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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객 빼돌리기' 알렸다 하루아침에 직장 잃은 보험설계사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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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고객 빼돌리기' 알렸다 하루아침에 직장 잃은 보험설계사 이야기 [작고도 가까운 노동, 그리고 싸움] ⑧ 에이플러스에셋 해촉 보험설계사의 ‘장거리’ 싸움
보험에 관해 잘 모른다. 사보험이 가계 소비의 적지 않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현실을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입장이기도 하다. 애초 공공복지가 있어야 할 자리이다. 하지만 이리 말하는 나 자신조차 실비보험과 암보험을 가지고 있다. 가입 이유야 남들과 비슷하다. 주위 권유로 하나. 가족들 불안을 잠재울 방안으로 하나. 보험이라는 상품은 우리 일상에 깊숙이 자리 잡았다. 그 자리를 잡기까지 자본의 영향이 없을 리 없다. 금융자본이 사보험(민영 보험) 시장에 뛰어들고, 2000년대 초반에는 법인보험대리점(이하 GA)이라는 여러 회사의 보험을 종합 판매하는 형태의 법인 설립이 허가된다. 그로부터 20년 후, 국내 4600여 개의 GA 업체가 존재한다. 이 중에는 보험설계사만 수천 명을 보유한 수천억 매출의 대형 GA기업도 적지 않다. 보험 시장이 커졌다는 말은 곧 보험 판매에 종사하는 이들의 수도 늘어났다는 것. 전국 40만여 명의 보험 설계사(이하 설계사)가 일하고 있다. 하지만 이들 대부분은 보험사나 GA 업체에 '고용'된 상태가 아니다. 보험 판매 기업들은 이들을 '보유'할 뿐이다. 설계사 대부분은 프리랜서 형태로 일하고 있다. 회사와 1:1로 계약을 맺는다는 이 프리랜서들을 부르는 다른 말은 '특수고용직'이다. 24년차 설계사 김명인(가명) 씨가 하루아침에 직장을 잃어버렸을 때도, 세상은 그 일을 두고 '해고'가 아닌 '해촉'으로 불렀다.

제주에서 서울로 비행기를 타고

2019년 해촉되었다는 명인 씨를 만나 인터뷰를 한 까닭은 그가 매주 비행기를 탄다는 말을 들었기 때문이다. 그를 해촉한 에이플러스에셋 본사는 서울 강남에 있는데, 그가 사는 곳은 제주이다. 매주 제주도에서 서울로 온다고 했다. 화요일마다 첫 비행기를 타고 서울로 와서 다음날 돌아간다. 나머지 요일에는 자신의 직장이었던 제주 에이플러스에셋 앞에서 선전전을 진행한다. 지난해 10월부터 계속된 일이다.
"매주 화요일 아침 첫 비행기로 가요. 6시 30분. 강남에 딱 도착하면 9시가 돼요. 현수막과 피켓을 가지고 설치하면 아홉 시 십 분에서 이십 분 사이. 그때부터는 이왕 올라갔기 때문에 본사 앞에서 계속 살아요. 저녁이 되면 꿀잠(비정규노동쉼터)에서 하룻밤 자고. 다음날은 3시에 본사에서 철수해서 다시 공항으로 가는 거예요."
그의 일과를 들으며, 매주 이 번거로움을 감수한다는 사실에 씁쓸해진다. '얼마나 억울했으면.'
▲ 김명인(가명) 씨가 에이플러스에셋 본사 앞에서 복직을 요구하며 1인 시위를 하고 있다. 본인 제공.

