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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의도에서 시작해 킨텍스에서 끝난 '진보정당 황금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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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의도에서 시작해 킨텍스에서 끝난 '진보정당 황금기' [손호철의 발자국] 72. 서울 여의도 : 비극으로 끝난 민주노동당의 실험
'심장에 새겨 세우며.' 우리 민주화운동의 실질적인 '국립묘지'인 경기도 남양주 모란공원에 있는 노회찬 전 의원의 묘비 뒷면에는 그의 오랜 친구인 장석 시인이 쓴 글이 새겨져 있다. 노 전 의원은 1987년 이후 부활한 진보정당 운동의 핵심 기획자였고 주역이었다.
▲ 1987년 민주화 이후 진보정당 운동의 중심이었던 노회찬 의원은 이제 모란민주묘역에 누워있다. ⓒ손호철
"새는 좌우의 날개로 난다." 리영희 선생이 잘 지적했듯이, 정치 역시 좌와 우, 진보와 보수의 두 개의 날개로 날아야, 사회가 균형 있게 발전할 수 있다. 그러나 해방 8년사의 이념갈등이후 한국사회는 '극우반공사회'로 변화하면서 진보정당은 사라지고 말았다. 극우반공사회라는 척박한 풍토에서 소수 진보인사들은 일생을 걸고 진보정당을 부활시키기 위해 고전분투했다.
▲ 진보정당이 없는 한국정치의 기형성을 비판한 리영희 선생 책의 표지
여기에서 우리가 명확해 해야 할 것은 '진보'의 의미이다. 왜냐하면, 김대중, 노무현, 문재인 정부가 '진보', 아니 '좌파'라고 생각하는 일부의 용법에 따르면, 1953년 이후 '진보정당'이 사라졌다는 것이 이해가 안 될 것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더불어민주당이 있는데 왜 진보정당이 없다고 하느냐고 반문할 수 있다. 이는 '진보'라는 용어를 잘못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민주당과 같은 소위 '민주야당'들은 역사적으로 이승만에 대립한 한민당에 뿌리를 둔 '개혁적 보수정당'으로, 조봉암의 진보당과 같은 '진보정당'과는 거리가 멀다. 즉 기본적으로 미국의 민주당과 같은 자유주의(liberal) 정당이며 유럽의 사회민주당이나 사회당 같은 진보(progressive)정당은 아니다. 진보정당이란 사회민주주의와 사회주의 등을 추구하는 정당을 의미하며, 우리의 정당정치는 진보정당이 사라진 가운데 자유당, 공화당, 민정당에서 국민의 힘으로 이어져온 (극우)보수(conservative) 정당, 한민당에서 더불어민주당으로 이어져온 자유주의 정당이 경쟁하는 '보수 양당구도'가 지배해 왔다. 이 같은 시각에서 볼 때, 우리의 진보정당 운동은 크게 4기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제1기는 일제하 민족해방운동과 결합되어 시작된 조선공산당 성립 등 좌파정당 운동이다. 이는 해방공간에서 미군정과 이승만 정권에 의해 압살되고 말았다. 제2기는 1950년대 중반 조봉암이 만든 진보당이다. 이 역시 이승만의 조봉암 사법살인으로 끝장나고 말았다. 제3기는 4‧19혁명 이후다. 사회대중당 등 다양한 진보정당들이 만들어져 국회에 진출했지만 5‧16쿠데타는 이 실험도 짓밟아 버렸다.
