천해오고 있다. 우리는 정 반대로 가고 있다. 지난 10년 사이 한국사회를 뜨겁게 달군 안현태와 백선엽은 그러한 유예와 소통의 대상이 될 인물들이었다. 그들은 안장자격을 둘러싸고 사회적으로 심대한 논쟁이 요구되는, 애국에 관한 국민적 합의에 도달하기 위해 오랜 시간을 필요로 하는 존재들이었음이 분명했다. 하지만 우리는 너무나도 가볍게 행동했고 너무나도 조급하게 결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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