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는 역사박물관으로 변한 서대문형무소 감방 앞에 서자, 어언 50년 전 18살의 대학 2학년 생으로 이곳에 벌벌 떨며 들어와 감방장과 나눴던 첫 대화가 떠올라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감방에 들어가자 제일 고참인 감방장이 몇 학년이냐고 물어, "내가 대학생으로 데모하다 들어 온줄 아는구나"라고 생각해 반갑게 2학년이라고 답한 것인데, 살벌한 얼굴로 "1학년 때 뭐로 왔어?"라고 물어 어안이 벙벙했다. 알고 보니 몇 학년이냐는 것이 전과가 몇 범이냐는 은어여서, 2학년이라고 하니 이미 전과가 있는 것으로 알았던 것이다. 5범부터는 석사과정, 7범부터는 박사과정이라고 불렀다.
전국에 많은 교도소 중 서대문형무소는 특별하다. 일제시대에는 독립투사들이 으레 거쳐가야 했던 곳이었고, 해방 이후에는 민중운동가들과 민주투사들이 반드시 거쳐가야 했던 일명 '학교'였다. 일제는 의병운동이 거세지자 이들을 수용하기 위해 1908년 이 형무소를 건설했다. 이후 1987년 서울구치소가 의왕으로 이전될 때까지 80년 간 수많은 독립운동가와 민주투사들이 이곳을 거쳐갔다. 이 점에서, 서대문형무소는 우리의 독립운동사, 혁명운동·민중운동사, 민주화운동사에 다름 아니다. 다시 말해, 이곳은 우리가 독립운동, 민주화운동을 공부하기 위해 모두 한번은 들러야 하는 역사교육의 현장이다. '자유와 평화를 위한 80년.' 서대문형무소는 형무소 80년의 역사를 이렇게 설명해 놓았다. 구치소 이전 후 대부분의 건물은 철거했지만, 망루와 보안과 청사와 일부 옥사, 한센병사, 사형장 등을 남겨놓아 역사관으로 사용하고 있다.
일제는 사상범이 늘어나면서 1930년대에는 그 규모를 30배나 늘렸다. 수용 인원도 건설 초기 2000명대에서 3‧1운동 이후 1만 명 수준으로 늘어났고, 일제 말에는 2만 명을 넘어섰다. 일제는 3‧1운동 후 수용자가 급속히 늘어나면서, 감시가 용이하도록 간수가 가운데에 있고 감방을 부채꼴 모양으로 배치한 원형감옥(파놉티콘)형태로 옥사를 지었다(파놉티콘은 1798년 영국의 철학자 제러미 밴덤이 처음 구상한 것으로 1970년대 포스트모더니즘의 철학자 미셀 푸코가 현대사회를 이로 비유해 유명해졌다). 역사관에는 이곳을 거쳐 간 독립투사들이 잘 정리되어 있다. 이강년, 허위 등의 의병장들이 이곳에서 순국했고, 의열단의 이재명, 강우규 의사, 이후 유관순과 손병희, 한용운 등 3‧1운동 민족대표 33인, 1920년대에는 간도 15만원 군자금 강탈사건의 한상호 등과 망우리 우편수송차 습격 의거의 이선구, 1930년대에는 조선공산당 재건을 도모한 경성트로이카 이재유, 이현상, 김삼룡 등이 이곳을 거쳐갔다. 문학가로는 심훈, 김광섭, 한용운이, 임정 인사로는 김구, 안창호, 김동삼, 양기탁, 김원봉, 김성숙, 여운형 등이 이곳에서 와신상담을 해야 했다. 역사관에는 일제의 악명 높은 고문 장비들과 장면들을 재현해 놓았다.
해방 후에는 1950년대 진보당의 조봉암, 5‧16직후의 민족일보 사장 조용수, 유신 직후 인혁당 재건위의 서도원, 도예종 등, 박정희를 저격하려다가 육영수를 저격한 문세광, 박정희를 암살한 김재규 중앙정보부장 등이 이곳에서 복역하다가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이들 이외에도 1960년대 말 동백림사건으로 유럽에서 납치되어 온 세계적인 예술가 윤이상과 이응노 화백이 이곳에 갇혀있었고, 유신에 반기를 든 지학순 주교, 박형규 목사 등 민주투사들도 모두 이곳을 거쳐 갔다.
"아니 이게 누구야!" 일제 강점기 이후에 진열되어 있는 '해방 후 민주화운동' 부분을 보다가, 나도 모르게 소리를 지르고 말았다. 동백림사건 공판 사진 바로 밑에 서대문형무소를 나오는 젊은 청년들의 사진에서 키가 크고 마른 청년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바로 나였다. 수많은 민주화운동 중 하필 내 사진이 거기에 걸리게 된 것인지 모르지만, 너무 반가웠다. "지난 대선은 부정선거이니 총선을 보이콧해야 합니다." 박정희와 김대중이 대결한 1971년 대통령선거에서 '운동권'이었던 나는 관권선거를 감시하는 대학생들의 선거참관인단을 조직해 참여하고 많은 부정선거를 목격했다. 나는 여러 학생대표들과 야당인 신민당사를 찾아가 김홍일 당수를 만나 총선 보이콧에 대해 화기애애한 분위기에서 이야기하고 나왔는데, 박정희 정권은 이를 신민당사 난입사건으로 규정해 선거법 위반과 정당법 위반으로 기소했다. 당시는 사법부의 독립성이 살아있었고 담당 판사가 강단이 있기로 유명한 판사여서 무죄판결을 받고 출옥하는 사진이었다.