▲ 한국전쟁 후 진보정당 운동의 선구자인 조봉암의 선거포스터. ⓒ죽산 조봉암기념사업회 자료
제4기는 1987년 민주화 이후 민중의당을 시작으로 민중당, 국민승리21를 거쳐 민주노동당으로 이어진 새로운 진보정당 설립 움직임이다. 이전의 운동들은 기본적으로 일제와 해방정국, 이 시대의 특징인 식민지반봉건사회론(한국이 식민지이자 농촌의 봉건적 수탈체제가 지배적인 사회라는)에 기초한 진보정당 움직임이었다면, 제4기는 1960~70년대의 산업화에 따른 '상당히 발달한 자본주의'와 그의 결과로 성장한 노동운동 등에 기초한 새로운 진보정당이었다. 이 시기의 중심에 바로 노회찬이 있었다. 이처럼 변화한 사회적 조건이외에도 제4기가 이전의 제 2, 3기와 다른 중요한 특징이 있다. 그것은 노동자들의 자주적 조직인 민주노총, 농민들의 조직인 전농(전국농민연합회), 빈민들의 조직인 전빈련(전국빈민연합) 등 기층대중조직들이 만들어져 이들이 당의 뿌리 역할을 했다는 점이다. 진보적 지식인과 '먹물' 중심의 한국전쟁 이후의 진보정당 움직임이 대중적인 기반을 갖게 된 것이다. 반공주의와 지역주의 등으로 인해 초기에 어려움을 겪던 이 시기 운동이 2000년대 들어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선거제도의 변화 때문이다. 헌법재판소가 거대정당들이 나누어 먹던 전국구 제도를 위헌으로 판정하면서, 지지후보만이 아니라 지지정당을 별도로 찍는 제도(정당명부식 비례대표제)가 2000년대 초에 도입된 것이다. 이에 따라 이전까지 사표가 되고 말았던 진보정당 표가 의미를 갖게 됐다. 게다가 노동조합도 정치활동을 할 수 있게 법이 바뀌었다. 그 결과 2004년 진보정당이 1960년 이후 40여년 만에 원내진출에 성공했다. 구체적으로, 2004년 총선에서 민주노동당의 권영길, 조승수가 노동자 밀집지역인 창원과 울산에서 승리했고, 비례대표로 단병호 전 민주노총위원장으로부터 마지막 의석을 놓고 김종필을 꺾은 노회찬까지 8명의 의원이 당선되어 진보정당이 당당히 10명의 의원을 가진 제3당으로 자리 잡을 수 있었다.
▲ 민주노동당이 제3당으로 등장한 2004년 총선 당시 민주노총의 선거포스터
예상 밖의 빠른 성공은 '축복을 가장한 저주'였다. 제3당으로 제도정치에 자리 잡고 국고보조까지 받게 되자, 다수파의 패권주의가 발동한 것이다. 분단 상황과 관련해, 우리의 사회운동과 정치운동은 오래 전부터 북한과 분단문제를 둘러싸고 정파적 대립이 생겨났다. 4‧19 이후 있었던 일부 진보정당 움직임부터 1960년대의 통혁당 등에서는 북한을 남한혁명의 '민주기지'로 보고 미제국주의를 주된 적으로 생각하는 '친북반미적' 흐름이 있었고, 조봉암의 진보당, 사회대중당 등은 이와 대립하여 남한의 독자적인 변혁을 강조하는 '사회민주주의적' 흐름에 가까웠다. 1980년 광주민중항쟁 이후 진보운동이 부활하면서, 이 같은 전통이 되살아났다. 전대협과 한총련과 같은 학생운동, 나아가 사회운동에서 다수파는 반미와 민족문제를 강조하는 '자주파', 소위 NL(National Liberation)이었다. 특히 북한의 주체사상을 추종하는 '주사파'도 나타났다. 반면에 한국이 미국 등에 종속되어 있기는 하지만 상당한 자율성을 가지고 있으며, 재벌과 노동 등 우리 내부의 계급문제 등 사회문제가 중요하다는 '평등파', 소위 PD(People’s Democracy)는 소수파였다. 자주파는 기본적으로 야당 중 '상대적으로 진보적'인 김대중을 지지한다는 '비판적 지지' 노선을 추구했다면, 노회찬, 심상정 등 평등파는 독자적인 진보정당 건설에 앞장섰다. 