거짓말쟁이가 된 보험설계사

10년 전, 명인 씨는 에이플러스에셋이라는 법인보험대리점(이하 GA) 소속 설계사로 들어갔다. 제주에 에이플러스에셋이 막 생긴 참이었다. 이전까지 ▢▢생명 설계사로 일하던 그는 GA가 확산되는 추세에 따라 회사를 옮겼다. 제주 에이플러스에셋. 처음에는 설계사 서너 명으로 시작된 회사였다. 10년 가까이 그곳에서 일했다. 그러던 2019년 6월에 사건이 벌어졌다. 등산을 같이 가자고 했던 고객이 연락이 되지 않았다. 보험계약으로 맺어진 사이지만 이제는 언니동생 하며 지내는 고객이었는데 도통 연락이 닿질 않았다. 알고 보니 그 고객은 핸드폰을 분실했던 것. 한참 후, 다시 연락이 되었을 때 고객은 자신이 권한 보험 상품을 해지한 것은 물론, 담당 설계사마저 바꾼 뒤였다. 나중에 알게 됐다. 명인 씨가 자리를 비운 사이, 그의 연락처를 묻는 고객의 전화를 받은 회사 동료가 '그 설계사는 그만두었다'고 한 사실을. 심지어 그 동료는 명인 씨가 소개한 CI보험이 쓰레기라며 해약하고 다른 상품으로 가입하길 권유했다. 고객을 잃은 것은 물론, 자신이 '사기꾼' 취급당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 명인 씨는 당혹스러웠다. 안 그래도 GA 회사 난립으로 경쟁이 치열해지자, 일부 설계사들이 보장분석이라는 명목하에 고객을 현혹시키는 일이 적지 않았다. 고객이 이전에 가입한 보험을 폄하하여 해지시키고, 자신이 수수료를 받을 수 있는 신규 보험을 들게 하는 방식이었다. 흔히 '고객 빼돌리기'라 불렀다. 그런 일이 같은 회사 동료에게서 벌어졌다니. 명인 씨는 믿을 수 없었다.
"우리 회사에서 이런 일이 일어나다니. 내가 다 부끄러웠어요."
명인 씨는 단장(지점장)에게 이 사실을 알렸다. 단장과의 미팅 자리에서, 재발 방지 차원으로 제주 사업단(지점) 내에서 이 문제를 공론화하는 것이 필요하겠다는 결정이 이뤄졌다. 하지만 사태가 급변했다. 하루만에 회사는 오히려 고객을 거짓말쟁이로 몰고, 그로 인해 명인 씨는 말과 말로 전해지는 증거를 찾아 돌아다녀야 했다. 마음고생을 한 두 달 후, 그가 얻은 것은 해촉 통보였다. '허위 사실 유포로 영업 분위기를 저하'시켰다는 것이 이유였다. 인사(징계)위원회가 누구에 의해 어디에서 열렸고, 어떤 기준으로 심의가 이루어졌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자신이 해촉된 이유를 납득할 수 없었던 그는 몇 차례나 이의 신청을 했다. 이 또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 사이 그는 회사 동료를 잃고, 고객을 잃고, 진실 공방과 명예훼손 고소고발(무혐의 판정)에 시달렸다.
"고객 중에 큰 질병 걸린 분들한테 제일 미안해요. 제가 2년을 이러고 있으니까. 이게 아니면 보험 처리는 잘 되었는지, 그런 걸 챙겨드릴 수 있었을 텐데."
▲ 국회 앞에서 에이플러스에셋을 규탄하는 내용의 피켓을 들고 1인 시위 중인 김명인(가명) 씨. 본인 제공.

