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성장률과 조세 수입의 크기는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거시경제학의 역사적인 시작을 알린 경제학자 존 메이너드 케인스의 '유효수요 원리'에 따르면, 정부나 민간의 지출이 국민소득을 창출하며, 저축과 조세 수입의 크기는 국민소득의 크기가 정해지면 그에 따라 결정된다. 정부와 민간의 지출 합이 결과적으로 자신과 똑같은 크기만큼의 저축과 조세 수입의 합을 만들어낸다. 국가 재정에 초점을 맞추자면 정부의 지출이 원인이고 조세 수입이나 민간의 저축(정부가 국채 발행으로 빌려올 수 있는 재원)은 그 결과인 셈이다. 그런데 보수적인 경제학자들과 관료들은 정부한테도 예산제약이 있는데 그런 사실을 자신들만 제대로 안다고 우쭐댄다. 예산제약의 내용은, 무한대 시간에 걸쳐 미래 모든 시점의 경제 상태를 완벽하게 파악할 수 있다는 비현실적 가정 하에 조세 수입의 현재가치가 정부 지출의 현재가치를 제한한다는 것이다. 말은 어렵지만 정부 지출이 조세 수입에 의해 제약된다는 뜻이다. 결국 결과가 원인을 결정한다는 주장이다. 태양이 지구를 돈다는 식이다. 케인스가 그렇게도 열렬히 탈출하고자 했던 과거의 습관적 사고가 21세기에도 버젓이 반복되고 있는 것이다. 인과관계를 바로잡아 지출을 원인의 자리에, 조세를 결과의 자리에 놓고 보면 다른 관점이 가능하다. 실제로는 재정 지출의 총량과 그 구성 내용에 따라서는 경제성장률(국민소득의 증가율)도, 조세 수입의 크기도 달라질 수 있다. 그렇다면 재정 건전성이나 국가채무비율도 재정 지출의 크기와 내용에 의존하게 된다. 그것이 케인스가 1933년의 어느 라디오 인터뷰에서 "실업 문제를 해결하면 예산 문제는 저절로 해결될 것"이라고 자신할 수 있었던 이유이다.'화수분'과 '악어 입' 이야기로도 못 가리는 실상, 대체 뭣이 중헌디?
케인스가 경계했던 그 과거의 습관적 사고는, 코로나19로 인해 적지 않은 시민들이 생존의 위기로 내몰리는 오늘의 현실에서조차 재정 당국의 관료적 입장으로 반복 재현되고 있다. 지난달 1월 '곳간지기'를 자처한 기획재정부 장관은 '국가 재정이 화수분은 아니'라는 사실을 애써 강조했다. 2월 초에는 기획재정부 제2차관까지 가세해 늘어만 가는 재정적자를 '악어 입'에 비유하며 일본처럼 될 것을 걱정하기도 했다. 화수분이든 악어 입이든 재정을 너무 많이 쓰고 있으니 예산 제약을 고려해 이젠 아껴야 한다는 이야기이다. 하지만 실상은 달랐다. 코로나19에 대한 한국 정부의 대응은 국제통화기금(IMF) 발표 자료를 보면 다른 나라에 비해 대단히 소극적인 것이었음을 금세 알아차릴 수 있다. 2020년 12월 기준으로 한국은 예산 직접 지원이 GDP의 3%를 겨우 넘는 수준에 그쳤다. 이는 주요 선진국의 15~17%와는 비교도 안 되는 수치이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는 한국의 2020년 재정 적자를 GDP의 4.2%로 전망했는데 이는 선진국 가운데 최소 수준에 가깝다. 상당수 선진국에서 재정 적자는 GDP의 10%를 훌쩍 넘을 것이다. 2020년 한국은 코로나19의 재난 상황에서 세계적으로 재정을 가장 아껴 쓴 나라였다. 혹시 한국의 시민들한테 신비한 방역 능력이 있어 코로나19가 세계 시민들보다 덜 괴로웠던 것이 아니라면, 재정의 그 빈자리를 누가 메웠겠는지 묻지 않을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민들이 겪는 고통보다 곳간 지키기가 더 중한 오늘 한국의 재정 책임자들은 화수분을 운운하고 악어 입을 걱정하신다. 이것이 시민들에 대한 사실상의 협박이 아니면 무엇이란 말인가? 우리에게 과연 이런 재정 책임자들이 정말로 필요한지 의문이다.악어 입이 안 되게 하는 길은 경제 살리는 적극 재정뿐이다