옥사에 들어가 감방을 돌아보자, 50년 전의 기억이 새록새록 살아났다. 한글의 자음과 모음의 순서로 벽을 두드려 다른 방에 있는 죄수와 '통방(통신)'을 하는 '타벽통보법'도 오랜만에 해보았다. 12동에는 빛이 들어오지 못하게 해 밤낮을 구별할 수 없게 만들고 엄청난 고통을 주는 '먹방'이라는 징벌방이 있다. 이 먹방을 보고 있으면, 인간이 다른 인간에게 고통을 주기 위해 얼마나 머리를 쓰고 있는가를 실감하게 된다.
서대문형무소에서 꼭 가보아야 할 곳은 여옥사, 특히 전설적인 8호 감방이다. 유관순 등 3‧1운동으로 잡혀온 여성독립운동가들이 갇혀있던 곳으로, 이들은 3‧1운동 1주년이 되는 1920년 3월 1일 이곳에서 만세투쟁을 벌였다. 1920년대에는 우파와 사회주의 계열의 여성운동들을 통합한 근우회가 결성되어 그 관계자들이 들어왔고, 1929년 광주학생독립운동이 터지자 허정숙이 이를 돕다가 잡혀왔다. 1930~40년대에는 일본의 인적, 물적 착취에 대항하는 노동운동을 벌여 총파업, 산전산후 휴가보장, 수유시간 보장, 남녀 동일노동 동일임금 보장 투쟁과 정신대 등 국가총동원법에 저항하는 투쟁을 하다가 많은 여성들이 이곳으로 들어왔다. 이들은 식민지와 여성이라는 이중적 수탈과 억압 속에서 몸부림치다가 이곳에 끌려온 것이다.
밖으로 나가자, 언덕 위에 한센병 환자들을 격리수용한 병동이 있었다. 조금을 더 가면, 위성안테나 같은 커다란 원형판이 반쪽 하늘을 향한 각도로 설치되어 있다. "여기에 왜 위성안테나가 필요하지?" 의아해서 가까이 가보니 원형판에 수많은 이름들이 깨알같이 새겨져 있었다. 이곳에서 사형당한 사람들의 이름이었다. 유관순, 김동삼의 이름이 눈에 띠었다. 이곳에서 사형을 당한 희생자들을 위한 추모 조형물이다.
이곳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사형장이 있다. 사각형으로 된 낡은 벽돌건물인 사형장 안에는 교수형에 사용했던 밧줄이 천장에 매달려있어 보는 이를 섬뜩하게 한다. 사형장 뒤쪽에는 시신이 고문의 흔적이 많거나 사형 집행 사실이 알려질 경우 사회적으로 문제가 될 인물의 시신을 몰래 빼돌리던 시구문이 있다. 고문의 흔적을 없애기 위해 일본이 시신을 철관에 넣어 봉인한 뒤 돌려준 6‧10만세 사건의 주범 권오설, 그리고 고문의 흔적을 없애려고 시신을 실은 장례차를 차째로 끌어가 강제로 화장을 시킨 인혁당 재건위 일부 사형수들의 시신은 아마도 이곳을 통해 나왔을 것이라고 생각하니, 가슴이 미어졌다. 일제는 사형장을 세울 때인 1916년 미루나무 한 그루를 사형장 앞에, 다른 한 그루를 사형장 안에 심었다. 안에 심은 나무는 사형수들의 한이 어려서인지, 밖의 나무보다 훨씬 자라지 못하다가 결국 말라죽었다고 한다. 사형장 밖의 미루나무는 아직도 살아있다. 사형장으로 끌려 들어가는 사형수들이 이 나무를 잡고 울었다고 해서 '통곡의 나무'라고 불린다.
이 나무는 일제 강점기에는 조국의 독립을 위해 몸부림치다가 이곳에서 목숨을 잃은 유관순 등 독립투사들의, 해방 후에는 민주변혁과 민주화를 위해 투쟁하다가 목숨을 잃은 조봉암으로부터 인혁당 재건위 관계자 등의 최후를 지켜봤을 역사의 살아있는 증인이다. 이 증인 앞에서 나는 이들 모두를 위해 감사와 존경의 묵념을 드렸다. "감사합니다. 편안히 잠드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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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호철
서강대학교 명예교수
화가를 꿈꾸다 서울대학교 정치학과로 진학했다. 독재에 맞서다 제적, 투옥, 강제 징집을 거쳐 8년 만에 졸업했다. 어렵게 기자가 됐지만, '1980년 광주 학살'에 저항하다 유학을 갔고 서강대학교 정치외교학과 교수로 일하며 진보적 학술 활동과 사회운동을 펼쳐왔다. <국가와 민주주의>, <한국과 한국 정치>, <촛불혁명과 2017년 체제> 등 이론서와 <마추픽추 정상에서 라틴아메리카를 보다>, <레드 로드-대장정 13800KM 중국을 보다> 등 역사 기행서를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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