너무 멀리 왔다 하지만

본사 앞에서 1인 시위를 하기로 결심한 첫날, 비행기에 몸을 싣고는 내내 울었다고 했다. 해촉된 지 14개월이 지난 때였다. 처음에는 회사를 믿고 기다려보자 했고, 고소고발에 대응하며 아픈 몸과 마음도 추슬러야 했다. 그런 와중에도 "우리 회사에서 이런 일이 일어난 것이 부끄러워" 다른 사람들에게 말조차 할 수 없었다고 했다. 하지만 더는 당하고 있을 수 없었다. 그가 싸우자 면담 자리가 잡혔다. 하지만 회사는 동료의 반대가 있어서 해촉 취하는 어렵다고 했다. 그가 '잘렸던' 순간과 마찬가지로, 누가 어떤 이유로 그를 반대하는지 정보는 주지 않았다. 회사는 '너무 멀리 왔다'고 했다. 그가 문제를 '바깥'에 알리고 본사 앞에서 피켓을 든 것을 두고 하는 말이었다. 이것이 명인 씨를 복직(해촉 취하)시킬 수 없는 이유라고 말하는 이도 있었다. 그 말을 옮겨 들으며, 나는 그와 회사 사이의 거리를 생각했다. 과연 그와 회사가 가까웠던 순간이 있기나 했을까. 명인 씨는 에이플러스에셋을 '우리 회사'라 불렀다. 하지만 그의 '우리 회사'는 사람을 잘라놓고 해고라 여기지 않았다. 계약상 서로 맞지 않아 생긴 '해촉'일 뿐이다. 그가 십여 년을 공들여 유지한 고객들을 다 가져가면서도 '계약상의 처리'일 뿐이다. 그런데도 명인 씨 혼자 우리(회사)라는 말을 반복했다.
"회사랑 집이 가까워요. 걸어서 다녔잖아요. 저녁에 집에 가다가 사무실을 올려다보는데 불이 켜져 있어요. 올라가 봐요. 아무도 없으면 불 다 끄고. 에어컨 켜진 데 없나 살피고. 여자 화장실 막히면 내가 뚫어뻥 들고 다 고쳤어요. 한두 번도 아니고. 무슨 일 있으면 달려와서 문단속하고. 습관이 되어버린 거예요. 내 집 단속하듯이. 아. 그랬는데. 너무하죠. 회사가 너무 잔인해."
그는 뭣 모르고 시작한 새내기 설계사 시절을 거쳐 야심차게 호텔과 학교를 판매 루트로 뚫던 시절을 신나게 말했다. 나는 들어도 모르는 CI보험의 특성을 설명하며, 어떤 방식의 보험 설계가 생애주기에 맞춰 어떤 효과를 내는지를 한참 설명하기도 했다. 나는 그것을 '노동'의 모습으로 읽었다. 하지만 회사는 그를 '우리'라 대해주지 않고, 세상은 그를 '노동자'로 여겨주지 않았다. 서울로 오가는 수고를 감수하는 그에게 무심히 "다른 일 구하라" 했다.
"저는 그게 제일 속상해요. 제가 회사 앞에서 1인 시위 하고 있으면, 전에 알던 (보험 회사) 분들이 지나가면서, 뭐하러 여기 있냐고. 우리 회사 오라고. 그냥 옮기면 되지 왜 그러냐고."
누구도 그와 회사를 '가까이' 여겨주지 않았다. 그래놓고 명인 씨가 싸움을 시작하자 너무 '멀리' 왔다고 했다. 노동과 노동권의 '가까움'을 인정하지 않는 세상에서 권리를 찾으려는 사람은 홀로 '저 멀리' 갈 수밖에 없다.
▲ 김명인(가명) 씨가 한겨울 추위 속에서도 복직 요구 1인 시위를 하고 있다. 본인 제공.

함부로 대해지지 않기 위해서

"해고된 지 27개월, 투쟁한 지 14개월."
그는 자신의 시간을 세어본다. 싸울수록 점점 더 억울해진다. "세상을 믿을 수 없게 되었어요"라고 말하면서도, 서울로 올라와 싸우는 동안 '좋은 사람들을 많이 만났다'는 말을 잊지 않았다. 싸움이란 그렇다. 어느 날은 내가 왜 여기 초라하게 서 있나 싶다가도, 어느 날은 사유지 운운하는 경찰에게 맞서기 위해 집시법(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 전문을 다 뽑아 들고 간다. 지지 않으려 하니 괴롭고, 그렇게 애쓰다 보니 자신이 옳았음을 알게 된다. 명인 씨의 설움과 분함이 섞인 지난 2년여, 그 시간 동안 갖은 사건이 있었다. 억울하고 다단하지만, 복잡할 것은 없는 사건이다. 특수고용직이라는 그의 고용형태가 문제의 본질을 흐릴 뿐이다.
"실은 해고인데 해촉이라 부르는 거고. 그 해촉마저 절차를 충분히 거치지 않은 거죠. 이렇게 회사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은 이 사람이 특수고용직이기 때문이고. 다른 설계사들도 이렇게 싸워서 이긴 경우가 없다는 말을 해요. 이 싸움이 성과를 거둬, 다른 해고(해촉) 노동자들에게 전례가 되었으면 좋겠다는 바람입니다."
김소연 '꿀잠 운영위원장의 말로 사건의 복잡하지 않음을 대신 설명한다. 비정규노동쉼터 꿀잠은 서울로 올라와 지인 집을 전전하던 명인 씨에게 쉴 곳을 마련해준 곳이다. 그가 말한, 싸웠기 때문에 만난 좋은 사람들 중 하나일 것이다. '특수한' 노동자의 지위이기에 회사도, 고용노동부도, 인권위원회도 '함부로 해고되지 않을 권리'를 보장할 생각이 없다. 결국 명인 씨 스스로 바다를 건너와 싸우고 있다. 함부로 해고되지 않기 위해. 함부로 대해지지 않기 위해. 명인 씨를 포함해 함부로 대해지지 않으려는 설계사들의 애씀은 곳곳에서 계속되고 있다. 2020년 12월, 보험설계사노조(전국사무금융서비스노조 보험설계사지부)가 설립됐다. 그 산하의 한화생명지회는 200일 넘게 천막농성을 진행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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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정
기록노동자다. 저서로는 르포집 <노동자 쓰러지다>, <삼성이 버린 또 하나의 가족>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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