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근현대사 기행이 이제 끝났다. 이번 기행은 지난 해 봄 답사를 시작해 8월부터 <한국일보>에 주 1회씩 30회를 전면 연재한 뒤, 올해 3월부터 <프레시안>에 주 3회 연재해 1년 만에 총 103곳을 다루었다. 이번 답사는 오래 전부터 준비한 것이 아니라 갑자기 이루어진 것이다. 그것은 코로나19 바이러스 때문이다. 재작년 정년 후 그람시, 로자 룩셈부르크, 트로츠키 등 실패한 좌파혁명가들의 사상기행을 하기로 마음을 먹어 그람시 기행을 끝냈고, 작년 봄 로자 룩셈부르크 기행을 떠날 계획이었다. 그러나 코로나19가 터져 나오면서 외국 여행을 떠날 수 없게 되면서, 나이가 훨씬 들어 외국을 다니기 어려워질 때 하려고 생각했던 한국근현대사 기행을 앞당겨 하게 된 것이다. 기행을 마음먹은 지난 해 봄, 답사 대상 120여 곳을 선정하고 답사를 시작해 전국 방방곡곡으로 1년 3개월 동안 3만5000Km를 달렸다. 서울~부산이 왕복 900Km이니 서울~부산 거리를 40번 왕복한 셈이다. 비행기를 타고 가 렌트카를 한 제주도, KTX를 타고 이동한 부산과 광주, 대중교통을 이용한 서울의 이동거리를 포함하면 이동거리는 훨씬 더 길었다. 특히 코로나 19의 방역지침을 지키며 답사를 하느라고 애를 먹었다. 열심히 달려간 답사현장이 코로나19를 이유로 폐쇄돼 헛걸음을 쳐야 했던 곳이 여럿이다. 예를 들어, 사람이 거의 찾아오지 않고 바닷가의 청정 야외인 강화도 광성보나 넓은 야외 공간인 4‧19묘역 같은 곳을 코로나19를 이유로 폐쇄하는 공무원들의 무사안일주의와 관료주의에 열을 받고 돌아와야 했다. 답사한 곳은 150여 곳이 되지만, 이중 핵심적인 곳을 골라 글을 썼다. 알려지지 않은 곳을 더 많이 소개하기 위해, 독립기념관, 탑골공원(3‧1운동), 전쟁기념관같이 잘 알려져 있고 '제도화된' 곳은 제외했다. 글로 싣지 못한 곳과 글을 실었지만 지면에 싣지 못한 많은 사진 자료들을 다른 사람들이 이용할 수 있도록 인터넷에 공개자료실을 만들 생각이다. 한국정치가 전공인 만큼 한국현대사를 나름 공부해 왔지만, 이번 답사를 하면서 많은 것을 배웠다. 특히 우리의 국토 곳곳이 아픈 역사의 현장이라는 사실을 실감하며 가슴이 너무 아팠다. 우리 근현대사의 많은 사건들이 패배와 학살의 역사였기 때문에 답사 내내 우울증에 시달려야 했다. 그러나 동시에 수많은 이름 없는 민초들의 희생이 있었기에 그 같은 패배와 학살의 비극을 딛고, 아직도 너무도 많은 문제들이 남아 있다고는 하지만, 지금과 같은 성과를 얻어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됐다. 기행은 다음과 같은 원칙을 지키려고 했다. 첫째, 현장성이다. 가능한 사건의 현장들을 모두 찾아가려고 노력했다. 현장을 다녀온 뒤 새로운 자료를 발견해 다시 찾아간 경우가 한두 번이 아니다. 특히 사진이 중요한데 거의 답사를 마쳤을 때, 사진들을 보관한 외장 하드가 망가져버렸다. 사방을 뛰어다니며 복구하려 했지만 결국 실패하고 이미 다녀온 곳들을 눈물을 흘리며 다시 답사해야 했다. 둘째, 사실이다. 워낙 방대한 주제를 다루는 만큼 모든 자료들을 수집해 소화할 수는 없었지만, 가능한 많은 사실을 수집해 읽으려고 노력했다. 특히 단행본 이외에 인터넷 검색을 통해 온라인 자료들을 최대한 활용했다. 사실 인터넷 시대가 아니었다면, 이번 답사는 그 준비에 몇 배 더 많은 시간이 들었을 것이다. 셋째, 관점이다. 나는 '진보학자'로서 진보적 시각에서 한국 근현대사의 주요 사건들을 다루었다. 