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대주입니까?' 코로나19 지원금 신청서를 작성하고 있는데 엉뚱한 질문이 나타났다. 아니 코로나 지원금 신청하는데 왜 세대주가 필요한가? 21세기지만, 우리 사회는 이처럼 가족제도 속에 엄청난 가부장제와 비민주적인 구조가 내재해 있다. <개인적인 것이 정치적이다>(The Personal is Political). 우리는 정치란 정부, 선거와 같은 '공적' 세계에 대한 것이고 가정 등 '사적'인 영역은 비정치적이라고 생각해 왔다. 1969년 기존질서에 반기를 든 68혁명과 반전운동의 열기 속에 미국의 페미니스트 캐롤 하니쉬가 쓴 이 글은 이 같은 통념을 갈기갈기 찢어버렸다.
그렇다. 가족과 가정은 '누가 밥을 짓고 설거지를 하느냐?'로부터 '텔레비전에서 무슨 프로를 볼 것이냐‘에 이르기까지 권력 관계로 가득하다. 매일매일 우리가 부딪치는 일상 속에 내재해 있는 '일상성의 정치'의 일부인 '가정의 정치'다. 어느 집에 들어가면 '텔레비전 채널권을 누가 가지고 있느냐'에서 그 집의 권력 관계를 알 수 있다. 이 같은 권력투쟁이 격해지면, 모든 정치투쟁에 그러하듯이, 접시가 날아다니는 '무장투쟁'으로 발전한다. 해방 후 한국현대사를 한번만 나눈다면 언제를 기준으로 나눌까? 어떤 기준으로 시기구분을 할 것인가에 따라 달라지지만, 1987년 민주화 이전과 이후로 나누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그러나 한국현대사, 더 나아가 한국사(최소한 조선조 이후의 한국사)를 2005년을 기준으로 나누어야 할지도 모른다. 2005년에 무슨 일이 있었기에, 2005년이 시대구분의 기준이 될까? 그것은 세계에서 우리나라에만 남아있던 호주제, 즉 부계 혈통을 바탕으로 호주를 단위로 가족이 구성되는 것으로 본 가부장적인 제도가 2005년 가족법이 개정되어 폐지되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성도 무조건 아버지의 성을 따르던 것을 아버지의 성을 따르는 것을 원칙으로 하되 본인들이 원할 경우 어머니의 성을 따를 수 있도록 개정했다. 우리 인구의 절반인 여성의 입장에서 바라보면, 한국현대사, 아니 한국사는 '2005년 이전'과 '2005년 이후'로 나눠진다고 볼 수 있다. 여의도에 가면 여의도순복음교회 바로 옆에 '한국가정법률상담소'라고 쓰인 근사한 건물이 있다. 최초의 여성 법률가였던 이태영 여사가 가족법 개정 운동을 벌였던 여성법률사무소가 가정법률사무소를 거쳐 1976년 최종적으로 이름을 바꾼 것으로, 비민주적이고 가부장적인 우리의 가족법을 개정시킨 일등 산실이자 '가정 민주화운동'의 중심이다.
이화여대를 나온 이태영은 결혼도 하고 나이도 33살이나 됐던 1946년에 서울 법대에 다시 입학했고 1952년 여성으로는 처음으로 사법고시에 합격했다. 이태영은 판사를 지원했지만, 이승만이 김병로 대법원장의 간청에도 이태영이 여성이고 야당 정치인인 정일형의 부인이라는 이유로 판사 임명을 거부했다. 변호사 개업을 한 이태영은 많은 여성들의 억울한 사정을 듣고 가정법 개정에 나서게 된다. 우리 헌법은 남녀평등을 규정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하위법인 가족법은 호주제가 존재하고 남녀 차별적 규정들이 산재하는 등 전혀 그렇지 않았다. 이태영은 1952년 YWCA, 대한부인회, 대한여자청년회, 여성문제연구원 등 여성단체연합을 조직해 개정 운동을 시작했고 1956년 여성법률사무소를 만들고 그 소장을 맡아 호주제 폐지, 동성동본 결혼금지 폐지 등 본격적인 가족법 개정 운동을 벌였다.