하지만 자주파는 '군자산 결의' 후 독자정당 건설로 노선을 바꾸어 민주노동당 건설에 뒤늦게 참여했고, 위장전입 등을 통해 당을 장악했다. 당은 장악했지만 노회찬, 심상정과 같은 대중정치인을 갖지 못해 2선에 머물렀던 자주파는 2004년 총선 승리 후 수적 다수에 의해 패권주의를 노골화했다. 나아가 북의 핵개발을 '자위권'이라고 옹호하는가 하면 일부가 당의 내부 동향을 북한에 보고한 일심회 사건이 터졌다. 특히 2007년 대선에서 심상정, 노회찬으로 '진보간판의 세대교체'가 필요함에도 불구하고 이미 두 차례 대통령선거에 출마한 권영길이 노욕으로 자주파와 연합해 경선에 승리한 뒤, 신자유주의로 민생문제가 시급함에도 불구하고 정세와 맞지 않는 남북한의 '코리아연방'을 주된 선거공약으로 내걸었다가 매우 저조한 지지율을 기록했다. 이는 결국 평등파가 탈당해 진보신당을 만드는 분당 사태로 이어졌다. 이정희를 영입한 민주노동당은 진보신당으로 출마해 2008년 총선에서 낙선한 뒤 탈당한 심상정, 노회찬, 조승수, 민주당 계열로 '진보'라고 보기 어려운 유시민의 국민참여당(국참)과 통합해 통합진보당을 만들었다. '새로운 진보정당의 실험'으로 기대를 모았던 진보신당은 노회찬과 심상정이라는 당의 간판을 잃고 활동가 중심의 '정치서클'로 전락하고 말았다. 제2의 통합으로 새로운 전기를 만들 것처럼 보였던 통합진보당은 2012년 총선 비례대표후보를 뽑는 내부 선거에서 막후 실세였던 이석기 등 자기파를 당선시키기 위한 부정선거와 일산 킨텍스에서 열린 관련 중앙위원회에서 벌어진 '당권파'의 폭력사태로 끝장이 나고 말았다.
▲ 통합진보당 창립을 선언하는 유시민, 이정희, 심상정 의원 ⓒ연합뉴스
▲ 통진당 중앙위에서 일어난 폭력 사태로 통진당 실험을 비극으로 끝낸 일산 킨텍스 ⓒ손호철
이후 박근혜 정부는 당권파인 자주파의 핵심 '경기동부'의 실세 이석기를 내란음모, 내란선동, 국가보안법으로 구속했고 대법원은 내란선동에 대해 유죄를 인정해 9년형을 선고했다. 뿐만 아니라 헌법재판소가 노회찬과 심상정, 국참계, 인천연합 등이 떠나고 강성 자주파만 남은 통합진보당에 대해 북한식 사회주의를 실현하려는 숨은 목적을 가지고 내란을 논의하는 회합을 개최하는 등의 활동을 한 것은 위헌이라며 해산조치를 했다. 이석기 사건도 쟁점이 되고 있지만, 진짜 문제는 통합진보당의 해산이다. 설사 통합진보당의 노선이 잘못된 것이라고 하더라도, 이를 정치시장에서 유권자들이 투표로 거르게 하는 것이 아니라 정부가 직접 해산시킨 것은 자유민주주의의 원칙을 파괴한 반민주적 정치탄압이다(일각에서는 사법농단으로 문제가 되고 있는 양승태 전 대법원장이 이에 개입했다는 의혹도 제기하고 있다). '여의도에서 시작해 킨텍스에서 끝났다.' 후세는 1987년 민주화 이후의 제4기 진보정치운동을 이렇게 평가할 것이다. 제4기 진보정당운동의 황금기는 민주노동당이 원내진출에 성공했던 2004년에서 분당한 2008년까지이다. 민주노총, 전농 등 기층민중단체들이 이의 뿌리 역할을 해 주었고 노회찬, 심상정 의원 등은 부유세 등 보수정치에서는 볼 수 없었던 진보적 아이디어로 바람을 일으켰다. 이 황금기에 민주노동당의 당사였던 여의도의 한양빌딩(민주노동당이 떠난 뒤 신한국당이 입주해 이명박, 박근혜를 대통령으로 만든 곳이다) 앞에 서자 부패하고 반민주적인 정치인들을 바꿔야 한다는 시민단체들의 낙선운동에 대해 "인물이 아니라 50년 삼겹살 구어 먹어 새까맣게 탄 불판 자체를 바꾸어야 한다"고 기염을 토하던 노 전 의원의 기백이 그리워졌다.