특히 진보적이되 보편적이고 글로벌한 시각에서 사물들을 보려고 노력했다. 예를 들어, 다산 정약용도 단순히 조선조의 시각이 아니라 글로벌한 시각에서 같은 시대를 살았던 프랑스혁명의 급진파 로베스피에르와 비교해 바라보려고 노력했다. 넷째, 서사다. 역사적 사실의 나열과 같은 전통적인 서술을 넘어서 독자들이 이해하기 쉽게 현대적 시각에서 이야기를 풀어나가려고 노력했다. 예를 들어, 북한에 협조할지 모른다는 이유로 수십 만 명을 학살한 보도연맹사건은 이와 비슷한 주제를 다룬 '마이너리티 리포트'와 연결시켜, 전두환 정권의 북한의 금강산댐 수공 위협 발표는 을지문덕 장군의 유명한 수공과 연결시켜 설명했다. 답사를 마치며, 몇 가지 느낀 바를 전하고 싶다. 첫째, 역사의 토건화다. 사람들은 일본을 정부의 재정을 통해 불필요한 도로를 만드는 등 토건공사로 경기를 부흥시키는 토건국가라고 비판한다. 이번 답사를 통해 느낀 것은 지나친 '역사의 토건화'다. 물론 기념물을 만들고 역사를 기억하는 것은 반드시 필요하다. 그러나 그것이 지나쳐서 역사가 '토건화'되면 그 정신을 해치게 된다. 이 같은 토건화는 5‧18기념공원이 대표적인 예로써 윤상원 등 5‧18 희생자들을 가족들이 실어와 묻은, 현장성과 역사성을 가지고 있는 망월동 묘역을 놔두고 외형만을 강조한 거대한 묘역을 새로 그 옆에 조성한 바 있다. 이번에 답사를 해보니 가장 기념물이 많은 것은 한국전쟁과 월남전 기념탑이었다. 시군 단위로 없는 곳이 거의 없었다. 몇 년 전 태백시는 6‧25전쟁 월남전 참전기념탑을 세우려 했는데 일부에서 이미 세워진 학도병 기념비도 제대로 관리되고 있지 않다며 반대의사를 밝혀 논란이 된 바 있다. 최근 들어 부쩍 늘어난 것은 동학 관련 기념물이다. 그동안 동학이 제대로 대접받지 못한 것을 생각하면 이해가 되지만, 일부는 '지나친 토건화'로 오히려 그 정신이 훼손되지 않는 것 아닌가 걱정스럽다. 황토현 동학기념물은 기념관, 기념동상, 황토현 기념비 등 상당히 잘 만들어져 있었는데 완전히 그 지역을 들어엎어 대대적인 공사를 하고 있었다. 하다못해 동학군이 몰살당한 비극적 장소인 우금치조차 대형 주차장을 만든다고 큰 공사를 하고 있었다. 중요한 것은 정신 계승이지 거대한 조형물이 아니다.
둘째, '역사지우기'다. 다양한 형태로 역사적 유적들이 사라지고 역사가 지워지고 있다. 몇 가지 대표적인 예를 든다면, 한국전쟁 당시 빨치산 지휘부가 있었던 전북 순창 회문산의 남부군 사령부 벙커다. 이명박 때 회문산 자유휴양림 공원을 만들면서 이를 철거하고 비슷한 모양의 벙커를 새로 지어 역사관을 만들었다.
전설적인 남부군사령관 이현상이 휴전 뒤인 1953년 9월 '반김일성파'라는 이유로 직위해제 당한 뒤 산을 내려오다가 사살된 지리산 빗점골 계곡 바위 옆에는 이를 알리는 설명판이 있었으나 이명박 때 이를 철거했다. 그러자 그를 기리는 사람들이 철거를 못하게 아예 바위에 '이현상 바위'라고 새겨버렸다.
한국전쟁 초기 이승만 정권이 보도연맹원들을 대량 학살한 세종시의 은고개도 마찬가지다. 진실화해위원회의 과거사 규명작업과 관련, 2018년 지역시민단체들이 은고개 지역을 발굴해 유골 등을 수습했고 근처의 세종국제고 학생들이 모금을 해 이들을 기리는 위령비를 설치했다. 하지만 LH공사가 세종시 개발로 이 지역을 개발하면서 학살 현장을 없앴고 위령비도 철거해 버렸다. 박정희 정권의 어두운 역사인 중앙정보부도 마찬가지다. 정치인, 학생운동 지도자들이 잡혀가 조사를 받던 6국 건물 등 중요한 역사적 유적을 철거하거나 유스호스텔로 만들어 역사를 지워버렸다. 안타까운 일이다.