1952년 개정 운동을 시작하여 2005년 호주제가 사라지기까지, 반세기 이상이 걸린 것이다. 여성법률사무소, 이후 한국가정법률사무소는 가족법 개정 운동만이 아니라 법률 지식이 부족한 여성과 청소년, 어린이들에게 상담을 제공하는 한편 가정폭력과 어린이 학대가 범죄라는 것을 알렸다. 또 1963년 가정문제를 전담하는 가정법원이 생기는데도 크게 기여했다. 가족법 개정에 있어서, 여자는 '삼종지도(三從之道, 어려서는 아버지를 따르고, 결혼해서는 남편을 따르고, 늙어서는 아들을 따르라)'라는 세 가지 법도를 따라야 한다는 식의 우리의 오랜 유교적 전통은 심각한 장애였다. 이태영을 판사에 임명하도록 이승만에서 추천한 바 있는 김병로 대법원장까지도 이태영이 가족법 개정안을 가지고 찾아가자 "다른 여자들은 불평 없이 잘 사는데, 법 좀 배웠다고 건방지게 법을 고치라고 나서느냐"고 호통을 쳤다고 한다. 1957년 이태영의 남편인 정일형 의원 등이 여성들의 입장을 반영한 민법개정안을 국회에 제출했지만 유림들의 모임인 유도회가 가족법 개정은 우리의 오랜 미풍양속을 헤치고 가정의 혼란을 가져온다고 결사적으로 반대하면서 개정이 무산되고 말았다. 1972년 박정희는 유신을 선포했고 유신헌법에 의해 국회의원의 3분의 1은 대통령이 임명할 수 있게 됐다. 그 결과 여성 국회의원 수가 12명으로 늘어났다. 좋은 기회라고 생각한 여성계는 1973년 범여성가족법개정촉진회를 결성하고 이태영 등의 자문을 받아 가족법 344개 조항 중 81개를 수정하고 19개 조항을 신설하는 대대적인 개정안을 국회에 제출했다. 이에 맞서 유림들도 '가족법재정저지범국민협의회'를 만들어 개정을 극렬 반대했다. 그 결과 개정은 극히 부분적인 개정에 그쳤다.
1980년대도 마찬가지다. 1983년 유엔여성차별철폐협약의 국회 비준을 앞두고 이 협약에 어긋나는 성차별적 가족법 개정에 나섰지만 무산됐고 1986년 개정안도 유림 5000여 명이 전국에서 몰려와 가족법 개정 결사반대 시위를 하면서 물 건너갔다. 1987년 민주화와 함께 여성단체들은 다시 한 번 가족법 개정에 총력을 다 했고 1989년 드디어 대대적인 가족법 개정이 이루어졌다. 호주제는 존치하되 호주의 권리와 의무를 삭제했고, 이혼 배우자의 재산분할청구권을 신설하고, 부모가 친권을 공동으로 행사하고 부모가 합의하지 못할 때는 가정법원이 결정하고, 이혼 부부가 자녀를 평등하게 면접할 수 있게 했으며, 재산상속에서 아들, 딸, 기혼, 미혼 등의 차이 없이 균등하게 상속하게 했다. 1997년에는 부모의 성을 함께 쓰기 운동이 일어났고 헌법재판소가 동성동본 결혼 금지 규정에 대해 헌법불일치 판정을 내렸다. 이 같은 노력의 결과 2005년 드디어 호주제가 폐지되고 어머니의 성을 쓰는 것도 가능해졌다. 이전까지 금지되었던 동성동본의 결혼도 허용하고 대신 근친결혼을 금지하도록 했다. "가족법이 개정되었습니다. 오백년 묵은 차별의 벽이 무너졌습니다. 주위의 많은 분들이 축하한다고 말해옵니다. 그러나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여성이 새로운 것을 얻은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다만 '제자리'를 찾았을 따름입니다." 한국가정법률사무소 빌딩을 올려다보자, 이태영이 1989년 제 3차 가정법 개정 이후 소감을 묻는 기자에게 한 이야기가 떠올랐다. 이태영 박사를 비롯한 수많은 여성들의 노력으로 호주제가 폐지되는 등 가족법이 많이 개혁됐지만 아직도 갈 길은 멀다. 여의도를 떠나며 나는 물었다. 언제쯤 가장도 아버지, 어머니, 아들과 딸이 입후보해 선거공약을 내걸고 유세를 해 투표로 선출하는 시대가 올 것인가? 2001년 네덜란드를 시작으로 선진국이라고 부르는 미국과 서유럽의 대부분의 국가들, 남아프리카와 아르헨티나 브라질 등 남미의 여러 나라들, 그리고 대만이 2019년 허용한 동성 결혼을 우리는 언제나 허용할 수 있을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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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호철
서강대학교 명예교수
화가를 꿈꾸다 서울대학교 정치학과로 진학했다. 독재에 맞서다 제적, 투옥, 강제 징집을 거쳐 8년 만에 졸업했다. 어렵게 기자가 됐지만, '1980년 광주 학살'에 저항하다 유학을 갔고 서강대학교 정치외교학과 교수로 일하며 진보적 학술 활동과 사회운동을 펼쳐왔다. <국가와 민주주의>, <한국과 한국 정치>, <촛불혁명과 2017년 체제> 등 이론서와 <마추픽추 정상에서 라틴아메리카를 보다>, <레드 로드-대장정 13800KM 중국을 보다> 등 역사 기행서를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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