▲ 민주노동당이 '황금기'에 입주해 있었던 여의도 한양빌딩 ⓒ손호철
'가자 민중의 바다로'라는 구호 아래 어렵게 원내진출에 성공한 제4기 진보정당운동은 결국 정파적 대립과 다수파의 패권주의, 북한의 핵무장과 3대 세습까지도 옹호하는 등 대중적 정서와 거리가 먼 다수파의 '친북노선', 나아가 자기파를 당선시키기 위한 부정선거와 폭력사태로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이후 심상정, 노회찬 의원과 국참계, 자주파 중 온건파인 인천연합 등이 정의당을 만들었고 여기에 국민모임, 노동정치연대, 진보결집이 다시 통합해, 10%의 득표율까지 기록하기도 했다. 하지만 조국 사태에 대한 침묵으로 대중의 비판을 받고 일부 당직자의 성추행 의혹 등으로 위기에 처해 있다.
▲ 통진당 사태 후 심상정, 노회찬 등 비(非)통진당 계열이 창당한 정의당. 한 때 10%의 지지를 얻기도 했지만 조국 사태와 성추행 문제 등으로 위기에 처해 있다. ⓒ손호철
헌법재판소의 잘못된 통합진보당 해산 결정으로 당을 잃은 경기동부 등 강성 자주파는 민중당을 만들었고 이후 진보당으로 이름을 바꿨지만 1%의 지지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혁명적인 사회변혁노동자당은 변혁성은 가지고 있는지 모르지만, 대중성은 없는 급진적 활동가들의 정치서클에 불과하다. 다른 군소 진보정당들도 마찬가지다. 특히 녹색당 등 일부는 연동형 비레대표제 도입 후 더불어민주당이 만든 위성비례정당 참여를 놓고 명분과 실리를 다 잃거나 실리를 얻으려다 진보정당으로서의 정체성을 잃고 말았다. '21세기의 새로운 진보정당은 어디로 가야 하는가?' 비극의 현장인 킨텍스를 떠나 서울로 들어오는 차 안에서 나는 깊은 고민에 빠졌다. 분명한 것은 21세기의 제5기 진보정당은 '전통적인 좌파'로는 불가능하고 노동을 중심으로 한 전통적 좌파(적) 이외에도 생태주의(녹), 페미니즘(보라)의 '적녹보연합', 나아가 다양한 진보운동의 '무지개연합'에 의해서만 가능하다는 점이다. 또 거대양당의 위성정당 설립으로 희극으로 끝나고 말았지만, 지지율대로 의석수를 갖는 독일식의 연동형 비례대표제가 제대로 시행되고 사상의 자유를 옥죄는 국가보안법이 폐지되어야, 소수자의 목소리를 대변할 수 있는 진보정당이 자리 잡을 수 있다. 민주주의의 핵심은 모든 사람의 한 표가 똑같이 평가를 받는 것이라는 당연한 사실과 관련해, 헌법재판소는 도시와 농촌 간의 인구 차이로 표의 가치가 두 배 이상 차이가 나는 것은 위헌이라고 판정했지만, 양대 거대정당에 던지는 표는 소수 진보정당에 투표하는 표의 7배로 계산되고 있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변혁적이고, 진보적이면서, 동시에 대중적인 새로운 진보정당은 불가능한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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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호철
화가를 꿈꾸다 서울대학교 정치학과로 진학했다. 독재에 맞서다 제적, 투옥, 강제 징집을 거쳐 8년 만에 졸업했다. 어렵게 기자가 됐지만, '1980년 광주 학살'에 저항하다 유학을 갔고 서강대학교 정치외교학과 교수로 일하며 진보적 학술 활동과 사회운동을 펼쳐왔다. <국가와 민주주의>, <한국과 한국 정치>, <촛불혁명과 2017년 체제> 등 이론서와 <마추픽추 정상에서 라틴아메리카를 보다>, <레드 로드-대장정 13800KM 중국을 보다> 등 역사 기행서를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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