셋째, 진실과 화해다. 진실화해위원회가 제주 4‧3, 여순 등 억울한 죽음에 대해 진실규명과 화해를 위한 작업을 했고 미진한 부분에 대해 제2차 작업을 하고 있다. 그러나 아직도 미진한 부분이 너무도 많다. 빨리 억울한 과거사에 대한 진실규명과 명예회복, 나아가 화해의 작업이 필요하다. 이 점에서 한국전쟁 전후에 있었던 좌우익 간의 교차학살에 대해 좌우익 피해자를 함께 추모하는 '용서와 화해의 위령탑'을 세운 영암, 그리고 비슷한 탑을 세운 화순의 사례는 우리가 배워야할 귀감이다. 보상은 복잡한 문제다. 제주 4‧3 특별법이 국회를 통과하면서 정부는 4‧3 피해자들의 명예회복과 보상을 결정했고 산청·함양·거창학살 피해자들, 여순사건의 피해자들도 정부의 보상을 요구하고 있다. 정읍시의 경우 동학 참여자 유족들에게 월 10만 원의 유족수당을 지급하고 있다. 피해자들과 유가족들이 받은 고통을 생각하면 이에 대한 보상은 당연할 일이다. 하지만 5‧18과 여러 민주화운동이 보여주듯이, 5‧18과 민주화운동으로 생계가 어려워진 피해자만이 아니라 5‧18과 민주화운동 덕으로 출세가도를 달린 사람들까지 거액의 금전적 보상을 받아 대중들의 비판을 받고, 금전적 보상을 받은 자와 못 받은 자의 반목(동일 사건 내에서의, 나아가 비슷한 다른 사건들 간의)을 가져오고 '가짜 피해자'들이 등장하면서 어렵게 지켜온 운동의 대의를 해칠 우려가 있어 걱정이 크다. 특히 여순의 경우 피해자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에 비해 정부가 인정한 피해자는 너무 적어 심각한 갈등이 예상되고 있다. 여러 차례 소개한 바 있지만, 10년 전 남미를 답사하며 목요일 11시 30분경 아르헨티나의 부에노스아이레스 대통령궁 앞을 찾아간 적이 있다. 12시가 되자 하얀 스카프를 두른 80대의 어머니들이 펼침막을 들고 시위를 시작했다. 이들은 군사독재 시절 군부에 의해 실종된 활동가들의 어머니들의 모임인 5월 어머니회로, 매주 목요일 이곳에서 시위를 하는 것이다. 놀라운 것은 그들이 들고 있는 펼침막이었다. 그것은 자신들의 자식들을 보상하라는 요구가 아니라 당시 현안이었던 '외채를 동결하라'는 것이었다. 5월 어머니회는 "내 자식들은 현재의 운동 속에 살아있기 때문에 사체를 발굴하지 않으며 이들의 정신을 가두는 기념물을 만들지 않는다, 생명은 돈으로 대신할 수 없기 때문에 금전적 보상을 거부한다"며 매주 목요일 자식들이 살아있다면 앞장서 싸울 현재의 문제들을 가지고 집회를 하고 있다. 우리가 모두에게 5월 어머니회와 같은 숭고한 정신을 요구할 수는 없다. 하지만 피해자들에게 보상을 하되, 보상 문제를 둘러싸고 예상되는 반목과 추태, '역사의 금전화' 등 부작용을 최소화할 수 있는 솔로몬의 지혜가 절실히 필요하다.