악어 입은, 아래턱의 조세 수입은 줄어드는데 위턱의 지출은 늘어 재정 적자가 누적되고 국가채무가 증가한 1990년대 이후의 일본 상황을 빗댄 표현이다. 일본 정부는 불황에 대응해 사회간접자본(SOC) 공공투자를 늘렸고 고령화의 영향으로 복지지출도 꾸준히 늘렸다. 그런 가운데 감세까지 시행했다. 문제는 재정 투입이 단기 경기부양 차원의 비효율적인 SOC 투자에 치우치면서 막상 미래 성장잠재력 강화를 위한 산업구조 개혁 등 장기 과제에는 상대적으로 등한했던 데에 있었다. 결국 잠재성장률이 떨어지는 것을 일본 정부가 막아내지 못하면서 국가채무비율이 상승했다. 국가채무비율 분자의 빚은 커져도 분모의 GDP는 정체되었던 탓이다. 이와 같은 일본 사례는 한국 경제에 의미 있는 반면교사가 된다. 아직 채 벌어졌다고 보기도 힘든 입이지만, 실제로 이 입이 행여 장차 악어 입처럼 되는 일이 없도록 하려면 어떻게 대비하는 편이 좋을지 따져볼 일이다. 필자는 일본 사례에 비추어 볼 때, 우리의 목표는 재정 여력이 약화되기 전에 시기를 놓치지 않으면서 적극적인 재정 투자로 잠재성장률을 끌어올리거나 유지하는 것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잠재성장률 하락이 고착화되고 나면 재정 투입의 성과가 일본에서처럼 제한될 공산이 크다. 그런 상황에서는 재정 여력도 고갈되기 쉽다. 그럴 때 악어 입은 닫기 어렵다. 때를 놓치면 안 된다. 오늘 한국 경제는 기술 전환과 생태 전환을 위한 디지털 뉴딜과 그린뉴딜, 저출산 대책을 포함한 사회투자 등 장기 성장잠재력 확충을 위한 전략적 재정 정책 과제들을 마주하고 있다. 분명한 점은 현재의 위기와 전략 과제들에 어떻게 대응하는가에 따라 한국 경제의 미래 성장경로가 달라질 수 있다는 사실이다. 코로나19 때문에 한국 경제가 입은 내상이 깊다. 이른바 '이력효과'로 인해 어쩔 수 없이 성장경로에 부정적인 영향이 예상된다. 그 부정적인 영향이 크면 클수록, 기존의 성장경로로부터 궤도를 이탈시킬 정도로 더욱더 과감하고 집중적인 강력한 재정 투입이 있어야만 한다. 전략적 재정 정책 과제들의 사회적 수익률(혜택)보다 낮은 수준에서 국채 이자율이 관리될 수 있다면 정부가 빚을 더 내 투자 재원을 확보하는 것은 충분히 바람직한 선택이다. 장차 코로나19를 벗어나 경제가 정상으로 돌아온 다음에는 재정 총량을 더 키우기 위한 본격적인 증세도 필요할 터이다. 국채 발행으로든 증세로든 충분한 규모로 미래에 투자해야 한다. 그럴 때에만 악어 입이 벌어지지 않게 할 수 있다. 오늘 우리에게 재정 지출의 크기와 내용은 그래서 더욱 중요한 문제이다.악어 입이 되지 않게 하기 위해서라도 재정 당국이 재정 건전성을 일면적으로 강조해서는 안 된다
한국의 재정 당국은 악어 입이 방만한 재정 운영 때문이라고 하지만 막상 일본 노무라 증권의 경제학자 리처드 쿠는 생각이 다른 것 같다. 그는 저서 <대침체의 교훈>(김석중 옮김, 더난출판사 펴냄)을 통해 일본 정부의 대규모 재정 투입이 없었더라면 일본의 1990년대 불황은 1930년대 미국의 대공황처럼 번져갈 수도 있었음을 지적했다. 섣부른 재정 건전화는 경제 상황을 악화시켜 재정 적자를 오히려 키웠다는 점도 짚어준다. 기실 재정을 아끼는 고민부터 앞세우면 한국 경제가 안고 있는 당면한 문제들을 해결할 여지가 좁혀지게 마련이다. 정부는 재정 운영에 있어 호흡을 길게 가져가야 한다. 재정 당국이 단기적으로 재정 적자 비율이나 국가채무비율에 집착한 나머지 재정 투입의 때를 놓치거나 찔끔찔끔 투입하고 마는 것이 최악이다. 잠재성장률이 더 떨어져 장기 불황으로 접어들면 일본의 사례에서 보듯 재정적자는 안 늘리려고 해도 더 늘어나게 되어 있다. 역설적이지만 악어 입이 안 되게 하려면 재정 당국부터 정태적인 재정 건전성 기준에 대책 없이 얽매여서는 안 되는 것이다. 보수적인 경제학자들은 흔히 미래 세대에게 빚을 물려주면 안 된다고 말하지만, 그렇다고 상처 입고 다친 경제를 미래 세대에게 물려줘서도 안 된다. 지금 한국 경제는 코로나19 이후 어떤 미래 한국을 준비할 것인지, 후손들에게 어떤 달라진 사회를 물려줄 것인지, 그래서 오늘 전략적으로 어떤 재정 정책 과제에 집중할 것인지의 질문들에 매달려야 한다. 그 질문들에 대한 우리 고민의 치열함의 정도가, 그리고 우리 대답의 내용이, 한국 경제의 미래를 결정할 것이다. * 내가만드는복지국가는 의제별 연대 활동을 통해 풀뿌리 시민의 복지 주체 형성을 도모하는 복지단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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