이 자리를 빌려 이번 답사에 신세진 사람들에게 고마움을 표하고 싶다. 제일 먼저, 최풍만 동지다. 잘 나가던 IT분야에서 일하던 그는 인간을 금전의 노예로 만드는 자본주의가 싫어, 직장을 그만둔 뒤 꼭 돈이 필요할 때만 건설노동자로 일을 하고 나머지 시간은 여러 투쟁현장에서 이름 없이 '반(半)전업 도우미'로 일하고 있는 '이단아'다. 그는 진보운동에 대한 정치적 동지이자 여행의 길벗으로, 이탈리아의 네오마르크스주의자 그람시를 찾아 나선 이탈리아 사상기행과 스페인과 프랑스의 피카소 기행 등을 같이 했다. 이번 한국근현대사 여행도 대부분 동행을 했고 속도를 잘 지키지는 않았지만 탁월한 솜씨로 운전을 해주었다. 어깨 고장으로 장시간 운전이 어려운 나의 건강을 생각할 때, 그의 도움이 없었다면 이번 답사는 불가능했을 것이다. 최 동지 이외에도 원경 스님, 명진 스님, 김세균 서울대 명예교수, 심지연 경남대 명예교수, 단병호 전 민주노총위원장, 최갑수 서울대 명예교수, 박재묵 충남대 명예교수, 곽진 상지대 명예교수, 창원의 임영일 미래를 준비하는 노동사회교육원 이사장, 임춘식 한남대 명예교수, 이영근 PROPAC사장, 김정한 서강대 HK교수, 김철홍 전 국가인권위원회 광주인권사무소장이 답사를 같이 했다. 제주 강정의 문정현 신부님, 제주 '수상한집' 강광보, 광주 황광우 장재성기념사업회 사무총장과 해직교수 이무성 교수, 여수 황남식 사장, 김용국 영광핵발전주민대책위 위원장, 대구 송필경 범어 송치과원장과 역사교사 강태원 씨, 통영 장석 시인, 마산 부마민주항쟁기념재단 진현경 사무총장, 울산노동역사관1987 이은영 자료실장과 김호규 금속노조위원장, 경주 최부자아카데미 최창호 상임이사, 소성리 강현욱 주무, 세종추모관 김경호 담당관, 노근리 정구도 관장, 대추리 심종원 이장, 천안 신학철화백과 최중한 씨, 강원민주재단 전미영 위원, 원주 황도근 무위장학교장과, 양길승 원진재단 이사장, 최열 환경재단이사장, 안병욱 전 진실화해위 위원장, 퇴직 역사교사 최병도 씨, 박천우 전 장안대 교수, 양경규 전 노동자정치연대 대표, <박헌영 평전>과 <이현상 평전>의 저자인 안재성 작가 등이 답사를 도와줬다. 특히 해방정국의 최고전문가인 심지연 교수는 각각 해방정국이라는 예민한 주제를 다룬 여러 글들을 꼼꼼하게 읽고 잘못을 지적해주었고, 프랑스혁명의 최고전문가인 최갑수 교수도 역사학자로 여러 조언들을 해줬고, 민중화가인 김정헌 선배는 박홍 전 서강대 총장을 풍자한 그림을, 환경운동가 최병성 목사와 부안의 사진작가 허철은 중요한 사진을 사용할 수 있도록 허락해줬다. 6월항쟁 지역기념 사진을 갑자기 쓰게 되면서 조승래 청주대 교수와 차진수 무위당사람들 대외협력실장이 청주와 원주의 사진을 찍어 보내줬다. <경향신문>과 <한국일보>, 그리고 여러 기념사업회와 기념관의 여러 자료사진들도 큰 도움이 됐다. 이 모두와 이번 연재를 담당한 <한국일보>의 강윤주 기자와 <프레시안>의 임경구 기자에게 이 자리를 빌어 감사함을 전한다. 코로나19에 대한 우려로 여행을 만류하는 답사를 한사코 강행하는 '철부지' 남편과 아버지를 용서해준 아내와 딸 고은이에게도 미안함과 고마움을 표하고 싶다. 그러나 이번 답사가 진짜 빚지고 있는 것은 이름 없이 쓰러진, 그를 통해 더 나은 우리의 현재와 미래를 만들어준 한국근현대사의 희생자들이다. 그들에게 다시 한 번 뜨거운 묵념을 드리며 긴 연재를 끝내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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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호철
서강대학교 명예교수
화가를 꿈꾸다 서울대학교 정치학과로 진학했다. 독재에 맞서다 제적, 투옥, 강제 징집을 거쳐 8년 만에 졸업했다. 어렵게 기자가 됐지만, '1980년 광주 학살'에 저항하다 유학을 갔고 서강대학교 정치외교학과 교수로 일하며 진보적 학술 활동과 사회운동을 펼쳐왔다. <국가와 민주주의>, <한국과 한국 정치>, <촛불혁명과 2017년 체제> 등 이론서와 <마추픽추 정상에서 라틴아메리카를 보다>, <레드 로드-대장정 13800KM 중국을 보다> 등 역사 기행서를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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